명동 사람들 ①
독립 디자이너 100명 모은 이호규 레벨5 사장
“명동에서 성공하면 세계시장서도 통해”
지난 8월15일, 서울 명동의 눈스퀘어 쇼핑몰 5층 ‘레벨5’에 국내 디자이너 100명이 모여 ‘독립’을 외쳤다. 레벨5의 자체 브랜드숍인 ‘랩5’가 100인의 독립 디자이너를 한 곳에 모아 패션 매장을 확대 오픈한 것. 독립 디자이너 편집 숍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디자이너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서울패션위크에서 주목받았던 송혜명·예란지·주효순, 국제 유수의 콩쿠르인 프랑스 디나르 대상 수상자인 이재환, 대한민국 패션대상 대통령상 수상자 안태옥 등 업계에서 주목을 받은 독립 디자이너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호규(48) 레벨5 사장은 “독립 디자이너들의 브랜드가 향후 개별 브랜드로서 확대 발전해 나갈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디자이너 개개인의 글로벌 진출 토대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애플의 앱스토어가 애플과 앱을 만든 중소 소프트웨어 기업의 동반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랩5는 앱스토어와 비슷하다고 했다. 입점하는 디자이너들은 매출 중 최소한의 수수료만 내면 되는 모델이다.
“우리나라의 독립 디자이너들도 자라(ZARA)와 망고, H&M 등 글로벌 패션 브랜드와 경쟁할 수 있는 디자인 실력을 갖추고 있어요. 그런데도 자금력과 마케팅 기반이 없어 제대로 역량을 펼치지 못한 거죠. 레벨5가 이들의 해외 시장 진출을 돕는 파트너가 될 겁니다.”
해외 시장 진출도 앞두고 있다. 랩5는 오는 10월 싱가포르 최대 리조트인 ‘마리나베이 샌즈’에 독립 디자이너 숍을 오픈한다. 이 사장은 “첫 해외 매장이자 랩5의 두 번째 매장으로 그 곳에서 자라나 H&M, 유니클로 등과 경쟁하게 된다”며 “앞으로 글로벌 시장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컨설턴트에서 패션 유통 전문가로
이 사장은 1994년 영국계 부동산 컨설팅 회사인 BHP와 손잡고 BHP코리아를 설립한 부동산 전문가 출신이다. 서울파이낸스센터, 스타타워 등 굵직굵직한 오피스 빌딩 거래 성사의 뒤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8월 부동산과는 완전히 다른 패션 유통회사인 ‘레벨5’를 설립했다. 눈스퀘어 5층 전체(2480㎡)에 전문 패션매장도 열었다. 잘나가던 부동산 컨설턴트가 패션에 뛰어든 데는 이유가 있다. 그가 패션에 눈 뜨게 된 것은 2008년 싱가포르계 부동산 회사인 퍼시픽스타자산운용과 옛 아바타 매장을 리뉴얼하는 눈스퀘어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사실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부동산 투자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것이 쇼핑센터와 같은 상업시설이지요. 그런데 자라나 H&M 같은 글로벌 브랜드는 입점 시켰는데, 한국 브랜드가 없는 거예요. 스페인도 하고, 스웨덴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글로벌 브랜드로 키울 수 있는 패션 유통회사를 만들자는 결심에서 뛰어들었어요. 무엇보다 패션이 예쁘잖아요.(웃음)”
편하게 살려고 했으면 자신이 잘하는 부동산 컨설팅을 했을 것이고, 돈을 벌자고 했으면 글로벌 브랜드와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레벨5 준비를 위해 동대문 패션상가 등 몇 곳을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디자인이며 가격이 상당히 좋았어요. 글로벌 브랜드와도 싸울 만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돈 벌기에 급급하기 보단 한국 패션의 글로벌화를 목표로 잡았어요. 디자인의 질은 높지만, 숨어있는 브랜드를 찾아 나섰어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글로벌 브랜드들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지가 강한가이었어요.”
이렇게 해서 동대문이나 신사동, 홍익대 앞, 청담동 등 패션멀티숍에서 사랑받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브랜드 등 40개로 매장을 채웠다. 또 독특한 해외 직수입 상품을 선보이는 편집매장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새롭게 떠오르는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의 역량을 한 곳에 모아 국내 및 해외로의 성공적인 진출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인큐베이팅 공간인 랩5에도 공을 들였다. 실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쇼룸처럼 사용하고 바이어 상담을 할 수 있으며 여기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단독매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했다.
“고가 시장은 외국의 명품 브랜드가 활개를 치고 있고, 저가 브랜드 역시 글로벌 패스트 패션 브랜드들이 장악하고 있었죠. 그 사이에 끼인 중저가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어요.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디자이너들이 먼저 찾아 왔어요. 같이 글로벌 시장에서 싸워보자며.”
뛰어난 디자인, 합리적 가격으로 인기몰이
이 사장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1주년을 맞은 레벨5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1년 새 레벨5의 회원 수는 2만3000여 명에 달했고, 랩5에 참여하는 독립 디자이너는 12명에서 100명으로 증가했다. 합리적인 가격과 디자인이 먹히고 있다는 것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명동(눈스퀘어)에서 성공하면 글로벌 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눈스퀘어에는 자라, H&M 등 글로벌 브랜드가 1층부터 4층까지를 꽉 메우고 있어요. 자라는 눈스퀘어 외에도 명동 곳곳에 퍼져 있어요. 그야말로 글로벌 전쟁터죠. 명동에서 성공한다면 세계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호규 사장이 명동에서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과 패션 전쟁을 벌이는 이유다.
명동 사람들 ②
루이비통도 탐낸 명품 수선장인 오창수 명동사 사장
“명품 수선만 42년…다 고쳐 드립니다”
“이 가방 고칠 수 있을까요.” 지난 8월17일 명동 초입의 명동사. 60대 후반의 할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구찌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 안쪽 밑바닥이 터져 있었다. 빛바랜 외양으로 보아 가방은 십 수 년은 됨직했다. 오창수 사장이 잠깐 들여다보더니 고칠 수 있겠다고 하면서 3일 후 찾으러 오라고 했다. 같은 시간 명동사 공장에선 숙련공 10여 명이 명품 가방과 구두, 액세서리를 수선하느라 분주했다. 이곳에서 매일 새로 태어나는 명품은 100여 개에 달한다.
서울 명동에 있는 명동사는 명품 수선업계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1960년대 ‘구두병원’으로 시작한 이 업체는 현재 서울 명동 본점과 롯데 부산 센텀점을 비롯해 전국에 7개 지사를 두고 있다. 명동사의 설립자는 김동주 회장으로, 오창수 사장은 15살 때부터 김 회장 밑에서 기술을 배웠다. 명품 수선만 42년째다.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서울로 돈 벌러 왔는데,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해서 이 일을 시작했어요. 월급도 많았어요. 기술자들은 공무원 봉급의 세 배 정도를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혹’ 했지요.”
오 사장은 꼬박 7년을 김 회장 밑에서 기술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이 2~3년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는 끝까지 견뎌냈다. 덕분에 거의 모든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군대를 갔다 온 그는 명동의 한 외국계 브랜드 제화점에서 수선 일을 했다. 그를 김 회장이 다시 불렀다. ‘달러골목’으로 불리던 곳에 있던 당시 명동사의 수선실은 10㎡ 정도였다. 찾아오는 손님이 2~3명 정도만 되면 수선실에서 몸을 돌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출발한 명동사는 명품 시장이 커지면서 덩달아 급성장했다.
“당시 수선을 맡기는 제품들은 고가의 국산이 가장 많았어요. 1980년대 어쩌다 하나씩 들어오던 명품이 어느 순간부터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실력이 좋아 내가 그런 명품 수선을 도맡아 했어요. 그러다가 루이비통 수선만 10년 이상 하게 된 거죠.”
그의 남다른 수선 실력은 루이비통에까지 퍼졌다. 루이비통에서 그를 찾은 것이다. 그는 스카우트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이후 루이비통의 한국 A/S센터에서 2년 동안 일했으며, 홍콩 A/S센터에서도 잠시 일하기도 했다.
명동사의 알짜 점포인 명동점과 부산점 등을 물려받아 운영하게 된 것은 2006년부터다. 김 회장과의 오랜 인연이 그를 붙잡았다.
소비자들이 명동사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명품 브랜드에 맡길 때보다 수선 기간과 수선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명품 브랜드의 서비스센터에 맡길 경우 보통은 10~15일 정도 걸리지만, 해외 본사에서 처리해야 할 경우 적게는 1개월, 많게는 6개월 이상 걸린다. 하지만 명동사에선 일주일이면 된다. 수선비도 해당 매장에 맡겼을 때보다 20~30% 저렴하다.
명동사의 수선 담당 직원은 40여 명이다. 이중 6명은 수선을 배우겠다며 뛰어든 20~30대 젊은이들이다.
“젊었을 때는 이 일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혹 명절에 고향에 가도 내 직업을 자신 있게 밝힌 적이 없었어요. 그냥 막노동한다고 했죠. 하지만 지금은 이것만한 직업이 없지요.”
명동 사람들 ③
‘명동 맛’ 지키는 박희환 명동교자 총지배인
“명동서 변하지 않은 것은 명동칼국수뿐”
지난 8월19일 오후 3시.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늦었고, 저녁으로는 너무 이른 시간. 명동교자의 1, 2층은 사람들로 붐볐다. 자리 비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박희환(61) 총지배인은 “명동교자의 유명세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했다. 제 때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싶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창업주의 조카로 명동교자에서만 31년째 일하고 있는 박 지배인은 “30살에 명동교자에 들어와 주방에서부터 홀 관리에 이르기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며 “명동에서 인생을 시작했으니까 명동에서 끝을 볼 것”이라고 말했다.
명동교자는 명동칼국수의 원조다. 창업주인 박연하(78) 사장이 1966년 장수장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낸 곳은 서울 을지로 입구였다. 박 사장은 1970년 지금의 명동교자 분점 자리로 옮기면서 ‘명동칼국수’로 이름을 바꿨다. 이전 개업 당일에도 손님들이 문밖에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처럼 명동칼국수가 유명해지자 명동뿐 아니라 전국에 명동칼국수라는 간판이 나붙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1978년 상호를 지금의 명동교자로 바꿨다.
이름을 바꾼 후 달았던 명동교자의 간판은 지금까지 달려 있다. “간판이 낡아 떨어져도 맛있는 집은 손님이 물어물어 찾아온다는 소신에 새로운 간판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박 지배인이 말했다.
“지금도 손님들이 간판을 보고 들어오면서도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명동칼국수야’라고 합니다. 전화를 걸어서도 ‘거기가 명동에 있는 명동칼국수’냐고 묻는 일이 아직 허다합니다.”
명동교자가 ‘1966년 창업 명동교자 (구)명동칼국수’라는 다소 긴 상호를 등록해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명동교자의 인기 비결은 ‘맛’이다. 그날 만든 음식은 그날 소비한다는 것이 원칙인 명동교자의 음식은 언제나 신선하다. 특히 칼국수는 육수, 면, 고명, 김치의 4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닭육수. 닭을 8시간 동안 푹 고아 간수를 제거한 천일염으로 간을 맞춘다. 오래 끓여도 쉽게 퍼지지 않는 면은 반죽 후 2~3시간의 숙성을 거쳐 직접 뽑는다. 이 때문에 고객들은 신선한 면발을 맛볼 수 있다. 가운데 수북이 쌓인 고명으로 얹은 닭고기도 인기비결이다.
또 칼국수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마늘향 강한 김치도 명동교자만의 성공 포인트. 김치 서빙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비워진 김치그릇을 계속 채워준다. 칼국수를 먹기 위해 김치를 먹는 것이 아니라 김치를 먹기 위해 칼국수를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치의 인기도 대단하다.
칼국수는 만두와 함께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메뉴다. 일본 관광객 중에는 명동교자의 칼국수 마니아가 있을 정도라는 게 박 지배인의 설명이다.
박 지배인은 “그동안 수많은 업체들이 명동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졌다”며 “변하지 않는 것은 명동교자의 맛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명동교자는 옛날 맛을 기본으로 두고 그때그때마다 유행하는 맛을 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단골들은 맛이 예전과 똑 같다고 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들 입맛에 딱 맞는다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