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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 순례 ④ 慶北 淸道 虎踞山 雲門寺 巡禮 四
칠성각(七星閣) 모습.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형태로 비교적 큰 규모로 고종 27년(1890) 박선원 스님이 창 건하였습니다. 본래의 위치는 비로전과 만세루 사이에 있었으나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 전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입구인 범종각 안으로 들어와 왼쪽 비각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 다. 칠성각이 크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자리한 것은 특이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칠성각(七星閣)
안에는 1976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1942년에 조성한 독성탱화가 봉안되어 있습 니다. 특히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칠원성군(七元星君) 탱화가 있어 특이했습니다.
칠성탱화. 1976년 조성.
북두제일 탐랑태성군(貪狼太星君)과 북두제삼 녹존정성군(祿存貞星君)
북두제일(北斗第一) 자손만덕양명(子孫萬德陽明) 탐랑태성군(貪狼太星君) 북두 중의 제일은 자손에게 만덕(萬德)을 주는 자손만덕 탐랑성군입니다.
북두제삼(北斗第三) 업장소제진인(業障消除眞人) 녹존정성군(祿存貞星君) 북두 중의 제삼은 업장(業障)을 소멸시켜 주는 업장소제 녹존정성군입니다.
여기서 북두제일 다음에 북두제삼으로 나간 것은 이 탱화가 칠성탱 중심으로 좌측엔 홀수 우측엔 짝수의 칠원성군을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북두제오 염정강성군(廉貞綱星君)과 북두제칠 파군성군(破軍星君).
북두제오(北斗第五) 백장진멸단원(百障殄滅丹元) 염정성군(廉貞星君) 북둥 중의 제오는 모든 장애 없애 주는 백장진멸(百障殄滅) 염정성군입니다.
북두제칠(北斗第七)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破軍星君) 북두 중의 제칠은 수명을 늘여 주는 수명장원(壽命長遠) 파군성군입니다.
북두제사 문곡뉴성군(文曲紐星君)과 북두제이 거문원성군(巨門元星君).
북두제이(北斗第二)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巨門星君) 북두 중의 제이는 장애와 재난을 없에 주는 장난원리(障難遠離) 거문성군입니다.
북두제사(北斗第四) 소구개득현명(所求皆得玄冥) 문곡성군(文曲星君) 북두 중의 제사는 구하는 바를 모두 얻게 해 주는 소구개득(所求皆得) 문곡성군입니다.
북두제육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제육(北斗第六)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武曲星君) 북두 중의 제육은 복덕을 두루 갖추게 해 주는 복덕구족(福德具足) 무곡성군입니다.
독성탱화.
산신탱화
비각(碑閣)
이 비각은 범종각에서 들어오면 왼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칠성각 앞에 있습니다. 운문사 중수기념비 (雲門寺 重修記念碑)
만세루와 대웅보전을 중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935년 건립한 기념비입니다.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보물 제31호.
운문사 3창주인 원응 국사의 자는 봉거(逢渠)이며 이름은 학일(學一, 1052~1144)입니다. 속성은 이씨이고 지금의 충북 청주인 서원(西原)에서 태어났습니다. 11세에 진장(眞藏) 스 님에게 출가했으며, 13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혜함(惠含) 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지(禪旨)를 깨닫고 이후 삼장(三藏)을 두루 섭렵하였습니다. 그는 <대반야경>에서 반야 삼매를 얻은 이후 귀천을 가리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였습니다.
그 후 승과에 급제한 후 여러 사찰의 주지를 맡았으며 인종의 왕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인 종 7년(1129) 운문사에 머므르게 되자 많은 불자와 학자들이 운문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뒤 입적할 때까지 운문사에 지냈는데, 이로 인해 전남 장흥 보림사(寶林寺)로 대표되던 가지 산문(迦智山門)의 중심지가 경상도로 변동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보각 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스님에게 영향을 미첬다고 합니다.
인종 22년(1144)입적하자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고 국사를 추봉하고 원응(圓應)이 라는 시호를 추증하였습니다.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
설송연초대사비(雪松演初大師碑).
설송 연초(雪松演初 1676~1750) 스님은 경산 자인현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백씨이며, 13 세에 삭발하고 운문사에 입산한 후 석제(釋霽)와 환성 지안(喚醒志安) 스님에게 수학하였습 니다. 학문이 깊어 선교(禪敎)에 동달하였으며, 강설함에 많은 학승들이 따랐습니다. 스님 은 특히 서산대사의 법맥이 두 파로 갈라진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영조 26년(1750) 무렵 운문사를 제4차 중창하여 상당한 사세를 이르켰습니다.
입적한 뒤 운문사와 통도사에 각각 부도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였고, 운문사에 1754년에 비석이 세워졌는데, 당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1698~1761)가 글을 짓고 이조판서 이익보 (李益輔 1708~1767)가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운문사 곳곳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설명해 주신 僧二 스님 감사합니다.
정효님 촬영한 작품.
처진 소나무 앞에서
이 순간을 아름답게 추억합시다.
좌로부터 백우, 해사랑님, 보화님, 비니초님, 덕명님, 서불산 회장 원문님, 정파님, 해밀님, 수현화님입니다. 밝은 미소가 늘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운문사 순례를 모두 마치고 3시 7분 표충사로 향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운문사 를 다 돌아보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더구나 카메라 충전지가 다하여 일부 못 담은 것이 많 습니다. 여벌의 충전지를 가지고 갔는데도 버스에 두고 내려서 애를 먹었는데 해사랑님의 카메라를 빌려 일부 담기도 했습니다. 해사랑님께 감사드립니다.
☞ 다음은 경남 밀양 표충사 순례 1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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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도 사진이 안 보이는게 꽤 있습니다. 여러 탱화도 잘 봤습니다. _()_
남의 사진은 용량이 맞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안 보이는 사진은 제거했습니다. 칠성각 칠원성군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낸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_()_
두분 잘어울려요
소이부답심자한(笑而不答心自閑)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_()_
멋진 비니초님 모자 땜시~~ 백우님 모습 까지!! 묘법이가 향시 사진 찍을 때 모자 올려 쓰시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 많이 하였지요. 이쁜 사진 맹글려구. ㅎㅎㅎ....나무묘법연화경()()()
앞으로 명심하지요. 감사합니다. _()_
예전에는 경내 촬영이 금지 되었구, 마음데로 경내 들어갈수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 나는데. 많은걸 찍으셨내요....나무묘법연화경()()()
경내에 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습니다. 수행처는 갈 수 없지요. 하나라도 많이 담고자 했으나루도 못 담아 많이 아쉽습니다. 주머니에 충전지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가방에 두고 온 것이 _()_
중요한
많이 아쉬웠습니다.
다른 팀들과 같이 사찰순례를 가면 항상 시간이 촉박합니다. _()_
획 둘러 보고 가니까 그렇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스님의 설명에 경청했을 것입니다. _()_
설명 듣다간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바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