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만리 / 홍성운
누군가 그리워 만 리 돌담을 쌓고
참아도 쉬 터지는 이 봄날 아지랑이 같은
울 할망 흘린 오름에
눈물이 괸 들꽃들
차마 섬을 두고 하늘 오르지 못한다
그 옛날 불씨 지펴 내 몸 빚던 손길들
목 맑은 휘파람새가
톱아보며 호명하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한뎃잠을 자야 한다
그래서 일출봉에 마음은 가 있지만
방목된 저녁노을이
시린 발을 당긴다
섬에 가두어진 게 어디 우마뿐이랴
중산간의 잣성도, 낙인된 봉분들도
먼 왕조 출륙금지령으로
그렇게 눌러앉았다
* 흑룡만리 : 제주의 현무암 잣담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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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산수국 / 홍성운
온 섬에 폭설이 내려 길이 모두 지워진 날은 사려니숲길을
천천히 걸어가 보라 산수국 마른 꽃잎들 결로 남아 흔들린다
산에 든다는 건 마음을 비우는 일, 그러기에 야생화도 마른
꽃이 되기에는 바람에 향기를 풀고 색소까지 내줘야 한다
요즘 길섶에는 겨울 나비 한창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동공
가득 묻어나는 가벼운 꽃의 날갯짓, 지난여름 꿈의 잔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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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트러진 꽃의 구도 / 홍성운
코스모스
편도 1차선 옆 횡대로 선 코스모스
스크럼을 짜야 힘을 낼 수 있다고
중복과 말복 사이에 색색이 머리띠 둘렀다
칸나
길 건너 듬성듬성 흐벅진 여름 칸나
갈 데까지 가버린 유곽의 여인처럼
두껍게 분을 발라도 과거가 역력하다
참깨
약았다, 구멍 숭숭한 돌담 너머 참깨꽃
전대 같은 꽈리에 빼곡히 은전을 채우며
은근히 속살 내밀듯 여린 꽃만 피운다
옥수수
아마도 전생엔 철책의 초병이었다
한여름 허리춤에 미제 수통을 차고서
담장 밖 오가는 사람들 검문하듯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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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이다.
내 등단 직후였던 것 같다.
광주에서 시조 행사가 열렸다.
광주공항에 제주 시인이 오신다기에 마중나갔다.
드디어 한 분이 나오셨다.
사진에서 본 얼굴, "홍성운 선생님!" 하고 불렀더니
다소 놀란, 황당한, 검은 눈동자로 그분이 나를 쳐다보았다.
오승철 선생님이었다.
그날 홍성운 시인은 오지 않았다.
그 후로, 나의 실수는, 두고두고 오승철 선생님과 홍성운 시인을 떠올릴 때면
함께 떠오르는 일화가 되었다.
지금 보면, 두 분이 그렇게 닮은 것같지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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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철 선생님은 웃으시며
"그럴 수도 있지요, 뭐!" 하신다.
그날도 그러셨다.
돌아보니 그날 그 어설픔이 내 성장의 디딤돌이 되었던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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