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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만 없었다면 이 그림도 700억 됐을 텐데 |
'소호와 해강의 난죽(蘭竹)' 전... 학고재갤러리에서 2월 19일까지
‘소호와 해강의 난죽(蘭竹)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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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미술에 애착을 가지고 이를 꾸준히 소개해온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임진년 새해맞이 첫 전시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사이에 활동한 두 작가를 조명하는 '소호와 해강의 난죽' 전을 연다.
출품작은 소호의 작품 20점, 해강의 작품 13점, 합작품 1점이다.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 1855~1921)은 대원군의 제자로 예서와 행서에 능했고 스승의 석파란을 계승했다. 그의 난은 그의 호를 붙여 '소호란(小湖蘭)'이라고 할 정도로 독자적이다. 또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은 왕세자 영친왕의 스승으로
묵죽의 새 화풍을 일으켰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를 창설했고 이응로 같은 수제자도 낳았다.
근대기에 사군자는 서예와 회화의 중간 위치에 놓이면서 서화라 불렸다. 한말에도 사군자 열기가 식지는 않았으나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제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문화적 상징성과 역사성, 예술적 가치가 많이 훼손된 것이다.
문사의 '선비정신' 빼닮은 난죽(蘭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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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사나 조선의 지식인은 자연 중에서 선비정신을 빼닮은 사군자에 깊이 탐닉했다. 사군자도 시대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져
조선시대에는 매죽(梅竹)이 성행했으나 한말과 근대기로 가면서는 난죽(蘭竹)이 더 인기가 있었다.
난(蘭)은 '문향십리(聞香十里)'라고 하여 그 맑은 향기가 십 리나 간다고 한다. 또한 죽(竹)은 추운 세한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미덕과 그 올곧음으로 군자의 삶에 비유된다. '묵란'이 곡선미의 정수를 보여준다면 '묵죽'은 직선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소호의 난(蘭), 단아하고 유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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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소호의 두 '묵란도'와 '석란도'에 적혀 있는 시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山深日長(산심일장), 人靜香透(인정향투)
산 깊고 해 긴데, 사람 자취 고요하니 향기만 살고 있다 - 묵란도
綠玉樷中紫玉條(녹옥총중자옥조), 幽花踈淡更香饒(유화소담갱향요)
푸른 무더기 가운데 붉은 줄기, 그간 꽃은 소담한데 향기는 넘친다 - 석란도
이 두 편의 시에 담긴 주제는 같다. 난(蘭)은 궁핍해도 굴하지 않고 덕을 쌓고 학문을 익히는 선비처럼 인적 끊어진 곳에서도 그
그윽한 향기를 소담하게 뿜어낸다는 뜻이다.
소호의 난(蘭)은 기품 있고 단아하고 유려하다. 가는 선과 굵은 선의 변주로 선율감이 넘친다. 또한 힘찬 움직임이 넘치고
그런 기운이 몸에 느껴질 정도다. 행서, 초서 등 서예를 터득한 후에야 난을 칠 수 있다는데 소호가 서예에 능한 건 그런 면에서
당연하다.
해강의 죽(竹), 넉넉함과 풍요로움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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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죽보평안(竹報平安)'이라고 하여 대나무 그림은 사람 맘을 편하게 해준다고 봤다. 위 '월하죽림도'에도 숲 뒤로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어 마음이 넉넉하고 푸근해진다. 세찬 바람에 스치는 짧은 댓잎들이 실제 같다.
해강은 특히 통죽 그림에 빼어났다.
해강의 죽(竹)은 '수죽도'나 풍죽도'에서 보듯 입체감과 볼륨감이 풍부하다. 뒷면의 흐린 먹, 중간의 보통 먹,
앞면의 진한 먹이 오버랩 효과를 준다. 이런 참신한 필법은 추종자도 많을 정도로 당대작가들을 매료시킨다.
해강은 이렇게 젊은 시절부터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죽사(竹士)'라는 호까지 얻는다.
이응로 화백, 해강의 직속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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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해강은 우리 현대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암 이응로(顧菴 李應魯, 1904~1989) 화백은 바로 그의 직속 제자다.
이응로의 초기작에는 전통형식은 붕괴되고 서양양식이 들어오는 과도기적 성격이 보인다.
이런 시기에 우리 스스로 뭔가를 해볼 기회를 놓친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로 우린 결국 근대 없이 어설픈 현대를 맞았다.
중국 전통화, 베이징 옥션에서 700억 원에 거래
중국은 우리와 다르게 전통을 잇는 서화가들이 큰 대접을 받는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장다첸(張大千, 1899~1983)과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가 있다.
치바이스는 해강과 동시대 작가인데 2011년 5월 베이징 옥션에서 '송백도립도'가 718억 원에 낙찰되었다.
이 점에 대해 이번 전을 기획한 우찬규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큰 이유는 일제의 우리문화 말살정책 때문이다. 그 영향은 지금도 남아 있다. 게다가 이 시기에 이렇다 할 작가가 나오지
못했다. 치바이스는 작년에 베이징 옥션에서 700여 억에 팔렸는데 해강은 최고가가 2억 정도일 뿐, 미술시장에서 저평가돼 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잇는다.
"우리도 중국처럼 전통미술에서 뿌리를 찾는 운동을 해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도 근대기 작품은
거의 컬렉션을 하지 않는다. 수준이 떨어진다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우수작도 많다. 어떻게 조명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한국근대서화는 거의 다 일본에 있다. 그걸 볼 기회조차 없다. 이번 작품들도 일본에서 온 거다."
고전의 고마움과 소중함 다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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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으로 해강의 '죽석도'를 감상해보자. '죽석도'에 적힌 시 한 구절을 보면 "시인도 품평하기 어려워한다(詩人猶豫品題難,
시인유예품제난)"라고 적고 있다. 옛 시인도 가는 바람에 나부끼는 대나무의 그윽한 멋과 그 아름다움을 다 형용할 수 없었나보다.
어쨌든 한국인의 기백과 전통을 담은 우리 회화가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안목을 갖춘다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작품이 나올까.
하긴 이우환의 조응미학이나 한국미술을 세계화한 김환기의 추상화도 이런 전통에 그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고전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이번 전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그림에서 으뜸가는 소호 김응원(小湖 金應元·1855∼1921)과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1868∼1933)의 작품세계를 조명한 전시다. 소호의 20점, 해강의 13점, 합작품 1점이 선보인다.
소호는 바위 틈새와 절벽에서 자라는 난초를 주로 그렸다. 가늘고 길게 뻗친 섬세한 잎, 활발한 동세가 특징인 그의 석란도는
일정한 묵색을 사용해 단아한 느낌을 준다.
해강의 묵죽화풍은 우람한 대나무의 중간 토막, 단도처럼 짧은 댓잎이 한쪽으로 날려 세찬 바람을 표현하는데 능했고,
고암 이응로에게 영향을 미쳤다. 전시장 한 벽을 차지한 그의 10폭 병풍과 다양한 풍죽도(風竹圖)에 대나무의 푸름과
꼿꼿한 절개가 고스란히 스며 있다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작가 소호 김응원과 해강 김규진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들은 근대기 예술가 가운데 난(蘭)과 죽(竹)에서 최고봉의 자리에 있었던 인물들이나, 아직까지도 전시를 통해 이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일이 없다. 특히, 김응원의 경우에는 그 예술적 성취에 비해 연구가 현저히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현대화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인물들이다. 본 전시는 두 사람의 작품을 통해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대세에 따라 개화기에 들어온
근대서구미술과 서화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나간 선구자들의 실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근대기 예술에 대해 지나치게 무관심할 뿐 아니라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학고재는 근대를 재조명하는 전시들을 통해 근대서화의 양식과 그에 깃든 시대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이 서양미술의 아류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검증해 나가면서, 동시대 한국미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세워나가고자 한다.
선비정신을 상징했다. 그 가운데에도 난은 중용의 도를 지키는 군자의 품성을 상징한다. 문향십리(聞香十里)라 하여,
산중에서 비와 이슬을 받아 살면서 수려한 잎에 고운 꽃을 피우는데 그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보내는 식물이다. 바람과 물을
좋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것도 지나친 것은 꺼리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난의 생태적 특성에서 옛 문인들은
산속에 홀로 피어서 남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향기로운 삶이 군자의 모습과 같다고 본 것이다.
눈이 오나 푸른 잎들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곧게 뻗은 모습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군자의 삶을 상징한다.
고유 정신과 회화 기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목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사군자는 서예와 회화의 중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서예의 연장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각각의 식물이 갖는 전통적인 상징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기도 했다.
또는 그림으로 들어가는 입문과정으로 폄하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사군자만큼 대상의 의미 상징을 중요시하는
동양회화의 가치를 잘 표현하고, 간결한 구성으로 먹과 여백이 주는 흑백의 묘미를 살리면서 동양회화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분야도 없다.
사군자는 위상의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소재의 상징성, 사군자화의 역사성, 수묵의 흑백이 주는 현대적 조형성 등 앞으로의
발전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대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이르러서는 난죽(蘭竹)으로 옮겨갔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도 난죽이 많다.
태도, 전체를 위해서 나의 이익을 접을 줄 아는 도량 등 사군자가 상징하는 군자의 덕성은 일제강점기 지식인이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오늘날에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사군자의 의미와 가치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다.
추구한다. 1910년대 사회의 발전을 민족문화의 향상과 정신문명 발전의 동력으로 보았던 문화주의 예술론을 기반으로 하여,
서화는 청산해야 할 봉건적 양반문화의 소산물이 아니라 계승해야 할 민족미술로 그 의미를 정립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안중식, 조석진 김응원이 왕가의 후원을 받아 서화미술회를 설립했다. 청년 서화가 양성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서화미술회는 “앞으로 서화의 발전이 날마다 왕성하여 무지개와 달이 광채를 발하듯이 우리나라가 다시 밝아지고 다른 나라와 높이를 다툴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세운다고 그 뜻을 밝혔다. 서화강습소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던 이러한 서화조직은 1915년과 1921년에
김규진과 양기훈의 제자인 김유택이 서화연구회와 서화지남소란 이름으로 소공동과 삼청동에 설립하기도 했다. 당시 서화인들은 1920년대부터 이도영 주도로 서화협회전이 매년 개최하였고, 서화협회보를 발간하면서 민족미술로서의 발전과 함께 근대미술로서의 자각을 통해 활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서화와 미술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구서화의 발전과 동서미술의 연구라는 취지를 내세우고 양자의 융합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서화를 미술로 바라보기 위한 새로운 미학을 세워나가는 시도였다.
위해 정신문명인 문화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서화가들은 개화기 이래 조선 말기의 사의적(寫意的) 경향과 청 말의 상해파 화풍,
일본의 화풍(和風) 수묵화가 혼재된 가운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근대미술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개화기를 포함한 근대기의 서화는 조선시대 서화의 쇠퇴 현상이 아니라
신구화도와 동서미술이 착종하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고 개량하기 위한 노력의 소산이다. 근대적인 문화주의 예술로의 개량을 모색하면서 서구의 물질문화에 대한 동양 정신문화의 우월감을 토대로 동아시아의 수묵화풍을 중심으로 결합을 시도하여
‘동도의 꽃’을 새롭게 피운 것이다. 필묵의 사의성(寫意性)과 함께 시각예술로서의 미려한 의장성(意匠性)을 추구했는가 하면,
붓질의 기세보다는 붓자국 효과에 더 치중했으며, 좀 더 크게 화면을 운영하는 등의 변화를 보이면서 특유의 시대양식을
수립했다.
소호 김응원은 당시 이하응에게 들어온 그림 청탁을 대신해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이하응과 유사한 화풍을 보인다.
그러나 김응원은 석파란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변형시킨 새로운 구도법을 사용하였다. 난엽은 첨예하고, 동세는
활달하여 그만의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대원군이 추사의 난법인 사의란(寫意蘭)을 주로 다루었던데 반해 소호는 사의란(寫意蘭)과 사생란(寫生蘭)을 겸하는 중간입장을 취했다.
있어서도 이하응은 먹의 농담에 변화를 주어 원근감을 표현하려고 하는 데 반해 김응원은 난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정한 묵색을
사용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응원의 난은 후에 ‘소호란’이라고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후대의 묵란 화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계승하면서도 청대 묵죽화풍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일면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의 선도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김규진이고, 현재까지도 이들 묵죽법의 영향이 지대하다.
기법 등이 근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평남 중화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외삼촌인 이소남(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장인인 이희수(李喜秀)에게
서예를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885년부터 8년간 청나라에,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일본에
머물며 그 곳의 서화를 접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1915년에 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문인화, 서화, 사군자 등을 가르쳐
후진 양성에 나섰고, 이때 서화교습용 교과서로서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를 발간하여 당대 묵죽과 묵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유명하다. 영친왕 이은에게 서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림에서는 산수화, 화조화, 사군자를 즐겼으며, 특히 묵죽도가 절묘하였다. 사진술을 도입하여 천연당 사진관을 개업했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교분이 두터워 석파란의 대필자로도 이름날 정도로 묵란에 뛰어났다. 그의 묵란은 대원군의 필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유연한 필선의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고, 행서와 예서를 잘 썼다.
<月下竹林圖(월하죽림도)> 海岡 金圭鎭(해강 김규진)作, 10폭 병풍, 130x375㎝, 견본수묵
<墨竹圖(묵죽도)>金剛山人 金振宇(금강산인 김진우)作, 134x41.5㎝, 지본수묵 1935년
<墨蘭帖(묵란첩)> 石坡 李昰應(석파 이하응)作, 33.5x44.5㎝, 지본수묵
<甁蘭圖 對聯(병란도 대련)> 石坡 李昰應(석파 이하응)作, 69x39㎝, 견본수묵 1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