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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정하여,
성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 제1독서
<열왕기 하 4,8-11.14-16ㄱ>
엘리사가 하루는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거기에 살고 있던 한 부유한 여인이
엘리사를 대접하고 싶다면서 머무르기를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곤 하였다.
그 여인이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틀림없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거룩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옥상에 작은 방을 하나 꾸미고 침대와 상, 의자와 등을 갖추어서
그분이 우리 집에 들르실 때마다 그 방에 모시도록 합시다.”
어느 날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다락방에 올라가서 쉬게 되었다.
엘리사는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 부인에게 해 줄 일이 없을까?”
“이 부인은 아들이 없는데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아 보기에 참 딱합니다.”
하고 게하지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 여인을 다시 불러 오라고 일렀다.
시종이 여인을 불러 오자 여인은 문간에 섰다.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 같은 철이 돌아오면 부인께서는 아이를 낳아서 안게 될 것이오.”
+ 제2독서
<로마서 6,3-4.8-11>
형제 여러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 복음
<마태오 10,37-42>
그때에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강화 갑곶성지)의 묵상글 *
어제 저녁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성무일도를 펴 들었는데,
문득 ‘핸드폰이 어디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핸드폰이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니, 성지에다 두고서 온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러한 갈등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하고서 갈까?
아니면 핸드폰을 찾아오고서 기도를 할까?’
저는 핸드폰을 먼저 찾아오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중요한 전화도 오거든요.
그래서 기도는 핸드폰을 찾아온 뒤에 하기로 하고 성지로 갔고, 핸드폰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핸드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액정 화면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전화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즉, 고장이 난 것이지요.
저는 곧바로 강화도에 있는 어느 대리점을 찾아갔습니다.
그 대리점 직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이것은 간단한 고장입니다.
부품 하나면 교환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저희는 수리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맡기고 가시면, 음....
오늘이 토요일이니까 화요일쯤 찾으러 오시면 되겠습니다.”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제가 직접 A/S 센터로 곧바로 가겠다고 하고 그 대리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김포에 있는 A/S 센터로 향했지요.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업이 끝난 뒤였습니다.
결국 저는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가서 쇼핑만 하고서 올 수밖에 없었지요.
쇼핑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왔습니다.
무엇인가를 빼 먹은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씻고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이 새벽, 제가 빼 먹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어제 저녁 기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를 하려는 순간에 가졌던 핸드폰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핸드폰 수리를 위한 저의 노력들,
그리고 그에 따른 기타의 행동들로 인해서 중요한 저녁 기도를 잊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께 얼마나 죄송한 마음이든지요.
물론 이 새벽에 어제 못한 저녁 기도도 함께 했지만,
신부라고 하면서
주님보다도 이 세상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 것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들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그래서 피곤함을 가져다주거든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요구 사항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네 유교 윤리에서는
부모 형제가 모든 생활의 첫째 자리에 오며
효가 모든 덕행의 으뜸 자리에 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이
바로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불효도 무릅쓰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극한 상황에서 필요하다면
부모까지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한다는 뜻이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라는 뜻입니다.
저처럼 이 세상 것을 더 먼저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지 마시고,
항상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가 되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살레시오수도원 원장)의 묵상글 *
<마음이 짠해져서>
이 한세상 살다 보면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십자가들,
절대로 바라지 않았던 십자가들이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어떤 십자가는 지독하게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를 휘감습니다.
어쩌면 평생 우리가 지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기운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저를 찾아온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도 딱했습니다.
얼굴을 뵙기조차 송구스러웠습니다.
마음이 짠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고작 마흔 밖에 안 된 딸이 먼저 세상을 뜬 것입니다.
이틀 전에 장례식을 치루셨답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건강도 여의치 않다는데,
앞으로 어머님이 지고 갈 십자가를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자식 먼저 앞세운 부모님들,
참으로 그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한 평생 죄인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십니다.
가장 힘든 것이 자식을 저리 황망히 세상을 떠났는데...
숟가락 들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하십니다.
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지요.
아직 어리지만 기구한 인생 여정 끝에 저희 집에 입소한 형제가 있습니다.
두 아이가 지금까지 겪어온 사연들을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소설도 그런 소설이 없습니다.
둘만이라도 헤어지지 말고 꼭 붙어 다니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서로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는지 그 동안 둘 사이는 꽤 껄끄러운 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조금 철이 든 형이 동생에게 사랑의 공개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듣고 있노라니 눈시울이 다 뜨거워졌습니다.
“사랑하는 동생 **에게.
**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너에게 쓰는 편지다.
어색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형이 너한테 지금까지 살면서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형으로써 안 좋은 모습만 보인 것이 정말 후회가 된다.
생각과 마음으로는
너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었다.
불편한 너의 손발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내 자신이 부끄럽다.
정말 미안해.
늦었지만 이제 내가 너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야,
힘내고, 너의 입가에 미소가 계속 번질 수 있으면 좋겠어.
**야,
그리고 사랑한다.
이런 말을 이제야 하게 되니 정말 미안하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에게 형이.”
참으로 가슴 흐뭇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슴 미어지는 사연입니다.
부모가 잘 뒷바라지해줘도 제 몫을 하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부모 없이 홀로 서기 위해
한평생 죽을 고생을 겪어야 할 아이들의 십자가가 너무도 커보였습니다.
때로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수용하기 힘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라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십자가는 난 데 없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피할 방도는 없습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까?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의 길 그 도상 위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 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힘에 겨운 십자가를 지고
휘청휘청, 비틀비틀 걸어가는 이웃들을 바라봅니다.
신앙인으로서 그들을 위해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생각해봅니다.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그들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그들이 십자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게 할지 생각합니다.
* 서철 신부님(청주교구 성소국장)의 묵상글 *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미워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앞으로 내세우고, 하느님을 뒤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앞세우고 그뒤에 아버지나 어머니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기에
새로운 눈으로 아버지에 대하여, 어머니에 대하여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나 딸을 마음의 첫 자리에 두고 그들에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음의 첫 자리에 두어
아들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 제대로 보고,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나를 앞세우고 하느님을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앞세우고 나를 뒤로 미루라는 것이다.
내 욕심이나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 사랑을 첫 자리에 두는 것이다.
이럴 때 자신에 대한 올바른 질서가 생긴다.
나는 무엇을 내 마음의 첫 자리에 두고 있는가?
* 허성 신부님(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상담)의 묵상글 *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오늘의 복음 말씀 요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우수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스승과 제자를 결합시키는 관계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지적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단순하게
『나를 따르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서에 나오는 「따르다」라는 동사는
단지 예수님의 인격에 귀의하는 것을 표현한다
(마태 8, 19 이하).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과거와의 절연을 의미하며,
따라서 참된 제자가 되려면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행동 양식을 따르고,
그분의 교훈을 경청하며,
구세주의 삶에 자기의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 8, 34~35; 마태 19, 21; 루가 18, 22).
유다교 학자의 제자들은
일단 율법에 규정된 교육을 끝낸 다음에는
스승을 떠나 독자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과는 달리
하나의 가르침에 매이지 않고 그분의 인격에 매여있기 때문에,
자기 부모보다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스승을 떠날 수 없었다
(마태 10, 37; 루가 14, 25~26).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의 운명을 함께 나누기로 불리움을 받았다.
즉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마르 8, 34; 마태 16, 24; 루가 9, 23),
그분의 잔을 마시며
(마르 10, 38~40),
마침내 그분께로부터 왕국을 받기로
(마태 19, 28~29; 루가 22, 28~30; 요한 14, 3)
불리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가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물 한잔만이라도 주는 이는
누구나 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이나
(마태 18, 6; 마르 9, 41),
반대로 이 미소한 형제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단죄될 것이다
(마르 9, 42; 마태 18, 6; 루가 17, 2).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다교의 제자들과 구별된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당신 독생 성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다교의 스승들은 때때로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무효화할 위험이 있는 인간적 전승만을 가르칠 따름이나
(마르 7, 1~3),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그들 영혼의 안식을 약속하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지혜이시다(마태 11, 29).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며,
이와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요한 6, 45).
예수께서 강생하신 목적은 인류 구원이지만
구원에로 이르는 길은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험한 길이기에
우리의 심신을 무겁게 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무디게 하는,
제물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직책이건 사람이건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집착하지 말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엘리아는 자기를 따르려는 엘리사에게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먼저 하러 가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르고 따르겠다는 요청마저도 거절하시고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까지
가혹한 요구를 하셨다.
또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온 부자 청년에게는
그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을 하며 돌아간 후에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그 청년의 멸망을 예고하셨다.
사도들은 에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즉시 가족과 재산과 직업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과거의 많은 성인 성녀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이나 동굴로 주님을 찾아갔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보다 더 완전하고 안전하게 주님을 따르고자
복음 삼덕의 길을 택하여 자신의 순결을 봉헌하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직분에 대한 집착과 소유권을 봉헌하고,
자신의 자유 의지마저 봉헌하여 완전히 빈 껍데기가 되어 홀가분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고 빈 껍데기가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빈 공간을 당신 자신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그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착하고 충실한 길잡이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도
현재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 드리고
우리는 단지 관리자의 위치로 내려와
주님의 충실한 청지기로 최선을 다하여 삶음으로써
주님의 성실한 제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