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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오늘(7월 27일)
6.25를 종식시킨 휴전체제가 들어섰다.
6.25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일으켰던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휴전체제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는
결국 “스탈린의 야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가?”
여부에 의해 결정될 수 밖에 없었다.
우남 이승만은,
이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휴전과 한미동맹은 이렇듯 쌍둥이로 태어났다.
이 쌍둥이를 만들어낸 인물이 우남이다.
1. 휴전과 한미동맹은 함께 태어났다
지금은 미국을 [세계의 경찰]이라고 부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은 오히려 [고립주의]가 강했었다.
고립주의 :
”바깥 세계가 어떻게 되든,
남북 아메리카 대륙만 평화스러우면 된다”고
보는 국제정치 전략.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이라고 한다.
미국의 제 5대 먼로 대통령이
1823년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미국의 외교전략.
따라서 미국이 맺는 방위조약은 대부분,
나토(NATO)와 같은
[지역 안보 체제]와 맞물린 방위조약들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같은 두 나라 사이의 방위조약은
매우 예외적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된 1953년 11월을 기준으로
미국이 [두 나라 사이의 방위조약]을 맺은 것은
오직 영국과 필리핀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영국의 경우,
미국이 핵무기 제조기술을 제공하면서 맺은 것이고,
100여 년 동안 미국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필리핀의 경우에는
미군주둔 조항이 없다.
한마디로 한미방위조약은 매우 파격적인 조약이다.
▲1954년8월2일 미국상하양원회의에서 국빈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뒤에 닉슨 부통령이 보인다.(왼쪽끝).
이 같은 파격적 조약 덕분에
우리는 스탈린의 야욕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를 관철시킨 것은 우남 이승만이었고,
이를 위해 대가로 지불한 것은
북한에 사로잡힌 국군포로 수 만 명의 영구 억류였다.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6.25가 막바지로 치닫자
미국은 하루라도 빨리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되었다.
꽃다운 젊은이 3만7천명이 숨지고
10만 명이 부상당했기 때문이다.
한미방위조약 같은 것은 옵션에 없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남은 대형사고를 저질렀다.
1953년 6월 18일,
3만명의 반공포로를 전원 석방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공산군을 크게 자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휴전 협상 자체가 무산될 지도 모를 고비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이며,
미국의 도움으로 전쟁을 치러 온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뺨을 후려친 사건이었다.
미국은 이를 갈았다.
이승만을 쿠데타로 쫓아내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아이젠하워는
우남에 대해
“그는 친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적이다”라고
극언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우남에게 굴복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기로 했다.
그대신 미국은
북한에 사로잡힌 국군포로의 송환에 대해
공산군에게 양보해 버렸다.
그 결과 이들 중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 한 채,
함경도 등에 있는 [네모 고을]들에서 살았다.
교도소처럼, 중앙에 집회장이 있는 네모 반듯한 특수 수용 시설이기에
[네모 고을] 혹은 [네모골]이라 불렸다.
이들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위한 희생양으로 스러져간 것이다.
2. 미국 대통령 입에서 ‘씨팔’ 소리가 나오게 만든 한국 대통령
돌이켜 보면,
한국 대통령 중에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면전에서
[씨팔](Damn it!)이란 말을 들은 사람은
우남 밖에 없을 것이다.
6.25가 끝난 이듬해
우남은 미국을 방문해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보다 좀 앞선 해방 직후 미국의 힘은 공포스러운 수준이었다.
지엠(GM)의 한 해 매출이
일본 전체의 GNP 보다 컸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를 만난 우남의 태도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을 뿐이다.
이런 취지의 대화가 오고 갔다.
아이젠하워: 아, 그런데
작년 6월에 반공포로를 석방한 일 말씀입니다.
아니, 우리 미국을 어떻게 보고
그런 일을 일방적으로 덜컥 저질렀습니까?
우남: (태연하게)
반공포로는 당연히 석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바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르쳤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르침을
따랐을 뿐 아닙니까?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미국 역사도 모릅니까?
아이젠하워: (약이 올라
얼굴이 시뻘개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씨팔!(Damn it!)
3.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최전선]에서
[전체주의를 끝장내는 종결자]까지
1953년에 맺어진 한미동맹에 의해
한반도 남쪽은,
[스탈린 전체주의]와 [모택동 전체주의]라는
세계 최강의 전체주의 체제 두 개에 대해
저항하는 최전선(front)이 되었다.
▲ 6.25 남침전쟁의 두 원흉, 모택동(좌)과 스탈린(우).
스탈린 전체주의-모택동 전체주의를 창시한 귀태들이다.
최전선이란 점에서는
아슬아슬한 [위기의 존재]이며,
한미동맹에 의해 그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점에서는
태평스런 [안정의 존재]가 되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소련은 해체되었고,
중국은
[공산당 간부가 자본가로 변신한]
[자본주의적인,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국가](capitalist, too capitalist state)가
되었다.
심지어 중국은 최근,
6.25를
<항미원조전쟁>(=미국과의 싸움판에 뛰어들어 도운 전쟁)이라 부르는 대신,
<조선전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극악한 전체주의 시스템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북한 김일성 사교(邪敎) 전체주의]뿐이다.
[전체주의]는
20세기에 등장한 현대문명(modernity)의 산물이었다.
현대문명은
[극선](極善)과 [극악](極惡),
두 자식을 낳았다.
[극선]은
[세계시장과 자유민주주의]이다.
[세계시장]이 발전하지 못 하면
[상품] 대신에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되지 못 하면
[표](ballot)를 던지는 대신 [총알](bullet)을 쏘게 된다.
[극악]은
[전체주의]다.
레닌-스탈린-모택동으로 이어지는 [공산 전체주의]가 있고,
파시즘-나치즘과 같은 [우파 민족주의 전체주의]가 있고,
[천황은 신이다]라는 일본 민족 종교에 바탕한
신성(divine) 혹은 [악마적(demonic) 전체주의](=미카도이즘, Mikadoism)가 있다.
[북한 김일성 사교(邪敎) 전체주의]는,
스탈린 체제를 모방했다는 점에서는 [공산 전체주의]이고,
극단적 민족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는 [나치 전체주의]이고,
김일성을 신으로 모신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천황전체주의]이다.
비빔밥이 한반도의 발명품이듯,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전체주의를 뒤섞은
짬뽕 역시 한반도의 발명품이다.
▲ 방부제 속에 누워 영생을 꿈꾸는 [귀태 중의 귀태] 김일성.
수백만명의 동족을 학살한
흉측한 [전체주의 사교] 집단의 정교일치 교주다.
▲ 이 꼬락서니를 보라.
지 애비처럼 방부처리 되어 영생을 꿈꾸는 잔인한 도살자 김정일.
지 애비를 능가하는 요사스런 [귀태 중의 귀태].
[전체주의 사교] 집단의 교주 계승자에 불과하다.
현대문명이 낳은 [극악],
즉 [전체주의]가
한반도의 북쪽에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악한 형태(김일성 사교 전체주의)로
완성된 것이다.
[편집자 주]
인간을
[개인]이 아니라 [떼],
사회를
[실험대상],
즉 인간을 [품종개량의 대상]으로 보고
사회를 [엔지니어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전체주의다.이런 전체주의에서는 항상
[피바다]가 빚어졌다.
▲舊 소련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바친 사형자 명단은
책으로 383권인데 모두 4,5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사진은 러시아 공산혁명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이다.
히틀러의 나치 전체주의가 벌인 유태인 대학살.
일본 천황전체주의가 저지른 난징대학살.
월평균 4만영씩 처형한 스탈린 전체주의의 대학살.모택동 전체주의에 의해 벌어진 [대약진운동](1958~1962).
역시 모택동 전체주의가 주도한 [문화대혁명](1966~1976).
그리고 크메르 루주에 의해 저질러진 [킬링필드](1975~1979) 아니던가?[스탈린 대학살]의 희생자는 약 4천5백만명.
[대약진운동]의 희생자는 약 4천5백여만명.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는 약 2천5백만~3천여만명.
[유태인대학살] 희생자는 약 6백만명.
[킬링필드]의 희생자는 캄보디아 전인구 4분의 1에 달하는 2백여만명.
▲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살인마(귀태)를 찬양한 리영희.
오늘날 휴전선 이남의 전체주의 부역자들의
사상적 스승으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다.[깡통진보]의 상징인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에서
그런 모택동을 숭배하는 풍조를 퍼뜨렸다.<리영희>는,
이런 학살자를 찬양했다.
386 운동권은,
이런 <리영희>를 정신적 사부로 모시고 있다.이런 [깡통 시류]를 추종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발언을 했다.특히 [대약진운동]과 관련,
영국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논픽션상인 BBC <새뮤얼 존슨상>의
2011년 수상작으로
홍콩대 프랑크 디쾨터 교수(런던대 박사)가
쓴 <마오의 기근>에 따르면,
그동안 2,500만명 정도로 알려진 희생자수가
최근 중국 공산당이
공개하기 시작한 문서를 통해
4,500여만명에 육박한다는 것으로 밝혀졌다.2010년 9월 출간된 이 책은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
<선데이타임스>, <이브닝스탠더드> 등의
<2010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 1964년 중국을 방문해서,
<마오쩌둥>(우)과 <저우은라이>(周恩來) 사이에 선 <김일성>.
그들은 저렇게 미소를 띄거나 점잖은 표정을 짓지만,
그러면서 수많은 생명의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더 천하게 생각하는
[귀태중의 귀태]들이다.
이제, 현대문명이 낳은 [극선],
즉 [세계시장-자유민주주의]를 향해 달려 온 남쪽이,
북쪽의 [극악]을 해체하고 통합해야 하는 때가 오고 있다.
[극악]과 [극선]으로 나뉘었던 현대문명의 자기분열이,
이곳 한반도에서 [극선]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 오고 있다.
60년 전 오늘,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최전선] 역할을 맡았던 한반도가,
이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가장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전체주의]를 끝장내는,
[종결자] 역할을 맡은 것이다.
[전체주의]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북한동포의 정신과 영혼을 부활시키는 것—
그것이 이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이곳은 [운명의 땅]이다.
4. 백년전쟁
현대문명이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덮치고 나서
40년 밖에 지나지 않은 1917년부터,
한반도는 항상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었다.
지난 백 년 동안 한국 현대사는
[전체주의]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우남 이승만이
1960년까지 40여년 동안 이 싸움을 이끌며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박정희가
1961년부터 1978년까지 이 싸움을 이끌며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백년 세월을 통틀어 보면,
[여섯 개의 시기]로 나뉘어진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난 1917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가
제 1기다.
이때는 [소련 볼세비키 전체주의]에 대한 평가가
핵심 이슈였다.
그래서 이 시기를 [평가의 시기]라고 불러야 한다.
“소련 공산주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리의 정신적 조국인가?
독립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이며 독립 모델(사회주의 모델)의 제공자인가?
아니면 결코 모방하거나 동맹으로 삼을 수 없는 위험천만한 집단인가?”
1945년에서 1953년까지가 제 2기이다.
이 시기는 [스탈린 전체주의]와의 싸움이었다.
김일성은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기는, [전쟁의 시기]라고 불러야 한다.
해방-건국-6.25에 이르는 8년 동안,
우리 선배세대는,
[스탈린의 지휘 아래
소련과 중공(지금의 중국)의 무제한 지원을 받은
북한 스탈린주의자들]과
싸웠다.
1953년에서 1987년까지 제 3기는,
[북한 전체주의]와의 체제경쟁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경제발전과 민주화,
두 가지 모두를 성공시켰다.
1987년 6.29 선언
혹은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체제 경쟁은 우리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 시기는 [경쟁의 시기]라고 불러야 한다.
1987년에서 2010년 천안함까지가 제 4기다.
[공포의 시기]였다.
이른바 햇볕정책은
두려움에 호소하여 두려움을 착취한 가짜 정책이다.
“북한 도발에 대해 자위적 군사행동을 하면 전쟁으로 번지지 않을까?”라는
[싸움에 대한 두려움]과,
“북한 시스템이 붕괴하면 우리가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되지 않을까?”라는
[독박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햇볕정책의 본질이다.
이 두려움은
가진 자의 두려움이며
성공한 자의 두려움이다.
체제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지킬 것이 많아졌고
두려움이 커졌다.
2010년에서 지금 계속되고 있는 제 5기는,
[각성의 시기]이다.
[북한 전체주의]가 붕괴할 수 밖에 없다는 진실을 각성하고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각오와 준비를 다지는 시기이다.
[북한 김일성 사교 전체주의]가 붕괴한 다음에 펼쳐지게 될 제 6기는,
[부활의 시기]이다.
김일성 사교 전체주의에 의해
정신과 영혼이 심하게 뒤틀렸던 북한 동포들이,
세계화된 현대문명 속에 우뚝선 개인으로 부활되는
거대한 인류사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시기이다.
5. 우남의 역할: [불 속의 물]
6.25가 끝난 직후
미 CIA는 두툼한 한국 파일을 작성했다.
이 파일의 제목은
<불에 의한 세례>(Baptism by Fire)였다.
한마디로,
“혹독한 고난을 겪었지만, 앞으로 안정과 번영의 기회가 주어졌다”라는
뜻이다.
불은 파괴이다.
불이 세례가 된다는 것은,
파괴가 창조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아무 불이나 무조건 세례가 되는 것도 아니요,
모든 파괴가 빠짐없이 창조의 씨앗이 되는 것도 아니다.
미친 불, 미친 파괴는 생명을 망칠 뿐이다.
불이 세례가 되고,
파괴가 창조가 되기 위해서는
불(파괴) 속에 물(수용=받아들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역(易)의 리(離=불) 괘가
가리키는 진실이다.
아래 위 두 개의 양(陽=불) 속에
음(陰=물)이 있다.
19세기 말,
현대문명은 우리를 불길처럼 덮쳤다.
이 불바다 속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서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면서
현대문명을 제대로 수용(=받아들임)하는 것이
바로 물의 역할이다.
물의 작업이 성공하면,
현대문명의 불길은 오히려 세례가 되며,
전통사회의 파괴는 결국엔 창조가 된다.
1898년 청년 정치 스타로 뜬 우남 이승만이
평생 동안 한 일은 바로 [물의 작업]이었다.
우남은,
현대문명이라 불리는 불길 속에
[생명의 길]을 만들어낸
[불 속의 물]과 같은 존재이다.
이 [물의 작업]은
우리 선배세대로 하여금
[스탈린-모택동 전체주의]의 침공을 물리치고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주춧돌을 놓도록
이끌었다.
그의 작업은,
1904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작업은,
본질적으로 [사상 정립] 작업이요
[노선 천명] 작업이었다.
우남은 평생
[사상과 노선]을 만들어내고
이를 전파한 사람이다.
해방 이전까지 흐름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A. 1904년 책 <독립정신>
우남은 서른 살 때인 1904년,
5년 동안 살아왔던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썼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세계시장과 현대문명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정신이 각성되어 그 요체를 이해하면 된다.
한국민족은 영리하고 부지런하기 때문에
세계시장과 현대문명 속에 뛰어들어 번영할 수 있다.
2) 앞으로 우리는 왕실을 없애고
민주공화정을 택해야 한다.
미국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3)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정신이 각성하는가 여부에 달렸다.
단 한 사람이라도 독립정신이 제대로 박힌다면 희망이 있다.
이 책은 일제시대 내내 가장 엄격한 탄압을 받은 금서였다.
B. 1908년 칼럼 <일본이 진정으로 싫어할 일을 골라서 해야 한다>
우남은
이 칼럼에서
“일제가 언젠가 도발한다.
함부로 게릴라 전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을 한다.
1) 막무가내로 독립전쟁을 한답시고
게릴라 전을 일으키면
오히려 민초의 삶을 도탄에 빠뜨릴 뿐 아니라
일제가 가혹한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도울 뿐이다.
2) 이런 상황이 오면,
고단한 삶에 지친 민초는
독립을 원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3) 하루아침에 졸부가 되면 결국 패가망신하듯이,
지금 일제는 하루아침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에
그 교만과 포악이 하늘 높은 줄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4) 일제는 언젠가 세계문명 질서를 상대로
거대한 도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5) 일제가 이 같은 도발을 할 때가 바로
우리에게 독립의 기회가 생길 때이다.
6) 그 동안은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현대문명의 특성을 연구하고,
이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가야 한다.
C. 1921년 임시정부 대통령의 발표문
우남은 1921년 초,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여러 차례의 발표문을 내놓는다.
이 발표문들은
게릴라투쟁 노선과
의혈투쟁 노선(=김구 자신의 용어에 의하면 [암살 테러] 노선),
둘 모두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1) 지금 독립전쟁을 하겠다고
게릴라 부대를 만들어 움직여 봐야
오히려 운동 역량을 소진시키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2) 의혈투쟁(김구 자신의 용어로 [암살 테러] 투쟁)은
운동 역량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 한다.
의혈투쟁 한답시고,
동포들을 찾아 다니며 돈을 뜯지 말라.
D. 1923년 칼럼 <공산당은 옳은가, 그른가?>
우남은
이 칼럼에서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로 요약해서 통렬히 비판한다.
당시 소련을 [조국]으로 떠받들면서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가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해
맹렬한 [노선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 재산을 없애면 근로의욕이 없어진다.
2)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없어진다.
3) 지식인을 없애면 무지몽매해 진다.
4)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허물어진다.
5) 소련을 [조국]으로 떠받들면 망한다. 소련은 하나의 국가일 뿐이다.
E. 우남의 독립운동 목표와 독립운동 전략
우남은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독립 목표로 삼았다.
이 같은 관점은
수십년에 걸친 우남의 행적과 글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우남은 이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운동 전략을 구사했다.
1) 두 시기의 구분:
결정적 시기(일제가 세계문명 질서를 향해 도발하는 시기)가 되면
독립전쟁/무력투쟁을 전개한다.
그 시기가 오기 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력을 다져야 한다.
2) 교포의 자조-자립 :
첫째, 교포운동을 자조-자립-교육 운동으로 확립시켜야 한다.
특히 미국 최대의 교포 커뮤니티인 하와이 교포사회에서
자조-자립-교육 운동을 전개해서
교포를 [각성된 민족 공동체]로 조직한다.
3) 국내 동포의 자조-자립:
둘째,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 역시,
지식과 교양을 드높이는 한편
각계각층이 자신의 여건에 맞도록 실력을 길러야 한다.
4) 선진국 지식층-여론 주도층을 겨냥한 [인식](awareness) 캠페인 :
셋째, 외국 특히 미국에서,
지식층-여론 주도층을 상대로
“한반도의 독립만이 세계 평화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다”라는 인식을
꾸준히 퍼뜨려 가야 한다.
5) 일본 고립화를 위한 외교 캠페인:
넷째, 국제 외교 무대에서
일본을 고립시킬 수 있는 홍보 선전 작업을
꾸준히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남이,
결정적 시기가 오면 당연히 무장봉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
또한 자조-자립 운동을 전개한 점,
외교 무대 뿐 아니라 선진국 지식층-여론 주도층을 겨냥한 홍보 선전을 전개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우남의 노선은 결코 [외교노선] 하나로 도식화 될 수 없다.
우남의 노선은,
[일제의 도발]이라는 국제정세 여건을 중시했기에
[현실정치] 노선이며,
개개인의 각성과 자조-자립을 추구했기에
[실력양성] 노선이며,
선진국의 지식층-여론 주도층 전체를 겨냥했기에
[인식 캠페인] 노선이며,
외교 무대에서 일본을 공격했기에
[외교] 노선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과정으로 파악했다.
우남은
소련 공산 전체주의에 물들어간 독립운동가들,
또한 의혈투쟁을 고집하는 독립운동가들과
격렬한 노선투쟁을 벌였다. ,
F. 1933 <만주의 한국인들> (영문 팜플렛)
1931년 일제가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자
우남은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생생히 정리한 영문 팜플렛을 만들어서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 배포했다.
이 팜플렛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한 <리튼 보고서>가 만장일치(일본 자신 제외)로 통과됐다.
일제는 결국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G. 1941 <저팬 인사이드 아웃> (Japan Inside Out; 일본을 벗기다)
(미국에서 출간된 영문 책)
1941년 여름,
우남은
<저팬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어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일제의 도발(진주만 기습)을 정확히 예언하고
[천황전체주의](Mikadoism) 체제가 형성시킨
국민심리를 생생히 묘사하는 한편,
미국 지식층과 정치인들에게
“평화주의, 고립주의 망상을 떨치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촉구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이 책은 미국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일본인의 전체주의 심리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에 투입된 미군 장교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또한
[천황전체주의]의 국민심리를 분석-묘사한 최초의 책일 뿐 아니라,
[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전체주의 비판서]이기도 하다.
6. 이제 [물 속의 불]이 필요하다.
우남 이승만은
1904년에 쓴 <독립정신>부터 줄곧,
[불길처럼 사납게 덮친 현대문명]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의 길]을 찾아내어
이를 전파하고 설득한 사람이다.
파괴의 힘으로 닥친 현대문명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해서,
이 문명을 수용(=물, 받아들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지도자이다.
그는 [불 속의 물]이었다.
이제 우리는 [북한 김일성 사교(邪敎) 전체주의]를 해체하고,
북한 동포의 정신과 영혼을 되살려 내야 하는 과업을 마주하고 있다.
통일은 영토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통일은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통일이다.
해방 이후 70년 세월 동안
전체주의에 의해 황폐화되고 왜곡된 정신과 심리를 가진 북한 동포를
[세계시장 속에 우뚝 선 당당한 개인]으로 부활시키는 것이
바로 통일의 궁극적 핵심이다. .
찌들리고 왜소해진 북한 동포를
보듬어 안는 것은 곧 물(=수용, 받아들임)이다.
그러나 무조건 보듬어 안는 것이 아니다.
[북한 전체주의 문화]에 의해 왜곡된 정신과 심리를,
[자유민주주의, 세계시장, 개인 존엄성]이라는 가치관으로
해체하여 녹여버리는 불(=파괴)이 함께 해야 한다.
우남 이승만과 박정희가 이끌었던 선배세대는
[불 속의 물]을 찾아냈다.
이제 우리는 [물 속의 불]을 찾아 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유통일의 궁극은
북한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신-심리 속에 똬리 틀고 앉은
[전체주의 문화-가치]를 해체-파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통일의 시작은 무엇인가?
이곳 휴전선 남쪽에서,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옹호-변호하는 자들,
즉 [전체주의 부역자]들이 누리고 있는 정치 권력을 해체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 권력(cultural hegemony)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 자유통일 지지자들은
1) 휴전선 남쪽에서 [전체주의 부역자]들과 싸우기 시작하여
2) 휴전선 북쪽의 [김일성 전체주의자]들을 고립-붕괴시킨 후
3) 마침내 북한 동포 개개인의 정신-심리 안에 똬리 틀고 앉아 있는
[전체주의 문화-가치]를 해체-파괴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멸공통일],
[승공통일]이 진화된,
[멸전통일](滅全統一),
[승전통일](勝全統一)을 구호로 삼는다.
이때 [전]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뜻한다.
뱀발: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매우 심하게 변형되기 시작해서
이제 더 이상 [공산주의]가 아니라
[김일성 사교(邪敎) 전체주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1953년 오늘,
[총칼의 전쟁]은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전체주의 부역자]들—
[북한 김일성 사교 전체주의] 체제를 [교류-협력의 파트너]라고 떠들며
국민을 혼란시키는 자들,
바로 이들의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에 대한
[정신의 전쟁]은 시시각각 강화되고 있다.
선배세대는
[총칼]로 저들을 물리쳤고,
우리는
[정신]—즉, 가치와 원칙—으로 저들을 해체시켜야 한다.
[첨부] 그들이 갔던 길: 피곤죽
우남은
만주-연해주의 무장게릴라 투쟁 노선에 대해
격렬히 비판했다.
특히 공산계 운동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남의 이 같은 비판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무장게릴라 투쟁 노선-공산주의 노선을 밟았던 사람들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다섯 번에 걸쳐 피곤죽이 되었다.
1920년경 연해주와 만주에는
우리 동포들이 약 80만 명쯤 살고 있었다.
1930년이 되면서
이 인구는 130만 명쯤으로 늘어났다.
이는, 한반도 인구의 5%쯤 되는 숫자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무려 3백 50만 명에 해당한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가들은
이 지역이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였던 이휘영-이시영 형제는
1910년, 식솔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열고 독립군을 기르기 시작했다.
만주와 연해주가 독립군의 기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소련 공산전체주의]와 [일제 천황전체주의]가 서로 겨루고 견제하는,
악마가 지배하는 죽음과 배신의 땅이었을 뿐이다.
신흥무관학교 역시 1920년에 폐교되었고
이시영도 활동 무대를 상해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과 모택동은,
우리 동포를 총알받이로 사용하다가 죽음으로 내몰았다.
A. 첫번째 피바다: 스보보드니
스보보드니(Svobodny)는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러시아의 우주발사기지가 있는 도시이다.
러시아 말로 자유를 뜻하는 스보보다(Svoboda)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들은
이 도시를 <자유시>라고 불렀다.
그러나 1918년에서 1922년까지
소련 공산군과 일본이 주도하는 다국적군 사이에 벌어졌던
시베리아 전쟁(Siberian Intervention) 과 관해서 만큼은,
한 없이 아름다운 이 강변 도시에는
사악한 배반과 학살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대한 독립군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학살되고 체포당한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1919년 7월이 되자
일본군 주축 다국적군과 소련 공산군 사이의 전투는 한 고비를 넘겼다.
1920년 6월이 되자
미국-영국을 포함한 서양 열강의 군대는 완전히 철수하고
일본군만 남아서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반혁명 정부를 계속 지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에게 이런 메시지를 분명히 보낼 필요가 있었다.
"너희 일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만주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욕심이 없다.
우리는 오직 연해주를 포함한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만 되찾으면 된다"
이 메시지를 가장 확실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값비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소련 공산군과 함께
죽기 살기로 일본군과 싸워 온 대한독립군만큼 좋은 희생제물이 없었다.
독립군을 계속 살려두면
만주 및 연해주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뇌관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었다.
1921년 6월,
소련은 대한독립군 전체를 자유시로 불러들인다.
약 3천 5백명의 병력이 따듯한 쉼터와 휴식을 기대하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르 강을 넘어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들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소련군대로 편입될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현장에서 1천명 안팎이 학살되고
나머지는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독립군의 마지막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우리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대한독립군이 존재한 적 없다.
독립군은
1921년 자유시에서,
소련군 학살에 의해 끝장났다.
그 이후 만주와 연해주의 조선동포들은
어떨 때에는 중국 공산당원이 되어,
또 다른 때에는 소련의 지휘 아래 싸웠다.
그때마다 자유시 참변과 똑 같은 일이
무려 [네 번이나 더] 되풀이 되었다.
B. 1930년대의 만주 연해주 정세
만주와 연해주는
1930년대 중반에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은 지역이다.
일본이
1931년의 만주사변으로 만주 직할통치 체제를 구축 한 이후
세계의 운명은 일본에 달렸었다.
일본의 다음 행보가
소련 침공인가,
아니면 중국 본토 침공인가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갈리는 상황이었다.
소련을 치면,
일본은 미국-영국 편이 되고,
심지어 나치 독일마저 미국-영국 편이 될 수도 있었다.
이미 1918년에서 1922년까지
볼셰비키 공산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시베리아 정권을 수립시킬 목적으로
반공 다국적군이 모인 적 있었다.
시베리아 다국적 협조여 다시 한 번!
이것이 1930년대 초중반의
챔벌린 같은 영국 정치인들,
그리고 존 F. 케네디의 아버지이자 이 시기 주영 미국대사를 지낸
조세프 케네디 같은 미국 정치인들의
계산속이었다.
영미 민주주의자들과
일본 군국주의자들,
독일 나치가 손을 잡고
볼세비키 공산주의자를 토벌하는 것이 그들의 로망이었다.
파시즘이나 군국주의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몽상했던
이 영미 민주주의자들을,
서양사에서는 [뮌헨 것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바로
1938년 9월 뮌헨에 모여
중부유럽의 민주주의 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던 만큼
1930년대 중반 소련의 최대 목표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소 평화체제]가 소련 최대의 외교 정책 목표였다.
1937년 7월,
소련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연해주-만주 지역에서
[일-소 평화체제]를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화약고를 제거해야만 되었다.
C. 두번째 배신: 연해주 동포 강제 추방-학살
일본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근사한 희생제물을 바쳐야 되었다.
누구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좋을까?
소련은 [일-소 평화체제]를 단단히 다지기 위해
두 개의 제물을 준비했다.
하나는 연해주 동포 20만 명.
다른 하나는 막강한 게릴라 부대였던 동북항일연군.
중일전쟁이 터지고 한 달이 지난 1937년 8월부터
소련의 스탈린은
연해주 동포 20만 명을 막무가내로 기차에 태워
겨울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패대기 쳤다.
스탈린은 우리 동포에게 왜 이런 흉측한 짓을 저질렀을까?
연해주 동포들의 맹렬한 항일 정신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소련과 일본 사이에 평화체제가 들어서든 말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군을 습격해서 괴롭히고야 말 열혈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일-소 평화체제]를 깨뜨리기 원하는,
걸어 다니는 화약고,
그 자체였다.
스탈린은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이 화약고를 제거한 것이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소련에 억류되어 있던 독립군 장군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으로 내동댕이쳐져 현지 극장 수위로 일하다 숨졌다.
그래도 홍범도는 행복한 편이었다.
1917년 공산 혁명시절부터,
[일본과 싸우는 소련]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열렬히 소련 공산당을 믿고 지지해 온 연해주 동포들은,
집도 이불도 옷도 가구도 식량도 없이
중앙아시아 황무지의 겨울 한 가운데에 버려졌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온 식구가 껴안고 자다가 얼어 죽었다.
한 줌의 식량을 얻기 위해 가녀린 처녀가 현지인에게 몸을 팔고 미쳐 죽었다.
한국인을 뜻하는 단어인 [까레이스키]는
더럽고 추접스런 짐승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D. 세번째 배신: 동북항일연군
[일-소 평화체제]를 위해
스탈린이 바친 또 하나의 희생제물은 동북항일연군이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세워 직할통치를 시작하자
중국인들이 주도하는 거센 게릴라 무장투쟁이 불붙었다.
공산당-국민당-군벌, 심지어 마적떼까지 항일투쟁에 나섰다.
따라서 온갖 색체, 온갖 이념의 다양한 게릴라 부대들이 등장했다.
1935년 말,
스탈린은 이 다양한 항일 게릴라 부대들을
[일-소 평화체제]를 단단히 다지기 위한 희생 제물로 준비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동북항일연군의 결성을 지시한 것이다.
동북항일연군은
표면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무력 부대였다.
그러나 내막은 스탈린이 직할 통치하는 부대였다.
스탈린은 동북항일연군을 이용해 일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니들이 우리를 침공하면
만주 전체가 게릴라 전쟁터가 되는 거야!"
일본은 스탈린의 메시지를 해독했다.
일본은 1937년 7월,
소련을 침공하는 대신에 중국 본토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이다.
이제 동북항일연군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일-소 평화체제]를 단단히 다지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스탈린은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지원을 줄여 말려죽이기 시작했다.
1940년 2월,
백두산 밑 길림성 정우현에서
중국인 게릴라 영웅 양정우가 일본군 기관총에 벌집이 되어 죽는 것을 끝으로
동북항일연군의 투쟁은 끝났다.
동북항일연군은
4년에 걸쳐 말라죽는 과정에서
수많은 만주동포들을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다.
우리 동포들은
스탈린이 동북항일연군을 말려 죽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목숨을 바쳐 동북항일연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이 완전히 말라죽은 다음에
스탈린은
그 잔존부대를 소련 안으로 불러들여 [소련군 제88 국제여단]으로 소속시켰다.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88여단 구두닦이]라고 부른다.
자기 구두를 닦은 것이 아니라,
소련군 장교의 구두를 닦았다.
이 구두닦이들의 두목이 김일성이다.
E. 네번째 배신: 민생단 사건
스탈린만
동포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도 한 몫 단단히 했다.
만주는
1905년 러일전쟁 이래
줄곧 일본의 안마당이었다.
일본은 만주군벌 장주오린( 張作霖 Zhang zuolin)을 내세워 간접 통치를 해 왔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이 되자
국민당 혁명세력이 곳곳에 등장해서
도저히 군벌을 통한 간접 통치로는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1928년에 만주 군벌을 암살해 버리고
1931년에는 괴뢰국을 세워서 직접 통치 체제로 들어섰다.
이를 만주사변이라 부른다.
만주사변은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이 같은 대중 의식 변화가 만들어 낸 최대의 수혜자는 중국 공산당이었다.
불과 1,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 만주 지구당에
중국인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만주 공산당의 몸집이 거대하게 부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 만주 공산당원의 80%는 조선 동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불과 5개월 전인 1931년 4월까지만 해도
만주 공산당의 당원 수는 1,190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중 8백여 명이 조선동포였던 것이다.
만주 공산당은 조선동포들에 의해 만들어져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 공산당에
중국인 신입 공산당원들이 밀려 들자 사정이 180도 바뀌었다.
중국인들에 눈에는
조선동포들이 아니꼽기 짝이 없는 존재로 비춰졌을 뿐이다.
중국인 특유의
사나운 중화 패권주의가 발동했다.
마침내 1932년 겨울부터
조선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무수히 많은 조선동포가
막무가내로 끌려가서 린치당하고 잔혹하게 죽어 나갔다.
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이다.
현재 중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희생자 숫자만도 오백 명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처형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 들의 숫자일 뿐이다.
일반 민초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수 천 명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민생단 사건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출신 중국 공산당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김일성이 그때 살아남은 조선족(=중국 국적) 중국공산당원이다.
F. 다섯번째 배신: 조선의용군
만주 지역 동포들의 피바다는
1950년 6·25 때에 완성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48년까지 3년 넘게
만주에서 진행된 중국 공산군(모택동)과 국민군(장개석) 사이의 국공내전에
수많은 조선동포 청년들이
공산군 측에 참여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단련된 노련한 군인으로 성장했다.
공산군과 국민당군 사이의 만주 싸움이 끝난 1949년부터
이들 중 5만 명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조선의용군이다.
이들이 바로 북한 인민군의 주력 부대가 되어,
6·25 남침의 선봉을 맡았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몰살당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에서 시작된 조선동포의 비극은,
스탈린의 첨병이 되어 동포에게 총을 겨누다
몰살당하는 운명으로 마감되었다.
6·25 군사작전은
그 세밀한 부분까지 소련의 군사고문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왜 최정예부대인 조선의용군을
낙동강 전선에서 버리는 카드로 사용했던 것일까?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였다.
조선의용군은 모택동 지지 세력이고,
그 지도자는 모택동 부대의 간부를 지낸 무정이었다.
무정은
당시 북한의 2인자였다.
조선의용군이 고스란히 보존되면
북한에서 중국의 입김이 세어지고
소련의 입지가 약화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5만명의 최정예 부대를 낙동강 전선에서 쓰레기처럼 태워버렸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난 1950년 12월에
무정을 숙청해 버렸다.
"퇴각할 때 살인을 저질렀다"라는 황당한 죄목이었다.
편집자 주
이 글에서 언급된 역사적 사실과 프레임들은
현재 우리 초-중-고 국사(역사)교과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전체주의 부역-깡통진보] 엉터리 국사학자들이 만든 국사(역사)교과서에는
정반대의 거짓 프레임이 세워져 있고,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이런 거짓 프레임을 우리 아이들 머리 속에 주입-쇄뇌시키고 있다.
현 정부는
이런 본질적 문제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국사(역시)교육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전체주의 부역자들에게 단물만 제공하는 꼴일 뿐이다.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주필.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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