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있기까지 조민환 프로듀서가 기여한 몫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1990년 영화기획정보센터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충무로에 입문한 그는 이화예술극장, 기획시대로 자리를 옮기며 홍보일을 해왔고, 95년 <꼬리치는 남자>를 시작으로 프로듀서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뒤, 영화스승인 차승재를 만나 싸이더스의 전신 우노필름에 들어간 그는 <비트> <태양은 없다> <8월의 크리스마스> <플란다스의 개> <시월애> <무사> 등 선 굵고 개성 넘치는 작품에서 조율사 역할을 했다.
지난 2년 동안 <무사> 프로젝트 하나에 매달렸던 그에게 2002년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그에게 ‘핵우산’ 노릇을 해준 차승재 대표와 싸이더스를 떠나 자신만의 집을 지어 분가했기 때문이다. 그가 앞으로 살게 될 새 집의 이름은 NABI픽처스. Nature, Art, Beauty, Intelligence의 머리글자를 딴 회사명은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자연과 예술, 아름다움과 지성을 동시에 추구해야할 그에게 힘을 실어줄 인물이 있다면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에서 한몸처럼 지내온 김성수 감독이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두명의 영화인이 꾸려나갈 새 영화사의 비전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6년 동안 일했던 싸이더스를 떠나 독립하게 됐다.
나는 돈보다는 명예, 즉 이름이 남는 것을 좋아하는 인간형인 것 같다. 영화기획정보센터 다닐 때 1년에 5편, 많게는 7∼8편을 홍보했는데 남는 게 없더라. 당시는 홍보담당의 이름이 크레디트에 찍히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기획시대에서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성공시키고 난 뒤 유인택 대표가 마케팅팀에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겠다고 하더라. 나는 막내도 좋으니 제작부에 보내달라고 했다. 똑같이 고생했는데 왜 내 이름은 마지막에야 올라가는 거냐, 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꼬리치는 남자>의 제작 총책임을 맡아보라고 했다. 이번 독립도 비슷하다. 승재 형에게 섭섭한 점이 있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 영화할 때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 내 영화를 선택하고 기획하고 싶다.
차승재 대표가 섭섭한 마음을 보이진 않았나.
잘 이해해줬다. 차 대표는 내 스승이자 친정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과연 내가 차승재라는 핵우산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래서 그 우산은 계속 이용할 생각이다. (웃음) 나는 이번 독립이 시집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출가외인이라지만, 딸들이 아쉬울 때면 친정에 가서 손벌리는 것처럼, 나도 비상시에는 싸이더스에 가서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회사의 지분은 어떻게 구성됐나.
자본금 15억원 중 나와 김성수 감독이 각각 25%, 싸이더스 30%, CJ엔터테인먼트 20%로 이뤄졌다. CJ는 <무사> 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데 대한 고마움 때문에 먼저 투자제안을 했다. 배급권도 일단 CJ에 우선순위를 줄 것이다. 이들과 좋은 영화를 만들고 흥행수익도 지분율대로 나누고 싶다. 재투자분을 빼곤 모두 스탭과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이후 일정은.
1월10일 전후해 고사를 지내고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간다.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세편 정도다. 우선 김성수 감독이 <리니지>를 끝내고 돌아오는 대로 김 감독, <무사> 연출부 출신인 홍성훈, 필감성 감독이 각각 30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내걸 계획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 감독의 신작도 있다. 일본만화를 골격으로 삼은 SF멜로가 될 전망인데, 약간 바뀔 가능성도 있다. <무사> 조감독 조동오 감독의 데뷔작 <게토>도 준비한다. SF액션물인데, 100년 뒤 혜성충돌로 사막이 돼버린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사막이 주배경이다 보니 중국에서 올 로케이션할 계획이다. 단편 프로젝트는 여름이 지나야 시작될 것이고, 나머지 두편은 연말 또는 내년에 들어갈 것 같다.
이들 작품에 모두 프로듀서로 참여할 계획인가.
되도록이면 현장 프로듀서 역할도 계속 해나갈 것이다. 최정화 프로듀서가 아직 숙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현장의 재미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편 프로젝트에서는 김성수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을 계획이다.
김성수 감독의 역할은 무엇인가.
성수 형에게 회사의 공동대표를 맡으라고 했는데 끝까지 고사하더라. 그래서 감독으로 명함을 새기기로 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공동대표다. 그리고 프로듀서뿐 아니라 <리니지>에서 배워온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바탕으로 테크니컬 슈퍼바이저 역할도 할 것이다.
싸이더스에서 독립해 <무사>의 김성수 감독과 NABI픽처스 차린 조민환 대표 (2)
SF 무기로 상투성을 뒤집어버릴 것
초기 일정을 듣자하니 무언가 확고한 노선이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표현의 새로움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 새롭고 무엇이 다른가’라는 화두와 끝없
이 싸울 것이다. SF 장르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선택이다. 겁나긴 하지만 상투성을 뒤집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계획이다.
<무사> <비트> <태양은 없다> 식의 남성영화 취향도 여전할 것 같다.
사실이다. 남성적인 것을 동경하는 것은 내가 범생이였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계에 들어오
기 전까지 나는 전형, 관습, 도덕적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나를 구원한 것은 어릴
때는 무협지, 만화, 책이었고 20대 들어선 파격이 가능한 시였다. 대리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늘 <유성호접검> 같은 무협영화를 얘기하곤 하는데 그런 계획은 없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나는 꿈을 좇는 직업을 택했다. 꿈의 원형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
나. 무와 협, 그리고 남성이 나오는 무협지는 내가 꿈꿨던 세계를 재현해줬다. 만화도 마찬
가지다. 어린 시절 봤던 <바벨2세> 같은 만화는 그리스 신화의 캐릭터를 SF적 상상력으로
구현해줬다. 꿈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신화에 항상 관심을 두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단군
신화, 홍길동전 이런 것들은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이야기다.
남성영화, 무협, SF라…. 이거 너무 팍팍한 것 같다.
사랑도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를 상당히 좋아한다. 그런 마음이 보이는 사랑이
야기는 참 괜찮다.
<8월…>에 이어 허진호 감독과 다시 멜로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다.
얼마전 허 감독을 만났는데, 무협영화를 한번 만들어보라고 권했다.(웃음) 농담이 아니라, 허
감독이 무협을 다루면 그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쓸쓸함이나 빛나는 순간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나. 장르는 달라도 결국 허 감독의 영화가 나올 것이다. 그런 영화는 정말 개인
적으로 궁금하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영화를 지배한 트렌드를 무시하고 나갈 것인가.
그런 점은 고민 않기로 했다. 조폭 신드롬이 올해와 내년에도 계속 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
리고 만약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 같은 시나리오가 들어온다면, 건달들이 주인공이지만
난 그 영화를 만들 것이다. 문제는 그 영화가 나에게 새로움과 즐거움을 주느냐다. 도전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만을 만든다는 원칙은 변치 않을 것이다.
<무사>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흥행에 다소 실패해 실망하지 않았나.
흥행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해외 판권 일부를 포함하면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 나머지 해
외 판권액은 이익분이다. 물론 기대만큼 부응하지 못해 차 대표와 싸이더스, CJ에 미안하긴
하다. 감독과 프로듀서의 책임이 가장 크다. 내 책임은 러닝타임을 계산 못했다는 것과 배급
시기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 제작비와 거기에 따른 제작기간을 잘못 예측했다는 점 등이다.
작품 내용면에서 실패한 점은 무엇이라고 평가하나.
모든 캐릭터에 집중하기보다 최정과 여솔, 두명에게 초점을 명확히 맞춰야 했다. 액션에선
후회없다. 어느 나라 어느 팀이 찍어도 그보다 잘 찍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사>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총평하자면, <무사>를 통해 개인적으로나 싸이더스로서나 잃은 것은 1%이고 얻은 것이
99%라고 본다. 일단 중국이라는 곳을 잘 알게 됐고, 블록버스터에 대한 접근법을 알게 됐으
며,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철저히 하게 됐다. 또 세계시장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개
인적으로는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것 같다.
어찌보면 <무사>는 충무로의 비합리적인 제작 관행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영화인 듯싶은데.
물론 개선할 수 있는 점도 있지만, 영화의 규모가 크면 어느 정도는 그런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현장상황과 안일하게 타협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무사>에 대
한 좋은 평가가 있다면, 그 이면에는 스탭들이 흘린 땀과 피눈물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
화 스탭들의 열정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또 그것이 한국영화가 볼 만하다는 평가를 불러일
으키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스탭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진 않다. 지금도 가끔 당시 스탭들에게 “너희 당장 <무사> 또 찍는다고 하면 어떡할
래?”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기꺼이”라고 잘라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한국영
화의 현 수준이다. 우리가 고생을 감내하지 못하면 그나마도 찍지 못한다는 얘기다. CG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려는 것도 고통을 덜자는 의지의 발로이긴 하지만, <무사>의 경우엔 CG
도 방법이 없다. 아무튼 누군가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제작자 조민환의 세계는 무엇일 것 같나.
만약 내게 프로듀서관을 물어본다면,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영화’라고 답할
것이다. 인간인 스탭들이 배우라는 인간을 찍고 인간인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이 단순한 진
리를 깨닫는 데 10년 정도 걸렸다. 결국 내 스탭을 아끼고 배우를 존중하고 관객과 끊임없
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