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얼마 안남았다. 암울했던 그 시절,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넘들이 했던 말이 불현듯 생각난다.
"아그야 넌 그래도 월드컵은 나가서 보겠다?"
"예 그렇슴다!"
"시꺼 임마 조용히 안해"
"예 알겠슴다!"
"알겠슴다? 줄임말이냐?"
"예...알겠습니다..."
내 뒤로, 월드컵도 안에서(?) 봐야 하는 쫄병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걸로 스스로를 위로하
던 그 날이 얼마 전 일인 것 같은데 어느덧 예비군 훈련을 받느니 마느니 하고 있는 것이
다. 후후...
나의 자대 생활은 처음 배치받았을 때 정보장교의 꼬임에 넘어가면서 시작되었다.
"너는 앞으로 2급비밀 씨크리트 이하를 열람할 수 있으며 3급비밀 컨피덴샬과 대외비를 생
산할 수 있고..."
그러나 이넘이 그럴듯하게 구라쳤던 '비문계원' 업무의 실상은 달랐다.
보안성 판단 업무--->이면지 재활용 도장찍어서 각 부서로 나르기
예고문 도래 비문 파기 업무---->버리는 종이 세절기로 갈고 땅에 파묻기
비문소각장 유지보수 업무------>쓰레기장 가서 재활용품 골라내기
전장정보 수집 업무------->한시간마다 온도, 강우량, 풍향 이런거 확인하기
일일부대보안 확인업무--------->질문이 나열되어 있는 노란색 장부에 동그라미 치기
뭐 이런 거엿던 거다. 그중에서도 젤 짜증났던 건 넘의 표현으로 '유선통신 수발 업무' 였다.
한마디로 전화 받는 건데 원래 군 간부라는 인간들 중 상당수가(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절라 싸가지가 없다. 전화걸자
마자 누구라고 밝히기는커녕 육두문자부터 나오는 건 보통이고 "나 찾는다고? 이 XX, 없다 그래" 라고
하는데 "있는 거 다 알아 XXX야!" 이런 식이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던 거다.
아! 앞으로 2년동안 매일 아침을 전화기 컴퓨터 닦는 걸로 시작해야 하다니....그러던 중 나
의 군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뭔 일인지 사람이 부족하다고 사무
병도 다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머리 안쓰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 이 참에 나의 삽질
실력을 보여주마....
그렇게 다짐하고 나자 삽이 너무나 친근해 보였다. 성질에 안맞게 걸레질만 해야 했던 두 팔을 걷어올리고 작업을 시작하자 어느새 삽과 나는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삽을 매개로 하여 작업물은 나에 의해 변화되었고,
이제 삽과 하나가 된 나와, 작업물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라! 모두들 나를
봐라 내가 바로 삽질의 제왕이다!
그렇게 신들린 듯 삽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대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재는 어디 있는 넘이야?"
"우리부대 보안담당입니다"
"근데 삽질은 어디서 해 본 거 같은데?"
"촌놈이다 보니 밖에서 해 본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삽이 젓가락이 될 때까지 땅을 파야 제대한다는 예비군 교장관리 중대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바로 전입 이후 첫 프로젝트(?)가 내게 떨어졌다. 다음 주에 사
단장이 헬기 타고 오는데 하늘에서 볼 수 있게 '충성' 이라는 두 글자를 나무를 심어서 대빵
크게 만들 수 있겠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겨를이 없어 나는 할수 있다고 즉각 말해버리
고 말았다.
니들은 남미 어디에 뱅기로 내려다 봐야 보이는 거대한 그림이 땅에 그려져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약간 복잡한 산수가 필요하기 때문에 7대 불가사의인지 하는 그걸 산등
성이에 만들라는 거다.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걸 막판에 다른 부대 병사까지 동원하
는 쇼를 벌여가며 결국 다 해내고야 말았다. 우 쒸 이게 전화받는 거 보다 훨 잼나는데!
그러나 새로 옮긴 부대의 어려움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선배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말 좀 들으십쇼, 자꾸 그러시면 제가 혼납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예비군 아저씨들, 말도 지지리 안 들어서 쪼인트 까이게 만들었던 인간들
이다.
울 학교 이번에 학기에 제대 일년 안된 사람들은 훈련이 없다고 한다. 이런... 예비군 조교 후배들에
게 나의 무서움을 보여주려고 했더니 아쉽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