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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 :1~10, 말씀:하용조목사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누가 복음에서는 3가지로 비유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둘째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드라크마에 대한 비유) 셋째는,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비유>는 하나님은 아주 작은 것을 잃어버려도 <그 가치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찾아 나섭니다. 그 아주 작은 것이 바로 <나>인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의 가치>를 한사람 한사람에게 아주 <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리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비방거리>가 생겼습니다.
누가복음15장 1~3절을 보십시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였습니다. 그러나 바라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이 죄인들을 맞아들여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눅15:1~3)
예수님이 죄인들과 바리새인들과 식사를 하여, 바리새파 사람들이 웅성거렸어요. 그들의 얘기로는 예수님이 "그들과 식사하면 안된다"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도 기독교가 들어왔던 초창기에는 이런 일들이 많이 벌어 졌어요. 그 당시 일반 천민계급으로 <백정의 신분>은 최하류의 [쌍놈]으로, 같이 자리에 앉을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양반이 소중하기도 하지만, 백정도 귀한 존재이므로 "어쩔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양반이 거세게 항의하여 "백정들을 교회 나오지 말게 하라"고 요구했어요.
선교사들이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하니까, 양반들이 교회를 떠났어요.
양반들은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홀로 외로워져서 <다시 들어오겠다>고 하면서, 조건을 붙였어요. "이제는 자리를 구별해 달라"고 했어요.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이, 태어나면서 부터 신분계급에 따른 <죄악의 문화>가 오래동안 계속되어 왔었지요.
예수님의 첫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4-6절을 보세요. "너희중 누가 100 마리의 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고 하자. 그러면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그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양을 찾게 되면 기뻐하며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아 기뻐했습니다.(눅15:4~6)
100 마리의 양이 있는데, 그 중의 말썽꾸러기 양이 집을 나갔어요. 주인은 99마리의 양을 우리에 두고, 1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들을 건너 숲속으로 찾아 나서서 온 산천을 헤메었어요. 그래서 "어렵게 양을 찾고, 돌아와서 잔치를 벌렸다"는 예화입니다.
이런 얘기는 약간 드라마틱하게 각색을 하여,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를 들려주면, 실감나고 정말 재미 있어요.
4절을 보면, <찾을 때까지>라는 문장이 나와요. 그것은 못찾으면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경제적인 가치보다는 "양과 주인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버리더라도, <한 마리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까짓 한 마리쯤 없어져도*****, 나에게는 99마리가 있는데*****."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여기에서 양 한마리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그것은 그 가치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럼, 주인의 태도를 보십시오. 1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내일 날이 밝으면, 찾자>는 태도가 아닙니다. 없어진 것을 아는 순간에, 즉시 찾아 나섰어요.
한국은 어디를 가나 교회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마음>은 교회가 많아도 잃어버린 한명의 영혼을 찾아 나섭니다.
일본에 가면, 교회가 보이지 않아요. 일본에는 절이 많아요.
제가 동경에서 7개월을 살면서 발견한 것은 교회다운 교회가 몇개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려요.
제가 보기에는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일본>인 거예요. 그 잃어버린 양을 찾는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7절에 결론의 말씀이 나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없는 의인 99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명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눅15:7)
예수님은 의인 아흔 아홉명과 죄인 한명을 똑같이 귀하게 여겼습니다. <참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양을 찾기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그것이<하나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비유로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어떤 여자가 열개의 드라크마 동전을 가지고 있다가 그중 하나를 잃어 버렸다고 하자.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동전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리고 동전을 찾게 되면,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내가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눅15:8~10)
어떤 여자가 동전을 잃어 버렸어요. 10개의 드라크마 동전을 가지고 있다가 그중에 하나를 잃어 버렸어요.
1드라크마는 로마의 1데나리온과 같이 품꾼의 하루 품삯정도입니다. 이런 동전은 경제적가치가 커서가 아니라, 자기가 이끼던 동전이기 때문에 끝까지 찾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 집의 구조는 대개 창이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찾으려면 등불을 켜고, 빗자루로 샅샅이 쓸어야 찾을수 있어요. 따라서 동전을 찾는 여인은 무척 애를 썼을 것입니다.
등불을 켜서 부지런히 찾는 모습이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자기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곧<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나서, 이웃들과 기뻐하는 여인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의 동전은 바로 나를 찾은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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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48.<돌아온 탕자의 비유>눅15:11~32, 말씀:하용조목사님
예수님은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잃어버린 양>의비유와
둘째는,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그리고
셋째로, 오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말씀했어요.
그것은 <아주 적은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장11~12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아버지 재산중에서 제가 받을 몫을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두아들에게 살림을 나눠 주었다“(눅15:11~12)
여기를 보면, 둘째 아들이 반항적인 것 같아요.
<유산>을 먼저 나누어 달라고 해요.
<유산>은 아버지가 죽어야 주는것입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유산을 나눠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탕자의 원칙> 첫번째는 탕자가 자기 몫을 챙겨요.
<내몫>을 챙기는 사람은 탕자예요.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가정하여, <내 몫을 내 놓으라>는 겁니다.
그럴 때에 <아들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나에게 죽어서 주면 뭣합니까?"
"자살한다"고 협박하고, "집을 나간다"고 으름장을 놓고, 별소리를 다 했을 꺼예요.
그래서 제가 추측하는데 아버지는 너무나 괴로워서 “아들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재산을 주기로 결정을 했을 꺼예요.
그럼, 보통 아버지들은 어땠을까요?
100명의 아버지가 있어도, 다 주지 않을 꺼예요.
여러분? 자식을 망하게 하려면, 돈을 주세요. 그럼, 금방 망해요.
돈을 쓸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식에게 돈을 주면, 자식을 망하게 만듭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예요. 오히려 자식을 버리게 만들어요.
13절을 보세요.
“며칠 뒤, 작은 아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챙겨서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러고는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했다.(눅15:13)
<탕자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며칠 뒤에 아들은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했을 것이고, 그렇게 그는 떠났어요.
탕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첫째, <자기 몫을 챙기는 사람> 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챙겨 아버지 없는 곳으로 떠나는사람 >입니다.
셋째, <간섭받지 않는 곳으로 자유를 찾아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어른의 특기는 뭐예요?***** 잔소리 하는 거예요
집에도 시어머니가 꼭 있어야 해요. 시어머니가 없으면 행복할 것 같아도 그게 아니예요.
회사에도 시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 꼭 필요 해요.***** 그런 사람이 챙길 것은 챙겨야, 회사가 돌아가요.
여러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무슨 관계이지요?*****<상처관계>예요.
그러나 손자와 할아버지의 관계는 무슨 관계예요?*******<사랑관계>예요.
자세히 보면, 할아버지에게 대드는 손자는 없어요.
어버지와 엄마한테는 <대드는 관계>이지만, 할아버지는 <사랑관계>로 얽혀 있어요.
사실, 노인이 집안에 있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예요.
이 세상에 젊은 피는 필요해요. 그렇다고 386만 있으면 안되요.
그러니까 <노인>과 <젊은이> 모두 다 필요해요.
그것은 나이드신 경륜있는 사람들이 무게 중심을 잡아 줘야 하니까요.
온누리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나이드신 어른들이 있으면 더욱 좋아요.
<탕자>가 되는 이유는 자유를 찾기 위해서***** 간섭 받지 않으려고*****
그런데 돈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어버지의 집이 생각이 나요.
탕자에게는 언제나 IMF가 올까요? ***** 돈이 떨어지면, 반드시 IMF와 같은 어려운 상황이 벌어져요.
14~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나라 전역에 심한 흉년이 들어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 나라 사람에게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 사람은 그를 들판으로 내보내 돼지를 치게 했다.(눅15:14~15)
IMF가 오니까 일자리가 없어 졌어요.
그래서 탕자는 일자리를 찾다가 어디까지 갔어요?*****들판에 나가 돼지치는 <일>을 얻은 거예요.
그런데 <일>은 시키면서도 밥은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돼지가 먹는 주염나무 열매를 먹고 싶을 정도로 비참해 졌어요.
요즘 경제의 최대 현안은 <젊은이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용직>이 생긴 거예요.
<일용직>은 임시직으로 정상적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고, <임시로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경제가 살아나면, 일용직도 자연히 없어져요.
16~17절을 보세요.
“그는 돼지가 먹은 쥐엄나무 열매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들어서 말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부해서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 구나(눅 15:16~17)
여기에 나오는 <그제사>라는 단어에 주의하세요.
<탕자>는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게 될 상황이니까, <그 제사> 제 정신이 들은 거예요.
여기서 “제 정신이 들었다”는 말은 그 때에 <철이 났다>는 겁니다.
사람이 철이 나면, 생각이 바뀝니다.
아직도 철이 나지 않아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에 나오는 <탕자>도 제 정신이 들어서 생각이 바뀐 거예요.
내 아버지 집에 가면, 양식이 풍부 할 텐데***** 그래서 자꾸 아버지 집이 생각이 나요.
성도 여러분!
자기 자녀에게 아버지가 생각나도록 <추억 꺼리>를 만들어 주세요.
자녀가 가장 어려웠을 때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 해요.
그럴려면 자녀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합니까?***** 아이에게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잘 대해주라>는 말은 "돈을 많이 주라"는 얘기가 아니고, <자녀에게 사랑을 주라>는 말입니다.
아들과 다툼이 벌어졌을 때, 사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 해요?
제 경우에는 절대로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럼, 아버지와 아들이 충돌 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
***** 그것은 <사랑>을 주어야 해결되요!
이 탕자도 자기가 어려웠을 때에 아버지 집을 생각 했어요.
그래도 탕자에게는 <돌아올 집이 있었다>는 거예요.
18~1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말해야 겠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그저 <하나의 일꾼>으로나 삼아 주십시오.(눅15:18~19)
<탕자>는 어디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것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회개>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드디어 <탕자>가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제사 <자기의 존재>를 파악한 거지요.
이것을 <자기주제를 파악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가난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제자리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신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0절~21절을 보십시오.
그러고서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그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아들에게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눅15:20~21)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갔는데,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금방 알아 봤습니다.
이게 아버지예요.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 한 것을 기억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기 자식이 잘못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는 사람도 있어요.
<사랑>은 자식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식의 잘못된 점만 기억해요.
그러니까 화가나고, 신경질이 나지요.
아버지 여러분들?
그냥 속아 주세요. 그것이 아들을 구원해 주는 방법이예요.
자식도 염치없는 줄은 본인이 더 잘 알아요.
여기서 필요한것은 <사랑>이예요. 아버지의 따뜻한 <인정>이예요.
그리고 어른들이 <할 일>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주는 것이 <사랑>이예요.
하나님이 내 과거를 일일이 따졌으면, 내가 여기에 있겠어요?
아버지의 집은 대문을 잠그지 않아요.
그냥 그리운 아버지! 보고 싶은 아버지! 기대보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계세요.
내가 미치광이가 되어도, 그래도 말없이 받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진정한 아버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에게 혹시 상처가 있다면, 지금 그냥 받아 주세요.
모든 노여움을 모두 다 풀어 버리세요.
아버지가 먼저 용서해 주세요.
그래야 가정이 회복됩니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먼저 발견했어요.
여기서 아버지가 먼저 달려 갔을까요? 아니면, 아들이 먼저 달려 갔을까요?*****그 대답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은 염치가 없어서 꼼짝 못하고 서 있어요.
탕자가 "회개를 했는지?" 아버지는 몰라요.
그냥 아들이 돌아온 사실만 알고 있어요.
22절~23절을 보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종에게 말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 이 아이에게 입혀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라.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잔치를 벌이고 즐기라.(눅15:20~23)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껴안아 주었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냄새가 나는 아들인데도 따지지 않고 받아 드렸습니다.
여기서 "좋은 옷을 입혀라“는 말은 <미리 준비했다>는 말입니다.
또 손가락지도 미리 준비 했어요.***** 이게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살찐 송아지로 잔치를 벌리는 과정을 보십시오.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다. 이 아들을 잃었다가 이제 찾았다. 이렇게 그들은 잔치를 열기 시작했다(눅 15:24)
여기서 아버지가 하는 말은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이예요.
그런데 천국 안에서도 <아버지 집>에 [진짜 탕자]가 숨어 있어요.
그것은 <집안의 탕자>입니다.
이 얘기는 내일 하겠어요.
내일 만나요 .
49.<집안의 탕자>눅15:25~32, 말씀: 하용조 목사님
기도는 <축복>이고, <능력>이고, <변화>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고, 능력을 주시고, 변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돌아온 탕자]가 <집 밖에 있는 탕자>라면, 또 한 사람의 탕자가 있습니다. 그는 <집 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밖에 있는 탕자>는 아버지 재산을 받아서 그 돈을 모두 다 낭비하고 모두 다 없어지니까, 그 때 <아버지의 집>이 생각나서,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돌아온 탕자]가 되었습니다.
<돈>은 잘쓰면 좋고, 잘못쓰면 <독>이 되요. <돈>은 잘 쓰면 축복일 수도 있고, 잘 못 쓰면 때로는 저주가 되기도 해요.
<돈>은 쓰는 능력이 없는 자에게 돈이 있으면, 나쁜 방향으로 쓰여 져요. 그러나 <돈>은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돈은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않게 우리에게 주옵소서" ....... 돈이 너무 많으면 교만해 지고, 돈이 너무 없으면 남이 없신 여길까 두렵습니다. 돈의 신앙적 철학과 가치관을 갖는 것은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오늘은 첫째 아들인 <집안의 탕자>를 살펴 보겠습니다.
누가 복음 15장 25~27절을 읽으십시오. "그런데 큰 아들이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때 음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하인하나를 불러 무슨일인지 물어보았다. 하인이 대답 했다. 동생이 왔습니다. 동생이 건강하게 무사히 돌아와서 주인 어른께서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눅 15: 25~27)
여기를 보면, 큰 아들은 책임감이 강하지만, 문제가 좀 있어요? 그것은 "얼굴에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일을 아무리 잘해도 기쁨과 흥분이 없다면, 그는 <탕자>가 될 소지가 있어요.
일을 할 때에는 기쁨으로 자원해서 일하는 사람과 의무감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른 거예요.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기쁘게 생각하고, <일>에 임해야 합니다.
둘째, 불평을 하면서 일하는 사람도 <탕자>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첫째 아들은 <일>을 의무감에서 일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와 달랐어요. 큰 아들은 자기 동생이 집을 나간 후, 돈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사실에 형의 입장에서 분노를 느꼈어요.
28~29절을 보십시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를 달랬다. 그러자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노릇하고, 무슨 말씀이든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며 염소새끼 한마리도 주시지 않았습니다.(눅15:28~29)
여기서 큰 아들의 말이 맞을까요? 틀렸을까요?*****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 할수도 있지요. 큰 아들은 "아버지가 하라"는 것은 모두 다 순종했어요.
"나는 놀고 싶을 때 놀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는 잔칫상 한번 차려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동생은 돈을 낭비하고, 아버지 망신시키고 돌아 왔는데도 왠 잔치입니까? " 라는 항의예요.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큰 아들은 기쁨을 잃었어요.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장남>이란 사실을 망각한 거예요.
큰 아들은 아버지의 <후계자>, 즉 <상속자>란 사실을 망각했어요. 큰 아들은 아버지 재산이 다 <자기 것>이란 사실을 망각한 거예요. 그런데, 제 동생이 오랜만에 돌아와 잔치한번 베풀어준 것에 불만을 품은 거지요.
둘째, 동생에 대한 <경쟁의식>과 <피해의식>을 가졌어요.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남과 비교하면 끝없이 불행해 져요. 첫째 아들도 이만하면 좋은 아들이예요.
그러나 지금은 동생과 비교하니까, <경쟁의식>이 싹튼 거지요. 그러니까 동생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고, 동생을 <경쟁상대>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지요. 상대편을 경쟁상대로 생각하면 미워지고, 사랑스럽지 않아요.
성도여러분! 우리들은 서로 <경쟁자>가 아니고, <동역자>예요. 우리가 경쟁자가 되면, 남을 끌어 내리고, 공격적이고, 비판하게 되고, 잘못된 것만 골라서 보게 되지요.
그리고 별것도 아닌 것을 <충고>라고 하게 되지요. 남에게 <충고>를 하게 되면, 그 얼굴이 사나워지고, 공격적이 되어, 무섭게 변해요. <집안에 있는 탕자>인 큰 아들은 <장남>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거예요.
그럼, <탕자가 되는 비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당신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했어요. 그러니까 큰 아들은 <아들의 신분>에서 <종의 신분>으로 자신이 스스로 내려 앉은 거지요.
첫째, 큰아들은 상속자인데, 그걸 망각한 거지요. 둘째, 아버지 재산이 다 자기 것인데 그것도 망각했어요. 셋째, 탕자가 자기 동생이란 사실도 망각했어요.
2. 기쁨을 잊어 버렸어요. 그것은 <장남>이라는사실을 잊어 버리니까, <기쁨>이 자연히 없어진 것이지요.
3. 경쟁의식이 생겨서 <동생>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다 보니까, <경쟁의식>이 생긴 거지요.
30~31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창녀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것이 다 네 것이다 (눅15:30~31)
<내 기쁨>이 <네 기쁨>입니다. 큰 아들은 <내기쁨>을 도덕질 당한 것으로 생각하니까, 불평이 나오는 거예요.
<돈>은 돈이라고 다 같은 돈이 아니예요. <돈>은 남을 주고도 기분좋은 감동있는 돈이 있어요. <돈>은 잘쓰면 교인들끼리 결속기 생기지만, 돈을 쓰는데 이상하면 의심이 되고 문제가 생겨요.
<집 안의 탕자>는 아버지 돈이 <내돈>인데, 그 돈을 마치 빼앗긴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불행해진 거예요.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그를 잃었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잔치를 벌리며 기뻐하는 것이 당연하다." (눅 15:30)
여기서 또 발견하는 것이 있어요. <집안의 탕자>는 동생이 <자기동생>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집안의 탕자>는 동생이 <자기동생>이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주 유치한 어린 아이처럼, <내 사랑을 모두 다 가져 간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린 아기가 1~5살로 아주 어렸을 때에 <자기동생>이 태어나면, 첫째가 둘째를 시기해요. 이유없이 시기하고, 심술 부리다가 심하면, <해꼬지> 해요.
그것은 <내 것을 빼앗아 간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혀서 그래요. 엄마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동생을 때리고, 심지어는 눈을 찌르기도 해요.
이게 웃을 일이 아니예요.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흔히 벌어져요. 새 신자가 오면, 겉으로는 반가워하지만, 속으로는 <내 자리를 뺏긴다>고 싫어 해요.
그래서 말없이 경계해요. 새 교인이 오면, 당연히 먼저 목사님을 만나도록 주선해 주어야 해요.
집나간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에게 <큰 아들>이 옷을 새로 마련해 주면, 그 아버지는 그 <고운 옷>을 입을까요? ********안 입어요.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을 걱정하느라>고 옷에는 관심도 없어요. "지금쯤, 그 놈은 밥은 먹고 있는지?"***** 아버지는 항상 작은 아들놈 걱정만 하고 지내요.
"집나간 아들 (= 집 밖의 탕자)을 생각하느라" 아버지는 걱정하느라 기쁨이 없어요. 좋은 것을 먹어도***, 좋은 것을 보아도***, 더욱 더 <집나간 작은 아들>이 생각이 나요.
여기서 큰 아들( = 집안의 탕자)이 해야 할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와 똑같은 심정으로 동생을 사랑하고, 축복해 주어야 해요.
그럼, 둘째 아들( = 집밖의 탕자)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이예요? 그것은 정신을 차리고, 빨리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은 너무나 많은 축복을 받아서 잘 살고 있어요. 동남 아시아나 서아프리카 지역은 상상할수 없는 <영적전쟁>으로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요. 에이즈와 마약으로 버림받은 영혼이 너무도 많아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큰 아들(집 안에 있는 탕자)이라면,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향하여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해요.
오늘 말씀드린 <두 탕자>중에서 누가 더 심각한 탕자일까요? 저는 <집 밖의 탕자 = 돌아온 탕자 = 작은 아들>이 아니고, <집 안의 탕자 = 큰 아들>이라고 생각해요.
<집안의 탕자>가 바로 [우리] 예요. 그런 <문제아>가 바로 [우리]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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