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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 葵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17일 일요일]
『대동야승』 제13권
[기묘록속집 (己卯錄續集)] 신원소장(伸冤疏章)
가정 을사 춘 태학생 등 상 인종 소(嘉靖乙巳春太學生等上仁宗疏)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비의 풍습이 국가에 대하여 관계되는 것이 중대합니다. 선비의 풍습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에 따라서 국가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이 판단됩니다. 선비의 풍습이 바르면 향하여 나가는 것이 정하여져서 국가가 다스려지고, 선비의 풍습이 바르지 못하면 향하여 나가는 것이 정하여지지 않아서 국가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인군된 이가 그 다스려지는 방도를 생각하고 그 어지러워지는 원인을 막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방법은 또한 인군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혀 향하여 나갈 길을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런 뒤에라야 아래에 있는 사람이 또한 보고 느끼는 것이 있어서 나갈 바를 알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세상이 타락되고 풍속이 더러워져서 인정이 범상한 것을 좇고 시속을 따라서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당시 사람들이 눈으로 본 바와 귀로 들은 것을 활용하여 나아가고 물러가게 함으로써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힌 연후에야 사람들이 또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실상을 알아서 의지하여 돌아갈 곳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선비의 풍습은 안일에 빠진 지가 오랩니다. 그 안일에 빠진 원인을 궁구하여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걸의 재주로써 조광조(趙光祖)는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현군과 권신이 만나는 때를 당하여 우리 선왕이 다스림을 구하는 성의를 보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바치어 지치(至治)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는데, 국가가 불행하여 간사한 무리가 화를 얽어서 임금을 사랑하는 신하와 나라를 근심하는 선비로 하여금 모두 뜻만 품고 길이 하직하여 구천(九泉)에서 한을 품고 있게 하였으니, 뜻이 있는 선비로 누가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두드리고 눈물을 흘리다가 피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광조의 학문의 바름은 그 전수받은 유래가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이 있어서 김굉필(金宏弼)에게 수업하였는데, 굉필은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우고 종직의 학문은 그 아버지 사예(司藝) 신(臣) 숙자(叔滋)에게서 전하여 받았고, 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 길재(吉再)에게서 전하였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얻었는데, 정몽주의 학문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가 되었으니, 학문의 연원이 이와 같습니다. 그 평소에 사람 대접하기를 온화한 빛으로써 하고, 사물을 대하기를 정성으로써 하고, 부모를 섬기는 데는 그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있어서는 우애를 극진히 하였고, 궁리하는 것이 더욱 정밀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욱 독실하여서 큰 근본이 이미 서자, 공리(功利)의 설이 흔들리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을 슬퍼하고 옛것을 사모하며, 왕도를 귀히 여기고 패도를 천히 여기는 공평하고 바른 마음과 방정한 행실이 금석(金石)보다 불변하여 신명(神明)으로 가히 바로잡을 수 있었으니, 그 몸소 행하는 바른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선왕께 우대를 받자, 선왕의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에 감격하고, 선왕의 어진 이를 대접하는 성의를 기뻐하여 요순 시대의 고요(皐陶)ㆍ직(稷)ㆍ설(契)과 같은 현신의 사업을 자신의 임무로 알고 이제(二帝)ㆍ삼왕(三王)의 다스림을 그 임금께 희구해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한갓 그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그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한갓 나라가 있는 것만 알지 집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무릇 옛적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정사가 오늘에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뢰지 않은 것이 없고, 무릇 오늘날의 어진 사람 좋은 선비로서, 때에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거하여 쓰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낳은 지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갔으므로 처음 배우는 자로 하여금 배우게 하였고, 옛적에 삼물(三物)ㆍ팔형(八刑)의 제도가 있었으므로,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의 법으로 행하게 하였고, 옛적에는 현량(賢良)ㆍ방정(方正)ㆍ직언(直言)ㆍ극간(極諫)의 과(科)가 있었으므로 천거하는 고시(考試)를 제정하였으니, 임금을 섬기는 정성과 시정하는 방법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 몸소 행하는 바른 것이 이미 이러하였고, 시정하는 방법이 또 이러하여 선왕의 총애가 더욱 지극해지니, 귀역(鬼蜮)과 같은 간사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장차 태양 아래에 뜻을 방자히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석(沙石)을 머금고 기노(機弩)를 베풀어 두었다가기필코 그 틈을 엿보아 쏘려 하였으니, 그것을 맞지 않은 자가 적은 것입니다.
남곤ㆍ심정ㆍ이항의 죄를 이루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남곤은 질투하고 간사한 괴수로서 문묵(文墨)의 조그만 재주로써 꾸미었고, 심정ㆍ이항은 탐하고 독하며 흉하고 간교한 무리로써 남곤의 턱으로 가리키는 것을 좇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공론이 더욱 확대되고 시비가 더욱 분명하여져서, 현(賢)과 사(邪)의 형세가 둘이 병립하지 못할 것을 보고는 서로 배척 방축할 술책을 꾸며, 떳떳하지 못한 참서(讖書)와 컴컴한 말을 만들어서 임금의 총명을 의혹시키고, 밤중에 일을 일으켜 가만히 북문으로 새어 들어가서 경동하였으니, 구중(九重)이나 되는 궐문에, 아랫사람의 정을 품달하기 어렵고 일이 졸지에 일어났으니 진정과 허위를 분별하기 어려웠습니다. 선왕이 부득이하여 구차하게 그 말을 좇았으니 처음에야 어찌 우리 선왕의 뜻이었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태학의 모든 생도들이 궐문을 밀치고 상소로 항쟁하여 대궐 뜰에서 통곡하고 금부에서 갇히기를 다투었으니 광조의 죄는 명목이 없고 사림의 울분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다행히 선왕의 명성(明聖)함을 힘입어서 특별히 경감하는 조항을 따라 명령하기를, “너희들이 모두 시종의 신하로서 위와 아래가 마음을 함께하여 기필코 지극한 다스림을 보려하였으니, 너희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년 이래로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과오가 된 듯하여 사람의 마음에 불평을 샀으므로 부득이 죄를 주는 것이다. 나의 마음인들 또한 어찌 편하겠느냐.” 하였으니, 그렇다면 광조를 죄준 것이 어찌 선왕의 뜻이겠습니까. 이 뒤로부터 음험한 사람들이 당을 만들어서 요직에다 채우고, 거짓 학문이니, 괴이하고 과격하니,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일 벌이기를 좋아하느니, 예전 법을 변경하느니 하고 지목하여, 무릇 한때의 어진 사대부들을 모조리 호미로 뽑듯 낫으로 베듯 하였습니다. 아, 이 몇 가지 말이 어찌 고금 간당들의 어진 선비를 밀쳐 빠뜨리는 한결같은 함정이 아니겠습니까.
기이한 것을 숭상하느니, 일을 좋아하느니, 예전 법을 변경하느니 하는 비방은 사마광(司馬光) 같은 어짊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괴이하고 과격하다느니 거짓 학문이라느니 하는 비방은 주희(朱熹) 같은 어짊으로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같은 말세에 간사한 무리로써 기탄할 것이 없는 자들이 어진 선비의 죄를 얽으려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우리 선왕께서 광조의 무죄함을 추후에 생각하사 장차 거두어 서용(敍用)할 계책을 세우고자 하니, 남곤ㆍ심정ㆍ이항의 무리가 속으로 윤세정(尹世貞)ㆍ황계옥(黃季沃) 등 무뢰배 두어 사람을 사주하여 글을 올려 모함하고, 의논하여 선비들의 공론이라고 칭탁하여 중한 법에 처치하였으니, 세정ㆍ계옥의 세상에 드문 무소(誣疏)는 진실로 서희(徐熹)가 글을 올려 주희를 베자고 간청한 것과 다름이 없지마는, 당시 간인(奸人) 중에는 사심보(謝深甫)와 같이 편지를 땅에 던진 자도 없었으니 그 괴팍하고 잔인한 것이 또한 너무 심하였습니다.
신 등이 엎드려 듣건대 사형에 처하자는 결의가 한번 결정되자, 길가는 사람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놓아 울어서 그 무죄한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광조의 어짊은 사람들에게 깊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그가 죽을 때에 조용히 얼굴빛마저 찌푸리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 근심하듯 하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밝은 해가 이 땅에 나타나면 밝게 단충(丹衷)을 비치리라.” 하였으니, 광조의 충성은 천지가 함께 조감(照鑑)하는 바입니다.
애석하게도, 광조의 어짊으로 선왕의 어짊을 만났으나 마침내 간사하고 음험한 무리의 모함을 당하여 한을 안고 땅속으로 들어갔으니, 신 등이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게 됩니다. 무릇 선왕의 밝음으로써 어찌 광조가 털끝만큼도 사심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특별히 남곤ㆍ심정 무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급하여 이런 부득이한 조치를 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선왕의 뜻이었겠습니까.
아, 신하와 백성이 복이 없어서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정호(鼎湖)의 애통이 있었으니, 미처 광조를 추복(追復)하지 못한 것이 선왕의 남긴 뉘우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책임이 도리어 전하에게 있지 않습니까. 전하의 정성과 효도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선왕께서 친애하던 자를 사랑하고, 존문(存問)하던 자를 공경하여, 무릇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르는 것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홀로 광조에게만 선왕의 마음을 미루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왕 말년에 위로는 대간과 시종이 아래로는 포의(布衣)와 위대(韋帶)의 선비가 소장을 번갈아 다투어 올려 광조의 죄 없는 것을 밝히려 한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상소 가운데에 거의 모두가 궤격(詭激)하다느니 일을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인습(因襲)하여 썼으니, 이것이 어찌 족히 광조를 안다 하겠습니까.
광조의 행신(行身)ㆍ처사(處事)가 공정하고 바른데, 이를 가리켜 궤격하다느니 일을 좋아한다느니 한 것은 남곤ㆍ심정ㆍ이항 그 사람들입니다. 광조의 뜻을 밝히려고 하면서도 도리어 광조를 참소한 말을 습용(襲用)하는 것은 또한 얕게 광조를 아는 것입니다.
그 예전 법을 변경하였다는 것은 신 등이 변명을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법이 세워지면 반드시 폐단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때에도 또한 손익(損益)의 제도가 있었으니, 덜고 보태고 하는 것은 그때 그때 적당하게 하여야 하나 고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삼강 오륜뿐입니다. 광조가 고친 것이 삼강입니까, 오륜입니까.
한(漢) 나라 선비 동중서(董仲舒)의 말에, “정치를 하는데 행하여지지 않거든 심한 것은 반드시 변경하여 변화시켜야 한다.” 하였습니다. 선왕 초년에 연산조의 남은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어찌 맞게 고칠 때가 아닙니까. 그 고칠 때를 당하여 참으로 성인의 신화(神化)가 아니면 그 교조(敎條)와 법령의 시행이 어찌 흔적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만일 흔적이 있다면 보고 듣는 데서 익혀져 보통 사람들이 누가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절대로 변경ㆍ교화했다고 해서 광조를 나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아, 질투 원망하는 해(害)와 번지르르한 말은 만번 죽어도 갚기가 어려운데, 심정ㆍ이항은 비록 이미 죽음을 당했으나 그 현인을 질투한 죄를 밝게 밝히지 못하였으니, 그에 해당한 죄로 벌을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남곤은 간흉의 괴수로서 영화를 누리고 제 명에 죽었으니, 권장하고 징계하는 도(道)가 과연 어디 있습니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현인은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화에 빠지고, 현인을 질투하고 임금을 속인 간흉은 도리어 부귀의 영화를 누렸으니 어찌 반대가 아닙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광조의 지정(至情)을 살피시고 선왕의 남긴 뉘우침을 생각하시와 제사를 지내도록 해 주시고 벼슬을 추증하여 주시기를 선왕께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에게 한 것과 똑같이 하신다면 사림(士林)에 있어서뿐 아니라 국가에 있어서도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아, 광조를 뒤늦게나마 포장(褒獎)하는 것은 지하에 있는 썩은 해골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요, 또 신 등이 잊지 못하는 것은 광조가 실상 우리 선비의 종장(宗匠)이기 때문입니다.
광조가 죽은 뒤로는 선비들의 기운이 지치고 풀린 지가 오래고 선비들의 습성이 박하여진 것이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정직한 기풍이 없어지고 겸양의 도를 잃어버리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것이 습관이 되고, 탐하고 더러운 것이 풍기를 이루어 모두 엄벙덤벙하는 것으로 귀한 것을 삼고, 연약한 것으로 어진 것을 삼으며, 고상한 말을 하는 자를 미쳤다 하고, 정당한 행실을 하는 자를 거짓이라 하여, 아첨하고 간사한 버릇이 서경(西京)의 말년보다 더 심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강하고 굳세고 바르고 곧아서 도를 지키고 이치를 따르는 선비가 그 사이에 나온다면, 위학(僞學)의 무리로 이름을 짓고 괴이(詭異)하다는 비방을 가하여 수십 년 동안에 이 몇 개의 글자로써 현인과 군자를 금고(禁錮)시키어, 반드시 그 몸을 용납할 수 없게 만들고야 마니, 이것이 어찌 태평성세의 일이라고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전하께서 새로 하늘의 명령을 이으시니 사방의 백성들이 목을 늘이고 눈을 비비며 새로운 정치를 보고 있으니, 진실로 이때에 이르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게 나타내지 않는다면, 간사한 무리가 반드시 장차 갓을 털며 서로 경하(慶賀)하고 착한 것을 하는 자는 게을러질 것입니다.
아, 당시의 선비로서 죄 없이 잘못 걸린 자가 이루 셀 수 없지만 김정(金淨)ㆍ기준(奇遵)의 죽음 같은 것이 가장 억울한 것입니다. 정과 준이 모두 광조와 함께 뜻이 같고 도가 합쳐져 힘을 합하여 다스림을 도왔는데, 화가 일어나자 정은 금산으로 귀양가고, 준은 아산으로 귀양갔습니다. 마음으로 반드시 죽을 줄을 알고 한 번 그 어머니와 함께 영결하기를 생각하고, 정이 고을 원에게 휴가를 빌어 보은(報恩)에 가서 그 어머니를 보고 돌아왔으니, 이것을 망명(亡命)이라 할 수 있습니까. 준의 어머니는 멀리 무장(茂長)에 떨어져 있으므로 가 뵙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고개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옛사람이 기(屺)에 오른 뜻을 붙이고 한참만에 스스로 돌아왔으니, 이것도 망명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두 신하가 진실로 망명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스스로 돌아올 리가 있었겠습니까. 두 고을의 원이 남곤ㆍ심정의 뜻에 맞추고 아부하여 억지로 죄를 만들어서 무고하므로, 남곤ㆍ심정이 이에 다시 제멋대로 말하기를, “김정ㆍ기준이 꿈쩍하면 옛사람을 법받는다고 하면서 마침내는 임금의 명령을 위반하였으니 그 무리들의 하는 짓이 대개는 이와 같다.” 하여, 이것으로 광조에게 연루시키고 심한 자는 역적 모의를 하였다는 이름으로 광조에게 붙여 임금의 총명을 굳게 가리었으니,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자고로 소인은 교묘히 꾸미는 것이 못하는 짓이 없으니, 조여우(趙如愚)의 충성하고 곧음으로도 또한 꿈을 빌려 부험(符驗)을 삼아 역적질을 꾀하였다는 참소를 면치 못하여 원통하게 도중에서 죽었으니, 광조의 진정도 또한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어 한 번 씻어 주면, 오직 세 신하의 혼령이 명명(冥冥)한 가운데에서도 감격하여 울 뿐만 아니라, 선왕의 하늘에 있는 영령도 또한 전하가 능히 뜻을 계승하는 도를 다한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직을 회복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은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는 외형적인 일이고, 그 사람을 숭상하고 그 뜻을 높이는 것이 호오를 분명히 하는 실제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세 신하의 관직을 능히 회복하더라도 참으로 그 정리를 살피어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 뜻을 높이지 않는다면, 그 좋아하는 것이 이른바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히어,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향하여 나갈 곳을 알게 하려 한다 해도 그것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대학》에, “명령하는 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반하면 백성이 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차리시소서. 신 등이 뜻은 크고 행함은 없이 소홀하고 거칠어 외람되게 수선(首善)의 자리에 있으면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마음에 강개(慷慨)한 것이 하루 한 달이 아닙니다. 대체로 학교라는 것은 예의로 서로 앞장을 서야 할 곳인데, 떼로 몰려 강학하는 자가 다만 과거와 이록(利祿)으로 선비의 사업을 삼고, 예의가 무슨 물건인지 학문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며, 만일 뜻 있는 선비가 몸을 닦고 행실을 삼가고 경서를 안고 마음을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떼를 지어 배척하고, 뭇사람이 비방하여 도학의 사기(邪氣)라고 눈짓하고, 궤격(詭激)의 남은 버릇이라고 손가락질하여 서로 괴이하게 여겨 웃으며 꺼리고 미워하니, 신 등이 몸소 친히 보고 울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여 보면, 기묘의 화에서 연유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아, 위학(僞學)의 당이 한 번 금고(禁錮)되고 한 번 제거되자, 조씨(趙氏) 송(宋) 나라의 명맥이 차츰차츰 깎아 없어졌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은감(殷鑑)이 아닙니까. 신 등이 한갓 옛사람의 글만 읽고 멍청하게 나갈 방향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까지 된 원인을 생각하면 광조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피를 쏟으며 말씀을 드리오니,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으로 인해 말을 버리는 것을 하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다행할지 모르겠습니다.
- 위는 생원(生員) 강유선(康惟善)이 지은 것.-
- 인조(仁祖) 비망기(備忘記)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천하의 모범 된 자리에 있으면서 옛것을 좋아하고 시국을 의논하여 소장을 세 번이나 올렸는데 말이 간곡하고 의리가 곧으니 배운 것의 바름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우리 선조(先朝)의 양육한 은택을 또한 상상할 수 있다. 말을 좇지 않는 것은 뜻이 있는 것이고, 또 태학(太學)은 비록 공론이 존재하는 곳이라고는 하나 시비를 정하는 것은 따로 조정에게 있다. 너희들이 시비를 확정하기를 기약하는 것은 제생들의 할 일이 아니다. 우선 물러가서 다시 생각하라.”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
[팔경논주]
남곤의 사주를 받아 조광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린 황계옥(黃季沃)은 유생들의 비난이 빗발치자 季 자를 李 자로 바꾸어 황이옥이라 개명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남곤으로부터 관직을 받지도 못하고 평생 생원으로 늙었다. 그의 애비와 이들이 부끄러워했으니, 혈육지간에도 생각이 다른 것을 보면 견문과 판단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생각의 차이’는 생각의 방향이 같으나 질이 다른 경우이다. 그러나 ‘생각의 상반’은 생각의 방향이 반대이고 질이 전혀 다른 경우 경우이다. 2024년의 대한민국은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생각의 상반’ 시대이다. 극우파와 극좌파는 생각이 상반이다. 그 ‘상반’이 이제 생각의 차원에서 이탈하여 감정과 생활에 스며들었다. 조선시대 당파싸움과 똑 같다.
2024년 11월 15일 이재명 더민주당 대표에 대한 선거법 위반 1심 선고 징역 1년 형을 두고 한국 유권자들의 생각이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졌다. 법치국가에서 1심 선고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황계옥의 생각 방법에 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