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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 받은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다!(눅5:27-32)
혹시 교회 다니다가, 이런 생각 드는 사람이 있던가요?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다니지? 누가 전도했지?’ ‘저 목사님은, 목사 안되는 게 더 나을 뻔 했는데, 어쩌다 목사가 된 거지?’ ‘저 권사님, 집사님은 도대체 누가 권사, 집사로 세운거지?’
오늘 본문에 그런 사람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르세요. 당시의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세금징수를 위해서, 동족들을 착취하는 민족의 반역자였어요. 기본으로 내는 토지세, 인두세, 소득세 말고도, 마차 세, 통과 세, 바퀴 세 등, 자기 들 편한 대로 명목을 붙이고 세금을 뜯어 갔어요. 그랬기에 그들은 죄인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세리」를 제자로 부르세요. 예수님은 조금 전에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치유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매혹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기피의 대상인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 있으니,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됐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대낮에, 많은 이들이 보는 가운데, 아주 공공연하게 그를 초대하셨어요.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 넓으신 예수님을 만나요. 누구라도 부르시고, 누구라도 쓰시는 예수님을 만나요..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 주시는 주님이죠. 그런데, 나를 생각하면 이것이 고마우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이것이 못마땅해요. 나를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돼요.
그런데, 본문을 보면서, ‘주님이 부르신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구나...’를 깨닫게 돼요.
27b, 28절을 볼까요.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사람은 누가 부른다고 쉽게 따라가지 않아요. 그것도 한순간에 모른 것을 버리고 따라가는 일은 거의 없어요.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계산이 빠르고 밝은 세리는 더더욱 어려워요. 그런데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어요. 직업이 세리였으니, 당연히 계산을 해 보지 않았을까요? ‘따라가도 될지?, 무슨 이 익이 있을지? 믿어도 될지?’ 몇 번이고 계산기를 두드렸을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손해 보는 일이었어요. 예수를 따르려면 그는 안락한 삶을 버려야 했어요. 그동안 사회적 따돌림을 당하면서까지, 꼭 붙들려고 했던 돈과 작별해야 해요. 그런데, 레위는 어이없게도,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어요.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사람의 사랑을 알 수 있듯이, 영적인 감각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운명적인 만남이 있듯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거부할 수도,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에 있어요. 자기를 한 인간으로 대하고, 구원의 길로 초대해 준 예수의 그 사랑에 끌렸기 때문일 거예요.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하는 자신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예수님의 낯선 사랑..., 그러나 고마운 그 사랑에 끌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계산하다가, 계산을 멈췄어요.
계산하면 계산할수록, 못 따라가는 게 믿음의 길이고, 따지면 따질수록 돌아서고 싶은 게 주님의 길이예요. 눅 18장의 부자 공무원 청년이 그랬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어요. 그런데, 재물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는, 뒷걸음질 쳤어요. 그는 예수님을 존경도 했고, 대단히 종교적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은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는, 인간적 이해득실을 정확하게 따지는 계산기가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계산이 밝았고 정확했어요. 그래서 돌아섰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영생과 바꾸기에는 손해라는 생각이었어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예수님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걸 희생시킬 순 없었어요.
여러분! 결국 예수님을 믿는 구원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에요. 신앙생활 잘 하는 길,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도, 가치의 문제에요. 부자 공무원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가치가, 예수님에 대한 가치보다 더 컸어요. 세리는 자기가 가진 것이, 예수님보다 못하다는 가치, 영생에 비하면 자기가 가진 것이 별 것 아니라는 가치를 가졌어요. 자신이 소유하고 차지한 것의 한계를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부자 공무원은 예수님께 등을 돌렸고, 세리는 예수의 등을 따라갔어요.
여러분! 우리는 구원 받은 자들이에요. 예수님의 부름에 따르는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등을 따를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살고 계시나요? 힘들어도 애쓰 시나요?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에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셨지요? 이때 모두들 “저는 아니지요?” 물었어요. 예수님을 판 유다도 그랬어요. “저는 아니지요?”
혹시 우리가 유다는 아닌가요? 헐값에 예수님을 세상 것과 바꾸고 있으면서, ‘나는 괜찮다’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헐값에 예배를, 사명을, 책임을, 세상 것과 쉽게도 바꾸면서도, 능청스럽게 ‘나는 아니지요? 나는 괜찮지요?’ 하지는 않나요?
내가 예수님의 등을 따르고 있는지? 세상 꽁무니를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보시길 권면 드려요. 그리고 내가 정말 예수님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를, 다시 확인하시길 권면 드려요.
그리고 또 하나, 구원의 문제, 따름의 문제는,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냐?」의 문제에요.
세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잔치를 열었어요.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달랐어요. 30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비방해요. 그들 눈에는,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영 못 마땅했던 거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 하세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 32절)
이 말씀은 무슨 얘긴가요? “세리는 죄인 맞다”는 선언이에요. 주님은 이 말씀을 세리가 없는 자리에서 하시지 않았어요. 세리가 예수님 앞에 있었고,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도 대부분 세리였어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어물쩍 넘어가지 않았고, 애매한 입장을 취하시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세리도 아무런 반문도, 대꾸도, 변명도, 불쾌해하지도 않았어요. 세리는 이미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기 때문이죠. 이런 자가 부르심에 따라가요. 이런 자가 순종하고, 이런 자가 제자가 되서, 복음을 전하다가 에티오피아 교회에서 칼에 찔려 순교자가 돼요.
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세리보다는 훨씬 깨끗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들은 세리를 비난함으로 자신들의 거룩이 더 도드라진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들이 모르는 게 있었죠.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롬 3:10에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요. 세상엔 죄인 아닌 사람이 없어요. 차이가 있다면, 덜 죄인과, 더 죄인이 있을 뿐이죠. 들킨 죄인과, 숨겨진 죄인이 있을 뿐이구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죄인이 있을 뿐이에요. 어차피 세상에는 죄인들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에요? “나는 더 죄인입니다. 내겐 숨겨진 죄가 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한 사람들이지 않나요? 같이 있을 수 없는 죄인들이, 함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지 않나요? 같이 말 섞기 힘든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같이 밥 먹는 자리가 교회에요.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곳이 교회에요.
그래서 예수님과 세리, 예수님과 삭개오,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예수님과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수가성 여인의, “함께”가 가능하고, 어울리지 않는 그 “조화”가 가능했어요.
여러분! 세리가 죄인이라는 것에는 예수님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똑같은 의견이었어요. 그런데, 차이가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죄인지를 가르쳤어요. 그리고 죄 지은 사람을 드러냈고, 정죄 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그들의 죄와 아픔을 이해해 주시고 짊어지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새롭게 해 보시려고 하셨지요.
여러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이 폭력적일 때가 많아요. 옳음이 따뜻함과 함께 가지 않으면, 그 옳음은 자기와 남을 해치는 무기로 변해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옳은 사람들이지만 무능했어요. 사랑이 없기 때문이죠. 그들은 옳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똑똑한 죄인들이었어요. ‘자기의’에 빠진죄인들이었지요.
여러분! 주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하시나요? 죄된 모습들을 내어 놓으셨나요? 베드로도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말했고, “나는 의인이다”고 그렇게 큰소리치던 바울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말했지요. ‘나는 이 정도면 됐다’하지 말고, 세리처럼 “죄인입니다” 인정합시다. 그래서 제자 마태가 되고, 베드로가 되고, 바울이 되시길 축원해요.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레위 같은 세리를 왜 불렀을까?’ 했어요.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어요.
먼저 그는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목숨처럼 여기던 돈과도 작별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부름 받았어요.
다음으로 레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부름 받았어요.
그리고 그 뿐이 아니었어요. 29절을 볼까요.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의 길을 떠난 레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잔치였어요. 큰 잔치를 베풀었어요. 세리와 다른 사람을 초대했다고 말해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나서는, 자신의 심정을 전하지 않았을까 싶었을 거예요.
그러나 잔치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어요. 분명 “예수를 위하여”를 잔치를 열었다고 증언해요. 자신의 재산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제자로 당선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어요.
“나를 새로운 길로 부르신 분은 바로 이분이랍니다. 내가 세리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신 분이 바로 이 분입니다.” 말하며,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서였어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자신을 불러 준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랬기에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고 기록하는 것이죠. 여러 잔치를 보았지만. “예수를 위한 잔치”는 못 봤어요. 주님께 부름 받고 나서는, 잔치도 “예수를 위해”서 하는 세리가 존경스러워요. 처음에는 ‘왜 세리를 부르셨을까?’ 했는데, 이제는 세리 앞에서 부끄러워져요. 세리는 부름받자 마자 “예수를 위해”였는데, 나는 부름 받고도 숱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나를 위해”이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어요. 목사가 되고도 “예수를 위해!” 보다, “나를 위해!”가 많으니, 세리보다 못한 나 인 것을 알게 돼요. 우리 모두 “예수를 위해!” 이 단어를 잊지 맙시다!
말씀을 마쳐요. 본문에 나오는 레위는 제자 마태가 돼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죠.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위해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각하를 비롯한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이고,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에요.
참으로 신비하지 않나요?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죠. 유대인들이 따돌리고 경멸하는 레위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 마태복음을 썼어요.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된 거예요. 세리를 우습게보던 유대인들이 세리의 도움을 받게 된 거예요.
하나님은 이런 미래를 보시고, 레위 세리를 부르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를 보시는 시선도 마찬가지겠죠.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만신창이어도, 우리 안에 있는 ‘미래의 제자 모습’을 보시고 부르셨어요. 지금은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다니지? 저런 사람이 목사지? 저런 사람이 권사고 집사지?’ 할지라도, 미래에는 ‘우리 한길의 선물’이 되고, ‘우리 가족의 선물’이 될 사람으로 보시고 부르셨어요. 우리는 과거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예수님은 미래를 보고 우리를 평가하세요.
분명 선하신 뜻이 있어요. 이 예수님의 시선, 이 예수님의 평가를 믿고, 마태의 삶을 보여 줄 수 있기를 소망해요. 서로를 기다려 줄 수 있기를 소망해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이 말씀대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여러분 가정과 우리 교회와 여러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해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