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은 김○○님의 홈페이지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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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미술에 대해 알기 이전에 '르네상스' 시대의 성격과 정의, 그리고 개념이 명확하게 기술되어야 그 시대의 산물인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뒤따를 것으로 생각되어 서론부분에서는 먼저 르네상스의 전반적인 개념과 르네상스 예술의 전반적인 특징을 서술하겠다.
르네상스(Renaissance, Rinascimento)는 단어 자체의 의미로 '재생', 또는 '부활'-Re(Again)+Nascere (Birth) -을 의미한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세사이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역사시기와 그 시대에 일어난 문화운동을 일컫는 데, 르네상스가 문명사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 시키고 중세의 神 중심의 금욕과 절제의 암흑속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인간성의 해방이라는 것에 있다.
이 시기를 일컬어 볼떼르는 「풍속론」에서 "해방된 이성의 빛에 싸여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라 일컬었다.
그럼 르네상스가 일어나게된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이래 오랜 역사가 축적되어온 곳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혜택으로 이슬람 세계 및 비잔틴과의 접촉을 항상 유지하여, 이들과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소임을 맡아왔다.
특히 11·12세기의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 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도시가 활성화 되기 시작했고, 12세기에는 중북부의 많은 도시가 자치 도시(Comune)로 조직되었다. 이들 자치 도시들은 주위의 농촌지대도 지배하여 도시국가의 형태를 취하였다. 또, 기존 봉건귀족층과 토지 소유자 계층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도시의 경제활동과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의 경제적 발전기에는 사회계층의 변화도 심하여, 상인의 현실적인 감각이 사회의 모든 면이 침투함으로써 이탈리아 특유의 시민문화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탈리아는 지리적인 조건과 상업상의 교류의 필요에 따라, 이슬람과 비잔틴 문화와의 접촉 가능성이 가장 많았고, 또 실제로 그런 교류가 유지되고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학문의 전통면에서도 스콜라 철학으로 대표되는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인 프랑스와는 달리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의 정치는 도시국가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 역시 도시국가에서 발생·발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의 도시국가와 이탈리아의 자치도시와는 사회적인 기초구조에서 크게 다르지만, 형태등의 면에는 공통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법과 정치이론이 자치도시에 적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이와같이 특수한 사회구조와 독자적인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비잔틴과 이슬람 문화권과의 접촉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자치도시가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태동하게된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문화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유산이 잔존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인들이 고대유산에 대한 재생의식을 들 수 있다.
둘째, 정치·경제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는 다른나라보다 일찍이 도시국가가 발달하고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하여 봉건 귀족이 몰락하고 시민계급이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지리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이탈리아는 동서교류의 중심지로서 개방적으로 문화수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넷째, 이탈리아인의 天品的 요인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생활을 예술화하는 심미적 태도를 이탈리아인이 가졌기 때문이다.
다섯째, 역사적 요인을 들 수 있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그리스 문화를 지닌 다수의 학자가 이탈리아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르네상스는 단순히 한부분에 걸친 문화운동이 아닌 대규모의 총체적 문화운동이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태동하게된 르네상스 미술, 특히 회화와 조각부분의 발전상과 특징 그리고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특징 개관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과 분위기(Mood)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분방한 예술적 독창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神 중심의 예술 양식으로 인해 작가의 창작성의 배제와 소재의 정형화, 일률적인 표현기법을 탈피하고 새로운 예술양식의 태동을 의미한다.
예술향유 대상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중세시대에는 예술작품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계층이 단지 성직자에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술에 종교적 색채가 강하였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개인적 예술 후원자(Art Patron)가 등장하게 된 것 또한 큰 특징이다. 더불어 시민계급이 상공업과 무역으로 성장하게 되어 종교에 종속되어 있던 예술에 대한 관심의 대중화가 이루어 졌다.
예술가의 위치 측면에서 보면, 중세시대의 예술가는 단순한 기술자의 의미를 가지고 일반 工人들과 마찬가지로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가의 개성이 표출될 수 없었고, 집단적 제약으로 인해 지위 또한 하찮은 신분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집단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예술가의 지위가 상승하였고, 따라서 작가의 개성과 주장이 중시되었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고집하게 되었다. 종교적 감각의 쇠퇴로 말미암아 작가 개인적 역량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술분야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중세시대에는 집단적이고 공통적이며 협동적인 건축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르네상스 시기에는 개별적 성향이 큰 조각과 회화가 성행하게 되었으나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단지 사회적 조건과 표현수법 그리고 주제선택의 기준과 같은 속성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 속성의 변화의 예로 작품의 주제는 크리스트교를 그대로 간직하였으나, 그 표현방식만이 고전적 수법으로 전환되었다.
예술표현에 영향을 준 경향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고전주의가 예술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건축분야에서는 로마시대의 아치(Arch), 그리스의 三頭柱 양식이 부활하였고, 조각분야에서는 해부학적 정확성과 인간 육체미와의 정감을 표현하는 것을 양성화하였고, 회화분야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우아미를 가진 인간 육체를 자유롭고 솔직히 표현하는 고전적 사실주의가 대두되었다. 또한 고전주의는 예술의 형식과 소재에 있어서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예술 표현 대상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중세의 성스럽고 엄격한 분위기의 대상 표현에서 평민적이고 민중적인 감정 표현에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표현함에 있어서 평범한 시민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의 창작과정상의 특징을 보면, 중세시대의 모범양식을 모방하는 획일적 표현에서 벗어나 예술가 자신만의 새로운 양식을 갖게 되었고, 작가 자신의 마음대로 창작 중간에 작품을 자유로이 변경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중세시대에는 일정한 본보기를 중단하지 말고 계속 추구해서 완성까지는 바꾸지 못하였으나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미술가는 제작의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동시에 중간에서도 추가하거나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미완성 작품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세에서도 미완성은 있을 수 있었으나 그것은 외적 조건 즉 경제적 문제라든지 교회 또는 정치적 사정의 변화에서 오는 압력때문이었다. 이제는 작품의 미완성인채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작가의 내적조건 즉 심리적 자유, 외적 압력에 대한 심리적 반발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결정되었다.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 참고)
순 번 |
내 용 |
1 |
자유분방한 예술적 독창성 |
2 |
개인적 예술 후원자 등장 |
3 |
예술에 대한 관심의 대중화 |
4 |
예술가의 지위 상승, 작가의 개성·주장 강조, 예술가의 긍지 고양 |
5 |
집단적·공동적·협동적 건축 쇠퇴, 개별적 성향의 조각·회화 성행 |
6 |
주제는 크리스트교를 그대로 지닌 채 고전주의 수법으로 전환 |
7 |
모든 미술 분야에 고전주의 적용 |
8 |
예술대상의 평민적·민중적 감정 표현에 노력 |
9 |
예술가 자신만의 양식을 가짐 |
10 |
창작 중간에 주제 변경 용이 |
11 |
미완성 작품의 가능 |
(표-1) 르네상스 예술의 특징
2. 르네상스 회화의 특징
중세 예술의 대표격은 건축이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의 특징을 보면,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油畵法, 이젤의 사용, 원근법의 적용, 그리고 사실적 자연주의 양상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원근법의 적용은 근대적인 회화 기법상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 조각에도 그 영향을 미쳤고, 3차원적 묘사가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원근법은 근대적 성격을 확립할 수 있다.
또한, 원근법이 회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어 색채와 구도의 다양성을 띄게 되어 각 지방마다 고유한 화파(유파) -피렌체, 베니치아화파, (표-2) 참고-가 등장하게 되었다. 원근법은 기하학적 계산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자주 사용되는 線 원근법과 북방의 여러나라, 특히 저지대 지방에서 자주 사용되는 大氣 원근법으로 나뉘어 진다.
구분 |
피렌체 화파 |
베니치아화파 |
특 징 |
1) 시각에 기초를 둔 자연주의 경향 및 원근 법과 해부학을 적용한 사실주의적 경향
2) 線을 중심으로 한 형상안에 색채를 가둠 |
1) 색채가 線 및 형상에 넘쳐 흐름
2) 극히 세속적·이교도적 |
주 제 |
종교적·세속적인 것 모두 |
육감적인 초상·풍경 |
화 법 |
템페라와 프레스코를 병행하여 새로운 유화 등장 |
금·은색이 주조가 되어 색채가 화려하며, 결(Texture)이 풍부 |
대표작가 |
13C - 치마부에
14C - 지오또
15C - 마사치오, 필리포 리피, 보티첼리,프라 안젤리코
16C -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
- 벨리니 一家
- 지오르지오네, 띠지아노
- 틴토레토
- 베로네제 |
의 의 |
모방연구를 통해 자신의 장점을 자기
개성에 동화시켜 독특한 화풍 이룩 |
회화다운 회화제작 |
(표-2) 피렌체·베네치아 화파
3. 르네상스 조각의 특징
원래 조각은 건축의 한 분야에 속하며 독자적인 예술의 부분은 차지하지 못하였으나 중세말 부터 서서히 건축으로 부터의 독립을 시작하였다. 그러한 독립적인 예술의 한 장르(Genre)가 되기 위해서는 배경, 벽감등 건축의 유기적인 부분으로 갖는 연관을 탈피하고, 前面性 즉 한 면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속성이 극복되어야만 했다. 르네상스 시기는 조각의 이러한 전면성 탈피의 초기시기에 해당되고, 완전한 탈피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된다. 전면성을 극복한 작품으로는 도나텔로의 「기마상」,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있다.
르네상스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주의적 사실 묘사"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주의는 중세와 고전주의로 부터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고전·고대의 부활은 자연주의 경향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상주의에 입각한 작품성향이라는 것이다.
이상주의는 르네상스 시기의 인본적·현세적·세속적인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써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닌 '美의 이상 추구'를 뜻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이상주의는 저지대 지방과 스페인 회화의 리얼리즘과 대조를 이루었다.
4. 르네상스 예술의 시대별 특징
이탈리아 도시의 부유하고 교양있는 사회의 도래로 예술가의 문화적 환경과 사회적 신분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보호의 성격도 뚜렷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곧 변해가는 예술의 양식과 그 정신, 그 기교에 반영되었다.
(1) 12세기
12세기의 예술은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중세사회의 종교적 관심의 결과로 다분히 종교적인 것이었고, 또한 성직자만이 예술가의 활동을 요구하고 대가를 지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으며, 종교 예술이 다른 예술분야를 지배하고 결정하였다. 그러한 예술의 종교적 색채는 작가의 인습적인 색채를 굳게하고 창의성을 방해하여 추상적인 형식의 발달을 초래하여 사실적인 자연과 인체의 재현을 할 수 없게하였다. 미술가들은 중세시대의 형식보다 자연스럽고 동시에 좀 더 조용하고 장엄한 표현을 했다.
또한 이전의 어느 때보다 비잔틴 미술과 접촉이 많았고, 동방 교회의 장엄한 聖像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은 자연형태의 모방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상징에 염두를 두었다. 회화의 색채 또한 자연에 나타나는 陰影의 농담(濃淡)을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에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색채도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자연적인 세계를 모방하려는 필요성에서부터 벗어남으로써 얻은 이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2) 13세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딕(Gothic)양식이 건축양식을 대표하고 있었다. 또한 조각은 독자적인 예술의 분야가 아닌 건축의 일부로써 발전하였고, 조각가들에게 모든 조각방법과 기교들이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성서적인 전통적인 형식을 존중했지만 그 형식을 더욱 감동적이고 생명감 넘치게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범양식으로 정해놓고 그 틀안에서 창작을 했는 데 이러한 것은 작가의 독창성과 창작성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13세기 말에는 도시 귀족들의 관심으로 예술의 재생을 이끌었다. 새로운 세속인의 비호밑에서도 예술은 종교적인 색채를 띄었지만 완전한 채택은 아니었다. 또한 비잔틴 예술의 보수주의 성격을 깬 인물은 '지오또'이고 그의 그림은 우아하고 자연스러워서 신앙심을 표현했고 르네상스의 세속적 문화의 발생을 예고했다.
또한 그는 '자연주의 최초의 거장'이라고 불리우며 이성적·현실적인 시민 예술을 추구했으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노력했다. 그의 작품은 벽화 즉 프레스코(Fresco)들이 많고, 원근법과 입체적 표현등으로 모든 회화 개념의 변경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13세기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건축과 위대한 성당들의 시기였고, 다른 모든 예술을 건축이 지배한 시기였고, 회화에서는 지오또의 자연주의가 지배했다.
(3) 14세기
14세기의 건축의 양식은 장대함보다는 세련을 추구하였고, 더 이상 고딕 성당의 장엄한 형태에 만족하지 않았다. 또한 도시의 발달로 세속적인 건물의 건축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실물과 유사하게 미술가들이 표현하려 애를 썼고, 새로 습득된 자연에 대한 지식을 종교 미술에 적용시키려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작업은 변화했다. 전에는 성서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을 표현하기 위해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자연으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14세기의 예술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더욱 그 발전을 하였지만 회화나 조각에 결정적인 형식과 정신이 나타나게 된 것은 15세기 초였다.
(4) 15세기
15세기 초 예술의 기본 경향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경제적 번영으로 피렌체가 예술사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시기의 진정한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로 브루넬레스끼(Brunelleschi)가 유명하였고, 그에게서 원근법(Perspectiva)이 비롯되었다고 할수 있다.
회화에서는 마사치오(Masacio)가 "삼위일체"에서 최초로 원근법을 적용하였고, 조각가인 도나텔로(Donatello)는 그 이전의 조각가들의 점잖은 세련미 대신에 자연에 대한 참신하고 힘있는 관찰을 제시하려 했다.
15세기 초반에 대해 다시 말하면, 비 고딕적,비 낭만주의적,비 의식적이었고 현세적이고 사치스런 사회의 관심과 취미를 반영하여 세속적인 사실주의가 성숙했고, 그 예로 초상화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종교 예술도 사실주의와 세속적인 전시효과에 대한 열망으로 변질되었고, 점점 희박해졌으며 사치스런 배경과 공들여 꾸민 당시의 의상과 배경은 세밀히 묘사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예술은 14세기의 온건한 자연주의 예술속에 그대로 간직되었던 이상적인 의미와 정서적인 힘을 많이 상실하였지만 일부 기법의 광범위한 개량으로 어느 정도 보충되었다.
사실주의는 창의성과 자세한 관찰 그리고 과학적인 실험을 필요로 하여 마사치오(Masaccio)와 더불어 이탈리아 화가들은 원근법·명암법의 여러 문제를 극복하였고, 인물과 풍경을 완전히 하고 깊이 있게 묘사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조각부분에서는 도나텔로(Donatello)가 인간의 형상을 사회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표준을 마련하였고, 건축은 중세시대처럼 모든 예술의 우위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교회·궁전·건물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번영하였다.
한편 예술가는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였지만 군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의 예술성을 허비하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들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또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자유속에서 자신들의 독창성과 천부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5) 16세기
15세기에 급진적으로 발전한 예술은 그 위대한 거장들의 세대에 이르러 완전한 결실을 맺고 이들의 성숙한 작품은 대개가 16세기초 4반세기내에 완성되었다. 이 시대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밖의 많은 작가에 의해 회화와 조각을 새로운 수준까지 향상시키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 양식을 발전시켰는 데 이것을 고전예술의 모범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시대 작품은 고전 양식과 비교될 수 있으나 다른 점에서는 전혀 유사성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 예술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힘과 권위를 이상화하였고, 고전·고대의 영향과 결부된 예술에 있어서의 세속적 정신의 궁극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또한 서구 전체의 예술적 취미와 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사후에는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신비로우며 괴상한 형태의 反 르네상스적인 예술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는 데 그 시기를 일컬어 Mannerism의 시기라 한다.
이탈리아에서 예술의 "재생"은 고대 철학, 문학, 그리고 이러한 분야에서 경험적인 연구방법 발전의 재발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전지식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직관적인 관찰과 자연세계 연구에 의해 습득된 새로운 해결책을 창조하였다. 이러나 이유로 예술의 세속적인 주제는 고대에 대해 재생된 관심과 그리스·로마 역사, 신화로 부터 유래된 새로운 양식이 예술가들에게 더욱 더 중요하게 되었다. 고대의 건축물과 예술작품에 의해 제공된 모델 또한 새로운 예술적 기교의 발전과 고전 예술을 형태의 양식을 재창조하기 위한 욕구를 고무시켰다.
르네상스 예술 발전의 중심은, 후대에 추구되어지고 그들의 박식함과 상상력이 존경되어지는, 창조자로서의 예술가의 출현이다. 또한 예술은 종교를 위한 수단과 사회적인 교훈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개인의 양식과 심미적인 표현 또한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상은 전통적으로 초기, 절정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최근에 다양한 해석의 화두가 되어왔다. 몇몇의 학자들은 14세기 초기의 지오또의 출현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이라 간주하고, 다른 이들은 그의 자연주의적 예술 속의 위대한 작품들을 그 시대와 분리된 현상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두 번째 입장에서 보면 르네상스 양식의 발전은 15세기의 초기에 피렌체에서 활동한 예술 활동의 세대와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1. 초기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첫 세대의 대표자는 조각에서 도나텔로,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회화에서는 마사치오이다. 그들 사상의 중심은 예술의 이론적인 기초 속에 있는 신념과 발전과 진보는 가능하다는 삶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확신이었다.
고대의 예술은 재생된 모델로써 뿐만아니라 위대한 예술가들의 성공에서 볼 수 있는 시행착오의 기록이다. 고대의 작품을 단지 모방하는 것보다 새로움을 창조하는 발전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자연계의 모습, 인간의 개성, 인간 행동의 경험과 일치하는 예술형식 창조를 추구하였다.
합리적인 연구는 성공의 열쇠라고 믿었으며, 그리하여 건축과 인간 육체의 묘사와 회화상의 묘사를 체계화하는 비례의 정확한 법칙의 발견을 일구어냈다. 또한 자연의 날카로운 탐구로 자연의 일률적인 모방을 지양하고, 이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을 예술 작품속에 불어 넣으려 노력했으며,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더 영구적이고 위대한 美와 중요성을 예술작품에 부여하였다.
자연에서 보이는 것보다 정신적인 美와 이상적인 형태를 묘사하려는 이러한 특징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의 기본적인 요소였다.
르네상스 예술적 사고의 요람인 피렌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술의 개혁에 있어서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Pollaiudo, Botticelli 같은 大家들도 약 1450년 경 새로운 예술가 세대들의 선두주자로서 피렌체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비례법, 꼬인듯한 몸짓, 그리고 線 투시법 같은 일반적 개념의 수용이 쇠퇴하고 예술가 개인적 표현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이룩되었던 혁신적인 발전의 하나로 미술과 미술가들의 지위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중세의 건축·조각·회화는 그 이론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공업 또는 단순한 기계적 기술에 불과한 것들 이었다.
그러나 초기 르네상스에 이르면 미술가들은 엘리트적인 집단으로 대접받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自由學藝」란 고전·고대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신사의 교육을 위한 知的 수련과정에 수학(음악이 포함됨)·변증법·문법·수사학·철학등이 포함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가는 사상가로 대접받게 되고 그들의 작품은 고도의 창조적 산물, 즉 수공업적 기능이라는 기성의 척도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근대적인 견해가 초기 르네상스의 피렌체에서 급속히 고조되어 갔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를 정의하자면, 비록 불완전 하였지만 절정기 르네상스의 완벽함에 필요한 준비 시기였고, 예술 작품의 외형적 묘사는 완전한 작품을 만들기에는 부족한 시기였으나, 근대적인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개념이 태동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 작가들
①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
피렌체 출신인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치오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이다. 그는 기베르티 밑에서 수련하였으며, 후기 고딕 양식에서 초기 르네상스에 걸친 과도기에서 그의 활동은 대체로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1405∼32년으로, 고딕의 작풍을 남기면서도 이미 르네상스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여, 분석적인 사실을 억제하고 종합적인 장엄함으로 향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성 조르조》는 그때까지 건축의 질서를 따르고 있던 조각을 3차원의 공간에서 독립시켜, 범할 수 없는 위용과 고전적인 격조를 보였다.
제 2기는 1432년 이후 10년간의 시기로 이 기간에는 고대 유적 연구에 열중한 시기로 청동상《다비드》는 젊음이 넘치는 육체의 표현에 고전미를 풍기게 한다.
이 시기에 대리석 조각도 사실주의의 극치에 이르게 되는 데 대표작은 《세례자 요한》이 있다.
제 3기는 1443년 이후 10년간의 기간으로,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은 르네상스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동시에, 르네상스 주조기술의 한 정점을 나타낸다.
제 4기는 사망에 이르는 시기까지로 사실적 기법은 더 세련되고 전부터 조금씩 보였던 그의 괴기 취향과 비극적인 표현이 강조되었다.
그의 전 작품에서 일관되게 풍겨오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육박해오는 투철한 르네상스적인 리얼리즘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고대의 단순한 모방에서 탈피하였으며, 조각을 회화화한 기베르티의 고딕적인 작풍과도 대결할 수 있었고, 조각을 원래의 正道로 되돌림으로써 베로키오나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끼쳐 근대조각으로 발전할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②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
피렌체 출신인 기베르티는 금 세공인으로 출발하여 피렌체의 제작 선정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본격적인 조각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 《구약이야기》는 회화상의 원근법을 성의 배치와 살을 붙이는 높낮이의 양각에 응용하고 있어 오늘날에는 '조각의 회화화'라 하여 비난하는 사람도 있으나, 구도의 통일과 사실적 묘사는 새로운 수법으로서 가히 '청동 화가'라는 말을 들을 만한 것이었다.
③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
화가이자 조각가 였던 베로키오는 도나텔로에게 조각을, 발도비네티에게 회화를 배웠다. 그는 그의 생애 중 10년을 제외하고는 조각에 전념하였다. 회화에서의 대표작은 그의 제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 《피스토이아 대성당 제단화》등 몇 개 안 되지만, 과학적 탐구를 지향한 15세기 후반 피렌체 畵派의 대표적 자연주의자의 면모는 뚜렷이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가문인 메디치 家의 후원을 받았고, 1476년 경의 청동상《다비드》는 공예적 장식성이 두드러지며, 인체를 더할 나위없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1481년 베네치아 정부와 계약한 그의 마지막 작품 《꼴레오니 장군 기마상》은 그의 엄격한 사실주의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그의 스승 도나텔로의 작품인 《가타멜라타 기마상》에 필적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또한 제자 육성에도 힘을 기울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페루지노·끄레디 등 탁월한 미술가들을 배출했다.
④ 마사치오 (Masacio, 1401∼28)
건축에서의 브루넬레스키나 조각에서의 도나텔로와 함께 회화에서의 참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천재가 15세기 초 피렌체 화단을 풍미했던 국제 고딕 양식을 청산하고 지오토의 조형적 전통으로 되돌아 가는 동시에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의 원리와 도나텔로의 인체조형의 성과를 섭취하여, 거기에 인간까지도 포함하여 공간과 量體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의 참모습을 파악한 시각적 세계를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삼위일체》가 있다.
⑤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5 ?∼1510)
피렌체 출신의 화가인 그는 초기에 필리포 리피에게 그림을 배운 듯하며, 베로키오와 플라이울로에게 사실주의를 배웠다. 《유디토와 홀로페르네스》같은 그의 초기작에서는 자연연구에 대한 소박한 정열을 보이는 데, 그 미묘한 곡선과 감상적인 詩情에 일찍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나타나있다. 그는 고전주의와 플라톤주의 정신에 접하고, 특히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詩에 고취 되어 그린 《프리마베라, Primavera》는 詩的 정신과 자연연구의 아름다운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1482년 후 10년동안 점차 寫實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畵境을 열었으며, 가장 충실한 원숙기를 전개하였다. 《비너스의 탄생》은 사실주의를 무시하고 양식화된 표현과 곡선의 묘미를 구사하여, 장식적 구도 속에 시적 세계를 표현한 걸작이다.
⑥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피렌체 출신으로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 양식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그의 첫 업적으로는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커다란 돔이 있으며,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또 피렌체의 첫 사회시설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에서는 9단의 계단위에 연속된 아케이드의 전망 효과를 노리고 있으며, 명쾌하고 새로운 율동감을 주고 있다. 또한 산 로렌초 성당에서는 저마다 질서있고 知的인 공간구성이 특색이다. 후자의 본당에서는 집중식 형태에 대한 관심이 엿보이는 데 이는 산 로렌초 성당의 聖器室, 파치 家의 예배당 등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의 위대성은 전통에서 계승한 구조방식을 여러 군데로 수시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 構築의 미적 법칙을 거기에서 이끌어내고 실현한 점에 있다.
⑦ 그 밖의 작가들
베네치아노, 폴라이울로, 롭비아, 롯셀리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카스타뇨, 피에로 데 코지모,
만테냐, 벨리니
2. 전성기 르네상스
전성기 르네상스는 초기 르네상스의 모든 경향이 최고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또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출발이기도 했다. 초기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예술가들은 예술이 어떤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법칙이란 음악적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수학적 비율, 인간 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과학적 원근법 등의 여러 가지 원리를 말한다. 그리고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예술가 스스로의 영감에 의존하였다.
16세기의 여명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거장들 - Leonardo da Vinci, Donato Bramante, Michelangelo, Raffaelo, Tiziano 등은 르네상스를 고전으로 이끌어간 인물들 이었다. 이들은 이제껏 발현해내지 못했던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하였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약 1495년에서 1520년까지만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이러한 전성기를 일구어낸 위대한 사람들이 1520년대에 이르러 작고하기 때문이다.
(1) 작가들
①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이다. 그는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고 그의 생애는 대개 5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 시기는 1466년에서 82년 까지로, 제 1 피렌체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베로키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으며, 엄격한 사실주의 기법을 터득하였는 데,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는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지네브라 데 벤치》,
《마돈나 베아노》에서 그의 치밀한 사실기법은 명암법에 스푸마토(Sfumato: 그 특유의 발림)를 병용함으로서 완성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풍은 엄격한 寫實에서 깊은 정신세계를 발견 할 수 있다.
제 2 시기는 1482년에서 99년 까지로, 제 1 밀라노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동안 축적된 그의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이다. 《최후의 만찬》은 객관적 사실과 정신내용을 훌륭하게 융합함으로서 다음 세기 고전양식을 이미 완성하였다.
또한 과학 연구와 저술에 힘쓴 시기이기도 했다.
제 3 시기는 1500년에서 06년까지로, 제 2 피렌체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모나리자》를 제작하였고, 특히 과학연구에 몰두한 시기이다.
제 4 시기는 1506년에서 13년까지로, 제 2 밀라노 시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동굴의 성모》를 완성하였고, 《성 안나》 등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성 안나》 그의 예술의 귀결인 동시에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 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는 오히려 여러 가지 과학연구, 특히 水流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 등에 주력하고 있었다.
제 5 시기는 1513년에서 19년까지로, 로마·앙부아즈 시기이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연구에 몰두하였고, 앙부아즈의 궁정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수기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사색에 잠겼으며, 운하 설계나 궁정설계를 지휘하면서 충실한 생활을 하였다.
그의 방대한 수기는 평생에 걸친 여러 과학(물리학, 역학, 광학, 천문학, 지리학, 해부학, 기계공학, 토목공학, 식물학, 지질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비롯된 것으로, 현재는 서구각지에 분산 소장되어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科學史上 그 선구적 의의가 크다. 전분야에 걸친 그의 지칠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이라 할만하다.
②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이다. 그는 기를란다요에게 배우다가 이듬해 베르톨로에게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웠다. 그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 체류하면서 조각을 위한 인체해부와 많은 인문학자들과 접촉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스칼라의 성모》,
《켄타우로스족과 타이족의 싸움》의 부조가 있다. 로렌초 사후에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하여 《바쿠스》,《피에타》를 제작하였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그는 《다비드》상을 제작하였다. 1508년에는 그는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위촉받아 12년만에 완성하였다. 천정화 완성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죽자 그의 무덤앞에 《모세》와《노예》를 만들었으나 교황 레오 10세의 다른 건축 강요로 중단하게 되었다. 그 후 1541년 교황 바오로 3세의 부탁으로 시스티나 성당 안쪽벽의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③ 라파엘로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청순한 색채와 감미로운 음악적 리듬이 보이며, 격정이나 위대성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운 매력을 나타내려 하였다. 그는 페루지노의 기풍을 익혀 《성모대관》,《그리스도의 책형》,《성모의 결혼》등은 페루지노의 그림이라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공간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는 그의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 이후에 그는 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 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화풍을 탈피하여, 피렌체 派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았고, 성모의 자태나 피라미드형 구도에 있어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 모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인의 기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 구성에 있어서의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등에는 언제나 독자성을 나타 내었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많은 걸작은 19세기 전반까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④ 띠지아노 (Tiziano Vecellio: 1448∼1576)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베네치아 畵派의 화가. 띠지아노는 일찍이 뛰어난 대가로 인정 받았으며, 수세기에 걸쳐 그의 명성은 이어져 내려왔다. 미술 이론가 조반니 로마초는 그를 '이탈리아의 여러 대가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화가들 가운데 태양같은 존재'라고 평했다.
⑤ 브라만테 (Donato Bramante, 1444∼1514)
건축가로서는 이탈리아 융성기 르네상스의 대표자 중 하나였다. 우르비노에서 기초 수업을 닦은 후 1477∼99년에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베르가모로 갔다가, 나중에 밀라노로 가서 산 사티로 성당안의 산타 마리아 聖器室을 설계하였다. 8각형의 평면을 가진 그 집중식 會堂형식은 그가 평생 추구한 건축과제의 첫 표현으로 주목된다. 99년 로마로 와서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수도원을 설계하였는 데 그곳의 回廊에는 前世紀 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장중한 느낌이 넘친다.
⑥ 그 밖의 작가들
지오르지오네
3. 후기 르네상스/ Mannerism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의 가장 큰 분수령은 1527년 로마가 침공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술의 후원에 원천이었던 도시의 역할에 결말을 맞게하였고, 그 예술가들이 피렌체 외의 다른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 이전에 反 고전주의적 미술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Mannerism이라 부른다. Mannerism의 대표자는 Pontormo, Parmigianino, Firoentino 등이 있는데, 이들은 Vasari나 Bologna의 작품의 표현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Mannerism은 고도로 정제된 우아미에 가치를 부여한 심미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이것은 16세기에 밀어닥쳤던 정신적 위기의 영향으로 젊은 예술가들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을 거부하고 보다 넓은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발견해 나가려 했으며, 인간성 신뢰에 중점을 둔 전성기 르네상스가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의 노예가 되어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이 신기롭거나 부자연스럽게 묘사되거나 왜곡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불안정한 이탈리아 미술에 Mannerism이라는 용어가 붙여졌는데, 이것은 20세기 까지 존속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바로 뒤를 이어 출현된 제멋대로의 反 고전주의적 미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특별한 매력을 주고 있다.
① 피오렌티노
Mannerism의 화가 중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색다른 인물이었던 롯소 피오렌티노는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퍼져나가는 거미집과 같은 격자형의 구도가 보이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 주는 충격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그림에서도 예상할 수 없던 것이었다.
② 파르미지아니노 (Parmigianino, 1503∼1540)
밀라노 공국의 파르마에서 태어난 그는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세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우아하고 세련된 Mannerism양식을 개발했다. 초기에 그는 코레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그의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증거는 《성녀 카타리나의 신비한 결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6세기에 베네치아 밖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양식은 가늘고 우아한 형태와 뛰어난 기교로 가장 화려하고 널리 알려진 Mannerism 양식의 하나였다. 그것은 전성기 르네상스 고유의 자연주의 원칙을 약화시키고 라파엘로의 후기 양식을 극도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모호한 공간적 구조와 길게 변형시킨 인물 형태, 그리고 자연미를 초월하는 율동적·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서, 미술사가인 바사리는 이 3번째 특징을 '세련미'라고 표현했다. 특히 가느다란 형태를 통한 우아미의 추구는 회화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데생에서도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③ 그외의 작가들
베로네세 (Paolo Veronese), 첼리니, 볼로냐, 사볼로, 코렛지오, 엘 그레코
르네상스의 종합 의견 서양문화사의 찬란했던 시기인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의 특징과 분위기(Mood)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분방한 예술적 독창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神 중심의 예술 양식으로 인해 작가의 창작성의 배제와 소재의 정형화, 일률적인 표현기법을 탈피하고 새로운 예술양식의 태동을 의미한다.
예술향유 대상의 변화 측면에서는 예술의 종교적 색채에서 예술에 대한 관심의 대중화가 이루어 졌다.
예술가의 위치 측면에서 보면, 일반 工人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신분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지위가 상승하였고, 작가의 개성과 주장이 중시되었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긍지를 고집하게 되었다.
예술분야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중세시대에는 건축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르네상스 시기에는 조각과 회화가 성행하게 되었으나 예술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단지 사회적 조건과 표현수법 그리고 주제선택의 기준과 같은 속성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예술표현에 영향을 준 경향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고전주의가 예술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회화에서는 자연스러운 우아미를 가진 인간 육체를 자유롭고 솔직히 표현하는 고전적 사실주의가 대두되었다. 또한 고전주의는 예술의 형식과 소재에 있어서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예술 표현 대상의 변화 측면에서 보면, 중세의 성스럽고 엄격한 분위기의 대상 표현에서 평민적이고 민중적인 감정 표현에 노력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예술가들의 창작과정상의 특징을 보면, 중세시대의 모범양식을 모방하는 획일적 표현에서 벗어나 예술가 자신만의 새로운 양식을 갖게 되었고, 작가 자신의 마음대로 창작 중간에 작품을 자유로이 변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완성 작품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세에서도 미완성은 있을 수 있었으나 그것은 외적 조건 즉 경제적 문제라든지 교회 또는 정치적 사정의 변화에서 오는 압력때문이었다. 이제는 작품의 미완성인채 그대로 놓아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작가의 내적조건 즉 심리적 자유, 외적 압력에 대한 심리적 반발 등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결정되었다.
중세 예술의 대표격은 건축이었으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의 특징을 보면,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油畵法, 이젤의 사용, 원근법의 적용, 그리고 사실적 자연주의 양상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원근법의 적용은 근대적인 회화 기법상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여 조각에도 그 영향을 미쳤고, 3차원적 묘사가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원근법은 근대적 성격을 확립할 수 있다.
또한, 원근법이 회화의 근간을 이루게 되어 색채와 구도의 다양성을 띄게 되어 각 지방마다 고유한 화파(유파) -피렌체, 베니치아화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조각은 건축의 한 분야에 속하며 독자적인 예술의 부분은 차지하지 못하였으나 중세말 부터 서서히 건축으로 부터의 독립을 시작하였다. 르네상스 시기는 조각의 이러한 전면성 탈피의 초기시기에 해당되고, 완전한 탈피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된다.
르네상스 조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주의적 사실 묘사"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주의는 중세와 고전주의로 부터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고전·고대의 부활은 자연주의 경향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상주의에 입각한 작품성향이라는 것이다.
이상주의는 르네상스 시기의 인본적·현세적·세속적인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써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닌 '美의 이상 추구'를 뜻하는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첫 세대의 대표자는 조각에서 도나텔로,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 그리고 회화에서는 마사치오이다.
그들은 고대의 작품을 단지 모방하는 것보다 새로움을 창조하는 발전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고, 초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자연계의 모습, 인간의 개성, 인간 행동의 경험과 일치하는 예술형식 창조를 추구하였다.
예술적 사고의 요람인 피렌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술의 개혁에 있어서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비례법, 꼬인듯한 몸짓, 그리고 線 투시법 같은 일반적 개념의 수용이 쇠퇴하고 예술가 개인적 표현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이룩되었던 혁신적인 발전의 하나로 미술과 미술가들의 지위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초기 르네상스에 이르면 미술가들은 엘리트적인 집단으로 대접받게 된다. 즉, 사상가로 대접받게 되고 그들의 작품은 고도의 창조적 산물, 즉 수공업적 기능이라는 기성의 척도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를 정의하자면, 비록 불완전 하였지만 절정기 르네상스의 완벽함에 필요한 준비 시기였고, 예술 작품의 외형적 묘사는 완전한 작품을 만들기에는 부족한 시기였으나, 근대적인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개념이 태동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전성기 르네상스는 초기 르네상스의 모든 경향이 최고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또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출발이기도 했다. 초기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예술가들은 예술이 어떤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성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예술가 스스로의 영감에 의존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의 가장 큰 분수령은 1527년 로마가 침공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술의 후원에 원천이었던 도시의 역할에 결말을 맞게 하였고, 그 예술가들이 피렌체 외의 다른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1520년 라파엘로의 죽음 이전에 反 고전주의적 미술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Mannerism이라 부른다. Mannerism은 고도로 정제된 우아미에 가치를 부여한 심미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이것은 16세기에 밀어닥쳤던 정신적 위기의 영향으로 젊은 예술가들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균형을 거부하고 보다 넓은 방향으로 새로운 길을 발견해 나가려 했으며, 인간성 신뢰에 중점을 둔 전성기 르네상스가 아무런 가치도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의 노예가 되어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이 신기롭거나 부자연스럽게 묘사되거나 왜곡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불안정한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불안정한 이탈리아 미술에 Mannerism이라는 용어가 붙여졌는데, 이것은 20세기 까지 존속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바로 뒤를 이어 출현된 제멋대로의 反 고전주의적 미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특별한 매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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