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나타난 메시야는 종류가 다른 영광, 즉 겸손이라는 영광을 입고 있었다. “신은 위대하다' 라는 이슬람교도들의 외침은 인간을 가르칠 초자연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진리이다(신은 너무 위대한 초자연적 존재이므로 하찮은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 - 역자주). 그러나, '신은 하찮은 존재' 라는 그 말은 예수가 인간에게 가르친 진리이다." 신부 네빌 피기스(Neville Figgis)는 그렇게 쓰고 있다. 우주를 호령하시던 하나님, 세상의 모든 군대와 제국을 장기판의 말 다루듯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의 한 아기로, 말도 못 하고, 딱딱한 음식을 못 먹으며, 대소변도 못 가리고, 어느 십대 소녀의 품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고, 그 소녀에게서 음식과 사랑을 공급받아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
런던의 그 음악당에서, 여왕과 그 가족들이 앉아 있던 귀빈석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통치자들이 세상에 납시는 전형적인 방식을 잠시나마 일별할 수 있었다.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웅장한 팡파르에 맞춰, 온갖 보석과 호사스런 의복을 걸치고 그들은 등장하는 것이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최근에 미국을 방문했다. 기자들은 여왕의 행차에 수반되는 '의전품' 목록을 일일이 거론하며 수다를 떨었다. 한 행사마다 두 벌씩 준비한 의전용 의상들, 누가 죽었을 경우를 대비한 상복 일습, 19리터들이 혈장액, 변기 깔개 등등을 포함해 짐가방 무게만 해도 1,800킬로그램이나 되었다. 그녀는 전속 미용사, 시종 둘 그리고 기타 수행원들을 대동했다. 이 왕가 일행이 잠깐 외국에 한 번 방문하는 데만도 26억 원이라는 돈이 우습지 않게 소요되는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지상방문은 한 짐승의 거처에서 수행원들도 없이, 구유 말고는 탄생한 왕을 누일 곳조차 없는 비천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실로 역사를, 또한 우리의 달력을 두 부분으로 나눈 그 사건의 목격자들은 아마 인간보다는 짐승들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당나귀가 그의 탄생에 보조를 맞출 수도 있었으리라. “이토록, 아! 이토록 고요히 놀라운 선물이 내리셨도다.”
*이슬람교도들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도한다. 사실, 대다수의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유대인들도 분명히 신에 대한 예배하면 두려움을 연상했다. 모세
불붙은 떨기나무, 이사야의 뜨거운 숯, 에스겔의 환상 등에서 보듯,하나님과 직접 만난 '축복받은 사람들은 불에 타 죽거나, 야곱처럼 반신불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모세나 이사야나 에스겔은 사실 복받은 사람들이었다. 유대 어린이들 또한 접근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면치 못하는 광야의 거룩한 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배웠다. 언약궤를 잘못 만지면 누구든 죽었다.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했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던 지성소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거나 발음하기를 두려워하던 그 사람들 가운데로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구유의 한 아기라는 놀라운 모습으로 사지를 옹송그린 채 누워 있는 신생아에게서 무서움을 느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되 이제는 결코 두려움이 개입되지 않는 방식을 찾아내신 것이었다.
사실, 두려움의 효과는 그렇게 크지 못했다. 구약에는 선한 것을 적극 권장하기보다는 악한 것을 금하고 부정하는 장치들이 훨씬 많다. 뭔가 새로운 접근방식이 필요했고, 그 접근방식이란, 성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광대한 심연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로 가교를 놓는 신약이었다.
*마태가 나열한 족보는 노출하고 싶지 않은 집안의 비밀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족보에 언급된 여자들을 생각해 보자(유대인들의 족보에서 여자들이 언급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그 넷 가운데 적어도 셋은 이방인이었는데, 이것은 예수가 우주적인 약속을 담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마태의 기록방식이 아니었는가 한다. 유대인의 메시야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니! 자식 없는 과부 다말은 예수로까지 이어질 대를 잇기 위해 창녀처럼 옷을 입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야만 했다. 라합은 외관상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몸을 팔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는 다윗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그 사건은 결국 구약의 왕가에서 벌어진 가장 유명한 성적 추문으로 기록된다. 이 수치스러운 조상들에 대한 기록은, 곧 예수가 있는 그대로의 역사에 들어와서 기꺼이 그 부끄러운 조상들의 후손이 되기로 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와는 반대로, 예수가 탄생할 무렵 통치하던 헤롯 대왕은 자신의 배경과 혈통이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비교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끝내 허영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족보를 파기해 버렸다.
*서사시 실락원(Paradise Lost)의 속편을 쓰면서 존 밀턴(John Milton)은 십자가가 아닌 유혹을 이야기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을 되찾으려는 예수의 노력 가운데서 가장 요체적인 사건은 유혹이었으리라. 낙원에서 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한정된 상태를 초월할 방법을 일러주겠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몇 천 년 후, 또 한 사람의 표상 -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둘째 아담 - 이 기묘하게 뒤바뀐 질문을 통해 비슷한 시험에 직면했다. 에덴에서 뱀은 물었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느냐? 광야에서 유혹자는 질문을 교묘하게 뒤바꿨다. "네가 진정 인간이 될 수 있느냐?"
이 유혹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예수의 시험 장면을 목격한 자들이 없었으므로 당시의 세세한 내용들은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 전달된 게 틀림없을 것이라고. 몇몇 이유로 인해 예수는 유혹자의 투쟁 상황과 인간적인 나약함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그 유혹의 순간을 제자들에게 밝혀야겠다고 느꼈다. 내 생각에, 예수가 받은 유혹은 말 그대로 처절한 사투갈등이었지 통과의례적인 형식적 절차가 아니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어쩔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발견했던 그 유혹자가 또다시 예수를 상대로 치명적인 급소를 찌르려 했던 것이었다.
*영국 시인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는 광야의 유혹을 예수와 사탄 양자가 익히 알고 있는 경험으로 소개한다. 성육신에 관해 무지했던 사탄은 확실히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었는지, 현현한 신이었는지, 혹은 자신처럼 제한적인 권능을 지닌 천사 중 하나였는지 알지 못했다. 사탄은 상대방의 능력을 탐색해 보는 수단으로 예수에게 이적을 행해 보라고 요구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좀더 진전된 성찰을 보여준다. 그의 추론에 의하면, 예수는 전생애를 통해 늘 겸손하게 행동하고 죄인들과 어울렸으며, 그 결과 큰 존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해, “마귀는 예수를 간과했으며, 그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했다. 요컨대 마귀는 너무 먼 곳만 바라보았다. 그는 크고 높은 것만 찾았으며 자기 자신 또한 그런 존재라고만 여겼다. 그는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것, 낮고 천한 것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복음서 기사에 따르면,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두 전사는 결코 상대방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그들은, 링을 돌며 상대방을 탐색하는 권투선수들처럼 주도면밀했다. 예수는 우선 사탄의 유혹을 지긋이 눌러 참아야 하는 그 순간에 가장 큰 긴장을 느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교활한 유혹자를 당장 멸절하고 그가 퍼뜨리고 있는 악으로부터 인간역사를 구원해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는 그 시도를 거부했다.
한편,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승리의 도취를 맛보고자 자신이 쥐고 있는 세상 지배권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 시험한 자도 사탄이요, 그 시험에 진 자도 사탄이었다. 두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에게 예수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했을 뿐이었으나 세번째 시험에서는 하나님께서 결코 동의하지 않을 어떤 것, 즉 경배를 요구했다. 광야의 유혹으로 인해 사탄은 오히려 정체가 드러났으나 하나님께 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의 존재로 계셨다. 사탄은 말했다. "네가 하나님이거든 나를 현혹해 보아라. 하나님처럼 행동해 보아라." 예수가 대답했다. “그런 결정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네 명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광야의 세 가지 유혹을 반추하면서 느낀 바지만, 사탄은 아무래도 대단히 매혹적인 개선책을 제시했다. 그는 인간에게 유익한 부분들만 가지고 예수를 시험했다. 이것은 배고픔이나 경작의 수고라는 고정불변의 규칙들을 거치지 않고도 음식을 맛보게 해주겠다는 것, 그 어떤 모험을 하더라도 진정 위험한 상황에는 처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 멸시와 거절이라는 뼈저린 고통을 각오하지 않고도 명예와 권력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이 유혹들은 말하자면, 십자가 없이도 왕관을 씌워주겠다는 제의였다(그러나 예수가 거절한 이 유혹들을 그의 추종자들인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갈망한다).
*이스라엘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던 말콤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는 광야의 유혹에 대한 심정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만, 영화를 찍으려는 그 순간 어두운 날씨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영화 촬영을 하기에는 빛이 너무 약한 날씨였다.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사방에 널린 돌들이 일순 포착되었다. 하나하나 또렷한 형상을 한 그 돌들은 기묘하게도, 잘 구워진 검은 빵덩어리들처럼 보였다. 후일,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예수가 이 빵 같은 돌덩어리들을 정말 먹을 수 있는 빵으로 바꾸기는 일도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어째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로마의 권세자들은 가이사의 왕국을 증진시키기 위해 빵을 거저 뿌려 댔다. 예수도 자신의 왕국을 증진하기 위해 로마처럼 할 수 있었을 텐데… 예수는 승낙의 표시로 그저 고개 한 번만 끄덕였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그는 불확실한 사복음서 위에,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패배한 사람이라는 오명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건전한 사회· 경제적 계획과 원리라는 기초 위에 기독교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모든 이들의 이상향이 도래하고 모든 사람들의 소망과 꿈이 실현되었으리라. 그때 예수는 얼마나 위대한 시혜자가 되었을 것인가!
런던 대학 경제학부에서,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한결같은 찬사를 받았으리라. 영국 의회 광장에 그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그리고 미국 의사당과 붉은 광장에는 그보다 더 큰 조형물이 세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만이 경배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 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머거리지의 생각이 그렇듯, 광야의 유혹은 예수의 동포들의 마음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질문 그 자체였다. 메시야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어 수많은 자들을 먹일 수 있는 백성들의 메시야? 성전 지붕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토라의 메시야? 이스라엘은 물론 지상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메시야? 그 무엇이 됐든 사탄은 예수에게 엄청난 만능의 메시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그런 메시야를 원한다. 머거리지의 심정을 통해서 나는 확실히 내 자신이 어떤 메시야를 원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분명 고난받는 메시야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측면에서 보자면 예수도 그것은 원하지 않았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하나님이 과연 안전을 책임져 주시는가 증명해 보라는 사탄의 제안은 급소에 들이대는 비수였다. 이 유혹은 후일에 다시 등장한다. 언젠가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으며 격노한 적이 있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23). 물론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의 예언에 반발하여, 본능적인 보호반응을 보였던 것인데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 - 예수는 베드로의 말 속에서, 쉬운 길을 제시하는 사탄의 유혹을 또 한 번 읽어 냈던 것이다.
*광야의 유혹은 하나님의 권력과 사탄의 권력간의 심대한 차이를 보여준다. 사탄의 권력은 강요하고 현혹하고 파괴하는 성질의 것이다. 인류는 그런 성질의 권력을 익히 경험해 왔으며, 수많은 정부들 또한 그 권력의 저장고에서 자원을 끌어다 썼다. 채찍이나 경찰봉, 혹은 아카보 소총을 쥔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에게 무엇이든 강요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권력은 외적이고 강제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권력은 내적이고 비억압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말했다. “당신은 기적에 의해 인간을 노예로 삼기를 원치 않았소. 기적을 토대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을 당신은 인간에게서 바랐던 거요.”
이러한 권력은 흔히 나약해 보이기도 한다. 내부로부터의 자연발생적인 변화와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에만 근거를 갖는 하나님의 권력은 일종의 '포기'와 유사하다. 부모라면 누구나 알듯,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 상대방이 거절하기로 한다면 사랑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것 아닌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하나님은 나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정 그렇다. 우주의 주인께서는 어떤 뜰에서 일단의 병사들에게 맡겨진 무력한 희생자가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힘 없는 존재로 만드셨다. 인간들에게 그와 관련된 일을 그들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주기 위해.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가벼운 접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손으로 세상을 우악스럽게 그럴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피조물들이 충분히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과 가볍게 접촉하실 수 있다." 나 자신이 인정하는 바이지만, 이따금씩 나는 하나님께서 좀더 강하게 접촉해 주시기를 바란다. 불신앙의 자유와 유혹이 너무도 많이 허용되고 있어서 내 믿음은 오히려 고통받는다. 때때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제압해 주시기를, 내 의심을 확실히 제거해 주시기를, 그분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흔들림 없는 증거를 주셨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서 좀더 능동적인 역할을 맡아주셨으
면 한다. 하나님께서 그저 슬며시 내려와 사담 후세인 같은 인간을 손끝 하나로 권좌에서 날려보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걸프전쟁의 포연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히틀러에게도 그렇게 하셨다면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에서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닌가? 왜 하나님께서는 '수수방관만 하고 계셔야 하는가?
나는 또한 하나님께서 내 개인사에서도 좀더 능동적인 역할을 맡아주셨으면 한다. 나는 내 기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극적인 응답을 원한다. 내 질병에 대한 치유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보호를 원한다. 나는 막연함이라는 것이 완벽하게 제거된 하나님, 그래서 의심하는 내 친구들에게 명확히 일러줄 수 있는 하나님을 원한다. 이러한 내 생각들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약하긴 하지만 사탄의 음성이, 이천 년 전 예수에게 도전하던 그 사탄의 음성이 서서히 울려 퍼지고 있지 않은가? 예수가 지상에서 그 유혹들을 거절하고 좀더 느리고 온건한 방법을 취했듯이 오늘날 내 앞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유혹들을 거절하신다.
*조지 맥도널드(George MacDonald)는 말한다.
신적인 권능으로 악의 세력을 멸하는 대신, 사악한 자들을 물리치고 강제적으로 정의를 펼치는 대신, 완전무결한 왕으로 통치함으로써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대신,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원하거나 말거나 그들을 무조건 자신의 날개 아래 모으고는, 자신의 예언자적 기백을 흔들리게 했던 공포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는 대신, 그는 악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 제 할일을 하게 했다. 그는 별로 극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천천히 필요한 만큼만 도와주는 것에 만족했다.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한다든가, 사탄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쫓아내기만 하는....
의를 사랑한다 함은 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더 자라나게 함이다. 그는 일을 속전속결로 해치움으로써 저급한 선이나마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충동에 저항했다.
*이반 카라마조프가 "억제의 기적"이라 부른 그것에 나는 공감하게 되었는데, 예수를 알아 갈수록 그 공감의 정도는 깊어졌다. 사탄이 제안한 기적들. 바리새인들이 요구한 이적과 기사들, 내가 바라는 확고부동한 증거들, 이 모든 것들은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결코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놀라운 것은 오히려 그분께서 그 기적들을 행하사 세상을 제압하시기를 한사코 거절하셨다는 데 있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된 태도는 절대적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갈 자유를 주었고, 그분에게 침뱉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까지 허용했다. 광야의 유혹자와 대결할 때 예수는 이미 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 광야에서 예수는 억제력이라고 하는 것 하나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억제력을 한사코 고집하는 이유는 당신의 전능을 아무리 화려하게 전시해 봤자 정작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권력은 복종을 강요할 수 있지만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그 사랑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것이고, 우리를 창조하신 유일한 이유이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의 본의를 놓칠까 하여 요한이 덧붙인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3)." 하나님의 본성은 자기를 내어줌에 있다. 그분은 희생적 사랑에 근거하여 호소하신다.
*예수는 광야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명예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 어쨌거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어느 날엔가는 완전히 회복하시겠다고 줄곧 약속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까지의 형편이란 어떠한가? 인류역사는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교회역사마저 잔학성으로 점철되었으며, 사태는 점차 종말로 치닫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신은 억제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냉정하게 표현해서, 인간의 자유라는 게 그 정도의 대가를 치러도 좋을 만큼 소중한 것인가?
회복의 최종지점을 보기 전까지는, 다시 말해 회복의 과정 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올바로 답변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예수가 악을 멸절할 권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악과 정면대결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뿐이다. 예수가 보기에, 지독하게 흠이 많은 인류라는 종의 자유의지 보존이야말로 그 정도의 대가를 치러도 좋을 일이었다. 물론 예수의 이 선택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이 선택은 자신의 추종자들의 고통은 물론 예수 자신의 고통까지를 요구하는 일이었으므로, 예수 생애의 나머지 면들을 탐사하다 보니, 광야에서 한 번 발휘된 억제력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하나의 경향성으로 지속되지 않는가! 확실히 그렇다. 나는 남의 팔을 비틀어 쥔 예수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그저 선택의 잇따른 결과들이 어떠하리라는 점만을 진술하고 결정은 상대방의 몫으로 남겨줄 뿐이었다. 그는 부자 청년의 질문에 일말의 여지없이 완고한 말로써 답변하고는 그를 보내 버렸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시의 적절하게 주석을 달았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막 10:21). 예수는 세상이 예수 자신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2).
*예수는 분쟁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조롱꾼과 비방자들을 상대로 싸웠다. 한번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는 군중들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를 잡으러 온 하속들이 빈손으로 성전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요 7:46). 하속들은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두려워 떨며 말했다. 예수는 귀신들에게는 직접 명령하기도 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막 1:25).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 9:25,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 혹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알아보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은 오히려 사람들이었다).
예수가 자신에 대해 한 언명들(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죄를 사할 권세를 가졌노라. 내가 사흘 만에 성전을 다시 세우리라)은 전례 없던 것으로서 그 자신을 늘 곤경 속에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진실로 그의 가르침들은 자기 자신과 깊이 관련되어 있던 터라 그가 한 많은 말들이 죽음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위대한 주장들은 십자가 위에서 그와 더불어 죽었다. 일찍이 그를 선생으로 따랐던 제자들은 본래의 생업으로 돌아가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눅 24:21). 진리의 선언자가 선언된 그 진리 자체가 되기까지는 부활이 필요했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게 그런 것일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팔복에 나타나는 바 예수의 드림은 아니라는 점이다. 팔복은 하나님께서 아주 다른 렌즈를 통해 이 세상을 보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포준지의 세계 500대 부자 명단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바닷가를 발랄하게 뛰노는 슈퍼 모델들보다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더 아끼시는 것 같다. 이상한 노릇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우스 센트랄 LA를 말리부 비치보다 더 좋아하시고 르완다른 돈테까를로보다 낫게 여기신다는 말씀이다. 사실 누군가가 산상수훈에 부제를 붙인다면 적자생존'이 아니라 승리한 희생자들' 쯤 될 것이다.
복음서 여기저기에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께 인상적이었는지 우리로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헌금통에 동전 두 개를 넣은 과부, 별로 정직하지 못하게 살던 주제에 예수를 잘 보려고 나무 위로 올라간 세금장이, 이름도 모르고 낯도 모를 아이,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다섯 번이나 치렀던 여자 눈먼 거지, 간음한 여인, 문둥병 자, 우리가 사는 사회는 힘 있고 외모 좋고 연줄 많고 경쟁심이 강한 사람이라야 성공한다고 보는 사회다. 그런데 그 성공의 요소들이 정작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도리어 의지하고, 슬퍼하고, 회개하고, 정말 변화받기 원하는 그런 마음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라고 예수는 말했다. 어떤 주석은 이 구절을 "절망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풀었다. 왜냐하면 아무데도 향할 데가 없는 절망한 사람이라야 결국 예수께 향하게 되기 때문인데, 정작 이 예수야말로 그가 찾던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정말로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고 슬퍼하는 자, 박해를 받는 자,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오히려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만약 절망한 사람이 바로 절망했음으로 해서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청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이야말로 복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만사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곳이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애통하는 자 그리고 억압받는 자가 참으로 복 있는 자라고 하니 말이다. 물론 그런 처지 자체가 복 있다 할 수는 없는 것이 만약 그랬다면 예수가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려 애썼을 까닭이 없다. 부유한 사람, 성공한 사람 그리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타고난 재능에 의지해서 인생을 잘 통과한다. 하지만 그런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 즉 이 세상에서 성공을 거두기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은 어려울 때면 하나님을 향할 밖에는 달리 길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쉽사리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다. 하지만 인정할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다.
*그가 말했다. “이 우정에서 득을 보고 있는 건 아담이 아니라 바로 접니다.”
그리고 나서 나웬은 아담과의 관계로 어떤 이득을 보고 있는지 죽 열거했다. 아담과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깊은 내적 평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거기 비하면 다른 활동들, 특히 고도로 정신적이기만 한 활동들은 너무나 지루하고 피상적인 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이 어린아이나 다를바 없는 사람 옆에 앉아 있노라면 나웬 자신은 학문의 세계 및 목회사역에 있어 얼마나 성공과 경쟁에 집착해 왔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아담에게서 "참인간이 되는 길은 우리 정신이 아니라 가슴이며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고 했다. 또한 아담의 단순한 성격을 보노라면 사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려면 '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함과 비움은 사막의 수도자들이 오랫동안 찾고 또 훈련해서 간신히 성취하는 덕목이 아니던가.
그런데 나웬은 나와 얘기하는 동안 수시로 내가 질문한 내용을 거론했다. 마치 내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담과의 관계로 해서 그가 얻은 유익을 계속 이런저런 식으로 생각해 내는 것이었다. 과연 나웬은 새롭게 얻은 영적 평화, 하버드의 위풍당당한 풍경에서는 얻을 수 없었지만 대소변도 제대로 못가리는 아담의 침대 곁에서는 얻을 수 있었던 그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를 떠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영적 가난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내 삶이란 작가로서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꾸리기 위해 다른 데 관심이 분산되지 않게끔 세심하게 뭉쳐 놓은 것이 아니던가. 자비를 베푸는 자는 과연 복 있는 자니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할렘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킹은 이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면서 냉정을 되찾자는 호소를 하였다. 도무지 비도덕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참된 도덕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군중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애썼다. 킹은 산상수훈과 간디를 통해서 그같은 원리를 배운 것인데 그가 하는 거의 모든 메시지가 다 그 원칙을 반복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독교가 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영광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고 킹은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 함은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온갖 어려움과 고통, 긴장을 무릅쓰고라도 그 십자가를 짐으로써 마침내 우리 안에 그 뚜렷한 흔적이 남고 또한 구속을 이루게 되는데, 가장 좋은 것은 고통을 통해서만 오게 돼 있는 까닭" 이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라고 약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틀림 없이 했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또 어떤 자기 보존의 유혹 속에서도 그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는 원칙을 고수했던 것이다. 얻어맞고도 되받아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복수를 주장할 때 화평을 외쳤다. 민권운동에 참여하여 행진했던 사람들은 맨 앞줄에 자기 몸을 세워 경찰봉에 맞고 독일산 셰퍼드에 물리곤 하였다.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추구했던 바 승리를 얻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민권운동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만든 한 가지 사건을 지목한다. 이 사건은 알라바마의 셀마 외곽에 위치한 한 다리에서 발생했는데, 당시 주지사 짐 클락이 경찰들로 하여금 비무장 데모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하게 했던 사건이다. 미국 대중은 이 엄청난 불의와 폭력에 충격을 받았고 마침내 민권헌장 가결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팔복에서 얼른 보기엔 이상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말들 안에 예수는 도리어 풍성한 생명에 이르는 열쇠를 넣어 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기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버린다고 했다(마 13:44).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무엇보다도 더 진정하고 항구적인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상에서도 몫이 있는 보물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이를 얻기 위해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얻을 것에 더 강조점을 두어 말한 것이다. 오히려 그런 보물을 추구하는 것이 정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처음 팔복을 접했을 때는 도무지 정신 없는 신비주의자가 가능하지도 않은 이상을 지껄인 것에 불과하게만 들렸다. 그러나 지금은 노먼 슈왈츠코프 장군 못지 않은 현실주의자가 선언한 참된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예수는 인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말이다. 그 자신은 가난과 슬픔, 유순함, 의를 향한 목마름, 자비, 정결함, 화평 그리고 박해로 특징지워진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삶 안에서 팔복을 구현한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애초에 우리들보다 자신을 향한 말로 팔목을 정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워낙 그의 생애는 그 힘든 진리를 실천해 볼 기회가 많았을 테니까.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온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알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온전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온전함으로부터 얼마만큼 비켜 서 있는지일 뿐이다.
레오 톨스토이
*'여러 해 동안 나는 산상수훈이 인간이 지켜야할 지침을 제시하는 청사진이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예수가 단지 우리에게 신앙에 대한 빛을 지우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려고 산상수훈을 전한 것임을 깨달았다. 산상수훈에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그 원형이 나타나 있다. 왜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은 지극히 자비로운 우리의 아버지께서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햇빛을 비추시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온전해져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아 두어야 하는가?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곳에 거하시고, 그 보화에 대해 후한 보상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백합과 들에 피어나는 풀들조차 아름답게 꾸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로 했기 때문이다. 왜 기도해야 하는가? 육신의 아버지도 그 자식에게 물고기와 떡을 주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을 또 하나의 형식화된 율법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가장 큰 비극이다. 산상수훈은 모든 형태의 율법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와 같은 것은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너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엄격함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마른 하늘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처럼, 산상수훈은 단호하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똑같은 존재임을 피력한다. 살인자나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자, 간음한 자 또는 그저 호색가일 뿐인 자, 도둑질을 한 사람과 실제로 훔치지 않았더라도 날의 물건을 탐하는 자, 그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는 구별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비참하고 절망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절망과 비참함을 절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고 한다. 우리가 절대적인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절감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로운 품 이외에 다른 안식처는 결코 없다.
*웬디 캐미너는 기독교를 이해해 보려고 애쓴 현대의 유태인으로서 이런 말을 했다. 이 은총을 통한 구원이란 교리 하나만 놓고 봐도 나한테는 도무지 신앙의 한 신조로서는 와 닿지 않는다. 내가 생각할 때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행위보다 믿음을 더 가치 있게 여기신다는 점을 지나치게 이상화시키다 보니 정의를 깡그리 무시한 것이라 본다. 나로서는 차라리 어느 우스갯소리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위에서 내려다 보시면서 '저 친구들이 이제 내가 있는지 없는지 걱정하는 짓일랑 그만두고 계명을 지키기나 했으면 하시는 하나님이 낫다."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잔소리 말고 내 계명이나 지키거라”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게 훨씬 쉽다.…
과연 예수는 여성이나 당시 억압받던 사람들을 위해 당대의 사회가 지혜로 받아들인 바를 완전히 뒤엎어 버렸다. 바리새인들은 부정한 사람과 닿기만 해도 부정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는 문둥병자를 만지고서도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고 도리어 문둥병자의 병이 깨끗해졌다. 행실이 좋지 못한 여인이 예수의 발을 씻었을 때 용서받고 또 변화받아 돌아간 사람은 바로 그 여인이었다. 또 당시의 관습을 어기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이방인의 종이 고침을 받았다. 말로나 행동으로도 예수는 완전히 새로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복음 안에서 사람들은 정결함을 얻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었고 제사를 지내거나 정결법을 따라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예수를 따르기만 하면 족했던 것이다. 월터 윙크는 이를 “거룩함의 전염이 부정함의 전염을 이겼다"는 말로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예수는 강조점을 하나님의 거룩하심(배타성)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포괄성)으로 옮겼다.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들어올 수 없다"는 메시지 대신에 하나님 나라에는 애시당초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란 있지 않다"는 선포를 한 것이다. 이방인과 서슴없이 만나고 죄인들과 더불어 먹으며 병자를 꺼리지 않고 만지는 등의 행위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자비가 미치는 영역을 넓혔다. 한편 유대 지도자들 눈은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곧 그들의 종교적 카스트 제도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쳤다. 복음서에서 스무 번 이상 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음해를 시도한 기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예수는 자신의 온갖 사회적 접촉을 통해서 팔복에 들어 있는 ‘위대한 역전’ 을 몸소 실천에 옮겼다. 대체로 이 세상은 부자, 외모가 빼어난 사람, 성공한 사람을 높이 우러러본다. 그러나 은총은 새로운 논리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을 사랑하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써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레니우스가 말한 바 '은총으로 치유된 눈'으로 보도록 도전했다.
예수가 한 비유는 바로 그러한 선교를 위한 것인데, 그의 비유 속에서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가 오히려 영웅이 되고 있다. 한 가지 예가 바로 거지 나사로에 관한 비유인데(사람 이름이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비유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부자한테 푸대접받고 멸시를 받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야기 첫머리에서 부자는 호화로운 음식과 의복을 누리는 한편 나사로는 부자가 사는 집 문에서 온몸에 상처가 난 채 개들과 더불어 비참하게 산다. 그러나 죽음이 이들에게 찾아온 이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이야기의 끝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서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내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눅 16:25) 하는 글을 듣는다.
이 통렬한 이야기가 초대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을 것은 그들 중 다수가 경제적으로 하층에 속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국에서도 거부당하고 영혼의 고향으로 생각했던 곳에서도 거부당하자 엔도는 신앙의 크나큰 위기를 겪게 된다. 엔도는 예수의 생애를 조사해 보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방문한다. 그리고 거기서 엄청난 발견을 하게 된다. 예수도 거부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점이다. 아니 예수의 생애는 바로 이 거부당함으로 규정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고 가족들마저 그가 정신이 나가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서 배신 당하거나 버림받았고, 자기 조국의 사람들이 남의 나라 사람들 손에 그 목숨을 넘겨주었다. 사실 예수는 사역을 활발히 했던 기간에도 늘 가난한자, 하층민, 거부당한 자들의 인력에 끌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이 같은 발견은 엔도로서는 계시와도 같은 힘으로 다가왔다. 일본에 있을 때만 해도 그는 기독교를 기세등등한 콘스탄틴적 이미지로 이해했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을 공부하고 십자군의 번지르르한 외양과 유럽의 어마어마한 대성당들을 찬양해 마지 않으면서 언젠가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창피함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나라에서 사는 꿈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공부하면서 예수도 자신의 불명예를 꺼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사야서가 그리는 바와 같이 고난받는 종이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사 53:3). 비로소 엔도는 이 예수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겪었던 거절과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 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때 예수의 고통을 복음서는 유대교나 기독교 순교자들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서술하고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막 14:36) 하고 그는 간청했다. 이 기도엔 경건한 맛도 틀 잡힌 기도의 외형도 없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번민케 했을까? 다가올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물론이다. 그 점에 있어서 예수는 우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게 거기 끼어 들고 있었는데, 예수로서는 처음 하는 경험, 즉 하나님께 버림받음이라 할 무엇이었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그것이 겟세마네 이야기의 핵심에 놓여 있다. 예수가 한 기도와는 달리 고난의 잔은 거두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이 예수를 거부했다. 그 증거가 그날 밤 동산 길로 접어드는 횃불 행렬로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도 예수를 내버리고 달아날 판이다. 기도하는 중간에도 예수는 단단한 돌벽에 부닥치는 느낌에 더욱 비통했을 것이다. 하나님마저도 아무런 응답 없이 멀어져 버린 느낌.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는 만약 하나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막 1446) 하는 기도에 응답하셔서 사건에 개입하셨더라면 어떻게 됐을지를 성찰해 내고 있다. 물론 예수가 힘이 없었던 건 분명 아니다. 만약 그가 아버지의 뜻보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들었다면 열두 군단의 천사들(72,000명)을 불러 거룩한 전쟁을 치르게 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예수는 일찍이 사막에서 치렀던 사탄의 유혹을 다시금 겟세마네에서 치렀던 것이다. 두 번 나 예수는 힘으로 응징하고 나설 수 있었다. 광야에서도 그렇고 동산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그랬더라면 교회의 역사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탄생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차피 인간의 역사 자체가 느닷없이 중지되고 시대는 끝장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가 그렇게 되라고 말만 하면 됐을 일이다. 그러면 따로 희생을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이후 구속의 어수선한 역사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겨자씨에서 자랄 왕국도 없고 대신 폭풍처럼 위에서 내려오는 왕국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더가 결론 지은 것처럼 그 잔' 이야말로 예수가 지상에 온 목적이었다. "여기 이 십자가에 자기 원수를 사랑한 사람, 그의 의로움이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컸던 사람, 원래 부요했으나 가난하게 된 사람, 겉옷을 달라 하는 자들에게 줘버린 사람, 자기를 이용하고 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매달려 있다. 십자가는 왕국으로 가는 우회로도 아니고 장애는 더더구나 아니다. 십자가는 왕국으로 가는 길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와 있는 왕국 그 자체다."
고문과도 같은 기도가 여러 시간 흐르고 난 뒤 마침내 예수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그는 나중에 이 말로 그때 일을 표현했다. 이 순간 이후 예수는 마지막으로 잠에 떨어져 있던 제자들을 깨우고는 담대히 어둠 속을 나아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앞에 나선다.
*예수가 숨을 거두었을 때 거친 로마군인 하나도 감동을 받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 15:39) 하고 말했다. 그로서는 야비하고 잔인한 자기 동료들과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조차도 그들을 용서하는 희생자가 뚜렷이 대비되어 눈에 들어왔으리라. 십자가에 두 팔을 벌리고 매달려 있는 그 창백한 인물은 정의를 약속하고 경건심을 자랑하면서도 스스로는 그 약속을 깨는 이 세상의 권력이 얼마나 거짓된 우상인지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론자가 아닌 종교가들이 예수를 고발했고 무법자가 아닌, 소위 법을 집행한다는 자들이 예수를 처형했다. 대충 구색을 갖춘 재판과 매질, 폭압으로 예수를 누르는 과정에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즉 그들은 자기 지위를 유지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나 관심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예수에게 가한 행위 하나하나가 그들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양편에서 처형된 강도 둘은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두 가지 반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강도는 힘없이 당하는 예수를 비웃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눅 23:39). 그러나 다른한 강도는 세상의 힘과는 다른 종류의 힘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 모험을 하면서 예수께 부탁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조롱할 때를 빼놓고는 누구도 예수를 왕이라 칭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옆에서 죽어 가던 강도만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의 왕국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본 것이다.
어떤 의미로 그 두 강도는 인간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놓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의 무력함을 무능한 하나님의 예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산 예로 볼 것인가? 주피터와 같이 강한 신을 섬기던 로마인들은 나무에 매달려 비비 꼬인 자세로 죽은 시체에서 신성을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여호와의 힘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교육 받은 경건한 유대인들 또한 이 무력하고 수치스럽게 죽은 신에게서 떠받들 만한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순교자 저스틴이 유대인 트리폰과 나눈 대화에서도 유대인들로서는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그를 메시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유대인들한테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스캇 펙(M. Scott Peck)은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랑의 방법론에 대해 전쟁터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한 늙은 사제의 이 말을 인용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사제는 "악에 대항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고 악을 정복하는 길도 여러가지다. 그러나 그 모든 방법들이란 진리, 즉 악을 정복하는 궁극적인 길은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 내면에서 그 악이 질식돼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여러 면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마치 스폰지가 피를 빨아들이듯, 혹은 심장을 창이 꿰뚫듯, 그렇게만 되면 악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시들고 마는 것이다."
악을 치유한다는 것은 - 과학적으로든 뭐든 간에 – 오로지 인간 각 개인이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려면 의지를 갖고 어떤 희생을 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세상의 힘의 균형은 조금씩 바뀌는 것이다.
*갈보리에서 힘의 균형은 조금만이 아니라 크게 바뀌었다. 그것은 그날 악을 흡수한 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나사렛의 예수가 그저 킹 목사나 만델라, 하벨, 솔제니친과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희생자였을 뿐이라면, 역사 안에서 그의 자취는 좀 남았을지 몰라도 세월과 함께 퇴색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종교가 그로 해서 탄생했을 리도 없고, 역사를 뒤바꾼 것은 제자들이 여명의 자각을 가짐으로써였다(이들이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부활을 통해서였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서라는 자각이었던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해 사랑 때문에 힘을 포기하실 수도 있는 분으로 재정의하게 했다. 도로티 켤레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는 "하나님 편의 일방적인 무장해제" 가 된 것이다.
힘이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고통을 낳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은 스스로 약해짐으로써 그 고통을 자기가 흡수해버린다. 갈보리 언덕이라는 한 집합점에서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 이 한 사람을 단절하셨던 것이다.
*처형 장면과 부활을 계속해서 읽노라면, 왜 예수는 좀 더 자주 나타나지 않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만 나타난 까닭은 왜일까? 기왕이면 빌라도의 법정이나 산헤드린 앞에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진광풍을 몰고 당신을 정죄하던 자들 앞에 나타났으면 좋잖은가? 어쩌면 도마의 의심을 녹여 없애던 날 도마에게 한 말 속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만약 그렇다면 부활과 승천 사이의 간주곡 같은 6주간에 예수는 믿음에 관한 법칙을 ‘스스로 위배 한 셈이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서 제자들이 다시는 의심을 품을 수 없도록 했다(그리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는 제자들의 믿음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봤는데 거기 믿고 자시고 할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존재인데 말이다. 가족이면서도 반발하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조차도 부활한 예수를 보고 나서는 완전히 항복하여 나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결국 순교자가 된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요 20:29)라고 예수는 말했다. 예수를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이들이 믿음을 갖기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예수는 멀지 않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따라서 후일에는 그를 '보지 못한 사람들'만이 지상에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가 서고 못 서고는 이제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 - 오늘날 우리를 포함해서 - 을 얼마나 잘 설득해 내느냐에 달리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로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히 해서 후대에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시간은 단 6주뿐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 별로 듬직하지 못한 무리들, 당신이 십자가에 죽게 되자 줄행랑을 친 이 열한 제자들을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순교도 마다 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진 박해가 예루살렘, 나아가서 로마에서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이 보여준 놀라운 변화야말로 부활에 대한 가장 힘 있는 증언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겁 많고 변덕 심한 무리의 전격적인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내가 부활에 마음을 여는 까닭 중 하나는, 아마도 마음 깊은 속에서 내가 부활이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신앙은 강렬한 희망이 기름으로 타오르는 것일 수 있는데, 인간 존재의 원초적이라 할 무엇에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기를 강렬히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이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들처럼 피라밋 안에 보석이며 병거를 갖다 집어넣는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아니면 오늘날 어떤 미국인들처럼 시신을 이중처리한 관에 미이라처럼 잘 보관하려는 노력의 형태로 드러나든지 간에 인간은 죽음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저항하려 든다. 어떻게든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란 얘기다.…
십자가 밑에 모여든 군중들은 예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증명해 보라고 야유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그렇게 하리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진행되고 보니 예수를 잘 알았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것처럼 말이 되는 각본이 달리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과 방식에도 너무나 잘 맞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록 느리고 어려운 길이더라도, 크나큰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인간의 자유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없애 버리시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을 변화시키실 따름이다." 도로시 세이어스가 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리지 않으셨다. 다만 그 죽음에서 부활을 일으키셨다." 이 이야기에서 영웅은 모든 쓰디쓴 결과를 그대로 달게 받는다. 그러고도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 이야기 중 늘 호기심을 자아내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예수는 무엇 때문에 십자가형에 생긴 상처를 부활 이후에도 지니고 있었던 걸까? 추측이지만 어떤 형태가 됐든 그가 원하는 대로 부활의 몸을 지닐 수 있지 않았을까? 좌우간 예수는 남들이 보고 만져 보고 그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왜일까?
사실 부활 이야기는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이야기가 빠지면 완성 되지 않는다. 우리더러 공상해 보라면 아마 고른 치열의 진주 같은 치아에 흠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성적 매력이 철철 넘치는 몸매를 원했을 것이다. 완전한 육신 말이다. 사실 우리는 아주 부자연스런 상태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 그가 인간의 뼈와 살 안에 갇혔다는 사실 자체가 부자연이다. 그리고 그 부활한 몸에 지닌 상처는 그가 지상에서 지냈던 시간의 상징과도 같을 것이다. 말할 수 없이 제한되고 고통을 겪었던 날들을 줄곧 생각나게 하는 표시로서 말이다.
나는 예수의 이 상처에 희망을 둔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상처들은 우주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사건 - 십자가-조차도 부활은 하나의 회상거리로 삼은 것이다. 부활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마음의 고통,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을 잃는 충격과 비탄, 이 모든 것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으로 남으리라 믿는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랬듯이. 그 상처의 흔적은 남지만 아픔은 사라진 그런 방식으로 그리고 우린 모두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활절은 시작될 것이다.
나는 역사를 보는 방식엔 두 가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전쟁과 폭력, 비열함, 고통과 비극, 죽음에 초점을 맞춰 역사를 살피는 방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부활이란 정말 동화 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엄청난 모순의 사건이다. 부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비록 내 친구들이 죽었을 때 사후의 삶이 있다는 어떤 종류의 믿음도 실감이 안나고 도무지 실체가 없는 것같이만 느껴졌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말이다.
*시간이 흘러 마음의 상처도 좀 가시면 제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스승을 기억할 방법을 모색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복음서와 비슷한 형태로 예수의 말들을 모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굉장한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혹은 순교한 예언자들을 공경하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의 인생도 그런 각도에서 기려 기념비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요즘 사람들도 그 비를 보고 옛날 나사렛에서 목수이자 사상가였던 이가 있었구나 하고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록에서 구미에 맞는 대로 골라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건 무시하고 그랬을 것이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는 마치 공자나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것처럼 비슷한 존경은 받았으리라.
여러 면에서 차라리 부활하지 않은 예수를 받아들이기가 쉬웠으리라는 생각마저 든다. 부활이 있어 오히려 예수는 어렵다. 부활 때문에 그가 한 엄청난 얘기를 통째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고 구미에 맞게 이것은 고르고 저것은 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라는 분이 저기 어딘가에 자유롭게 있어야 할 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예수가 어디서 홀연히 나타날지, 어떤 식으로 말을 걸지, 또 나에게 무얼 요구해 올지 알 길이 없다. 프레드릭 부크너가 말한 대로 부활은 "우리가 도무지 그를 못박아 둘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못을 써 십자가에 달아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활로 해서 예수의 일생은 완전히 다른 빛 아래 조명된다. 부활을 빼고는 그의 일생이 비극적이었다 할 것은 사역 몇 년을 고작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고작 이 세계 한 귀퉁이의 소수에게만 활동한 것뿐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똑같은 일생에 부활을 덧붙여 생각해 보면 도리어 그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예수가 계획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즉 그는 후일 자신의 메시지를 들고 이 세상에 나갈 사람들을 주변에 모으리만치만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월터 윙크가 지적한 대로, 예수를 죽인 것은 민들레 홀씨를 불어 날려서 없애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후 예수는 남아 있던 신자들의 모든 의심을 수증기로 날려 보내는 데 고작 사십 일을 머물고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부활과 승천 사이의 시간이란 사실 간주곡 그 이상이 아니다.
만약 예수가 부활한 일요일이 제자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스런 날이었다면, 예수는 승천한 날이 그러했을 것이다. 만물을 창조한 기의 그 시따에 내려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셈이니까. 오랜 혈전을 치르고 바다를 건너 귀국하는 군인처럼, 친숙한 지구의 공기 속으로 되돌아와 갑갑한 우주복을 훌훌 벗는 우주 여행사처럼,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가 한 기도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관점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런 기도를 바쳤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4-5).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먼 옛날을 추억하는 노인처럼 - 아니, 나이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기억으로 - 지금 예루살렘의 갑갑한 다락방에서 예수는 잠시 은하계와 안드로메다가 생기기 이전으로 마음이 흘러가게 한 것이다. 두려움과 위협에 찬 지상의 한 어두운 밤에 그는 귀향하여 한편으로 제쳐놨던 영광을 다시 입을 준비를 했다.
*나는 마지막 만찬에서 일어난 일을 부모가 하는 수 없이 갱에게 자기 자식을 넘겨주는 일이나 장군이 부하들을 사지에 들어가라고 명령하는 일에 비교해 봤다. 그 자리에서 예수는 떠난다는 말을 아무도 오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즉 처음부터 예수는 자신이 떠남으로써 도리어 다른 사람들의 몸을 통해 일이 계속되도록 계획했다는 말이다. 그들의 몸, 우리들의 몸, 그리스도가 입은 새몸.
그런데 그 시점에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떠나시는 게 우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들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 (눅 22:19)을 나눠 먹었다. 그 안에 담긴 엄청난 뜻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순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이 다시 아들을 통해 그들에게 위임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8) 라고 예수는 기도했다.
사실 예수는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긴 것이 별로 없다. 책을 쓴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팜플렛 같은 소책자 하나 남긴 게 없다. 집도 없이 이곳 저곳을 다녔고 어디 박물관에 안치할 유물 같은 것도 남기질 않았다. 결혼도 안했고 어디 정착한 적도 없으며 무슨 왕조를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가 사람들 속에 남긴 것을 빼놓고는 사실 그를 알 길이 하나도 없을 뻔했다. 그러나 그게 바로 그의 설계였다. 율법과 예언서는 올 그에게 조명을 집중하듯 시선을 모으고 있다. 이제 빛으로 온 그는 마치 한줄기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 형형색색으로 퍼지듯 온갖 다양한 흐름과 색깔의 사람들 프리즘을 때려 사방으로 퍼진 것이다.
당시엔 몰랐지만 6주가 지나면 제자들은 "너희에게 유익” (요 16:17)하기 위해 떠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끔 돼 있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우리 눈에서 벗어나 승천하셨고 우리는 슬퍼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신을 우리 가슴속에서 발견했습니다.”
*비유의 내용으로 볼 때, 예수는 자신이 두고 떠나는 세상에 여전히 가난한 사람, 주린 사람, 옥에 갇히는 사람, 병자가 있을 걸 알았다. 이 낡아 덜그덕거리는 것 같은 세상의 상태가 그에겐 새삼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런 세상에 대해 일할, 장기 혹은 단기의 계획만을 세웠다. 장기계획 속에는 마침내 능력과 영광 속에 재림하여 모든 것을 바로잡는 것이 들어 있다. 단기계획은 일단 다른 이들에게 이 세상 일을 맡겨 두는 것인데, 결국 우주의 해방이 좌우될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승천했고 이제 우리가 그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지금까지 내가 수없
이 물은 질문이다. 그 대답은 질문을 달리할 때 찾을 수 있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교회는 어디 있는가?"
마지막에 물은 질문은 사실 역사의 문제를 함축시킨 질문이며, 승천이 내 신앙에 큰 도전을 주는 사건이라고 말한 까닭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예수는 당신 왕국의 열쇠를 우리 어설픈 손에 쥐어주고 떠난 셈이다.
예수를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내 드러난 또 한 가지 명제가 있었다. 그것은 교회 자체가 켜켜이 쌓은 먼지와 오점을 걷어 내야 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다. 우선 예수의 이미지 자체가 인종주의와 편협함, 근본주의의 속좁은 율법주의로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나 유럽의 카톨릭 신자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접한다. “먼지만 쌓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금을 너무 갖다 발라도 참된 상을 가릴 수 있다"고 독일 신학자 한스 큉은 말한다. 어쩌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알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고 산다. 교회의 잘못에 가려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정작 그리스도의 발치에도 못미친다”는 건 정말 서글픈 일이라고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는 말했다. 그말을 생각하다 보니 언젠가 유세장에서 본 티셔츠 문구가 생각난다. 거기엔 “예수여, 우리를 구하소서.… 당신을 따른다는 사람들로부터! 라고 쓰여 있었다. 뉴질랜드 영화 "천국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에서 두 소녀가 하늘 나라를 상상하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나온다. “정말 더 나은 천국이라니깐. 거기엔 예수쟁이들이 하나도 없어!
문제는 교회 초기부터 등장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해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가 쓴 표현을 읽어 보자.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바울이 쓴 인상 깊은 은유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눈이요 귀요 손이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방식은 되려 그리스도의 눈을 충혈시키고 귀를 먹게 만들고 손톱이 뒤집어지게 하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수행하겠다고 든 것이다." 4세기 경에 어거스틴은 답답하기만 한 교회에 화가 나서 이렇게 썼다. "구름이 천둥을 몰고 오듯 주님의 전이 이제 온 세상에 지어질 판인데 이 개구리 떼는 그저 몸에 옹종거리고 '모여개굴개굴하면서 '우리만 신자요! 하고 앉아 있으니."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명성을 건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태한 것인지 예증할 인용문만으로도 이 책의 몇 쪽은 채울 수 있다. 예수와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 되기엔 턱없이 못미친다. 거기 비유하자면 우리는 엉터리 문법에 말도 더듬거리고 강조부호도 엉뚱한 데 갖다 붙이는 뒤죽박죽이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려고 해도 플라톤의 우화에 나오는 동굴인들처럼 그저 그림자나 볼 수 있을 뿐 빛 자체는 볼 수 없는 형편과도 같다.
*왜 우리는 예수가 의도한 교회가 못되는 걸까? 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데도 제대로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는가? 십자군 전쟁이나 이단 재판, 노예 거래, 인종분리정책 같은 걸 미리 예견했다면 애초부터 승천은 왜 한 걸까?
그런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는 게 나 자신도 그 문제덩어리인 교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따져 보면 내가 던진 질문들이란 게 결국 나 자신에게 뼈아프게 돌아오는 질문들이다. 왜 나는 예수를 별로 닮지 못했는가? 예수가 승천한 이래, 그 흐름을 내 나름대로 관찰해 보니 세 가지 정도 지적할 내용이 눈에 띄었다.
우선, 교회는 세상에 어둠도 가져왔지만 못지않게 빛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성프란시스는 거지에게 입맞추고 옷을 벗어주었으며 마더 테레사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으며 윌버포스는 노예를 풀어주었고 부쓰는 구세군을 세웠으며 도로시 데이는 주린 자를 먹였다. 그런 일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교육자들도 만났고 도시 목회자들도 만났으며 의사와 간호사, 언어학자, 구조대원, 환경학자 등등 보수도 별로 받지 못하면서 이름도 없이 예수를 위해 봉사하는 전 세계 도처의 사람들을 만났다. 좀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바하, 렘브란트, 대성당을 지은 이름 없는 석공들 등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자신의 최선을 바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손길은 지상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성공한 면 못지않게 실패한 면도 많다는 증거를 여기서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만이 내리실 수 있다. 계시록 첫머리를 보노라면 하나님께서 교회들을 보시되 얼마나 현실적으로 보시는지 알 수 있지만, 한편으로 신약 여기저기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분 눈에 우리는 '특별한 보물' 이요 기뻐 받으시는 향내 이자 '기쁨을 주는 선물' 이다. 도대체 우리의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인지 이런 표현들의 속내를 나로서는 정말 헤아리기 어렵다. 다만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지 아신다.
둘째로, 예수는 당신 몸의 모든 부분에 책임을 진다는 점이다. 너회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라고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 엉터리없는 제자들, 자기 스승을 자주 화나게 하고 종국에 가서는 그 스승이 가장 자신들을 필요로 할 때 버리고 떠났던 자들에게 말이다. 베드로를 생각하면 그 허세, 애정, 성급함, 방향을 잘못 잡은 열정 그리고 믿음을 저버린 배신행위 등이 늘 떠오르는데, 이 베드로는 이후 19세기 동안에 걸친 교회역사가 어떠리라는 예고편과도 같다. 베드로에게 말한 것처럼 과연 예수는 반석' 들 위에 교회를 세웠고 지옥문이 이기지 못하리라는 약속을 이 교회에 주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함께 생각할 때 나는 희망을 얻는다. 제자들이 예수를 실망시킨 것이 어디 그를 배신하던 날 밤만의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기록하기를 예수가 그들을 "사랑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문제란 한 그리스도인의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전혀 거룩하지 않은 잡다한 남녀 부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있을까? 나는 그 대답을 질문을 달리함으로써 하겠다. 어떻게 한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나가 가능하면 다른 하나도 가능하다.
내 스스로 자주 떠올리는 것 중 하나는, 사도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거나 하나님의 성전이라거나 하는 아름다운 말을 한 장소가 다름 아닌 고린도 교회, 그 결점 많은 사람들 투성이인 교회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고 한 그의 말은 사람이 쓴 글 중 가장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 (Flannery O'Connor)는 인간의 타락성에 대해 무지했다는 비평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작가인데, 하루는 교회 현실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고 이렇게 답변했다.
귀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교회더러 지금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성령께서 갑작스레 모든 육체에 깃들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어떤 것에든 표면에 드러나는 법은 드뭅니다. 결국 귀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애초에 창조하셨던 상태로 순식간에 돌아가라고 하는 말씀이신데, 여기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을 맞이하게 했던 교만을 간과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십자가형을 당하셨고 교회 또한 고난을 겪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부인했고 물위를 걸을 수도 없었던 베드로가 반석으로 섰습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교회더러 물위를 걸으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본성은 은총을 열심리 거부하게 되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변화란 사실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점이 있어서는 성직자들이라고 다른 사람과 다를게 없습니다. 교회를 귀하가 원하시는 대로 만들려면,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기적을 통해 마냥, 끊임없이 참견하고 간섭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두 군데를 기억해 둘 만한데, 오코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사를 보시면서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셨다는 것이다. 한 가지 선택은 끊임없이 인간사에 기적을 통해 간섭하시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일찍이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계속 '못박는' 것이다. 몇번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래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본성이신 하나님께서는 두번째 길을 선택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형에서 남은 상흔을 그대로 지녔듯이 이제 그의 몸된 교회가 남기는 상처도 그대로 품는다. 가끔 십자가가 남긴 상처와 교회가 남기는 상처 중 어느 쪽이 더 아플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군중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가 이야기하는 그 나라 혹은 왕국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상스러운 종류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바라던 것을 줄 수 있는 나라, 말하자면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나고, 실업자가 없으며, 강한 군대가 있어 침략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가시적인 왕국을 원했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부를 포기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나라를 선언했다. 예수가 그 나라를 이야기할 때 군중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런 그가, 가로지른 나무 기둥에 못박힐 즈음 해서는 모두가 희망을 꺾고 사라졌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고난받는 메시야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 열두 제자만 해도 그렇다. 예수가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아무리 자주 혹은 진지하게 경고해도 그들은 귓등으로 듣고 말 뿐이었다. 요컨대, 메시야가 죽는다는 생각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나라(kingdom)라는 말의 뜻을 두고 예수와 군중들이 보인 괴리는 실로 다대했다. 그러기에 예수는 대부분 배척당했다. 메시야란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전 국민적인 이미지에 예수 자신이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내가 오랫동안 궁구해 온 질문 하나가 있다. 자기 추종자들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예수는 왜 줄곧 나라라는 말을 가지고 그들의 희망을 부추겼을까?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자그마치 53회가 나온다) 모든 사람이 오해할 소지가 높은 그 말을 예수는 한사코 자기 자신과 연관지어 사용했다. 과연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일까?
추종자들의 기대를 저버린 한 사람이 전 역사를 통해 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서 아예 이름 자체가 '왕' (그리스도)이 되지 않았는가. 히브리어로 '메시야' 라 번역되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뜻으로 대관식의 고대 방식을 말한다. 이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우리 모두는 예수 시대 사람들을 그토록 당혹스럽게 했던 그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좀더 잘 이해하고 있는가?
*천국은 씨 뿌리러 나가는 농부와 같다. 농부라면 누구나 알 듯, 뿌린 씨앗 전부가 곡식을 내지는 않는다.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져 말라 죽고, 더러는 새나 들쥐들이 먹어 버리고, 더러는 가라지 틈새에 끼어 자라지 못한다. 농부에게야 이런 일들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전통적인 세상 왕국을 세우려는 자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현상이다. 왕국을 다스리는 왕들이야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그들의 뜻을 신민들에게 강요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으로 판가름 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권력이 아니라 저항할 수 있는, 제한적인 권력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예수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나라는 낮고 겸손하며 악과 공존하는 왕국이다. 까닭에 이 메시지는 대로마 반란을 꾀하려는 애국적인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으리라.
*요컨대, 예수는 상대방의 출신이나 성향이 어떠할지라도 인간 본연의 존엄성만큼은 존중하고자 했음이다. 그는 인종이나 계급 따위의 차별성 위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누구든, 설사 남편이 다섯이나 되던 혼혈 여인이나 십자가에 죽어가던 강도라 할지라도 그의 나라에서는 결코 박대당하지 아니할 터였다. 그의 나라에서는 계층이나 출신보다 사람 그 자체가 단연 중요했다.
예수가 보여준 이 인간 존중의 정신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내가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지지하던 대의명분이나 무슨 무슨 주의란, 사실 알맹이 빠진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극단적 대립의 정치에 가담해 상대편과 맞고함 질러대는 일이야 우리가 조금만 흥분하면 늘 보일 수 있는 행태 아니던가. 그리고 방금 낙태수술을 받고 병원문을 나서는 여인들이나 시술의사들, 혹은 문란한 성접촉으로 에이즈에 감염돼 죽어 가는 환자들, 또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착취하는 대지주들을 조건없이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 사랑의 부르심인 것을... 나는 늘 그것을 잊고 산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없다면 나는 내 자신이 진정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되물어야 하리라.
정치운동이란 속성상 선을 긋고 구분하고 판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그 선을 지우고 구분을 초월하며 판단 대신 은혜를 베푼다. 낙태 반대운동을 하는 우익이든 평화와 정의라는 가치에 중점을 두는 좌익이든 나름대로 내건 이슈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정치운동인 이상 거기에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생명체를 질식시킬 권력의 덮개가 도사리고 있다. 내 자신이 무슨 대의명분을 지지하든 사랑과 겸손의 덕목을 배제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예수로부터 배운 바다.
*C. S. 루이스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왜 하나님은 원수가 지배하는 세상에 변장을 한 채로 상륙하는가? 그리고 왜 비밀단체 같은 수단을 통해서 악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그는 왜 악이 지배하는 나라에 대규모로 침입하지 않는가? 그는 그럴 만큼 강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그가 전면적으로, 대거 진군해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왜 지체하고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각자의 의사에 따라 그의 편에 가담할 기회를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침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세상에 공개적으로, 직접적으로 간섭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는 사람들이 정작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나 하고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 일이 벌어지면 세상은 끝이다. 극작가가 무대로 걸어 나오면 연극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순간에야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날이 이르기까지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해야 하며, 언제나 복음서에 비추어 그 미래의 원형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구약성서의 '주의 날' 이라는 말씀은 두려움을 자아낸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약성서가 말하는 주의 날은 확신으로 다가온다. 신약의 저자들이야 주의 날의 주인이신 그 주님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그들은 진정 그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음이다.
지상에 사는 동안 예수는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설름발이를 걷게 했다. 이제 그는 질병과 불구 없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돌아올 것이다. 지상에서 그는 죽고 부활했다. 그가 돌아오면 더 이상 죽음은 없을 것이다. 지상에서 그는 귀신들을 쫓아냈다. 다시 돌아오는 날 그는 '악한 자’를 멸할 것이다. 그는 구유의 아기로 지상에 왔다. 그러나 이제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빛나는 존재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지상에서 시작한 나라는 끝이 아니라 끝을 향한 출발점이었다.
세상과는 다르지만 언젠가 실현될 새로운 사회의 모형을 교회가 창조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 지상에서 자라날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에 대해 “(세상의) 방식과는 현저하게 다른, 그리고 약속으로 충만한 하나의 방식으로 세상의 방식에 대항하는 새로운 신호"라는 처방을 내렸다. 인종과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사회, 대립이 아니라 사랑으로 형성되는 사회, 약한 자들을 먼저 보살피는 사회, 이기주의와 퇴폐가 만연한 세상에서 정의의 편을 드는 사회, 서로 섬기고자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회 -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의 뜻은 바로 이 사회를 이름이 아닌가.
*다른 신들은 강했으나 당신께서는 약했다.
그들은 당당히 걸어서 옥좌로 나아갔지만 당신께서는 비틀거리면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에는 오직 하나님의 상처만이 말을 걸수 있다.
다른 신들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당신께서만 홀로 상처를 입었다. - 에드워드 실리토
*복음서에서 내가 본 그 사나이는 너무나 생생한 인물로 다가와서 나는 그만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나는 거의 끊임없이 좌절하던 남자를 거기서 보았다. 그의 좌절감은 사실 복음서 어디를 펼쳐도 튀어나올 만큼 많았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더 일러야 하겠느냐? 내가 얼마나 더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나는 또 빈번히 슬픔에 잠기고, 어떤 경우는 아예 절망하기까지 하며, 툭하면 분노하고 무서워하던 사람을 거기서 보았다. 그는 절절하게 진정 절절하게 외로움을 탔으면서도 어떤 때는 한사코 홀로 있고자 했다. 내가 본 그 사나이는 세상의 그 누구도 가공해 낼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인물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추측했던 대로 복음서 저자들이 적당히 윤색된 홍보물을 의도했다면 거기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적어도 이런 것이 아니었으리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 사분의 삶의 머릿속에 지금도 여전히 그려지고 있는 예수, 언제나 다정하고 늘 미소 지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예수, 일점의 동요나 흔들림이 없는 평정한 자태로 세상을 주유하는 예수... 홍보기사를 의도했다면 저자들은 아마 그런 예수를 그리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이 기독교의 가장 깊은 비밀이라 주장하는 예수, 복음서의 이 예수는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별로 누리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세속적인 의미로 이야기하는 그 마음의 평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역시 그런 세상적인 마음의 평화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 - 스캇 펙
*예수가 표명한 강경한 도덕적 언사들을 기독교 교회는 줄곧 완화시켜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에 대항치 말라'는 예수의 계명을 적어도 초기 300년 동안은 문자 그대로 이행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나 결국 교회는 '전쟁' 심지어는 '거룩한 전쟁' 이라는 교리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다양한 시기에 걸쳐 나타난 기독교 소그룹들이 부를 멀리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도 했지만 그것은 다만 부유한 제도권 교회의 변두리에서 미미하게 기능하다 사라지곤 했을 뿐이었다. 오늘날에도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언급하지도 않은 동성애에 관해서는 지독하게 비난하면서도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강경한 계명들은 정작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죄의 정의를 다시 내리고 강조점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제도권 교회는 교회 밖의 죄악된 세상과 대립하는 존재로 자신의 위치를 부각시키려 애쓰고 있다. 사실, '도덕적 다수
(Moral Majority) 따위와 같은 말들은 이미 그 다수 안에 포함돼 있는 사람들에게나 그럴듯하게 들릴 뿐이다. 최근에 나는, 어떤 에이즈 환자들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하고, 또 그 환자들이 직접 조연으로 출연한 연극을 관람했다. . 연출자는 자신이 어떤 지역 목사의 말을 듣고서는 그 연극을 무대에 올릴 결심을 했다고 동기를 피력했다. 연출자가 전하는 목사의 얘기란 이렇다. 그 목사는 신문에서 젊은 독신 남성의 부고 기사를 읽을 때마다 쾌재를 부른다는 거였는데, 그것은 그런 남성들의 죽음이 곧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반대하신다는 또 하나의 징표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교회가 점점 더 죄인들의 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현실이 나는 진정 두렵다.
이제 교회는 죄의 정의를 제 나름으로 -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내린 죄의 정의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바꾸고 있으며, 그에 따라 죄인들은 자신들이 교회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는 거의 생각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는 자신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부끄러움(Shame)을 통해, 역사의 진정한 싸움은 부자와 가난한 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흑과 백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쾌락주의자와 청교도라 지칭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사회의 진자(子)는 무엇이든 좋다"고 말하는 자들과 너희만큼은 안된다"고 말하는 자들 사이를 왕래한다. 말하자면, 왕정복고주의자들과 크롬웰, 미국시민자유연합과 우익 종교단체, 현대 세속주의자들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사이를 이름이다. 루시디의 견해가 옳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마 안 있어 이란은 그의 목에 백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루시디가 너무 나갔던 것이다.
*음모 이론에 대한 대인, 즉 그 대담한 주장들의 출처를 예수 자신으로 보는 태도는 문제를 확대시킬 뿐이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나는 이따금씩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보려고, 이를테면 코란이나 우파니샤드를 읽을 때와 같은 태도를 취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를 취할 때마다 나는 늘 놀라고 심지어는 불쾌감마저 느낀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느나라" (요 14:6)고 말하는 그 사람의 태도가 너무 교만하지 않은가. 사실 예수의 그 지혜로운 가르침과 선한 행실들을 무색케 하는 듯한 이 진술들은 도처에서 빈번히 튀어나오곤 했다. 따라서 예수는 진정 하나님이 아니라면 지독한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C.S.루이스는 이 점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의 깊이와 건전한 그리고 (하나를 더 들자면) 빈틈 없음과 그가 진정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신학적 가르침들 배후에 존재할 것이 분명한 과대망상증 사이의 모순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된 적이 없다. 자신의 저서 「기적(Miracles)에서 이처럼 쓴 루이스는 유명한 저서 순전한기독교 (Mere Charistianiy)에서는 한결 다채로운 표현법을 구사했다.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어떤 사람이 예수가 한 것과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 선생일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삶은 달걀이라고 주장하는 자와 비슷한 정도의 정신이상자이거나 아니면 사탄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지(예나 지금이나), 아니면 정신이상자이거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존재인지 선택해야 한다.
대학 시절 나는 루이스의 이 문장을 읽고서 과장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 선생으로 존경하기만 할 뿐, 하나님의 아들이나 정신이상자로는 판단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 말하자면 당시 내 입장 역시 그랬다는 얘기다. 그러나 복음서를 연구하면서부터는 점차 루이스의 입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예수는 결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 아니면 십자가형을 받아 마땅한 협잡꾼이 분명했다. 그의 시대 사람들은 이 양자 선택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전 생애는 자신을 하나님이라 한 그 주장에 전부 아니면 전무의 형태로 걸려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용서를 제안할 만한 권위가 그에게 없다면 나는 그가 제시한 용서의 약속을 신뢰할 수 없다. 아버지께로서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그의 말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다른 장소에 대한 그의 언질("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2) 또한 나는 신뢰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어느 모로 보나 그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십자가를 신의 잔악한 행위로 보아야지 결코 희생적 사랑의 행위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불멸이라거나 비가시적이라거나 무한하다거나 하는 진술들이 그렇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정의할 경우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에게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골 1:15)이라고 거침없이 선언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정확한 재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 1:19).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같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도 떠날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무시할 수도 있는, 피부를 둘러 쓴 하나님을 예수는 제시한다. 우리 앞에 제시된 이 보이는 형상, 규모가 작아진 이 실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더 명백히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내 조악하고 무미건조한 개념들은 예수로 인해 상당부분 교정되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이따금씩 나 자신에게 던져 보는 질문인데, 내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솔직히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번째는 달리 훌륭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예수 때문이다. 총기가 넘치며, 길들여지지 않고, 온유하며, 창조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굴복시킬 수 없는,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대단히 겸손한 이 예수야말로, 나를 탐구해 보라며 당당히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인물이다.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바로 그 아니던가.
마틴 루터는 숨겨진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에게 달려가라고 자신의 학생들을 권면했고, 나는 루터가 왜 그랬는지 안다. 내 자신이 확대경을 들고 명화 한 점을 감정한다고 할 경우, 확대경 중앙에는 대상이 또렷하고 명백하게 잡히지만 그 주변은 점점 더 일그러져 보인다. 내게 예수는 확대경 중앙에 잡힌 대상, 말하자면 초점이었다. 사실, 고통이라든가 섭리와 자유의지 등의 해답 없는 문제들에 매달리다 보면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 자신을 바라볼 경우,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가 실제로 어떻게 대했는가 관찰할 경우 그리고 자유롭고 진지한 행동에의 부름을 생각할 경우 명료성은 회복된다. 그러면 "하나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터에 우리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질문은 어떤가? 사실 이처럼 지루한 순환론에 빠지면 영적인 권태를 감당하기 어렵다. 예수는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그가 기도했기 때문에 우리 또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프레드릭 뷰크너(Frederick Buechner)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새 계약의 새로운 면이란 하나님이 피를 흘릴 정도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개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여기서 자신이 한 말에 실제로 돈을 걸고 있다는 주장에 있다. 병든 자식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를 고쳐주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마침내는 자신이 말한 대로 패를 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라는 그 말에 예수 그리스도를 걸었고, 그가 무슨 짓을 한 십자가는 새 계약신앙의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사랑이신 이. 나 혼자였다면 아마 하나님에 대한 내 개념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내 하나님은 여전히 정적이고 불변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사람처럼 이리 저리 움직이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결코 알지 못했을 테다. 하나님은 여전히 권능으로 만물을 다스리시고, 반대자들은 씨 하나 남김없이 신속하게 궤멸하셨으리라. 나 혼자였다면 정신과 의사 로버트 콜즈(Robert Coles)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는 한 모슬렘 소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겠는가. "알라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신은 지극히, 지극히 위대하도다' ・・・ 신께서는 모든 이로 하여금 자신을 믿게 할 겁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신을 거절하면 죽을 것입니다. 알라께서 세상에 오시면 정말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나 바로 예수 때문에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내 본능적인 개념들, 막연한 생각들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그리고 그것이 예수 사역의 한 핵심 아닐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들의 목숨을 담보하시고서라도 우리를 위해 자유를 마련해 주시는 하나님, 상처받기 쉬운 약한 하나님을 예수는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신 하나님을 예수는 보여준다.
우리 중 어느 누가, "사랑할 뿐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혼자 힘으로 생각해 낼 수 있겠는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런 개념을 창안해 낼 사람이 과연 있을까? 기독교 전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예수 메시지에 담긴 그 충격적인 개념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지 모르나, 사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그들 신의 관계를 설명하는 정상적인 방법이 결코 아니었다. 코란은 사랑이라는 말을 단 한 차례도 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꼬는 말은 또 어떤가? "어느 누가 제우스를 사랑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괴이한 것이 그뿐이랴? 제우스가 인간을 사랑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인들의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고 긍정할 뿐 아니라, 예수가 지상에 온 주된 이유도 바로 사랑 때문이라고 인용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9).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썼다. 나뭇가지의 새가, 초원의 백합화가, 숲속의 사슴이, 바다의 물고기가 기쁨에 겨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러나 이들이 내는 소프라노 음역 밑에는, 희생된 이의 심오함이 장중한 베이스 소리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듯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는 실로 곡진하게 표현한다. 누가복음 15장에서 그는,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밤이 새도록 찾는 한 여인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목자를 이야기한다. 이두 비유는 각각 기쁨의 장면, 다른 죄인들도 하늘의 집에 부름받는다는 소식과 더불어 배설된 천상의 잔치로 결론을 맺는다. 그리고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예수는 마침내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 아버지의 사랑을 거절하고 먼 나라에 가 재산을 탕진하는 탕자의 이야기를 한 헨리 나웬(Henn Nouven)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즈 미술관에 앉아 렘브란트의 명화 '돌아온 탕자" (Return of the Prodigal son)를 오랫동안 감상하고 있었다. 나웬은 그 그림을 보면서 탕자의 비유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 통찰이란 예수가 우리를 위해 친히 탕자와 같은 존재가 된 그 신비를 일컬음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낯선 나라에 왔고,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포기했으며,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집에 돌아왔다. 그가 한 이 모든 일들은 그러나 반역의 아들로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모든 자녀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보냄받은 순종하는 아들로서 이 모든 일들을 했다. 예수는 아버지가 맡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탕자의 역을 감내했다. 나 같은 사람도 그와 같이 되어 그와 함께 아버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간단히 말해,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자신의 가족을 되찾으려는 열망으로 아무것도 개의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지구라는 머나먼 행성에 아들을 보냄으로써 화해라는 결정타를 날리셨다.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처럼 가족의 재결합이라는 기쁨의 잔치로 끝난다.
그 외 다른 곳에서도 복음서는 하나님이 사랑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느 한도까지 갔는지 언급한다.
*시간 속으로 구겨져 들어와 있는 동안, 즉 성육신 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체험했다. 지상에서 33년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은 가난에 대해, 가족간의 불화에 대해, 사회적인 배척에 대해, 말의 남용에 대해, 배반에 대해 배웠다. 그는 또한 고통이라는 것도 배웠다. 비난자에게 얻어맞아 뺨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을 때의 심정이란 어떨까. 징이 박힌 채찍에 등을 내맡기고 있는 마음이란 어떨까. 조악한 쇠못이 근육을 뚫고, 힘줄을 끊고, 뼈를 관통할 때의 느낌이란 어떨까. 지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실로 그 모든 것을 '배웠음'이다.
그 성품으로 보아 하나님은 이 흠 많은 행성에 대해 나 몰라 선언하고 마실 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물론 몸소 악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예전에 완벽한 신으로서 악과 맞서던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죄를 사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쳐야만 했다. 그는 인간과 같아짐으로써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배워야만 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가 우리를 위한 ‘동정적인’ 중보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리스어 어원(신파토스, '함께 느끼거나 함께 고난받다)이 의미하듯 동정을 배우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히브리서가 함축하고 있는 바, 성육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되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곧 이 땅에서 한 연약한 인간으로 친히 살아보시고 몸소 기도해 보신 경험에 바탕하여 들으시는 것이다.
죽기 직전 예수가 한 마지막 말들 중 하나는 그의 기도였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저희란 로마병사들과 종교 지도자들, 어둠 속에서 달아난 그의 제자들과 이런저런 이유로 수없이 그를 부인한 나와 여러분 모두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인간이 됨으로써만 진정 인간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유로 해서 이 처형기구를 믿음의 상징으로 차용하게 되었는가? 그 수치스러운 불의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십자가는 그저 역사에 잠깐 있었던 불행한 각주로서만 취급하고 오히려 부활 같은 문제를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왜 십자가가 신앙의 중심부에 놓여야만 하는가? "왜 저 그림이 어떤 이들의 신앙을 잃게 해야 한단 말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주인공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묘사한 홀바인(Holbein)의 그림을 보고 난 후 그렇게 외쳤다. 물론 예수가 우리에게, 예배로 모일 때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명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가 종려주일이나 부활절을 특별히 지칭해서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19)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갈보리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도 좋다고 말하거나 잊기 원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갈보리를 잊지 않았다.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표현에 따르자면, 십자가는 “유쾌하고 아름다우며 불사적인 만신들을 소유한 그리스인들이나, 왕적인 메시야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몹시 불쾌하게 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인간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뭔가에 대해, 말하자면 인간 내부의 실상에 대해 답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하나님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두 인식 사이에, 이를테면 이 세계는 지독하게 불완전하며 무정하게 내던져져 있다는 인식과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현존해 있다는 인식 사이에 가교를 놓았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진리를 제정해 놓되 그 십자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제정해 놓았다. 바로 그 십자가가 희망 없는 곳에 희망을 세워 놓는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 자기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 12:10). 그는 이 말씀을 통해, 고난이나 역경과 타협하는 불교식의 방법론보다 몇 단계 위에 있는 신비를 지적하고자 했음이다. 바울은 운명론적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 변화를 역설했다. 우리로 하여금 못났다고 느끼게 하는 그것들, 우리의 희망을 꺾어 버리는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들이다. 증거를 원하거든 십자가를 보라.
* 하나님은 적극적 변화를 모색하여 인류 역사상 최악의 행위를 가장 위대한 승리로 바꾸었다. 그러니 십자가는 상징이 소멸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 아닌가. 예수가 우리더러 잊지 말라고 명령함은 실로 당연한 것 아닌가.
내게 소망이 있음은 십자가로 인함이다. 이사야가 말했듯,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은 그의 기적이 아니라 종의 상처를 통해서이다(사 53:5참조) 패배 직전까지 갔다가 그토록 어렵게 승리를 쟁취한 하나님, 극단적으로 연약해져 있던 순간에 힘을 발휘한 그 하나님이 우리 삶의 실패와 역경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아무것도, 심지어 아들의 죽음까지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가장 비열한 범죄가 우리를 치유하는 힘이 된다는 것은 실로 구속의 연금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치명상을 입은 치유자는 부활절에 돌아왔다. 영원이라는 유리한 관점에서 보면 모든 역사가 어떻게 보일 것인지 암시해 주는 그 부활의 날에, 이전까지의 모든 흉터, 모든 상처, 모든 실망이 전혀 다른 시야로 보이는 그 부활의 날에 그는 돌아왔다. 우리의 믿음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십자가와 빈 무덤 사이의 공간은 인류역사에 대한 약속이 걸려 있는 분기점이다. 세상에 대한 소망과 그 세상 안에 사는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소망이 기로에 서 있는 공간이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거룩한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의 광대한 거리를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 거리란 사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인류역사의 요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날 그분과 함께 웃을 수 있도록 지금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