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럭재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무럭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무럭재」는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지금의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와 신읍동[신읍리] 사이에 가로놓인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이곳 성여완(成汝完)[1309~1397]을 찾아왔다고 하여 문례현(問禮峴)이라고 부르던 것이 와전(訛傳)되어 무럭재로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담이다. 성여완의 본관은 창녕이고 호는 이헌(怡軒)이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포천의 계류촌(溪流村)에 은거하였다. 태조가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나 고사하였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1984년과 1997년 포천 군지 편찬 위원회에서 발행한 『포천 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2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간행한 『포천의 설화』에도 각각 실려 있다.
내용
고려 말엽이었다. 해주, 충주 목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해당하는 시중(侍中)을 거쳐, 창녕 부원군에까지 봉해졌던 성여완이, 난세를 피하여 이곳 왕방산(王方山) 아래에서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이성계가 등극하자, 그가 지금의 신북면 심곡리와 신읍리 사이에 가로놓인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이곳 성여완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씨 조정에 입조(入朝)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부터 이 고개를 예를 갖추어 찾아온 고개라 하여 ‘문례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무럭재는 문례현의 와전이라 전해진다. 그런데 성여완이 우거했던 왕방산은 왕이 찾아온 산이라 하여, ‘왕방산(王訪山)’이라는 한자 표기가 옳을 테지만, 이조의 모든 문헌에는 이태조를 격하하는 것을 기하여, ‘방(訪)’자 대신 음이 같은 ‘방(方)’자로 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설도 있다. 또 일설엔 근년에 장독곡이란 분이, 어느 날 문례현을 넘어 집으로 돌아가다가 “후유! 이 고개가 아직도 얼마나 남았을꼬? 아니 이 고개 이름이 무슨 고개인고?” 하면서 자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고개를 ‘물어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모티프 분석
「무럭재」의 주요 모티프는 ‘고개의 지명 유래’이다. 「무럭재」는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깊이울]와 신읍동 사이에 위치한 ‘무럭재’가 ‘문례현’으로 불리고, ‘왕방산’, ‘물어 고개’ 등에 대한 지명 유래담인데, 지역과 연고가 있는 유명 인물인 성여완 및 장독곡과 연관되어 전승되는 민간 어원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포천 군지』(포천 군지 편찬 위원회, 1984)
『포천 군지』(포천 군지 편찬 위원회, 1997)
이근영·이병찬 편저, 『포천의 설화』(포천 문화원, 2000)
조흥욱·박인희·조재현 편, 『경기 북부 구전 자료집』Ⅱ(박이정, 2001)
강등학 외 공저, 『한국 구비 문학의 이해』(월인, 2002)
『우리 포천의 옛날이야기』(포천 문화원, 201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8-1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