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과 실제로 확인되는 사실이 다른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인도의 수많은 覺者(각자)들의 의해 쓰여져 내려온 우파니샤드의 수도 전통적으로는 108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200종이 넘는다고 하며, 고전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700년경부터 기원전 200년경까지 성립된 10여종으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베다(Veda)의 끝부분(anta)을 이루는 것이 베단따(Vedanta)이고, 베단따가 우파니샤드를 가리키는 것이며 행위를 다루는 브라흐마나 문헌과는 달리 우파니샤드는 지식을 다루며 지혜와 해탈을 추구하는 전통을 이어받은 베단따 학파들의 의해 계승되어진 Upanisad(우파니샤드)의 원뜻은 ‘사제 간에 가까이 앉음’ 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서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며 옛날부터 天啓文學(천계문학, sruti)이라 신성시 되었고 死語(사어)인 Sanskrit(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는 우파니샤드를 인도 베나레스 힌두대학교(Banaras Hindu University)에서 인도 철학ㆍ종교학 석사 학위를, 뿌네 대학교(University of Pune)에서 인도 정통 철학인 비이원적 베단따(Advaita/아뜨와이따 Vedanta)를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으신 박효엽님의 勞苦(노고)로 웅진 지식하우스에서 출간한「처음 읽는 우파니샤드」는 책 제목처럼 우파니샤드를 책으로 처음 접하는 나 같은 사람은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으며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읽기 마치기가 2월14일 pm. 7 : 05분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독후기를 꼭 쓰리라 마음먹었는데 여차저차, 차일피일 미루다 열흘이 다 되어 가는 즈음에 벼름벼름한 끝을 보려 하지만 읽을 당시에는 무지하게 좋은 말이 많고, 가슴을 훑고 지나간 글들에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터지만 망각이란 단어와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지라 뭐 이렇다 하게 생각나는 것은 없고 해서 일단은 밑줄을 그어댔던 부분을 적어 본다.
「아뜨만(Atman, ‘참 나‘)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전통적으로 인도에서는 아뜨만이 인간의 심장에 머문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뜨만이 머리에 머문다는 견해도 있었다고 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분명히 아뜨만이 심장에 머무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힌두교에서 대부분 아뜨만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불교에서는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는다. 붓다는 우파니샤드의 아뜨만을 부정함으로써 힌두교의 전통 안에서 혁신적인 종교를 만든 셈이다. 힌두교에서도 불교에서도 ‘나’의 마음이라든가 ‘나’라는 관념이라든가 ‘나’의 지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전자에서는 아뜨만을 긍정하고 후자에서는 아뜨만을 부정한다. 이 아뜨만은 ‘나’의 배후에 존재하는 어떤 불변의 원리이자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불멸의 영혼이다. 아뜨만은 ‘나’의 앎을 가능케 해주는 순수의식이고 ‘나’의 경험에 토대가 되는 순수 존재이다. 아뜨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든 것들은 지켜보는 자 즉 관조자ㆍ관찰자(saksin)이다.」-68쪽~69쪽-
「비이원적 베단따 학파에서는 다섯 가지 덮개(pancakosa) 이렇게 설명한다. 다섯 가지 덮개 가운데 음식(anna)으로 이루어진 것은 顯示的(현시적) 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육체는 음식을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음식으로 이루어진 덮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음에 숨(prana)으로 이루어진 것, 마음(manas)으로 이루어진 것, 인식(vijnana)으로 이루어진 것은 微視的(미시적)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숨은 육체와 정신을 연결하는 것으로서 음식보다 더 미세하다. 마음은 숨보다 더 미세하다. 그리고 인식(지성)은 더 미세하다. 숨으로 이루어진 덮개, 마음으로 이루어진 덮개, 인식으로 이루어진 덮개를 미시적 신체라고 부르는 까닭은, 아뜨만만이 유일한 순수의식(순수정신)이고 나머지는 무언가 물질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조리 의식의 연장인 것 즉 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덮개인 환희(ananda)로 이루어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는 가장 미세한 것으로서 原人的(원인적)신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덮개는 아뜨만과 가장 가까움으로 말미암아 아뜨만의 본질인 환희와 아주 유사하다. 하지만 환희 자체는 아니고 ‘환희로 이루어진 덮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미시적인 신체와 현시적인 신체를 나타나게끔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원인적 신체라고 불린다. 이상의 다섯 가지 덮개는 인간이 경험하는 의식의 세 가지 상태(생시ㆍ꿈ㆍ숙면 상태)와 관계한다. 현시적인 신체는 깨어 있는 상태와 관계하고 미시적인 신체는 꿈을 꾸는 상태와 관계하며, 원인적인 신체는 꿈 없이 깊은 잠을 자는 상태와 관계한다.」-136쪽-
「우선 아뜨만이 내면의 진정한 핵이기 때문에 내면을 지칭하는 다른 것들은 기관에 불과하다. 마치 귀ㆍ피부ㆍ눈ㆍ혀ㆍ코가 감각기관(감관)이라 불리고 외적기관이라 불리듯이, 마음 등은 내적기관이라 불린다. 가장 낮은 단계의 내적기관은 마음(manas)이다. 마음은 그저 외적기관이 가져오는 정보를 결집하는 역할만 한다. 즉 외적기관과 내적기관의 관문 역할을 한다. 지성(buddhi)은 경험된 모든 것들을 확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지성은 가장 높은 단계의 내적기관이다. 이 외에도 우파니샤드에서는 자기관념(ahamkara)ㆍ지능(citta) 등의 내적기관을 말하고 있다. 자기관념은 ‘자기’ ‘자기의 것’이라는 관념을 형성시키는 내적이관이고, 지능은 지적인 탐구를 하는 내적기관이다. 자기관념은 마음과 유사하지만, 억지로 말하자면 마음보다 더 높은 내적기관이다. 지능은 지성과 유사하지만 억지로 말하자면 지성보다 더 낮은 내적기관이다.」-131쪽-
「비이원적 베단따에서는 세계가 Brahman(브라흐만)과 Maya(마야)*즉 幻術(환술)의 공동작품이라고 말한다. 우파니샤드 전체의 맥락을 통해 본다면, 브라흐만으로부터 에테르(허공)가, 에테르(akasa)로부터 공기가, 공기로부터 불이, 불로부터 물이, 물로부터 흙이 창조 된다. 그리고 허공, 공기, 불, 물, 흙이라는 아주 미세한 다섯 가지 원소들의 결합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들이 창조된다. 이러한 가장 전형적인 창조의 방식에서, 어쨌든 중요한 것은 브라흐만이 이 세계의 質料人(질료인)이자 動作人(동작인)이라는 점이다. 브라흐만이 물질적 재료가 되고 또 최초의 운동을 주는 자가 됨으로써 이 세계가 창조된다는 점이다. 브라흐만으로부터 창조된 세계는 ‘명칭과 형태(namarupa)'의 총체이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명칭과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목재를 원료로 하는 목수가 만드는 여러 물건들을 보라. 책상은 책상이라는 명칭과 형태를 가지고, 걸상은 걸상이라는 명칭과 형태를 가진다.」-118쪽~119쪽-
「절대적 자유로서 해탈이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슬픔이 없는 상태이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다. 한 마디로 말해, 고통(duhkha)이 없는 상태이다. 인도에서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모두 포괄하는 이 고통이라는 말, 삶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런 까닭에 인도 사상은 삶의 고통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몸부림이다. 급류에 휩쓸린 자가 강변에 도달하려고 하듯이, 더위에 지친 자가 나무 그늘에서 쉬려고 하듯이, 암흑을 무서워하는 자가 불빛을 찾으려고 하듯이, 이 세상의 고통을 아는 자는 고통이 없는 상태로 온 마음이 향한다. 그런데 삶은 왜 고통이기만 한 것일까? 고통과는 별도로 즐거움이나 행복도 늘 함께하지 않는가. 즐거움이나 행복까지도 고통이라는 말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고통에서부터 출발하는 인도 사상은 삶의 전부를 고통이라는 범주에 넣는다. 즐거움이나 행복까지도 지속적이지 않다. 잠깐의 즐거움이나 행복은 고통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빨려 들어간다. 또 다시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나 행복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잃고 만다. 그래서 고통의 거대한 이빨에 깨물린 상태로 있는 즐거움이란 고통의 다른 상태이다. 그 고통의 此岸 (차안)으로부터 彼岸(피안)으로 건너는 것. 모든 인도 사상이 공통적으로 목적하는 바이다. 어떻게 이쪽 강둑에서 저쪽 강둑으로 건널까?」-201쪽-
우리네들의 입에 붙어 무시로 남용하는 말 중에 하나가 “시간이 없다”이다. 시간은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시간이 없다”고들 하니 시간 입장에서 보면 답답하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애당초 시간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단지 해라고 불리는 그 어떤 것이 보이는 감각기관에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면서 반복되어지고 ‘컴컴하다’고 표현되어지고 ‘환하다’고 표현되어지는 그 무엇을 합쳐 날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그것을 또 스물 넷 토막을 내어 시간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기 때문이니까...그리고 그것을 육십 토막 내고 또 육십 토막 낸 다음 그 시간의 노예가 되어 시간을 흘려보내고 날과 달을 그리고 해를 넘기는 것을 숨(prana)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반복하며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위해 음식으로 이루어진 덮개를 위해 음식(anna)을 축적하기 위해 음식으로 이루어진 덮개를 이끌고 각자 어디론가 떠났다고 되돌아오곤 하는 날들이어야 하는가.
나 같은 경우는 일년 365일 중에 즐거운 날이 65일 정도 되는 것 같고, 그저 그런 날이 100일 그리고 나머지 200일이 고통(Duhkha)의 날들이라면 잠깐의 즐거움이나 행복은 고통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찰나에 빨려 들어간다는 말과 의견을 같이 하며 조금 전에 느꼈던 것들이 어제 보았던 것들이 내일 또 나의 감관기관에 느껴지고 보여 지리라고는 장담할 수도 없고 그리고 언젠가는 다 사라져 버릴 Maya들에게 음식으로 이루어진 덮개를 消盡(소진)하지 않으려 어제 보단 오늘이, 오늘 보다 내일이 조금은 나아지려 보이지 않은 것들을 위해 살아보려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제는 근동에 있는 ‘은천노인복지회관’에 봉사를 갔다가 일은 대~~충 하고 가까운 곳에 동태찌개를 맛있게 한다는 말에 혹하여 쭐래쭐래 따라가 맛나게 없고 수다를 떨다 돌아온 이 귀 얇고 하늘거리는 마음을 어찌 다스릴꼬...-_-a
「*Maya(마야) : 마야의 본뜻은 속임수ㆍ기만ㆍ마술ㆍ환영ㆍ비범한 힘 등이다. 바이원적 베단따 학파가 다른 베단따 학파들로부터 구분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마야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마야의 유의어로 볼 수 있는 용어로는 명칭과 형태(namarupa), 미전개자(未展開者, avyakrta), 무지(無知, avidya) 쁘라끄르띠(prakrti), 沒理解(몰이해, agrahana), 미현현자(未顯現者, avyakta), 無明(무명, tamas), 질료인(karana), 소멸(laya) 潛在力(잠재력, sakti), 大睡眠(대수면, mahasupti), 睡眠(수면, nidra), 不滅體(불멸체), 에테르(akasa)등이다. 」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