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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1(삼국지1) - 황건적이 일어나 후한이 망하고 군웅들이 자립하다!
1. 당고의 옥 :
후한(後漢) 말에 환관 세력이 사대부 인물들을 금고(禁錮)에 처한 탄압사건을 당고의옥
(黨錮之獄) 이라고 하는데.... 후한 초기인 92년 화제가 환관 정중과 손잡고 외척
두헌의 실권을 박탈하였고, 121년 안제가 환관 이윤과 손잡고 외척 등즐을 숙청
했으며 159년에 환제는 환관 선초와 함께 권신인 양기(梁冀) 와 부인 손수를 처단합니다.
양씨 집안 사람 60여명과 연루된 관료와 빈객 300여명을 살해함으로써 외척과 환관 사이의 균형
은 깨지고 대권은 환관에게로 쏠리게 되었으니... 그들은 막강한 권세를 바탕으로 전횡을
일삼았고 내정에 간섭하며 환관들의 일족을 지방에 파견시켜 토지겸병을 벌였으니, 지식인
이자 관료 계층인 사인(士人)들은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였고 1, 2차 “당고의 금” 으로 이어집니다.
1차 당고의 금은 166년 호족 세력과 향거리선제를 통해 진출한 사대부 및 관료 계층은 유교를 통해 외척
및 환관의 세력을 비판했으니... 환관들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청류파 사인들과 30,000명의
태학생이 낙양에서 연일 환관들을 비판하자, 위기를 느낀 환관들은 환제에게 거짓말을 해서 청류당의
이응(李膺)을 비롯 200여명을 잡아들여 관직을 박탈하고 평생 관직진출을 막는 금고(禁錮)형을 내립니다.
13세의 어린 황제 영제가 즉위하자 두태후가 섭정이 되고 외척 두무가 실권을 잡았으니, 두무는
당인의 금고를 해제하여 청류당에 속한 사람들을 등용함과 동시에 그들과 결탁하여 환관을
일소하려고 했지만 들통나 거센 역습을 받고 패배해 두무는 자살했고 이응등 죽은 자만 100
여명이 넘었으며, 사죄(死罪), 유죄(流罪), 금고의 처분을 받은 자는 600 ~ 700명이나 되었습니다.
2. 황건적의 난(黃巾之亂)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마땅히 누른 하늘이 서리라.
때는 바로 갑자년,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한나라 말에 장각을 필두로 한 황건적이 일으킨 반란이자 400년 동안 이어지는 난세를 여는 시발점인데...
위의 표어는 오행설, 그중에서도 상생설을 차용한 것이니 오행에 의하면 한(漢)은 화(火)의 덕에 의해서
흥한 나라이기 때문에, 한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던 세력은 하나같이 오행상생 중에서 火生土
에 의해 토(土)의 덕을 타고 났음을 자처했고 모든 상징에 토의 덕을 상징하는 “노란색” 을 사용했습니다.
"창천이 죽고 황천이 일어난다" 는 말도 후한에 반기를 든 황건적(노란색 두건을 쓴 무리)
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오행설에 끼워맞춰서 자신들이 토덕의 대표
임을 자처한 데서 만들어낸 유언비어이지만.... 아주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니었고,
적어도 당시에는 그럴듯하다고 여겨졌던 음양오행, '오행도참설' 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오행(五行)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중에 오행을 말하며, 동양에서 우주 만물의 변화를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압축해 설명하려고
했던 사상으로 종종 서양의 4원소설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4원소설과는
불, 물, 흙 3가지가 겹치고 마지막 공기 대신 나무와 쇠가 들어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오행사상을 정립시킨건 전국시대의 음양가를 제창한 제나라의 추연(騶衍)으로 인, 의, 예,
지, 신의 오덕(五德)이나 근대 이전 육안으로 관찰되었던 태양계 5행성과 연결짓기도
하며, 김삿갓 등의 일화 중에는 부수를 포함하여 오행에 맞춰 시를 짓는 내기도 있습니다.
화(火)는 주변으로 확산되는 기운을 의미하니 불을 피우면 빛과 열기가 사방으로 퍼지므로
주변으로 확산되는 기운을 화에 비유한 것이고 토(土)는 수렴하고 발산하는 기운을
의미하며 금(金)은 변형되는 기운을 의미하고 수(水)는 응축하고 결속되는 기운
을 의미하니...... 수를 숫자로 나타내면 1(一)과 6(六)인데, 1은 변화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오행에서 화(火)는 더움(熱), 토(土)는 젖음(濕), 금(金)은 마름(燥), 수(水)는 추움(寒)으로 각각 1:1
로 대응되는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에서는 더움(熱)↔추움(寒)과 젖음(濕)↔마름
(燥) 둘의 결합으로 4가지 성질이 만들어지니 더움과 마름은 불의 원리(확산), 추움과 젖음
은 물의 원리(응축), 더움과 젖음은 공기의 원리, 추움과 마름은 흙의 원리로 오행의 흙은
젖어있지만, 4원소설의 흙은 말라있다는 데서 동서양의 땅에 대한 인식차이를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오행도참설”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생겨서, 처음에는 오행의 상극 순서(목-금
-화-수-토)를 따른다고 여겼지만, 후한 말에는 상생 순서(목-화-토-금-수)라는 게 정설이
됐는데.... 한나라는 화의 덕으로 흥한 나라라고 여겨졌으며 따라서 한나라를 상징
하는 색은 화에 해당하는 붉은색이었으니 장기에서 한나라의 각인색이 “빨강색” 입니다.
그리고 한나라의 후계자를 자처한 세력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토의 덕을 지녔음을 강조하며 토
에 해당하는 황색을 상징으로 삼았으니.... 이에 따라 헌제로 부터 선양을 받은 것으로
정통성을 주장한 위나라는 최초의 연호로 황초(黃初)를 사용했으며, 오나라의 손권도 오왕
을 칭하며 사용한 첫 연호는 황무(黃武), 황제를 칭한 뒤 사용한 첫 연호는 황룡(黃龍) 입니다.
반대로 왕조 교체를 인정하지 않고 한 황실의 정통성을 이어 갈 것을 천명한 촉한은 263년에
연호를 바꾸어 '염흥(炎興)' 을 사용했지만, 바로 그해에 나라가 망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허망한데.... 반란은 결국 실패했지만 통일 왕조가 무너지고 난세로 들어가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진승·오광의 난이나 후삼국시대의 원종·애노의 난과도 같습니다.
한나라 영제 때인 184년에 거록 출신으로 태평도의 교주 장각이 후한 말기에 성행한 황제와 노자
를 교조로 삼는 종교인 황로도(태평도)를 통해 신도들을 모아서 "대현양사" 라 자칭하고...
무리들을 모아 신봉자들에게 과오를 깨우치게 하고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재를 탄 물을
사용해 주문을 외우며 병을 고치는등 종교집단의 활동을 전개하여 무리들을 이끌어 모았습니다.
장각은 제자들을 사방에 보내 황로도를 전파하여 청주, 서주, 유주, 기주, 형주, 양주, 예주 등의 8주
에 무리들이 퍼졌으며... 황실의 환관들과 내통 약속을 받아내는 등 치밀하게 거사 준비를
했으나, 이 사실이 제자들의 밀고로 발각되자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184년에 전국적으로
난을 일으켜서 각지의 주군(州郡)들을 약탈하고 관리들을 죽이는 등 온 세상에 세력을 떨칩니다.
조정에서는 당인(청류파)을 사면해 관군이 편성되었고 각지에서 황건적에 대항하는 의병들이 일어
서면서 점차 진압이 되었고.... 그 와중에 난의 주모자인 장각이 병사하여 중심을 잃었지만
황건적이 완전히 소탕되지 않아 독립적인 군소 세력이 할거하였고, 이 때문에 때때로 지방관이 계속
토벌해야 했는데 잔당의 일부는 군웅의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조조의 “청주병” 입니다.
184년에 황건적 정원지는 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주 탁군을 침략하자 유주자사 유언은 유비에게
500명의 군사를 주면서 막으라 명령했고... 유비는 100배인 50,000명의 황건적과 싸워야 했으니
대흥산에서 황건적과 대치하자, 유비는 적장 정원지에게“나라를 배반한 역적놈아! 어찌 어서 항복하지
않냐!” 정원지는 등무를 출진시켰고 장비는 장팔사모를 들고 돌격하니 등무는 명치를 찔려 낙마합니다.
대장 정원지가 장비를 향해 말을 몰아 칼을 휘두르며 돌격하니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바로 정원지를 두동강 내버리자 남은 황건적들은 창을 거꾸로 들어 달아났고... 유비가 이들
을 추격하자 투항하는 황건적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으니 유비가 황건적을 격퇴하고 성
으로 돌아오자 유주자사 유언은 이들을 직접 맞이해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며 감사를 표합니다.
유주자사 유언의 명령으로 청주자사 공경의 구원을 간 유비는 관우에게 1,000명
을 장비에게도 1,000명의 병력을 주어 산 오른쪽에 숨어 징소리 신호로 일제
협공하게 하였는데, 이튿날 유비가 추정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 북소리를
울려 진격했고...... 적장은 이에 반응하여 출진하자 이에 유비는 적을 유인합니다.
관우, 장비는 유비가 신호를 보내자 황건적을 공격했고 유비 또한 뒤로 돌아 공격
하였는데 세갈래로 공격하자 결국 황건적은 무너졌고.... 유비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황건적이 청주성으로 도망쳐오자, 공경은 군사를 이끌고 황건적을
무찔렀으니 청주성의 포위가 풀렸고 공경은 유비에게 음식을 주며 감사했습니다.
후한 왕조는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중앙정부의 권위와 영향력이 실추' 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의 통치기구들이 군사력을 확대하고 지휘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 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니.... 낙양 조정의 영향력 아래있던 '지방관' 들이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군벌)으로 변모하는 것이니 통일 제국 멸망사의 효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십상시의 난 :
189년에 외척인 하진과 유림들을 세력으로 한 청류파와 장양등 환관과 부패한 관리들을 세력
으로 한 탁류파 대립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환관 십상시는 영제를 주색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환관들과 간신들이 판을 치며 나라가 위태로워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외척 하진이 대장군에 임명되어서는 탁류파와 청류파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하진은 백정 출신으로 십상시에게 줄을 대면서 누이동생 하태후를 황실에 궁녀로 넣으며
관직에도 임용될 수 있었는데... 하태후가 영제 총애를 받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고
그 배경에는 십상시의 조력이 있었지만, 권력이 강해지자 하진은 점차 십상시들
에게 간섭받기를 싫어하게 되었고... 거기다 영제가 승하하자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됩니다.
영제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환관 건석을 불러 유조를 내리고 진류왕 유협을 보살펴 줄 것을 부탁
하니... 건석은 수도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원팔교위의 수장으로 하진을 고깝게 보고
있었기에 하진을 죽이고 진류왕 유협을 옹립할 계획을 세우지만 중간에 하진이 눈치를 채는
바람에 실패했으며 하진이 환관 세력에 원한을 품어서 대립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십상시와 하진의 불화를 감지한 원소등 강경한 청류파들이 하진에게 접근해 십상시를 몰아내자
고 부추기니.... 불안해진 건석은 자신이 거느린 중앙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하진을 죽일
계획을 세웠지만, 십상시들은 하진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 착각하고 오히려 건석의
계획을 하진에게 일러 바치니...... 건석은 주살되고 중앙군은 모조리 하진에게로 흡수됩니다.
영제가 죽고 황태자 소제가 즉위한 직후의 상황은 하진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니 소제는 어린
나이라 어머니인 하태후와 삼촌인 하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 환관에 비해 외척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동 태후가 수상쩍은 죽음을 맞아 하진에게 살해
되었다는 설이 기정사실 처럼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청류파들은 하진에게 지지를 보냈습니다.
십상시의 비리는 수없이 쌓여 있었고 영제시대에는 왕윤이 십상시가 황건적과 결탁했다는
문건을 입수한 적도 있었으니 이때는 영제가 십상시들을 총애한 탓에 용서해주고 오히려
왕윤이 위기에 빠졌지만, 영제는 죽고 세상은 뒤집히자 환관 입장에서는 도저히 손 쓸
도리가 없었던 상황이라 하진이 마음만 먹으면 십상시를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십상시들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 태후를 비롯한 하진 일족에게 뇌물을 바치며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었고, 하태후의 어머니 무양군이 환관들을 감싸고 돌자 하태후는 하진을 의심하게
되는데, 십상시와 결탁해 출세했던 하진은 건석을 죽인 시점에서는 하태후와 반목해 가면서
까지 십상시와 척을 질 생각이 없었지만 원소를 위시한 강경파는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원소 등의 강경파에게 설득당한 하진은 환관들의 주살을 강행하리라 마음
먹었으나 보정대신 이라는 하진의 정치적 입지상 하태후의 재가가 필수
였고.... 이에 원소는 하진의 정치적 입지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하태후로
하여금 십상시의 숙청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4가지 계책을 내게 됩니다.
병사들로 하여금 흑산적으로 분장하게 하여 맹진을 불태우고 정보를 통제하여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시키며.... 하진 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징발하게 함과 동시에 외부 군벌들을
끌어들여 흑산적에 대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당시 영제와 십상시가 추진하던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해 십상시를 숙청한 다음 외부 군벌들과 함께 흑산적을 토벌하여 진상을 은폐한다.
노식과 진림등은 군사 요직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 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런 위험한 짓을
하느냐는 반대가 제기되었지만 하진은 끝내 듣지 않고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이니... 하진은
동탁을 포함한 외부군벌들을 불러들임과 동시에 부하들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고,
정원을 시켜 맹진을 불태우니 맹진의 불길이 낙양에서도 보이자 환관과 가까웠던
탁류파들도 공포에 질려서는 환관을 주살하자고 말했으나 유독 하 태후만이 듣지 않았습니다.
하묘는 여전히 하진에게 환관들과 화해할 것을 권했지만 원소는 하진이 머뭇거리는 것을 감지하자
되돌릴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진을 다그쳐 마음을 굳이게 하니... 이에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에
임명하고 원소에게는 사례교위와 가절을 주어 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데,
원소는 환관들을 옭아매고 황실의 경호병을 자신의 심복들로 교체하여 황궁을 낱낱이 감시합니다.
원소의 이같은 행동에는 마침내 태후도 백기를 들어 십상시들을 모두 파면시켜 고향으로 돌아
가게 하고 평소 하진과 친했던 환관들만 궁에 남기니... 십상시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하진에게 읍소하며 애원하는데, 하진이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자 원소는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니 곧바로 처결하라며 세차례나 막아섰지만 듣지 않았고 이에
원소는..... 하진의 명령을 사칭하여 십상시를 잡아들일 것을 명하나 때를 놓쳐 실패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십상시도 반격을 준비했으니 십상시 장양의 양아들이 하태후의 여동생과
결혼했는데.... 장양이 양며느리에게 "입조하여 한 번이라도 다시 태후와 폐하의 안색
을 뵙고 구덩이에 들어간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로
읍소하자, 이 말은 곧 하태후에게 전해졌고 감동한 하 태후가 십상시 전원을 복직시킵니다.
분노한 하진은 태후에게 십상시를 모조리 죽이고 삼서의 낭 중에서 사람을 뽑아 환관들의
거처를 지키고 감시할 것을 제안하려 하나... 도리어 십상시는 태후의 조서라고 속여
189년 8월 25일 하진을 궁궐로 불러들여 죽여버리니, 풍전등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극단
적인 방법을 쓴건데 이전에는 황제를 이용해서 외척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방법 입니다.
하진을 살해한후 장양은 조서를 꾸며 번릉을 사례교위로, 허상을 하남윤으로 삼았는데, 상서가 의심
하며 "대장군이 오시면 의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하진의 머리를 상서에게 내던지며 "하진은
모반하여 주벌했다." 라고 외치는데... 배후 조종자 원소등 청류파는 남아있지만 십상시는 황제와
태후를 확보하고 있으니, 원소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관리들을 임명해 수도를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하진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광등 하진의 부하들은 분노하여 원술과 같이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 문을 부수고 난입하자... 환관들까지 직접 무기를 잡고 나서 당장은 궁을 지켜냈지만 원술은
해가 지자 남궁의 문에 불을 지르고 동궁과 서궁까지 불태우며 장양이 나오도록 협박하니 8월 27
일 궁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장양은 하태후에게 하진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합니다.
장양은 하태후와 소제, 진류왕, 관속들을 이끌고 북궁으로 피신하였는데 2차 당고의 금 당시
보병영의 군사 5천을 장악하고 선공에 나선 두무를 물리친 전훈을 따라... 번릉과 허상이
사례교위 원소와 하남윤 왕윤에게서 지휘권을 빼앗고 수도를 장악할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한건데, 원소는 하진의 피살 소식을 듣자 사병 100명을 이끌고 번릉과 허상을 살해합니다.
번릉과 허상이 장양에게 임명된 인사였지만 형식상 이들은 황명을 통해 임명되고
원소는 역적으로 선포된 상태였으므로.... 이런 갑작스러운 원소의 행동에
군사들이 혼란에 빠졌으나, 원소가 조정의 원로대신이었던 숙부 원외와 짜고
위조한 조서를 명분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중요인사들을 포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양이 북궁으로 피신하는 시점에서 장양파 인사들은 죄다 원소에게 죽고 노식, 왕윤, 하묘,
왕광 등 하진파 인사들이 원소에게 합류하는 상황이었으니, 제각기 궁에 진입해 아수라장
이 되면서 장양의 패배는 확실한 상황이었고, 다음날인 8월 28일 북궁으로 진입한 원소는
북궁의 문을 닫고 환관이란 환관은 모조리 끌어내 살해하니 무려 2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장양등 환관은 황제를 협박해 궁궐을 탈출했지만 원소의 추격이 급해지자 강에 자결했는데, 낙양에 막
도착한 동탁의 군사는 3천명으로 큰 규모가 아니었으나 허장성세를 부려 군대가 서쪽에서 계속
도착하는 것처럼 꾸몄으니 동탁은 새벽에 몰래 병력 수백명을 성 밖으로 내보낸 뒤, 그날 오후에 병력
들이 북을 울리며 낙양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여준뒤 또 그 다음날 새벽에 성 밖으로 나가서 반복합니다.
성내 사람들은 병력이 성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보지 못했으므로 꾸역꾸역 증원된 것으로 믿게
되었으며 황제를 동탁이 끼고 있는 데다가 군세도 강대해 보이자...... 하진과 하묘 형제
가 이끌던 병사들은 대부분 원소가 아닌 동탁에게 흡수되었고, 동탁이 절대권력을 잡게
되는데 기도위 포신은 원소에게 동탁을 습격할 것을 권했지만 원소는 주저하며 거절했습니다.
동탁의 기만책에 원소뿐만이 아니라 낙양에 있던 정치가들 전원이 넘어간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원소에게 동탁 습격을 제안한 포신조차도 이 기만책을 간파한 것이
아니라... 비록 동탁의 군이 강대하지만 멀리서 온 군대라 지쳐있으므로,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근거를 들며 동탁을 칠 것을 유세했을 뿐이었습니다.
원소는 동탁의 정확한 군사력을 가늠하기 어려웠으니 주저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고 사태
가 수습되어 가는 국면에 난리를 일으켜 혼란을 가중시키기 보다는... 동탁은 중앙정치
에 기반이 없으니 협조적으로 나올것이라 본 것인데..... 동탁은 집금오 정원의 측근
여포를 매수해 정원을 살해하고 그 군대마저 손아귀에 넣고 상국에 올라 폭주하게 됩니다.
4. 동탁 토벌전 :
후한말 190년 18로 제후가 모여 동탁의 토벌을 위해 동탁군과 겨룬 전투로 정사와 삼국지
연의의 세부 내용이 많이 다른데.... 원소는 수도를 탈출해 기주(冀州)로 도망갔으며
유비는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가 무리를 모았는데, 동탁이 신뢰한 시중
주비는 원소를 위해 동탁에게 원소가 대체(大體)에 통달하지 못하고 두려워 도망간
것이니...... 급히 잡아들이면 변고가 생길 것이라고 말하자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합니다.
동탁은 환관이 충신과 어진이를 주살한 것을 생각해 본성과 진심을 억누르고 뭇 선비를 발탁
했으니.... 이부상서에 주비(周珌), 시중에 오경(伍瓊)등이고 당고의 화에 연루된 진기
등의 무리도 모두 공경의 반열에 올렸으며, 숨은 선비도 많이 뽑았으니...... 상서
한복을 기주자사로 삼고, 유대를 연주자사, 공해를 예주자사, 장자를 남양태수로 삼았습니다.
동군태수 교모가 수도의 삼공이 주군(州郡)에다 서신을 보내왔다고 거짓으로 꾸민 뒤, 동탁의
죄상을 설명하며 「핍박을 받아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으니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란을
풀어 주기를 희망하노라」고 했는데.... 동탁이 태후와 홍농왕(소제)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자, 조조는 진류에서 가산을 처분해 의병을 모아 장차 동탁을 주살하려 했습니다.
190년에 원소는 발해에서 기병하여 종제인 후장군 원술, 기주목 한복, 예주자사 공주, 연주자사 유대,
진류태수 장막, 광릉태수 장초, 하내태수 왕광, 산양태수 원유, 동군태수 교모, 제북상 포신등과
군사를 일으키니... 무리는 각 수만명을 헤아렸는데 원소는 하내(河內)에 주둔하였고,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鄴)에 나머지 군대는 산조(酸棗)에 주둔하여 맹약하고 원소를 추대하여 맹주를 삼았습니다.
동탁의 사위 중랑장 우보(牛輔)가 병사를 맡아 따로 섬(陝)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교위 이각,
곽사, 장제를 관동(關東)으로 보내 진류와 영천의 여러 현을 공략하는데... 이때 장사 태수
손견이 예주의 병사를 이끌고 동탁을 토벌하려 했으니, 동탁의 장수 서영이 손견을 양에서
만나 전투를 벌여 손견을 격파하고 영천 태수 이민을 사로잡아서 팽형에 처해 삶아 죽입니다.
동탁은 의병을 포로로 잡으면 천으로 돌돌 말아서 땅에 엎어놓고서 뜨거운 기름을 부어서 죽였는데
하내 태수 왕광(王匡)이 하양진에 병사를 주둔시키니 동탁이 거짓 병사(疑兵) 를 보내 싸움을
걸고서, 몰래 정예병력을 소평진에서 하양진 북쪽에 보내어 격파하니 왕광의 군사가 다 죽었습니다.
다음해 손견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양현으로 진격하자 동탁이 호진(胡軫)과 여포를 보내
공격했으나 서로 불화해 사졸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졌으니... 손견이 추격하자 호진과
여포가 패주했으며 동탁이 장수 이각을 보내어 손견에게 화평을 구했으나, 손견이
거절하고 대곡으로 진군하니 낙양에서 90리 거리라 동탁이 출전하여 손견과 제릉묘한
에서 싸웠으나 동탁이 패주하고 민지에 다시 주둔한 뒤에 섬(陝) 지방에서 병사를 모읍니다.
손견이 낙양 선양성문에 진격하여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가 패주하였고 손견이 종묘를 깨끗이 하고서
여러 능묘를 정비한 뒤에... 군사를 나누어서 함곡관을 나와서 신안, 민지까지 가서 이(涞) 강을
경계로 동탁과 맞섰는데, 동탁은 동중랑장 동월을 민지에 주둔시키고, 중랑장 단외는 화음에,
중랑장 우보는 안읍에 주둔시키며 나머지 중랑장과 교위를 여러 고을에 배치해 산동을 방어시킵니다.
손견이 양동(梁东)으로 옮겨 주둔하였다가 동탁군에게 공격을 받으니 손견과 수십기만 포위를
뚫고 탈출했는데.... 손견의 붉은 두건(幘)을 장수 조무(祖茂)에게 쓰게하니 동탁의 기병들이
다투어 조무를 추격하는지라 손견은 샛길로 탈출할 수 있었으며, 손견이 다시 병사를 수습해
양인(阳人) 성에서 전투를 벌여 동탁군을 크게 격파하고 도독인 화웅 등을 효수(梟首) 했습니다.
이때 원술이 의심을 품고 군량을 운반해 주지 않았으니 양인성에서 노양까지는 1백여리인데도, 손견
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계획을 설명한 뒤..... " 위로는 나라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한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손견과 동탁은 골육
의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장군이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미워하고 의심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동탁은 손견의 용맹하고 굳센 것을 꺼려 장군 이각(李傕) 을 보내어 화친을 구하며 손견의
자제들을 자사나 군수로 임명하겠다고 하자... 손견이 말하길 "동탁은 하늘을 거슬러
무도하여 왕실을 쓸어 뒤집어 엎었으니, 너의 삼족을 주살하여 사해에 내걸어 보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눈을 감지 못하는데 어찌 장차 같이 화친하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191년에 손견이 다시 대곡(大谷)으로 진군하니 낙읍(雒邑)과 90리 거리에서 대치했는데 동탁
이 바로 도읍을 옮겨 서쪽으로 관중으로 들어가면서 낙읍을 불태웠으니, 손견이 앞장서
입성하여 낙읍에 이르러 여러 능묘를 수리하고 동탁이 파헤쳐 놓은 요새를 바로 세웠습니다.
원소등이 패배하여 감히 먼저 진군하지 못하자 조조는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주살하려고 대군이
모였는데, 제군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동탁이 산동(山東)의 병사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실의 중엄함에 의지하여, 이주(낙양과 장안)의 험고함에 의지해 동쪽으로 향해
천하에 임하려 합니다. 비록 그가 무도함으로 행한다 해도 족히 우환이 될 것이니 싸워야 합니다.“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성고(成皐)를 거점으로 삼으려 하니 장막이 위자로 하여금 조조
를 뒤쫓자... 형양의 변수(汴水)에 도착해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을 만나 싸웠으나 불리하여 병사들
이 많이 다치고 죽었으며, 조조도 유시(流矢)에 맞고 타던 말은 창에 찔렸으니 사촌동생 조홍
(曹洪)이 말을 주어 밤에 달아날 수 있었고 산조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서영도 물러갑니다.
한편 유비는 적에게 격파당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 달아났으며 군대를 거의 잃은 조조는 병사가 적으니
양주와 패국을 돌아 다니면서 반란을 겪기도 하면서 병사 1천명을 모아 하내로 이동해 주둔했는데
한편 서로 불화한 연주 자사 유대가 동군 태수 교모를 죽이고 왕굉에게 동군 태수직을 맡도록
했으며, 원소는 한복과 유주(幽州)목 유우(劉虞)를 세워 황제로 삼고자 모의하였으나 조조가 거절합니다.
한편 산조에 주둔하던 관리들은 어느 누구도 솔선하여 동탁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기에 군량이 떨어져서
흩어졌고... 공손찬(公孫瓚)이 병사를 이끌고 기주로 들어가 동탁토벌을 명분으로 삼아 한복을
습격해 안평(安平)에서 승리했으며, 191년 봄에 원소와 한복이 유우를 옹립해 황제로 세웠으나
유우가 수락하지 않았고, 4월에 동탁이 장안으로 환도하자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해 기주를 취합니다.
원술은 손견을 보내 양성에 주둔시켜 동탁에 대항토록 했는데, 원소는 주앙을 보내어 공격하니 원술은
공손월과 손견을 보내어 싸웠는데 패배하고 공손월이 죽자 공손찬은 격노하여 "내 동생이 죽었으니
이 재난은 원소로 부터 시작되었다." 군대를 내보내 반하에 주둔시켜 원소에게 복수할 준비를 합니다.
“오록(吳錄)”에 이르길 이때 관동(關東)의 주군에서 서로 겸병하여 스스로 강대해지는 데 힘썼으니...
원소가 회계군의 주우(周喁)를 보내 예주(豫州)자사로 삼고는 내습하여 그 주를 취하니, 손견이
비분강개하여 탄식하길 "같이 의병을 일으켜 장차 사직을 구하고자 하였다. 역적들이 거의
격파되려 하는데 이같이 하니 내가 누구와 함께 힘을 합쳐야 하겠는가!" 라 말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원술은 북으로 공손찬과 연계했으며 원소는 공손찬과 불화하여 남으로 유표와 연결했으니
형제가 다른 상대와 손을 잡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과 교류하며 군대를 이끌고
진류(陳留)로 들어갔는데, 조조와 원소가 같이 공격하여 수공(水攻)으로 원술을 격파합니다.
조조와 원소군에 협공당해 패한 원술이 구강(九江) 으로 달아나 양주자사 진온을 죽이고 그 주를
차지했는데... 손견을 제외한 제후들의 군대는 189년 12월~ 190년 2월까지 3개월만 동탁과
싸웠으니 그 이후부터는 동탁과 싸운 기록이 없고 오히려 자기 세력을 늘리기 위해 싸웠습니다.
정작 낙양을 버리고 천도한 동탁은 장안에서 왕윤에게 설득당한 여포의 배신으로
살해당하고, 그를 죽인 여포 또한 동탁의 잔당인 이각, 곽사에게 쫓겨나 각지
를 방랑하는 신세가 되며 원소-조조-유표와 원술-공손찬-손견이 서로 대립합니다.
반동탁 연합은 중국 역사에서 특수한 경우이니 지방 관리들이 사병을 조직하고 연합해 중앙 정부
를 공격한 것 부터가 드물며.... 지방 관리들 대다수가 원래부터 토착 호족이었던 것도 아니고
왕의 혈족도 아닌 중앙 정부에 의해 발령나 연고가 없는 관리들이 사병을 조직했다는 점은
전무후무한데, 황제에 의해 발령받은 지방관들이 황제와 그 측근 동탁에게 칼을 들이민 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