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성
떠났다. 그리고 돌아와 또 떠난다.
인도양의 진주, 신비로운 스리랑카
Sri Lanka
내 인생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내 인생이 살아가는데 조금 서투르면 어떤가 ?
“나마저 안 챙기면, 내 인생은 어디로 갈까, 떠났다 돌아와 신비로운 세상속 스리랑카로 떠난다.
“아주 오래되고 조금 오래되고 복잡대고 잔잔하고 신비롭고 평범하고„
내 기억의 공간속에 단 한 번도 입력된 적이 없던 시공을 초월한 낯선 장면들이 정신없이 이어지는 동안 나의 감정 역시 복잡다단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결국, “유쾌„라는 한단어로 점철된 스리랑카 여행의 기억들,
시기리야(Sigiriya) 빌리지 투어
과거가 아닌 현재를 체험하는 시간
보기만 해도 힐링되는 천혜의 자연을 느낄수 있는 밀림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밀림의 풍경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지만,액티비티를 줄기며 그 속을 다녀올 수 있는 밀림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도로가에 빌리지 투어(Village Tour)라고 써놓은 간판을 보고 찾아가 신청을 하자 물소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나타나 도로에 주차해둔 수례를 끌고 갈 준비를 한다. 투어의 첫 액티비티는 소달구지 드라이브다. 밀림 속으로 들어간 물소는 느릿느릿 걸으며 순식간에 시간을 먼 과거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오래전쯤에 모습일까„ 궁금하지만 이 곳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일 뿐이다. 그저 있는 자원을 온전히 개발하여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그들의 삶 속으로 잠시 들어가 준비된 여행을 즐기는 것뿐이다.
소달구지에서 내려 걸어간 곳에 호수가 나타났다. 시기리아 바위를 오르며 유독 눈에 띄던 호수가 하나있었는데, 호수 뒤로 멀리 시기리아 바위가 보이는 것을 보니 그 호수가 맞는 것 같다. 이름조차 모를 호수 위를 군데군데 덥고 있는 연잎과 그 위에 피어오른 연꽃이 호수의 전형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인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그 공간속에“작은 나룻배와 사공만 있으면 한 장의 그림 일 텐데„라고 생각하던 그때 소달구지를 몰던 기사가 사공이 되어 작은 배를 준비했다. 천천히 노를 저어가는 배위에 올라 호수의 정적을 즐기는 시간이 그토록 평화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잠시 노를 내려놓은 사공은 연잎을 하나 건져 말없이 햇빛을 가릴 모자를 하나 만들어 건넨다. 자연을 이용하는 그들의 지혜도 반갑지만 급격하게 마음의 온도를 따스하게 올려놓은 그들의 순박한 환대가 놀랍다.
옛 왕조의 수도 캔디(Kandy)
멋진 해질녘 풍경, 불치사(佛齒寺)
캔디는 1592년부터 1815년까지 스리랑카의 마지막 왕조인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다.
영국에게 점령되면서 왕조의 운명도 수도 캔디도 수도가 아니게 되었지만 도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광도시며 불교 도시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수도인 쿨롬보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져있고 고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인구는 약10만정도의 작은 도시다.
기원전부터 문명이 꽃피운 곳이다.
불치사(佛齒寺. Dalada Maligawa Sacred).
이름이 말해주듯 불치 사리를 품고 있어 전 세계 불자와 여행객들의 발 검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나 역시 캔디를 찾아간 이유이기에 그 기대감은 꽤 높았지만 사원의 입구 앞에서 발걸음은 그만 바로 옆 캔디호수로 향했다.
시기리아를 지나 해질 무렵 닿은 캔디는 보다 모던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여행자를 맞아 준다. 석양이 지던 하늘은 주홍빛에서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캔디는 호수위에 그 잔상들이 가녀린 자태로 뿌려져 인근을 지나던 모든 것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호수주변의 불치사를 찾은 수많은 여행객들, 호수 위를 떠돌던 오리, 물속을 유영하며 고개를 내밀고 펄떡펄떡 뛰는 물 고기떼, 언덕의 고급스런 호텔의 은은한 조명까지 호수의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매일 이시간이면 벌어질 것 같은 캔디의 작은 의식. 그 풍경을 선물해준 해질 무렵 풍경이 더해 불치사에 기억으로 간직된다.
콜롬보(Colombo)
그리고 Outro
스리랑카 섬의 서해안, 켈라니 강 바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도양의 주요항구이다. 이 항구는 5세기 중국의 여행가 법현의 기록에서 카오란푸라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다.
스리랑카인 들은 이 항구를 콜랑바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 들은 이 이름이 망고나무('잎사귀'라는 뜻의 Kola와 '망고'라는 뜻의 amora)라는 뜻의 스리랑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Koramba가 고대 스리랑카어로 '항구'나 '나루터'를 뜻하는 낱말이었다는 해석이 더욱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8세기 이후 오늘날의 항구 근처에 아랍 상인들이 정착했으며 16세기부터는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및 영국인들이 차례로 섬에 정착하면서 발전되였다. 1815년 스리랑카인 족장들이 실론 섬(지금의 스리랑카) 중심부에 있는 캔디 왕국의 왕을 몰아내고 영토를 영국에 양여하면서 실론 섬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가 독립한 뒤, 서구 영향권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었다
스리랑카 여행 첫날,
공항에서 시기리아로 여행하는 길에 잠시 어둠속에서 봤던 콜롬보가 아닌 잘 닦인 고속도로를 뚫고 만난 한낮에 콜롬보는 시간이 미래로 늦춰진 도시가 되여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는 길 여전히 도로는 차량소음과 경적소리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여는 도시와 다른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정돈되고 현대화된 모습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이곳 여행에서 마무리는 바닷가 해변으로 발을 돌렸다. 서울 시내에서 바다를 구경하는 수고로움 같은 것은 이곳에서는 필요 없다.
주요 빌딩과 상점 관공서등이 몰려있는 콜롬보 시내 한가운데에 해변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설익은 푸르스름한 과일처럼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촌스러운 해변이지만 그래도 지나가는 여정을 떠올리며 스리랑카를 기억하는 풍경이 되어준다. 뭐가 그리 반가운지 카메라 렌즈 속에서 반갑게 손을 들어 흔들어주던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밀려온 파도에 젖어버린 나를 보고 함께 웃어주던 사람들, 또다시 모든 여독은 날아가 버리고 마냥 웃으며 스리랑카를 줄기고 있는 나.
시기리아 (Sigiriha) 고대도시
시기리야,
즉“사자의 암석은„ 매혹적인 고고학 유적으로, 그 중심부에 있는 입방체 형태의 바위언덕이 이곳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화산의 폭발로 생성된 이 바위 언덕의 높이는 370m로, 사면이 다 깎아지른 듯 한 수직이다. 꼭대기 부분의 평평한 표면 넓이는 1.4헥타르에 이른다.
시기리아는 4세기의 불교 수도원이었으며, 주위에 조성된 단지는 한 세기 이후에 카시야파 왕이 세운 도시일 것이라 여겨진다. 이 유적지와 정글사이에는 정원들이 있어 서로 분리되어있는데. 진흙으로 된 해자가 정원 가장자리에 경계선을 긋고 있다.
바위 언덕 꼭대기에는 카시야파 왕이 요새 삼아, 혹은 유희용 궁전 삼아 지은 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의 저수지 유적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왕이 죽은 후, 건물들은 예전처럼 수도원으로 되돌아갔으나 16세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카시야파 왕이 시기리아를 지었던 것은 침략군에 맞서는 특별한 요새로서의 마사다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황당할 정도로 확실한 요새 속으로 그가 나라를 이끌고 들어갔던 것은 그 개인의 욕망과 불안과 공포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광기와도 같은 전설같은 역사의 따르면 카시야파 왕은 디투세나 왕의 장남으로, 그 밑에 배다른 동생인 목갈리나 왕자가 있었다고 한다.
장남 카시야파는 어머니가 평민이었고 목갈리나는 어머니가 왕족이었다.
출신 성분이 동생에게 뒤지기 때문에 카시야파는 왕위를 동생이 물려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살아야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하고 만다.
권력을 위해서는 늘 골육상쟁이 벌어지는 법. 그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깜짝 놀란 동생 목갈리나는 바다 건너 인도로 도망친다. 이제 확실한 왕이 되었건만, 그럼에도 카시야파의 걱정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 동생이 돌아와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그래서 그는 저 시기리아의 사자산위로 올라갔다.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어 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자산위는 원래 수도승들이 도를 닦던 곳. 그 천혜의 요새는 그래서 갑자기 왕가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러나 운명이란 자가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걱정했던 대로 망명했던 동생은 10년 뒤 마침내 세력을 귀합해 형에게 복수를 하러 처들어 온다. 요새에 있기만해도 버틸 수 있었지만 카사야파는 분노에 불타 직접 동생을 물리치러 전장에 나선다. 그러나 전세에 밀리자 홀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자 동생의 군대를 앞에 두고 단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카시야파가 죽은 뒤 시기리야 요새는 다시 왕실에서 수도승의 수도처로 되돌아간다. 허망하고 부질없는 운명의 요새였다. 그 역사는 겨우 20년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그리고 그 뒤 잊혀진 곳이 되어 버렸다.
오랜 세월 밀림 속에 방치 되였던 이 요새는 훗날 영국인들에게 발견되어 비로소 그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암벽 한쪽 면을 깎아 만든 테라스에는“거울의 벽„이라 알려져 있는 길이 140m의 벽이 있다. 이 벽의 벽토위에는 머리에 꽃을 장식한 5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나타낸 프레스코화 스무 점이 그려져 있다. 과거에는 최대 500점의 프레스코화가 있었던 듯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 버렸다.
다양한 색으로 채색된 벽화들은 수백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들이 쓴 사랑시가 되여 벽에 남아 있다.
테라스 위에는 폭이 좁고 철로 만든 나선형 계단이 돌로 된 사자의 두앞발 사이에 놓여있다. 이 두앞발은“사자의문„에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인데. 원래는 사자의 머리도 달려있었다. 방문객들은 아마 크게 벌어진 사자의 입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계단을 통해 관광객들은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주변 평원 넘어 멀리까지 펼쳐진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계단은 몹시 좁아서 한 계단에 한발만 겨우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이다.
힘들게 올라가는 길이 좁고 높은 곳이라 각별히 안전에 유의해야한다.
일상의 무거운 짐들을 잠시 내려놓고 스리랑카 여행길에 스치며 만났던 사람들의 친절을 간직하며, 이 세상을 진정 다르게 만드는 방법들을 발견하게 한다. 여행은 행복의 응집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그 길을 신뢰하고, 방랑벽을 즐기며, 대담한 영혼의 자양분을 주어 기르는 법을 배운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일상은 언제나 아침 이슬처럼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