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 한산거사
동아대학교 교수불자협의회 회장인 학산이
[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책을 펴낸 한산거사를 초청해서
특강의 기회를 가졌다.
평소에도 한산이라는 존경하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한산의 강의를 직접 듣고 나니 이런 훌륭한 친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한산이 책을 통해서 친절하고 소상하게 불교의 근본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직접 그의 강의를 통해 핵심적인 내용을 들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더 명료하게 다가왔다.
한산거사의 강의내용이 너무 소중한 가르침이라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본다.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의문의 출발점인
<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한산이
간략한 그림 하나를 그려서 명쾌하는 설명하는 것으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불교는 부처님 생시의 설법을 바탕으로 한
[근본불교]의 토대 위에 [대승불교]로 발전한 것인데
대승불교에서는 좀체 근본불교를 드러내어 설명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상태에서의 이야기를 시작하므로
근본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선불교는 대승불교와의 접점이 크지 않으며 껍질이 매우 단단하다.
더욱이 선불교는 있는 그대로를 如實하게 알고 보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오는 설법으로 그 내용을
일반 불자들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에 비하면 티베트불교는 대승불교를 잘 계승하고 있다.
부처님은 인생을 苦海라고 보고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찾고자 수행하셨고 그 깨달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만약 인생이 괴롭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불교를 알고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생의 괴로움은 生`老`病`死의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애별리고(愛別李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고자 하여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인간의 심신을 형성하는 5가지 요소인 오취온(五取蘊)으로 인한
오음성고(五陰盛苦)의 8가지 괴로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오취온(五取蘊)이란 사람의 몸, 감정, 지각, 의도, 의식인
色`受`想`行`識을 가르키는 것으로 여러 생의 삶을 통해서
쌓여진 경험의 축적으로 생긴 자아의식을 가르키는 것이다.
괴로움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불교의 핵심원리인 12연기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이 [늙고 병들면서] 갖가지 괴로움을 겪는 것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고, 태어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인데, 존재는 강하게 움켜쥐는
[집착]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집착은 내가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다는
[갈애]로 인한 것이고, 갈애는 무엇인가
[느낌]이 있기 때문이고, 느낌은
[접촉]이 있기 때문이고, 접촉은 우리에게
[육입]의 감각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감각기능은 우리의 정신과 신체 즉
[명색]이 있기 때문이고, 명색은
[의식]이 있기 때문이고, 의식은
[형성]이 있기 때문이고, 형성은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무명- 형성- 의식- 명색- 육입- 접촉- 느낌- 갈애-
집착- 존재- 탄생- 노사- 무명으로 끊임없이 연기한다.
존재라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A와 B라는 다른 두 시점에 어떤 개체가 완전하게 같다면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연기하므로 존재는 불가능하다.
緣起한다는 것은 다른 조건들의 영향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조건은 무수히 많으며
무엇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므로
잠시도 불변의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無明이란 이와 같은 연기의 법칙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연기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 뿌리에 해당하는 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무엇이라 규정하는 것인데 이렇게 살아가면서 배우는
모든 것들이 존재를 형성해서 무명을 깨우치지 못하게 한다.
연기의 중심에는 특히 "나"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가 자리하고 있다.
불교의 수행이란 이 무명을 깨치는 훈련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무명을 깨치는 일은 머리로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러 생을 살아오면서 익힌 경험에서 ?여진 분별심을 버리야 한다.
분별심만을 버리자면 의식을 잃을 정도로 만취나 깊은 잠에 취하면
일시적으로 분별심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분별심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의식이 명료해서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명료한 의식으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살피되
분별심을 버리는 것을 止觀이라고 한다.
모든 현상을 살피는 방법은 우리의 몸, 느낌, 마음, 법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四念處라고 한다.
우리는 금강경, 반야심경 등과 같은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흔히 접하게 되는데 대승불교의 경전만으로는 불교의 근본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승불교는 자기 스스로 해탈하기 위해 수행하는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만들어졌다.
무명을 개우치고 깨달음을 얻으면 연기에서 벗어나
다음 생을 맞지 않게 되는(不受後有) 아라한이 된다.
그러나 소승불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첫째, 자비심이 없다는 점이다.
스스로 해탈할 뿐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열반과 자비를 모순되지 않게 할 법리를 만들어야 했다.
둘째 자기라는 존재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我空, 人無我에 대해 法無我, 法空이라는 것이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각 부파가 부처님의 법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고정된 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 주장했음에 대해 대승불교는 법이라는 것
역시 고정불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론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함경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아함경을 경시하는 것은 중국 天台宗의 창시자인 天台智가
五時敎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고,
이후 12년 동안 [아함경]을 설하고, 8년 동안 [방등경]을 설하고,
이후 22년 동안 [반야경]을 설하고,
이후 입멸하시기까지 8년 동안 [법화경]을 설하셨다.)의 영향이 크다.
이와 같은 구분을 많이 인용하면서 아함경은 가장 낮은 근기를 위한 것이고
법화경이 가장 높은 경전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아함경은 토막토막 구성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체계화하기 어렵다.
아함경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니까야]가 있다.
[니까야]는 아함경과 전파경로가 달라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내용은 같으며 [니까야]를 읽으면 불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니까야]의 번역이 속속 진행되고 있는데
어렵고 힘든 작업으로 분량이 많고 가격이 비싼 것이 다소 부담이 되지만
[쌍윳따니까야]는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나는 윤회에 관심을 가지고 윤회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불교를 배우면서 어렵게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과정의
어려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익힌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책을 내게 되었다.
출처: 건강한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