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믿음의 길(갈라디아서에서)
2024. 1. 21. 성찬예배
신약성서가 기록된 당시에 초대교회는 여러 사도들이 교회들에게 편지한 것을 살펴보면 많은 혼란과 어지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이천 년 전의 그때와 비교해서 훨씬 더 많은 어지러움과 혼란들이 교회 안팎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주님을 앙망할 때 하늘까지 이어지는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왕래하는 것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천사들은 자유롭게 날 수 있지만 사닥다리라는 길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세가 되어 속됨과 가증함, 거짓과 불법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성도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참된 믿음의 길에 굳게 서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의 살과 십자가의 보혈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하는 이 시간에 참된 믿음의 길을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갈라디아서 2장 16절)
전에 기도원 같은 데 가보면 ‘주여!’ 삼창하고 ‘믿습니다’ 하는 그런 맹목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참으로 존중하면서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너무나 단순한 사실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을 믿고 있어요. 세상을 믿고 있고요, 가까이하는 사람들을 믿고 사는 것이 많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크고 첫째가는 성도의 신앙생활이고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우리의 모든 사람과 환경에 대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주님을 몰랐을 때 이 믿음을 핍박하고 잔해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해보다 더 밝은 빛 때문에 눈도 멀게 되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뿐이지 예수님을 인격적인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 형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사실이 나의 해답인 것을 인정하고 그 주님을 영접했을 때 사도 바울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어느 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 말씀처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뿌리요 나의 생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접붙임을 받으면서 연합할 때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가 맺어지는데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 살아 있는 관계가 믿음이지요. 서울에 가면 큰 믿음 교회가 있답니다. 저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믿음이 크냐 작으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일 교회도 많지요. 제일이 아니라 꼴찌가 되더라도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내 주님과 살아 있는 관계가 진정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 단순한 복음에 집중하지 못한 모습을 보시고 “참 이상하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누가 너희를 꾀어서 그리스도에게서 멀게 했는가?” 바울 선생님은 탄식하며 그들을 권면합니다. 주님을 믿는 것 이외의 다른 복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살지 않고 믿음 밖에서 온전한 길을 찾고 있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믿음 밖에는 성도들이 살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죽듯이 우리 성도들도 믿음 밖에 있을 때에는 죽은 생활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지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육체로 마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밝히 보이거늘 이처럼 너희가 어리석느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하는 길 그것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두 번째, 듣고 믿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라디아서 3장 2절)
복음을 단순하게 듣고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로마서 10장 17절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합니다. 이사야 55장 3절에
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그리스도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듣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먹지 않으면 우리는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명기 8장을 인용하셨지요. “사람이 떡으로만(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그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기억하는 것이 영혼의 삶을 꾸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살아 있으려면 주님의 영으로 감동되고 빛이 내 마음에 비추어져야만 그 말씀은 때에 맞는 말씀으로 좋은 꼴 맑은 물로 우리에게 생명이 될 줄로 압니다.
듣고 믿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판단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 일을 할지 안 할지, 어떻게 해야 될지’ 우리의 지혜와 머리를 굴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판단은 주님께 듣고 주님의 판단을 나의 판단으로 받아들입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도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께로부터 듣는 것으로 판단하니 나의 판단은 옳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양처럼 따라가는 그 길에서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생명이요, 내가 나아갈 길이요, 진리가 될 줄 압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의 비결도 성령님 안에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듣는 귀가 있는 자가 이기는 자였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의 소리도 있습니다. 그것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여 믿고 따라가는 것이 듣고 믿음으로 사는 삶인 줄 압니다.
세 번째,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갈라디아서 3장 11절)
로마서 1장 17절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박국서 2장 4절 말씀을 인용했지요. 이 말씀은 성경에서 어느 구석진 곳에 있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주목하는 단어는 ‘믿음으로 믿음에’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목사님께 배웠듯이 그 앞에 있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죄 용서를 받고 그 은혜 속에서 구원을 힘입는 믿음, 대부분의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이 수준에 멈춰 있습니다. ‘이신칭의’라고 저는 신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나 성경 로마서 1장 17절의 이 말씀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 두 번째 믿음이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 보좌의 주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내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을 주님과 의논하면서 허락 속에 사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 그 동행의 믿음이 두 번째 믿음입니다. 죄인이 용서 받은 믿음도 감사하지만 의롭게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그 동기에서 시작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죄인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 소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더욱 믿음의 길에서 소중하다고 말씀할 수 있겠습니다.
네 번째, 성령으로 믿음을
갈라디아서 5장 5절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
을 기다린다”고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말씀했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주님이 보내신 보혜사 성령님은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마치 예수님처럼 우리의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참으로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 중에 하나라고 말들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때 예수님은 크게 기뻐하시면서 베드로에게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다. 네 스스로 깨우친 것도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일깨워 주신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 선생님과 실라가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묻고 기다릴 때 예수의 영 곧 성령님은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대신 유럽의 첫 관문인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로 가는 길을 환상 중에 보여주시면서 빌립보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빌립보로 건너가니 그곳에서 자주 장사(옷감 장사) 루디아 아주머니의 마음을 움직여서 바울 사도 선생님이 전하는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 빌립보 감옥에 사도 바울 선생님이 갇혔을 때 역시 간수에게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온 가족이 성령님 안에서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디아 아주머니의 가정과 그 간수의 가정이 중심이 되어서 그 아름다운 빌립보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진 줄로 압니다. 주의 영으로 깨닫지 않고는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전도를 해야 하며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삶을 꾸려가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라디아서 5장 6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랑을 주고 싶지만 사랑이 그렇게 쉽게 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 그래서 새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이 명령도 지키고 싶은데 잘 안되는 거예요. 저는 그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기를 ‘주님, 제 속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하고 싶은데 제 속에는 사랑할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코리텐 붐 할머니가 자기를 그렇게 핍박했던 독일로 화해의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나아갔습니다. 어느 강당에서 집회를 하는데 “주님께 용서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제가 기도해줄 테니 강단으로 나오세요” 말하니까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나오는데 유독 한 사람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기와 언니 베시를 그 강제 수용서에서 괴롭혔던 그 간수가, 꿈에도 보기 싫은 그 간수가 용서받겠다고 걸어 나오는 거예요. 코리텐 붐 할머니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릅니다. ‘주님 저는 저분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 순종할 뿐이오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 예전의 악랄했던 간수가 차마 이분이 자기가 괴롭혔던 사람인 줄 모르고 다가왔을 때 코리텐 붐 할머니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로부터 사랑의 능력이 그 온몸을 감싸고 마음으로부터 용서가 되며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안아주고 기도해줄 수 있었다고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생명나무이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믿음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는데 사랑으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으면 우리가 형제들과 이웃을 사랑하는데도 주님이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사랑은 결코 은사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그 살아 있는 믿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열매요, 믿음의 길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대할 때도 보물단지인 줄 알았는데 그들의 육이 발동하면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지요. 꿀밤 한 대를 꾹 쥐어 주고 싶지만 참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속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 속에 자녀들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줄로 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주님을 모신 믿음의 삶에 있습니다. 생각 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주님을 생생하게 모시고 우리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이 생생한 삶을 꾸려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전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독교 교리 이상의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내 주님을 가까이 하고 참으로 온전한 믿음에 굳게 서 간다면 거칠고 패역한 이 세상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며 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힘있게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