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총(吳延寵)은 해주(海州) 사람이다. 집안이 한미하여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천하게 지냈으나 공부에 힘써 글 짓는 것을 잘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승진해서 기거랑 병부낭중(起居郞 兵部郞中)이 되었다.
숙종(肅宗) 5년(1100)에 상서(尙書) 왕하(王嘏)와 함께 송(宋)에 가서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였는데, 조정의 명령으로 『태평어람(大平御覽)』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송인(宋人)이 감추고 허락하지 않으니, 오연총(吳延寵)이 표문을 올려 간청하여 〈『태평어람』을〉 얻게 되었다. 돌아오니 왕이 말하기를, “이 책은 돌아가신 문종[文考]께서 일찍이 구하려했으나 얻지 못했던 것인데, 지금 짐이 이것을 얻게 되니 사신의 재능이다.”라 하였다. 정사(正使)·부사(副使)·요좌(僚佐)에게 모두 작위와 상을 더해주니 오연총에게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의 벼슬을 내렸다.
〈오연총은〉 외직(外職)에 임명되기를 청하였으나 그때 왕은 다른 사람을 뽑아 전주(全州)·청주(淸州)·광주(廣州)의 3주(州)의 수령으로 임명하고, 〈오연총은〉 송사(宋使)를 대접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오연총을 재상이 될 만한 인재라고 여기어 장차 크게 쓰려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부터 시험하고자 한 것이었다. 드디어 지전주목(知全州牧)으로 나가서 정사를 하니 관대하고 공평하며 가혹하지 않아 향리와 민이 그를 편안하게 여겼다. 〈오연총이〉 최고의 고과를 받으니 불러들여 추밀원좌승선 형부시랑 지어사대사(樞密院左承宣 刑部侍郞 知御史臺事)의 벼슬을 내렸으며,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尙書左丞 翰林侍講學士)로 옮기게 하였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지추밀원사 어사대부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 御史大夫 翰林學士承旨)의 벼슬을 받았으며, 동북면병마사 겸 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兼行營兵馬使)가 되어 나가서 아뢰기를 “동계(東界)에서 징발한 내외(內外) 신기군(神騎軍)으로서 부모가 70세 이상이고 독자(獨子)인 사람이 있으면 〈역을〉 면해주고, 1호(戶) 안에 3~4명이 종군한 자는 1명을 감하며, 재신(宰臣)·추밀(樞密)의 아들로서 스스로 응모한 자가 아니면 또한 면제하도록 하소서.”라 하니, 〈왕이〉 따랐다. 검교사공 형부상서(檢校司空 刑部尙書)로 승진하였다.
처음에 술사(術士)가 참언(讖言)으로 왕에게 서경(西京)의 용언(龍堰)에 궁궐을 짓고 때때로 순행(巡幸)하기를 권하자 내인(內人) 정극공(鄭克恭), 사천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 태사령(太史令) 음덕전(陰德全)·오지로(吳知老), 주부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磾) 등을 함께 보내어 용언의 옛 터를 보게 하였으며, 양부(兩府) 및 장령전(長齡殿)의 수교유신(讎校儒臣)에게 명령하여 모여서 의논하게 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오연총(吳延寵)이 홀로 말하기를, “남경(南京)의 역사(役事)가 겨우 끝나 민(民)은 피곤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새로운 궁궐을 세울 수 없습니다. 만약 순어(巡御)하고자 한다면 옛 궁궐에 머무르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 하였으나, 〈왕은〉 답하지 않았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이 또 아뢰기를, “태사관(太史官)의 보고에 의하면 송도(松都)에 도읍한 것이 지금 200여 년이나 되었다고 말하니, 왕업(王業)을 연장하고자 하면 서경 용언의 옛 터를 점쳐 새 궁궐을 짓고 왕의 거처를 옮겨서 조회를 받으며 새로운 법령을 반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 하였다. 오연총이 논박하여 말하기를, “지금 용언에 궁을 짓는데 불가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문종(文宗)께서는 명민하고 총명한데도 술수(術數)에 미혹되어 서경에 좌궁(左宮)과 우궁(右宮)을 지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고 깨달은 것이 있었으며 조짐이 없다고 여겨 끝까지 순행하지 않아서 헛되이 재력(財力)만 낭비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최근에 남경을 새롭게 열었으나 8년 동안 길한 조짐이 없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서경의 옛 궁궐은 지금 구하는 용언에서 서로 거리가 멀지 않으며 지세의 길흉(吉凶)도 반드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물며 명확하게 비결(秘訣)로 징험(徵驗)할만한 것도 없는데, 조종(祖宗)의 옛 궁궐을 버리고 따로 새로운 궁궐을 짓기 위하여 살림집을 헐어내고 걷어내면 인민을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로 불가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은 결단을 내려서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시고, 늙은 신하가 아뢴 것에 따라 옛 궁궐로 순행하시어 사직(社稷)의 장구한 계책을 구상하실 것이며, 억지스러운 말을 따라 함부로 공역(工役)을 일으켜 사람들이 원망하는데 이르지 않게 하소서.”라 하였다. 왕이 결국 최홍사(崔弘嗣) 등이 말한 바를 따르니 당시 의논이 애석하게 여겼다.
왕이 여진(女眞)을 정벌하려고 오연총(延寵)을 윤관(尹瓘)의 부관으로 삼았다. 그 때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나 오연총은 자못 의심스럽게 여겨 작은 소리로 윤관에게 말하니 윤관이 말하기를,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라 하였다. 오연총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었으며,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여진을 격파하여 영토를 개척하고 9성(城)을 쌓았다. 그 내용은 윤관 열전[尹瓘傳]에 있다. 〈오연총은〉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으로 녹훈되었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 叅知政事)가 되었으며 내구마(內廐馬) 1필을 하사받았다.
여진(女眞)이 다시 와서 땅을 다투며 웅주(雄州)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鈇鉞)을 주고 가서 구하게 하였다. 웅주가 포위된 지 27일이 되었는데 도지병마영할사(都知兵馬鈴轄使) 임언(林彦), 도순검사(都巡檢使) 최홍정(崔弘正) 등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군사를 나누어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무너지려고 하였다. 오연총이 문관(文冠)·김준(金晙)·왕자지(王字之) 등으로 하여금 정예(精銳) 1만을 이끌고 네 길로 나누어 수륙으로 함께 전진하게 하였다. 오음지령(烏音志嶺)·사오령(沙烏嶺)의 2령 아래 이르렀는데, 적이 먼저 고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 군사가 다투어 올라가 급습하여 191명의 목을 베었다. 적이 북쪽으로 도망가 다시 진을 치고 싸우려고 하였으나, 관군이 승기를 타고 힘을 다해 싸워서 크게 패배시키고 291명의 목을 베니 적이 드디어 목책을 불사르고 도망갔다. 오연총이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장수와 군사 가운데 구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출전하여 사상자를 많이 내서 군사들의 사기를 잃게 한 책임을 물어 차등 있게 벌을 내렸다. 〈오연총에게〉 양구진국공신 수사도 연영전대학사(攘寇鎭國功臣 守司徒 延英殿大學士)를 더하였다. 개선하고 돌아오자 왕이 문덕전(文德殿)으로 불러 보고 변방의 일을 물었으며 잔치를 내려 위로하였다.
여진(女眞)이 다시 멀거나 가까운 여러 부족(部族)을 모아 길주(吉州)를 수개월 포위하고, 성에서 10리 거리에 작은 성을 쌓아 6개의 목책을 세우고 매우 급하게 성을 공격하니 성이 거의 함락되었다. 병마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이 사졸(士卒)을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겹겹이 성을 쌓고, 또한 지키면서 한편으로 싸웠으나 싸움이 오래되자 형세가 어렵게 되고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오연총(吳延寵)이 그것을 듣고 분개하여 〈싸우러〉 나가려고 하니, 왕이 다시 부월(鈇鉞)을 주어 보냈다. 행렬이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적이 길을 막고 갑자기 공격하여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으며, 장졸(將卒)들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오연총이 스스로를 탄핵하는 장계를 갖추어 올리고는 윤관(尹瓘)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길주(吉州)로 나아가려 하였는데, 마침 적이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여 결국 돌아왔다. 재상들이 패군(敗軍)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는데, 왕이 사신을 보내 부월을 거두니 〈오연총은〉 복명(復命)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왕은 재상(宰相)과 대간(臺諫)이 〈오연총에게〉 여러 차례 죄 주기를 청하며 그치지 않으니 관직을 그만두게 하고 공신칭호를 박탈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연총을〉 다시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守司空 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오연총(吳延寵)이 표문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재주 있는 자가 비록 많으나 명분에 따라 실상을 꾸짖는다면 더불어 국정을 도모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죄가 비록 무거우나 그 마음을 속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오히려 간혹 용서해주기도 하는데, 그러므로 조말(曹沫)이 땅을 빼앗겼어도 노공(魯公)은 그를 책망하지 않았고, 맹명(孟明)이 패군(敗軍)하였어도 진(秦) 목공(穆公)은 그를 다시 등용하였다. 예전에 동쪽 오랑캐가 공손하지 않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해를 끼치니 선황께서 격분하시어 토벌하고자 하였고, 과인이 뜻을 이어받아 군사를 일으키니 경이 문무(文武)의 재능으로 장수(將帥)의 부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오히려 주저하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능히 적을 토벌하여 쓸어버리니 목을 벤 것도 이미 많았고 포로로 잡은 것도 역시 많았으며, 영토를 개척하여 성과 해자[城池]를 쌓았다. 비록 〈경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시끄러우나 힘써 노력한 것은 기록 할만하다. 이에 총애함을 내려 옛날의 지위를 복구하도록 하는 것이니, 당연히 보살피는 뜻을 이해하여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번 더하여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守司徒 守太尉 監修國史 上柱國)이 되었고, 판이부사(判吏部事)·판예부사(判禮部事)·판병부사(判兵部事)를 역임하였다. 병으로 여러 번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나이 많고 명망 있는 선비[耆儒舊德]에게 끝까지 도움을 받고자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예종〉 11년(1116)에 〈오연총이〉 죽으니 시호를 문양(文襄)이라 하였고 62세였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행동을 삼가는 것이 정성스러웠으며 충성과 검소만을 내세우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지론(持論)으로 당시의 폐습을 제거하는데 힘썼으며, 일찍이 사적인 것으로 공적인 것에 피해를 주지 않은 까닭에, 왕이 그를 중요하게 여겼다. 근신(近臣)에게 명령하여 장례에 대한 일을 감독하고 돕도록 했으며, 백관(百官)이 모여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아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