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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㉖ 바리사이들도 감탄한 예수의 현답
올리브 산 위로 올라갔다.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둥근 황금빛 지붕. 지금은 이슬람 성전이다. 모스크 특유의 문양으로 치장된, 이슬람의 3대 성지다.
예수 당시에는 그곳에 유대교 성전이 있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광야를 떠돌 때는 천막으로 성막을 치고 그 안에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모셨다. 그것이 신을 만나는 성전이었다. 유대인은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운 뒤에야 성을 쌓고 거대한 성전을 건축했다. 예수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의 한가운데 유대 성전이 있었다. 종교 국가였던 유대 사회의 심장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예수 당시 유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 모스크가 서 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승천했다고 해, 이슬람교 3대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백성호 기자
예수는 그곳으로 향했다. 유대 광야와 사마리아, 갈릴래아 일대를 돌면서 하늘의 뜻을 전하던 예수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예수와 제자들 일행은 예루살렘 동편의 올리브 산 근처까지 이르렀다. 예수는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의 등에 올라탔다. 나귀는 어렸다. 성경에는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라고 적혀 있다. 마태오 복음서의 예루살렘 입성 대목에는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린 나귀는 ‘겸손’을 상징한다. 예수는 건장한 큰 말을 타고서 위엄을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그것이 예수의 마음이었다. 유대 사회의 심장으로 자처해 들어가는 예수의 심정은 ‘낮춤’이었다.
그 낮춤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신의 속성을 향해 무한히 낮아지는 낮춤이다. 그것이 나중에 겟세마니의 기도로 이어지고, 다시 십자가의 길로 이어졌다. 예수는 그렇게 도성으로 들어섰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은 말을 키울 수가 없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에서는 군사용으로도 쓰일 수 있는 말 사육이 금지돼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로 양과 나귀만 키울 수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숱한 사람들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자신의 겉옷을 바닥에 깔자 그 위로 예수가 탄 나귀가 지나갔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이 자신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기도 했다. 아시아의 남방 국가에서 귀한 손님을 맞을 때 꽃잎을 흩뿌리는 풍습과 통한다.
올리브 산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이 순례객들에게 나귀를 탈 것을 권하고 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군마로도 쓰일 수 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말을 키울 수 없었다. 나귀를 키우는 것은 허용됐다. 그러니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갈 때도 말을 타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백성호 기자
이런 술렁임 속에서 예수는 성으로 들어갔다. 예수를 아는 이도 있었고 모르는 이도 있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물었다. “저분이 누구냐?” 그러자 군중이 답했다. “저분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 예수님이시오.”(마태오 복음서 21장 11절) 그리스어 성경에는 이 대목이 그리스어로도 ‘prophetes’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언자’라는 뜻이다. 이 단어만 봐도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봤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처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올리브 산의 전망대에 섰다. 예수는 이 고개를 넘어갔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개였다. 예수에게는 ‘생사(生死)의 고개’였다. 이 고개를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갔기에 예수는 결국 ‘십자가 죽음’을 맞았다.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가던 날 밤에도 예수는 이 고개에 있었다. 이 산의 중턱 겟세마니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예수는 다시 한번 죽음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나는 천천히 올리브 산에서 내려갔다. 내리막길이 다소 가팔랐다. 산 중턱에 유대인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묘지였다. 검은 옷을 입은 정통파 유대인 유족들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는 이 ‘답이 없는 물음’에 답을 내놓았다. 절벽처럼 아득하기만 한 삶과 죽음의 낭떠러지. 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를 전하기 위해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가 찾아간 곳은 ‘유대의 심장’이었다. 예루살렘 성전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과 제물로 바칠 비둘기를 파는 장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늘에 제물을 올리는 본래 취지는 좀 달랐다.
예루살렘 동편 올리브 산에 있는 겟세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 예수는 이곳에서 땀을 피처럼 흘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백성호 기자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집에서 태어난 가축 중 첫째 새끼를 바쳤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가축은 재산 목록 1호였다. 그중에서도 처음 태어난 송아지나 염소는 다시 새끼를 치기 위해서도 귀하디귀한 존재였다. 자신의 피와 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그 귀한 것을 바쳤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을 떼어내 하늘에 바쳤다. 제물이 피 흘리고 불에 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 제물 대신 자신이 불타는 느낌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제물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며 자신을 씻어 내리지 않았을까.
나를 씻어 내릴 때 통로가 생긴다. 우리는 그 통로를 통해 신의 속성으로 들어간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식으로 제물을 바치며 신을 만나는 장소였다.
짧은 생각
모든 율법에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 출발선에 서면
이유가 보입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율법이 생겨났는지
말입니다.
100년, 500년, 1000년이
흐르다 보면
사람들은 까먹기 시작합니다.
율법이 생겨난
이유는 망각하고,
율법 자체에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뀌는 겁니다.
종교에서는
이런 풍경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십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면,
거기에는
우상 숭배를 금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에 가려서
우리가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0년, 500년, 1000년이
흐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우상 숭배 절대 금지’만
오롯이 기억합니다.
왜
우상 숭배를 금하는지는
깊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한
사회적 사건들도
종종 발생합니다.
일부 기독교인이
불교 사찰에 가서
법당에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사찰의 땅을 밟으며
무너지라고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을 때처럼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율법을
그저 율법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생겨난
본질적 이유에 대해서
사색과 묵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
사색이 빠지고,
종교에서
묵상이 빠지면,
그 종교는
한없이
가볍고 천박해지기
십상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에서
우상 숭배를 금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하느님(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상에 가려서
진리가 보이지 않으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모세가 유대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떠돌던
구약의 시대가 아닌,
2023년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음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나에게
우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기에
진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에 가려서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
답이 나옵니다.
내가 숭배하고 있는
우상은
다름 아닌
‘나’라는 에고입니다.
차분히 짚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올리는
기도의 상당수가
실은,
나의 에고를
키우기 위한 것임을
말입니다.
하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항목별로
하나씩 따져보면
나는 지금껏
나를 숭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상 숭배는
불교의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단편적이고, 편협하고, 일차원적인
접근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에 담긴
깊은 메시지를
받아 마실 수가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을 섬깁니다.
그게
내가 부수어야 할
진정한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000년 전에
이미 경고를 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그것 없이
나를 따르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거듭 경고를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뭘까요.
거기야말로
내가 섬기는
‘나’라는 우상을
부수는 곳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부수는
이들을 가리켜,
예수는
“나의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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