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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마침내 미국에 가다
a, 뉴욕으로...
크리스마스에, 인야는 멕시코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정확히는, 인야가 멕시코 한국 수녀원에 크리스마스 인사를 했던 것에 따른 답장 메일이 크리스마스에 도착했다.
인야가 1997년 멕시코를 떠날 때, 자신의 작품 그림 서른 점 남짓을 그 한국 수녀원에 맡겨 놓으면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찾으러 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10여 년의 세월이 가도록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인야로서는 1년에 두어 차례(특히 크리스마스 때는) 수녀원에 메일을 보내, 그림을 빨리 찾아가지 못한 것에 따른 미안함과 성탄 인사를 전해오곤 했었던 것인데... 두어 차례, '그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 하루 만에 도착한 답장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림을 맡아주었던 수녀님이 몇 년간 한국 생활을 하다 멕시코로 돌아가 보니, 천장에서 새어든 빗물과 쥐로 인해 그림들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인야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지 못해, 이미 몇 달 전 모두 소각해버렸다는 것이었다.
인야는 그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홈페이지에 '슬픈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올렸다가(12월 25일 밤), 이틀 뒤 지워버렸다. 너무 개인적이고 슬픈 이야기를 그대로 세상에 공개하기가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미 달린 위로의 댓글들을 남겨둔 채 본문만 지우고 나니,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무슨 일이냐는 의문만 남긴 셈이 되었다.
결국 새해 첫날 아침, 인야는 담담하게 사건의 전말을 다시 정리해 올렸다. 회원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면서.
2008 년 크리스마스에 운영자(저)에게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처음에는 제 신상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아(? 어딘가 떠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되면 까페 운영도 못 할 것이기에...), 까페에 알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글을 올렸습니다.
당시엔 슬프기도하고 또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렇게 했던 건데, 하루 정도 지나면서 생각해 보니... 너무 개인적인 일을 까페에 올린 것 같아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삭제했는데, 이미 올라온 덧글에(회원여려분께) 미안해서, 그 덧글까지는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 내용만 지우고 덧글은 남겨놓았던 건데요......
그 게 오히려 나중에 들어오신 회원님들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는 의혹만 남겨놓은것 같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편할 리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창의 조회수는 자꾸만 늘어나고 있어서, 거기에 따른... 뭔가 조치를 취해야하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여,
다시 간단하나마 그 내용의 골자만이라도 올리기로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저에겐 너무 슬프고 황당한 일이라 이성을 찾을 수가 없어서 저질렀던 일이었으니, 회원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격려와 위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음도 알려드립니다. 그 위로에 일일이 답을 드리지 못함도 양해바랍니다.)
2009 . 1 . 1
그 소식을 접한 주변 지인들은, 이미 다 타버렸다는데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었지만, 인야의 생각은 달랐다.
도무지 그냥 한국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하다 못해, 직접 멕시코 현지에 가서, 사라진 그림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왕 멕시코까지 가는 길이라면, 이참에 그놈의 미국에도 한번 들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 할 땅이기도 한데, 멕시코까지 가는데, 바로 그 옆에 있는 미국을 건너 뛸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어쩌면 인야에게는, 이 기회에 미국도 한 번 들러 보고... 하는 기대감도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멕시코행이 빌미가 되어, 어쩌면 주객이 전도된 여정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이름 앞에서, 인야는 묘한 긴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나라와는 오랜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멕시코에 머물던 시절 미국에 있던 친구들의 권유로 미국에 가기 위해 별생각 없이 비자를 신청했다가 단번에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정해진 수입이 없는 화가라는 신분이 그들 눈에는 '무직'이나 다름없었고, 불법체류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분류된 탓이었다.
그 뒤로도 미국을 경유할 일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공항의 밀폐된 방에 몇 시간씩 갇혀 감시를 당하다 겨우 풀려나곤 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했지만, 힘없는 개인이 달리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2007년 가을, 인야는 이 오랜 앙금을 홈페이지에 적어둔 적이 있었다.
올해, 우리나라 국민의 미국 비자 거부율이 여전히 높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처음 외국에 나갈 때, 미국 대신 스페인을 택했던 그 선택 하나가... 어쩌면 나와 미국의 악연의 시작이었을 수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그 당시의 나는 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이 비자 발급에 유리한 조건이었기에... 그때 미국으로 선택했다면, 거부당할 리는 없었을 텐데... 좋은 조건이 다 지나버린 뒤에야 멕시코에서 비자를 신청했으니, 거부를 당했던 거라는 게 확실했던 셈이지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한다는 건 아닙니다.
왜냐면, 나의 스페인에서의 시간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었으니까요.
다만 괘씸해서라도 언젠가는 한 번, 미국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오기만은 남겨두었었답니다.
10 . 18
그렇게 미국은 오랫동안 인야에게 '못 가는 나라'였다.
새해가 밝고 연말연시의 어수선함이 가라앉을 무렵, 인야는 그 오기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정상적인 일과가 시작되는 날에 맞춰, 미국대사관을 찾아갔다. 한미 무비자 협정 이후로는 절차가 그리 까다롭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서였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은근히 겁이 나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대사관 입구에서는, 사전 인터넷 신청 없이는 인터뷰나 특별한 용무가 있을 때만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런 절차조차 모르고 갔던 인야는, 건물 안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문밖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에이, 헛걸음했잖아!'
이 헛걸음 자체는 결국 인야의 미국행 성패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무비자 협정 아래에서는 이런 사전 절차를 밟지 않고도 웬만하면 입국이 가능하다고 했다.
연말연시가 지나도록 인야는 좀처럼 몸을 추스르지 못했다. 집안은 어질러진 채였고, 하루의 대부분을 멍하니 누워 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멕시코 사건의 충격과 책 작업의 여독이 겹친 탓이었을까. 스스로도 심상치 않다고 느끼던 어느 날, 인야는 문득 결론에 다다랐다.
'삶에 뭔가 변화가 필요한 모양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 예감만은 분명했다.
겨울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런데 그보다 인야를 더 서늘하게 만든 건, 여행에서 돌아와도 여행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늘 당연하게 해오던 일이 이렇게 귀찮게 느껴지는 게, 어쩌면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까지 이어질 만큼 중대한 변화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인야는 친구 G와 극장 앞에서 만났다.
아침에 문자 한 통을 주고받다 갑자기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는 G의 사연을 들으며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인야의 근황으로 흘러갔다.
"인야 너, 이번에도 어딘가 나간다며?"
"응, 지난번에 내가 멕시코에 일이 생겼다고 했잖아? 멕시코 가게 됐어. 태워먹은 그림들한테 사죄라도 하러." 인야가 말했다.
"야, 근데 왜 그런 일이 생겼어?"
"돈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좀 여유 생기면 가서 찾아온다는 게 10년이 넘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림을 그렇게 태우냐?"
"그러게. 그것도 수녀가... 일반 사람이면 싸우기라도 하지, 수녀한테 뭐라고 하냐고. 기왕 가는 김에 뉴욕도 들를까 해. 우리 고등학교 후배, '되는대로 사는 애' 있잖아."
"뭐? 되는대로 살어?"
"응, 걔가 뉴욕에 있어. 텍사스엔 '멍청한 신부님'도 있고."
G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좀 그런 이상한 사람들뿐이냐? 귤 농사 짓겠다고 제주도로 떠난 친구, 그림 태우는 수녀, 되는대로 사는 애, 멍청한 신부님......"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와 하 하 하......"
인야도 뒤늦게 웃음이 터져, 극장 안에서 두 중년 남자가 예고편이 나오는 내내 숨죽여 킥킥거려야 했다.
영화가 끝난 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면서도, 인야는 혼자 그 생각에 몇 번을 더 웃었다.
항공권을 예약하고 발권을 마친 날, 출발일은 2월 25일로 확정되었다.
목적은 여전히 멕시코였지만, 계획은 뉴욕을 거쳐 상황에 따라 텍사스의 멍 신부님이나 시애틀의 고교 동창까지 들르는 것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동안 가야 했던 미국이라, 이런저런 일들은 많이 쌓여있었던 것으로... 비자 없이 가는 여정이라 입국 거부의 불안은 여전했지만, 인야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의 동서남북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멍 신부님의 전화는 뜻밖의 부탁을 담고 있었다.
사순절을 맞아 자신이 사목하는 성당 신자들을 위해 '산티아고 가는 길' 특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멍 신부님은 인야가 교직에 있던 시절, 아직 수사였을 때 처음 만난 오랜 인연이었다. 그 뒤 신부 수업을 위해 로마로 떠났고, 인야가 스페인으로 향하던 길에 그곳에서 다시 마주친 이후로 지금껏 이어져온 사이였다.
이미 까미노에 대한 책 세 권을 낸 데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강의를 해본 터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강의를 위해 계절별로 이미지를 다시 편집해야 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아... 떠나기 전 며칠을 꼬박 매달려야 했다.
떠나기 전날, 짐을 꾸리던 인야의 눈에 창밖의 솟대가 들어왔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와 설치했던, 어느덧 10년이 된 물건이었다.
머리 부분이 낡아 떨어져 나가고 묶은 끈도 삭아 있었다. 인야는 짐을 싸다 말고 솟대를 철거했다.
'너도 늙고 나도 늙었구나. 10년을 함께 늙어왔으니......'
말없이 자신의 삶을 지켜봐온 동반자였다.
인야는 사진 몇 장을 찍어 남긴 뒤, 솟대를 안쪽에 잘 놓아두었다.
외유에서 돌아오면 그때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심정이었다.
내 입장은, 이렇게나마 멕시코에 가서 뒷마무리를 짓고 싶습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내 그림들에게 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 계획으론 뉴욕을 먼저 거쳐 멕시코로 가는 코스인데, 아무래도 나머지 시간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보낼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이 날 받아준다는 전제 하에서요.
비자 없이 그냥 가는 거라, 공항에서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일정을 대폭 수정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될 대로 되라지요 뭐.
이번 외유는 어쩌면 주객이 전도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시작은 멕시코 일 때문이지만, 텍사스의 '멍 신부님'도 찾아가야 하고, 시애틀 사는 고교 동창도 만날지 모릅니다.
비행기 표는 3개월 오픈이라, 상황에 따라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여행이지요.
가장 안전한 건 뉴욕에 머무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편할 거란 생각은 안 합니다.
나는 관광하러 가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어디에 있든 그건 그저 내 생활의 연속일 뿐입니다.
거기서도 스케치는 할 거고, 컴퓨터 작업도 웬만큼은 할 겁니다. 있는 곳만 바뀔 뿐, 나는 나니까요.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웃기는 사람입니다. 상황은 분명 심각한데, 그걸 굳이 태연하게 일상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으니까요.
뭔가 낯선 일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걸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들이려는 내 모습이요.
아, 모든 게 다 내 운명 따라 가겠지요......
2 . 16
2월 25일, 인야는 서울을 떠났다.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일곱 시간의 환승 대기 동안, 그는 그저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뉴욕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자꾸 흔들렸다.
그 불안하고 절박했던 심정을 며칠 뒤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보면,
그건 그렇고, 뉴욕 공항에 도착하면 난 밖으로 나가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을까?
그저 막연히, 그들이 날 받아주지 않는다면 멕시코로 가리라는 생각은 해 두었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곳에서마저 나는 '떠돌이'가 되어, 어딜 갈까 망설여야 하는 입장이 되는 건 반갑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것도 따져보면 다 내 운명(?)이다.
'그래, 지들이 날 받아주지 않겠다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긴 했지만, 뉴욕에 가까워질수록... 내 생각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녁에 도착할 텐데, 입국거절이 되면 난 어디서 오늘 밤을 지낸다지? 그 즉시 멕시코행 비행기와 연결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리고 물론 지금도 멕시코행 비행기표는 없는데......'
열 몇 시간의 비행 시간으로 녹초가 된 나는(그것도 체크인이 늦어 비행기 맨 가온댓자리에 앉아) 모든 게 귀찮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에 가까워질수록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도 싫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건 일종의 불안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심정일 것이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일정시간 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출입국 관리통제소를 통과해야만 했던 나는, 이미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는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에... 마치 '날 잡아잡수...' 하는 식으로, 그들에게 떠맡기듯 덤덤하게 그들의 통제와 지시에 따라주기는 했다.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말이다.
열 손가락의 지문을 검색했고, 얼굴 사진도 찍나 보았다.
그러면서 내 여권을 훑어보더니 일정을 물어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예? 관광으로요."
"미국에 가족이 있습니까?"
"아니요. 친구가 있는데......"
"얼마나 머물 건가요?"
"잘은 몰라도, 약 3 개월?..."
"3 개월요?"
"예......"
"그동안 뭘 하실 건가요?"
"우선, 내 친구를 방문할 거고.. 여행도 할 거고..."
"한국에 돌아갈 비행표는 있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비행일정표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예, 감사합니다."
"쾅 쾅!" (인증 찍는 소리)
"감사합니다."
그게 공항에서 치렀던 절차의 전부였다.
좀 싱거웠다.
사실 난, 그 전에 한 번 미국입국을 거절 당한 경력이 있던 사람으로... 다른 사람과는 달리 내 경우엔 상당히 까다로운 입국 수속을 해야 할 것이란 추측을 해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러다가... 결국 거절당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전자여권을 만든 뒤, 대사관 사이트에 들어가 '여행허가'가 승인됐다는 인증도 인쇄를 해온 상태기긴 했었지만.
그런데, 내가 우려했던 것에 비해선 너무 간단하게 일이 진행(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이거 뭐 잘못 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허기야, 내가.. 미국이란 나라에 뭐 잘못한 게 있어야지.
그래서 입국 문제로 불안하긴 했지만, 그건 떳떳하지 못한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죄인취급하는 건, 지들의 무지이지... 내 잘못은 아니니까.
어디 그 뿐인가? 내가 못 갈 곳이 어디 있나?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어떤 해악을 끼치지 않을 사람인데, 겁날 게 있어야 말이지.
그 전엔, 그저 이유도 모른 채 미국으로 부터 입국을 거절당했지만... 도대체 내가 그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일이 있었나?
그래서, 만약 이번에도 거절당한다면... 어쩌면 다시는 미국이란 나라에 안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있었던 나다.
아무튼, '한미 무비자 입국 체결'로 인해서 나도 일반적인 한국인과 똑 같이 미국 입국이 허락되었다.
2 . 25
인야가 놀리듯 표현하는 '되는대로 사는(?)' 후배는, 조금 늦게 공항에 나와주었다.
"아, 형님... 어려운 일은 없었어요?"
"응. 너무 간단하게 나왔다. 생각보단 너무 간단하게... 뉴욕이란 곳도 나와는 인연이 있나보지 뭐......"
그는 점점의 불빛으로 반짝이는 '맨해튼'을 끼고, 인야를 데리고 그의 집이 있는 뉴저지로 차를 몰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