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
일제 관헌 기록에 의하면 정백은 본명이 정지현(鄭志鉉)으로,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 진장리(金化面 塵長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철원군 김화읍) 45번지에 본적을 두고 있다. 일제 시대 4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조직의 성립과 와해 과정에서, 그리고 해방 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는 정백이 사상 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서울에서 양정보고를 졸업한 뒤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청년 운동에 종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서울청년회는 서울에서 설립된 최초의 청년 단체로서, 본래 전국에 산재한 각종 청년 단체의 통일적 지도를 목적으로 1921년1월27일 김사국(金思國), 이영(李英), 홍증식(洪增植), 장덕수(張德秀), 김명식(金明植), 윤자영 등 사회주의적 경향의 청년 운동자들이 중신이 되어 만든 단체였다. 발족 직후 김윤식 사회장 문제, 장덕수 문제 등으로 잠시 내분을 겪기도 했으나 장덕수 등 개량주의 계열을 밀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한 핵심 간부들은 1920년대 전반, 사회주의 운동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추세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사회주의 단체들 중에서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사상, 청년, 노농 운동의 각 방면에서 적극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자파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 결과, '조선노동대회준비회(1923년9월16일)' '조선청년총동맹(1924년4월21일)'등이 서울청년회의 주도로 조직되었으며, 정백은 각각 발기위원, 중앙집행위원으로 이들 조직에 참여하였다. 또 '사회운동, 무산계급 운동의 발전'을 표망한 사상 단체 '사회주의자동맹(1924년12월6일)'조직에도 참여하여 이영, 이정윤(李廷允), 김영만, 조기승(趙紀勝) 등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았다. 한때 정백은 『신생활(新生活)』의 이사로서 정백의 등단을 서울청년회 창립 멤버였던 김명식의 후원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일제의 사상 탄압의 표적이 된 『신생활』은 출범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곧 '한국 초유의 적색 필화 사건'에 휘말려 좌초되고 말았다. 『신생활』에 게재된 김명식의 「러시아 혁명기념」, 이향발의 「자유노동조합 결성의 취지」등의 논문을 문제삼아 일제 경찰이 그 해11월 '적화사상을 선전'한 혐의로 잡지 발매를 금지하고 김명식 등 관련자들을 검거해 버린 것이다. 구속은 면했으나 이 사건으로 잡지사를 그만두게 된 정백은 이영등과 함께 화요회, 북성회계의 조직 활동에 맞서 서울계의 대중 단체활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당시 서울청년회는 『신생활』의 필화 사건에 연루된 서울청년회의 최고책임자 김사국(당시 김사국은 필화 사건을 일으킨 문제의 논문 「자유노동조합」결성을 추진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해 있는 동안 당분간 표면활동에 치중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라서 정백은 조선노동총동맹이 주최한 교양강좌에서 '1971년 이후의 노농 러시아' 등의 제목으로 강연을 실시하는 등 서울파 주도의 각 노농 단체, 청년 단체 활동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 후 서울계의 최고책임자 김사국이 귀국하자 서울계는 화요계 주도의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이미 자신들만의 공산당인 서울당(또는 서울 콤그룹, 이때 서울파가 조직한 것이 '고려공산동맹'이라는 이름의 단체였다는 기록도 있다)을 조직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백도 본격적으로 당의 교양부장으로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서울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그 후 만들어진 화요계의 조선공산당에도 합류하지 않았다. 그 후 1925년 11월 말경 상해로 건너간 정백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고 있던 중에 주종건(朱鐘建, 1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의 권유로 1927년 3월 하순경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에 가입했으며, 3차 조선공산당의 김준연 책임비서 시대(1927 년9월말~11월 초)에 이르기까지 계속 상해부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정백이 상해에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1926년6월부터 8월에 걸친 대규모 검거로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붕괴되고, 그 해9월 검거를 면한 김철수의 주도로 제3차 조선공산당(소위 M·L당)이 성립됐다. 3차 조선공산당에는 각파 규합의 조직 방침과 2차 조선공산당의 중심세력인 화요파 인물의 대량 검거로 말미암아., 그간 조선공산당 조직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서울파와 상해파, 동경의 일월회계 인물의 참여가 확대되었으며 이에 따라 정백도 상해에서 국내로 활동의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김세연 책임비서 시대)1927년11월중순부터 1928년2월 초)에는 경기도에서 강동주[姜東株, 일명 남천우(南天祐)]를 책임자로 하는 야체이카에 가입하는 동시에 통합된 고려공산청년회에도 참가하여 조기승(趙紀勝)을 책임자로 한 야체이카(1928년1월경)의 구성원이 되었다. 3차 조선공산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첩보와 사찰로 당 조직을 탐지한 경찰의 추적을 받아 마침내 1928년2월2일, 30여 명의 당원이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또다시 해체 위기에 봉착했다. 당원에 대한 체포가 이어지는 가운데 검거를 면한 일부 간부들은 2월27일 아현동 모처에서 급히 전국 대회를 소집, 4차 당 조직에 착수했다. 경기도 대표로 참석한 정백은 대회에서 이정윤, 이경호(李慶鎬)와 함께 4차 당의 중앙 간부 전형의 책임을 맡게 됐다. 그러나 3차 대회를 끝낸 당일로 즉시 종로서에 구속되어 버린 정백은 이정윤과 함께 감방 안에서 비밀리에 후계 간부를 선정한 다음, 석방되는 윤일[尹一, 본명 윤택근(尹澤根), 해방 후 사로당의 핵심 인물]에게 간부 명단을 전형위원의 한 사람인 이경호에게 전달케 하여 조직 인선을 완료했다. 그러나 이정윤과 함께 4차 당의 후보위원이기도 했던 정백이 2년여를 복역한 후 1931년1월8일 석방되었을 때 당은 이미 붕괴된 후였다. 출옥 직후 정백은 같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창수(金昌洙)로부터 당 재건 문제를 의논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창수가 주도한 경기, 충남, 전북 3개 도에서 발각된 당 재건 운동의 재판 기록에서 정백이 관련된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1930년 대 국내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그간 공산당의 소부르주아적 인텔리 중심으로 조직, 운영되는 데서 생겨난 파벌성과 같은 당 조직의 결함을 제거하고, 당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농민조합 및 노동조합의 대중조직 결성을 통해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 첫째 과제로 제기되었다. 새로운 단계의 운동에 들어선 공산주의자들은 당재건 운동의 일환으로 농민조합, 독서회 등을 비밀리에 조직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경찰의 탄압도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주로 사상운동에서 출발하여 코민테른의 권위에 의지한 전위당 조직에 몰두해온 기존의 인텔리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일제의 압력에 굴복, 전향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향이란 일제의 폭압 또는 간계에 회유당하여 다시는 민족 해방운동을 하지 않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항복선언이다. 이 전향 선언은 그 당사자에게도 이미 자기가 항복했다는, 그리고 항복에 이르게 된 과정을 통하여 다시는 저항하기 어려운 심적 상태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패배감을 조성하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하여 일제의 앞잡이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사상 전향을 하고 출옥한 정백은 그후 사실상 공산주의 운동을 포기한 채 일제가 정책적으로 추진하던 광산찾기 운동의 대열에 참여하여 광산업 브로커 등으로 전전하며 8·15해방을 맞기까지 10여 년이 넘는 공백기를 갖게 된다.
해방 직후 장안파 공산당 조직을 주도
해방 후 정백은 건국준비위원회 참여와 이른바 장안파 공산당의 조직을 계기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이르러 일제는 국내에서 더 이상의 조직적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체의 항일 운동을 분쇄하는 데 성공한 듯이 보였다. 독립 운동자들의 대부분이 사실상 운동을 포기할거나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존재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감옥에 투옥된 상태였다. 다만 1944년8월 초에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결성된 건국동맹이 유일하게 비밀리에 지하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모태로 과도 정권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몇 차례의 교섭을 통해 일제 총독부는 권력 이양의 가장 유력한 인물로 판단한 여운형에게 치안 유지의 권한을 일임키로 했다. 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인수한 여운형은 건국의 대업 실현을 위해 좌우 세력의 합작으로 건준 조직을 출범시켜야 한다는 판단 아래, 보수우파의 송진우(宋鎭友) 그룹과 제휴를 시도했다.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약점 때문에 임정봉대를 명분으로 여운형의 합작 제의를 거절하는 송진우를 설득하고자 여운형은 공산계의 건준 간부 정백(조직부장)으로 하여금 한때 공산주의 운동의 동지로 있다가 김성수, 송진우의 측근으로 변절한 김준연의 건준 가입을 교섭토록 했다. 그러나 김준연이 쉽사리 응하지 않자 정백은 "소련군이 곧 서울에 입성할 것이니 우리들은 지금 내각을 조직하려 하는데 그래도 당신은 후회하지 않겠는가"라며 마치 경고하는 투로 말했다 한다. 당시 사회주의자들 가운데는 소련군의 점령과 지원으로 한반도에 공산 정권이 수립될 것으로 믿고, 그렇게 될 경우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정백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혁명 정권의 대열에 뒤질세라 과도적 정권 기구로 출범한 건준에 적극 참여한 정백은 다른 한편으로, 장차 건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생각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공산당 건설을 서둘렀다. 8월15일 밤 정백은 이영, 조동우, 정재달(鄭在達), 최원택, 이승엽(李承燁), 최용달, 홍남펴(洪南杓), 서중석 등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이른바 '재경 혁명자 대회'를 열고 공산당을 조직했다. 15일에 착수하여 종로의 장안 빌딩에서 만들어졌다 해서 세칭 '15일당' 또는 '장안당'으로 불려진 장안파 공산당에는 앞의 인물들 외에 최익한(崔益翰), 이우적, 하필원, 이정윤, 이청원, 최성환, 안기성, 문갑송 등 다양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혁명적 열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과거 혁명 운동자들이 모여 당을 결성했다고는 하나 뚜렷한 강령이나 규약, 하부 조직이나 지방적 체계조차 갖추지 못한 중앙당만의 조직에 불과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또한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1930년대 이후 운동선상에서 이탈해 있던 소위 탈락분자내지 혁명 유휴분자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제 말 비교적 끝까지 지하 운동을 지속했던 콤그룹을 주축으로 반격에 나선 박헌영의 집중적인 공세에 밀려 당의 주도권을 넘겨 줄 수밖에 없었다. 장안파를 제압하기 위해 박헌영은 표면적으로 장안파 조직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내부에서 장안파 조직을 와해시키는 정치 공작을 진행했다. 재건파의 장안파에 대한 이론적 비판 즉 '장안파 해체론'은 첫째, 장안파의 핵심 인물들이 일제하 공산주의 운동의 유휴분자, 탈락분자, 타락자라는 점과 둘째 장안당의 결성이 공산주의 운동의 조직 원칙을 무시하고 졸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에 집중됐다. 또한 박헌영은 이미 장안하 공산당에 참여한 이승엽 등 화요계 인물들을 통해 장안파에 대한 흡수 공작을 진행했다. 즉 재건파가 당의 주도권을 장악할 경우 박헌영에게 협조할 의사가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개인 자격으로 당에 흡수하는 한편, 이영이나 최익한처럼 끝까지 장안계의 정총성을 주장하는 인물은 당으로부터 고립, 배제시켜 내부로부터 조직을 와해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장안파와 재건파 상호간에 폭로와 비방이 난무하게 되었다. 정백에 대해서는 1928년 M.L당 사건 이래 사상 전향을 하고 동지를 적(일제 경찰)에 팔아먹었으며 그후 광산 브로커로 전략, 타락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일시적인 사상 전향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동지를 밀고했다는 것은 치명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백은 9월22일에 당 해체를 결정하고도 이영, 최익한 등과 함꼐 장안당을 고수, 분열적 행동을 계속한다는 이유로 당 중앙으로부터 파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로 규정되어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백은 자신에 대한 박헌영의 적대감을 불식하고 당 내 헤게모니 투쟁에서 빚어진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즉 1945년11월7일 「8월15일 조선공산당(장안파 공산당) 조직경과 보고서」와 1945년11월16일 「경애하는 동무들의 건추를 축(祝)한다」라는 두 편의 글에서 정백은 이영, 최익한 측의 정치 노선에 대해 자신은 '독자의 주장과 자기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이들과 무관함을 주장하고 오직 무소속적 입장을 고수하며 당의 통일을 바라고 있을 뿐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이영, 최익한 측과 동일시하는 '박 동지(박헌영)의 오견(誤見)'이 바로잡아지기를 호소했다. 현실적으로 정안파를 정치활동의 기반으로 하면서도 당장에 재건파가 주도권을 장악한 불리한 형세에서 오랜 동지였던 이영, 최익한과의 관계마저 부인해 버린 것이었다.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재건하에게 뺏긴 정백은 건준을 계승한 인민공화국의 기획부장으로 또 1946년2월에 결성된 좌익 진영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간보(노동문제 연구위원)로서 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파→사로당→근민당의 핵심 인물
1946년8월경, 남북의 좌익 정당들은 합당을 통한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통합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남한의 좌익 진영에서는 합당 문제에 관한 의견 대립으로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3당이 각각 합당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분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조선공산당에서는 이를 계기로 잠재되어 있던 파벌적 요소가 표면화되어 박헌영 중심의 간부파와 이에 반기를 든 반간부파 세력의 대립으로 당의 분열이 불가피하였다. 먼저 합당의 방법에 있어 당 대회를 열어 당 중앙을 개선한 다음 그 대표로 하여금 합당 공작을 추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대회파'라고 불린 반간부파에는 김철수, 이증윤, 강진, 서중석, 문갑송, 김근 등 6인의 주도 인물 외에, 이영을 비롯한 과거 ㅈ아안파 공산당의 간부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고, 정백 역시 그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대회파를 주도하게 되었다 '6인의 간부'가 당 중앙으로부터 정권 처분을 받게 되자 재건파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나선 대회파 진영은 별도의 '조선공산당 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회파와 마찬가지로 남로당에 가입하기를 거부한 인민당, 신민당의 합당 반대파와 마찬가지로 남로당에 가입하기를 거부한 인민당, 신민당의 합당 반대파와 함께 사로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정백은 상임위원에 선출된다. 그러나 사로당의 존재는 단기간에 불과했다. 위원장인 여운형이 원만한 좌익의 단합을 위해 남로당과 합당할 것을 촉구하면서 사로당을 탈퇴했을 뿐 아니라 북로당까지 당 대회를 열고 사로당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여 강진, 백남운 등 사로당의 책임자를 비난하자 사로당은 해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사로당은 중아우이원들이 차례로 탈퇴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어 당이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1947년2월21일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당의 '발전적 해체'를 결의했다. 대회에서 사로당 해체 후의 모든 문제를 위임할 '5인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된 정백은 여운형, 백남운과 함께 앞으로의 진로를 논의하게 된다. 사로당 해체 후 몇 달 만에 곧 신당 조직에 착수한 정백 등은 여운형을 당수로 하여 장안파의 이영, 정백계(소위 근만좌파)와 인민당의 여운형직계(근민우파), 그리고 신민당의 백남운계의 집결로 1947년5월24일 근로인민당(이하 근민당)을 창설했다. 창당 초기의 근민당은 여운형의 권위에 의해 근민우파가 당 조직을 주도했으나 여운형이 암살되고 난 후로는 40여 개의 세포 조직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해 온 근민좌파, 즉 구장안파 세력의 주도권이 차츰 강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48년4월에 북한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근민당의 정치적 활동이 커지고 그 중에서도 칠면팔비(七面八臂)의 수완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정백의 활약으로 북한에서 상당한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하게 되자 이제 근민당은 정백, 이영계의 압도적 우세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 및 남북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이래 줄곧 북한에 머물렀던 정백은 사실상 근민당의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서 남한에 있는 이은우(李殷雨, 근민당 조직국 차장, 충남 아산 출생으로 조선공산당 창립 때부터 반 박헌영계로서 정백의 신임이 가장 두처웠다)를 통해 근민당 조직을 통제하고 있었다.
체포, 그리고 전향
1949년12월27일, 『조선일보』는 공개 전향 성명서를 포함하여 그간 정백의 좌익 활동 경력과 전향 경위를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정백은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한 후 남북조선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통합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약칭 조국전선, 1949년6월에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0월 중순경에 월남하였다가 11월4일에 경찰에 체포된 것이었다. 당시 남한의 좌익 진영은 조국전선의 결성 이후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무장투쟁전술에 따라 종래 산발적으로 전개해 온 무장투쟁을 보다 조직화하기 위해 유격대 조직을 통합, 재편성하고 9월20일,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목표로 대규모 공세, 이른바 '9월 공세'를 전개했으나 실패하고 조직수습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남로당의 서울지도부와는 별개의 루트로 정백을 남한으로 파견하여 사실상 와해된 근민당을 재건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한의 지하 운동을 수습하는 한편, 조국전선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백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수사진의 검거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정백이 파견될 무렵 경찰에서는 남로당계와 북로당계의 두 가지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근민당계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조직을 추적하던 중, 고명자가 서울에 잠입했다는 정보에 따라 그의 은신처를 알아낸 경찰이 북아현동의 모처를 급습한 결과 뜻밖에 그곳에 잠복해 있던 정백을 체포한 것이다. 이어서 정백의 자백으로 고명자(高明子)도 검거되었다. 체포된 후 정백은 자신을 검거했던 전향한 사찰경찰 홍민표(1949년 조선공산당 서울시 당 간부, 전향 후 1950년 치안국 경감)의 설득으로 전향을 결심했다. 12월27일 시경국장실에서 오제도 검사와 김태선 서울 시경국장의 임석하에 기자회견을 갖고 전향 성명을 발표한 정백은 그후 전향자들로 구성된 '보도연맹(1949년4월 결성)'의 명예간사장에 취임하여 반공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정세에서 정백의 공개 전향은 상당한 파문과 함께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백은 북한의 정치보위부에 치호되어 총살당하고 말았다. 해방 직후의 출판물이나 훗날 동시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정백은 타고난 '정치적 수완가'요 '봉건식 수공업적 권모술수의 권화(權化)'였다. 그러나 정치적 정열은 있으되 올바른 역사 인식과 민족적 지행을 결여한 정치 지도자들이 대개 그랬듯이, 정백 역시 개인적으로 출세주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탈피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방 후 전체 좌익 운동에 부여된 역사적 과제를 방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불행한 정치적 최후로 일생을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