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보석에 빛바랜 '국립현대미술관' -당위성도 명분도 없는 까르띠에 명품 보석쇼
글ㅣ홍경한,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상업 대관갤러리로 전락해 미술관이라는 레테르가 아까운 ‘예술의전당’을 포함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에도 여전히 해외 블록버스터에 상당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국공립미술관으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는 일부 국공립미술관들의 행태를 보면 ‘소귀에 경 읽기’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다. 너무 질려버려서인지 예전 같으면 상업성에 매료되지 말고 동시대 미술흐름을 되짚고 다양한 실험적 기획을 통해 새로운 현대미술의 미학적 담론을 형성하는데 앞장서달라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내 목만 아플 것 같아 별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대놓고 돈벌이에 나서 왔고 그동안 워낙 막무가내 식으로 블록버스터 전시에 혈안이 되다시피 했기에 따라서 그들이 2008년의 시작을 170년 역사의 ‘티파니’와 함께 하던, <반 고흐 전>에 이은 또 한명의 지긋지긋한 인상파 작가로 전시장을 도배 하든 말든 딱히 논평하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아예 무관심해져 버린 탓에 여전히 ‘욕먹을 짓’을 반복한다고 해도 유구무언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국내 유일의 ‘국립미술관’이요, 어찌되었든 끝까지 지켜야할 한국미술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곳인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기는 힘들다. 사실 여러 매체들이 허구한 날 일정한 창구를 통해, 별도의 지면을 이용해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기관답게 바로서달라고 숱하게 요구하며 눈총을 준 것도 해당 미술관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염려하고 아끼는 심정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퍼블릭아트』에 두어 번 유사한 지적을 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였음은 당연하다.
헌데, 그런 의중에도 아랑곳없이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서구 왕족들의 장신구를 진열하는 ‘더 아트 오브 카르티에(The Art of Cartier)’전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발표하며 논란을 자초하고 나섰다. 또 한 번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는 관계가 적은 전시를 개최함으로써 보란 듯이 거꾸로 가는 행보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수년간 그 어떤 질책과 의견 제시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상업성을 지향하는 모습을 유지했다. 덕분에 ‘돈’은 어느 정도 벌었을지 모르지만 반면 전시면 전시, 기획이면 기획, 소장품이면 소장품 등 벌이는 일마다 온갖 잡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해만 해도 <베르나르 브네 전>, <바젤리츠 전>, <행위미술 40년 전>,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 전> 등을 치렀지만 기획력 부실과 알맹이 없는 전시, 담론형성의 실패라는 지적을 받았으며 최근엔 철저한 검증 없이 ‘마르셀 뒤샹’의 <여행가방 속 상자>라는 작품을 터무니없는 고가에 구입했다는 의혹마저 받고 있어 체면도 구길 만큼 구겼다.
관련 소식이 타전됨과 동시에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거대 기업의 상업성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전시기획에 있어 정작 덕수궁미술관 학예사들이 배제되었음은 물론 강력한 내부 반발에 부딪혔으나 관장의 ‘엄명’에 어쩔 수 없었다는 내용과 전시약정도 관장 직속인 홍보마케팅팀이 꾸린 프로젝트팀이 맺었다는 점 등이 알려지면서 ‘까르띠에’전은 논란의 화두로 부각됐다. 이뿐 아니라 전시의 전권이 ‘까르띠에’에게 있어 국립현대미술관은 지극히 형식적인 관여만 할 뿐이고 전시 대가로 ‘까르띠에’가 미술관의 향후 기획전에 스폰서를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부터는 공공미술관이 지녀야할 마지막 위상마저 적잖이 흔들거렸다.
파문이 이어지자 국립현대미술관은 부랴부랴 “처음엔 안 하려고 했는데 까르띠에가 삼고초려를 해와 승낙했다”는 식의 궁색한 변명 아닌 변명을 내세우며 진화에 나섰다. 그리곤 “19~20세기 초 유럽공예의 특성을 살펴본다는 취지에 따라 상업적인 측면을 최대한 배제했으며 카르티에 상품을 홍보하는 전시가 아니라 재단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공예예술품 전시”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몇 없어 보인다. 결국 과거에도 그러했듯 ‘실적’에 연연하는 자세를 드러낸 것을 제외하곤 왜 하필 상업갤러리도 아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양 명품브랜드 보석전을 열어야 하는지, 서구 왕족의 화려한 장신구들이 역사적 시대적 미학적 관점에서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나아가 구체적으로 ‘까르띠에’와 어떤 조건으로 약정을 체결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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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과 비평 원문보기 글쓴이: 홍경한
첫댓글 명확한 교과서적인 체계를 갖춘 대한민국의 미술 이론교육 한계다. 간혹 외국인들이 한국인에게 당신 민족은 "우리나라"라는 표기를 자주 사용한다고, 그거 참 독특하다고, 민족 역사적 이야기를 떠나서 국내문화 수준의 실정을 돌아봤을때 '우리문화'의 가치 자체를 너무 모르있는 것이 안타깝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