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제주도 해역 표류자들
홍어장수 문순득의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정약전을 말하여야 한다. 정약전은 다 알다시피 정약용의 중형(仲兄)이다.1790년 증광문과 급제. 일찌기 이벽(李檗)과 매형인 이승훈(李承薰)등과 교유하여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접하고 카톨릭에 입교, 벼슬을 버리고 전교에 힘썼다. 1801년 신유박해(또는 신유교난)가 일어나자 배교(背敎)를 선언하면 귀양을 가고, 주동자들은 참수형을 받게 되었는데, 이승훈, 정약종, 홍낙인, 홍교만, 최필공,등이 서울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목을 잘렸고, 배교를 선언한 정약전, 약용 형제는 전라도의 흑산도, 강진으로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과는 처남 매부관계로 정치적인 관계로 유배생활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정약전은 우이도(소흑산도)에서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각각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풀려나던 중 황사영 백사사건으로 다시 유배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황사영은 정약전 사촌형의 사위로 중국 천진의 프랑스 함대에 편지를 보내 조선정부에 압력을 넣어 천주교의 박해를 저지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려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이로 인하여 천주교 신자인 정약용, 약전형제는 또 다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는 동네에서 이상한 청년이 몇 년 만에 돌아와서 헛소리만 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가 바로 문순득이다. 그는 1801년 12월 홍어 사러 출항했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남방 유구국(오키나와)을 거쳐 여송국(呂宋國, 필립핀)에 다시 표류 기착했다가 마카오, 베이징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가 장장 3년 넘게 표류해온 이야기는 정약전에 의해 ‘표해시말’(漂海始末)로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으로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이던 마카오에도 청나라 관리가 조사한 문순득의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문순득은 류구국에 기착하여 필담(筆談)과 몸짓 등으로 대화하고 필리핀에서는 현지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과 소통하고 청나라 표류인과도 대화를 했다.
이 무렵 전라감사 이면응이 부임길에 친구 정약용을 만나 그의 형님 정약전에게서 들은 문순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감사는 마침 제주도에 여송국 표류객이 6년째 머물고 있다면서 문순득이 통역해 주면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순득이 제주도로 가보니 여송국 표류객이 목장에 거주하고 있지만 ‘막가외’(莫可外)라는 말뿐 어느 나라 사람인지 전혀 소통이 되지 않은 채 울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제주목사가 그들을 청나라로 보냈지만 다시 제주도로 되돌아와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당초 표류 여송국인은 5명이었으나 청나라 갔다가 한명 죽고 제주도로 되돌아와 한명이 죽고 3명만 살아 있었다. 문순득이 여송국 말로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니 표류한지 9년만에 처음으로 말문이 열린 감격에 엉엉 울어댔다. 제주목사가 조정에 고하고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했으니 문순득이 ‘조선을 깨웠다’라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당시 조정에서 문순득에게 내린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공명첩은 직계 후손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문순득의 묘는 해남군 화산면 봉리리에 위치하며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지금도 시제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나는 최근에 문순득의 여정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문순득이 정약전에게 구술하였던 지역, 언어등이 대부분 일치하였으며 마카오에서는 문순득의 송환사실이 외교문서에 기록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정약전의 만남, 자산어보는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생활중 흑산도 지역 바다 에서 많이 나는 어류, 해조류를 총 망라하여 지은 생물도감과도 같은 저서인데 이에는 문순득을 통하여 알게 되고 조사한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편찬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것 말고도 문순득은 상인으로서 화패 통화부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유심히 관찰하였던 것인데 이 또한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려 결국 정약용이 경세유표 저술에 기여한 것으로 보고들 있다.
지금 제주도 한담 해안 산책로에 서 있는 비석 장한철. 장한철(張漢哲)은 제주도 향시에서 장원을 해 관가의 후원까지 받으며 1770년(영조46) 12월 25일에 과거를 보기 위하여 배를 탔다가 표류하여 유구열도인 호산도에 표착하였다. 이듬해 1월 2일 안남 상선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나 안남세자가 제주에서 죽은 일 때문에 작은 배로 옮겨 타서 청산도를 지나 강진의 南塘浦를 지나 2월 3일 한양에 도착하여 과거에 낙방하고, 5월 8일 고향에 귀환한다.
반 년 만에 고향에 귀환한 후 장한철은 표해록을 지었다. 이 후 그는 1774년(영조50)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정현감 등을 역임한다. 그의 글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헌적로나 문학적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그를 기려 장한철 백일장등 관련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제주도 표류가 그만 있었던가. 숫하게 많을 것인데 글로 남겨진 사람들 몇몇이 있을 뿐이다. 사실 최부의 표해록을 따져보면 성종은 그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온 것이 갸륵해서라기보다는 바깥세상의 풍경이 더 궁금하여 지나간 과정을 써보라고 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어찌 연명하며 생을 이어 살아났는지가 보다 관건일 것인데 그 시대는 그가 표류하며 보고 느낀 것들에 더한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조선시대는 꽉 막힌 폐쇄사회이었기 때문 바깥세상이 무엇보다도 흥미꺼리였다.
하멜의 표류기는 또 어떠한가. 이를 〈난선제주도난파기〉라고도 한다. 하멜은 포수 출신 선원으로 이 배의 서기(書記)였다. 원래는 인도총독과 평의원에게 올리는 보고서로,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시 여러 장의 삽화도 곁들였으나 조선의 풍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하멜 일행은 타이완[臺灣]에서 일본으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36명이 제주도에 난파했는데 이후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선은 이들의 표류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하여 살도록 했다. 이들은 앞서 표류하여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한국 명은 朴燕)을 만났는데, 그가 이들의 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훈련도감의 봉급으로 생활했으나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배에 있던 녹비[鹿皮] 일부를 환급받아 이것으로 오두막과 의복 등을 마련했다고 한다. 1655년 이들은 청나라 사신의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구원을 호소했으나 실패했으며, 이 일로 하멜 일행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전라도 병영으로 이속되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서울에서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 같은데, 부임하는 병사에 따라 대우가 달라졌다. 자상하게 보살펴준 사람도 있는 반면, 가혹한 경우는 쌀만 지급하고 일체의 외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때로는 군사훈련을 받거나 풀뽑기 같은 병영의 막일에 시달리며 생활했는데, 흉년에는 구걸을 하거나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살기도 했다. 특히 승려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겼는데, 이들을 통해 민간에 서양 세계가 상당히 소개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뒤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순천·남원 등지에 분산·배치되었다.
1666년 생존자 16명 중 8명이 그동안 사귀어온 한 조선인에게서 배를 구입해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들로부터 조선에 잔류자가 있음을 알게 된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2년 후에 남은 일행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처음과 끝부분이 자세하다. 중간에 조선의 군사·형제(刑制)·관료제·가옥·교육·산물·상업 등에 관한 간단한 기술이 있으며, 맨 마지막에 조선으로 가는 항로가 기술되어 있는데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명하며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본 글에 나오는 김배회 , 이섬등을 제외하고 또 소개할 분이 한 분 더 계시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1822~1846) 신부.그가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귀국하다 풍랑을 만나 해안에 표착한 곳이 바로 또 제주도이다. 그것을 기리는 기념관이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성지에 있다. 그곳 박물관 외부에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고증·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된다. 그리고 동년 8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사품을 받는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파엘호는 상해항을 출항하였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두옥 제주대 교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제주도 표착 지점이 중국 상해와 제주도 사이의 해류 방향, 지리적 시정거리, 제주도 서쪽 고산 주변 해역의 해안 형태를 종합 분석한 결과 한경면 용수리 포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창억 울산대 교수는 '라파엘호 고증에 대한 연구'에서 김대건 신부가 탔던 라파엘호는 한선(韓船) 특유의 해선(Sea ship)인 재래형 어선으로 추정되며 길이 13.5M,폭 4.8M, 길이2.1M라는 구체적인 치수까지 제시했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험난한 여정임을 말한다. 그러기에 죄인들은 곳에 두어 뭍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최부의 직책을 보면 또 그 내면을 자연 알 수 있다. 그의 직함은 추쇄 경차관(推刷敬差官), 이는 무엇을 하는 관료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