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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로 나뉜 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 밀라노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 권력은 남은 두 아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형 아르카디우스가 다스리는 동방이 선임의 지위로 정해졌다. 이 시점에서는 제국이 분열되었다기보다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력 공유의 관행이 계속되어 5세기 대부분 동안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알맞다.
이 시기 군대에서는 게르만 출신 장교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족과 아리우스 신조로 인해 황제 자리를 요구할 수는 없었지만, 5세기 내내 로마인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실질적인 제국 통치자로 행세했다. 따라서 권력 구조, 특히 군대가 게르만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반달 출신 스틸리코로, 그는 테오도시우스 시대에 황제의 조카 세레나와 결혼하여 황실 일가에 편입되는 등 비로마 출신 인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경력을 쌓았다.
테오도시우스와 달리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는 뛰어난 황제가 아니었다(당대 철학자이자 주교 키레나이카의 시네시우스는 아르카디우스를 해파리에 비유했다). 두 사람은 상당히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다른 사람들이 했다. 아르카디우스의 경우에는 환관 출신 에우트로피우스나 고트 출신 군사령관 가이나스가, 호노리우스의 경우에는 스틸리코가 그런 존재였다. 제국의 동방과 서방 사이는 꽤 적대적이어서 5세기 말에는 내전에 발발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이 같은 정치적 갈등의 배경에는 다뉴브강과 라인강 너머에서 일어나는 대이주가 있었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훈 제국의 서진으로 돈강과 볼가강 인근의 종족들은 고트인과 마찬가지로 서쪽으로 밀려났고, 필연적으로 제국 영토로 밀려들었다. 이 집단들은 이 시기까지 단일한 종족 집단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적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로마 제국 국경에 가해지는 압력도 커졌다. 로마 제국은 일부 집단에 대해서는 유화 전략을 취하여 체제 내에 정착시키고 군대로 활용했다. 이민족의 입장에서도 로마 제국 군대에 복부하는 대가로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로마 제국은 훈계 집단 일부를 이용해 새로 이주한 게르만계 이주자들을 압박하고 복종시켰다. 이 사실은 이 시기에는 로마인이 아닌 사람들이 로마인이 아닌 이들과 싸우고 제국으로부터 그 대가를 받았음을 말해 준다.
이 어지러운 시기 제국과 게르만 이주민 사이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잘 보여 주는 예가 알라리크이다. 알라리크는 고트 집단의 지배 가문 출신으로 390년대 초반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했고, 395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의 군대는 공성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알라리크는 그리스로 방향을 돌려 아테네와 코린트 등의 도시를 대대적으로 노략질했다. 스틸리코는 두 차례나 알라리크를 격파하려 시도했지만, 두 번 모두 실패하는 바람에 게르만 음모론의 먹잇감이 되었다. 어떤 사료는 알라리크를 이 시기 고트계 양대 집단 가운데 하나인 비시고트의 왕으로 부른다.
비시고트 집단은 408년 이후 이탈리아 방면에 여러 차례 원정을 펼쳤다. 이는 같은 해에 스틸리코가 처형된 일과 관련이 있다. 유능한 군 지휘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로마는 세 차례나 포위당했다. 410년 세 번째 포위전에서 로마는 함락되어 약탈당했고 전 지중해가 충격에 떨었다. 비시고트는 이후 갈리아 지방 남부를 거쳐 스페인으로 진입하여 이 지역을 정복했다.
동쪽에서는 아르카디우스가 408년에 죽으며 갓 태어난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즉위했다. 아르카디우스가 생전에 테오도시우스를 공동 황제로 만들어 놓은 덕분에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나, 테오도시우스의 재위 기간은 섭정 시대였다. 그의 누나 풀케리아가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진짜 권력은 행정부와 군부의 관리들에게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 재위 초기는 동방의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인 안테미우스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안보가 가장 중요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에 강력한 육상 성채가 세워졌다(둘 다 현재까지 위엄을 뽐내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규모가 계속 커짐에 따라 식량에 대한 압박도 커졌기 때문에 안테미우스는 식량 부족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여러 조치를 취했다. 로마가 약탈당했을때 동방 제국은 서방 제국의 새로운 수도 라벤나에 군대를 보냈다. 이 관행은 다음 10년 동안이어졌다.
414년 풀케리아는 아우구스타[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여성형으로 여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어로는 아브구스타(Augousta)또는 바실리사(Basilissa). 기본적으로는 황제의 반려자였으나, 본문에서 언급된 풀케리아나 아리아드나(레오 1세의 딸), 테오도라(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아내)처럼 대단한 권력을 행사한 경우도있다.]의 지위에 올라 정식으로 동생의 섭정이 되었다. 풀케리아의 권력은 종종 과대평가되곤 하지만, 어쨌든 처녀로 남기로 다짐하여 남편의 통제를 받을 가능성을 제거한것은 사실이다. 테오도시우스는 아버지의 예를 따랐으며 그 자신이나 아내 에우도키아 그리고 누나의 이름으로 공공 분야에 대한 자선과 교회 건설, 성물 기부를 활발히 펼침으로써 황실의 신앙심을강조했다. 정부의 보다 세속적인 측면은 궁정에서 영향력을 지닌환관들이나 외국 출신 군사령관, 특히 알란계 아르다부르와 그아들 아스파르에게 맡겨졌다.
423년 호노리우스가 사망하자 서방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동방제국은 의례히 군대를 파견해 정당한 후계자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옹립했다. 물론 옥좌 뒤의 진짜 권력은 이민족의 침략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로마인 군 지휘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에게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주인공은 훈 제국이 420 년대 들어 다뉴브강을 향해 서진하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434년 루아가 이끄는 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배후지라 할 수 있는 트라키아를 맹렬히 공격했다. 루아는 번개를 맞고 죽었다고 하는데, 사료들은 테오도시우스의 기도에 신이 응답한 결과라 기록했다. 루아의 지위는 조카인 블레다와 아틸라가 이어받았으며, 두 사람은 권력 구조를 통합하고 정치적 목표를 명확히 하는 등 훈 제국의 역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켰다.
제국의 동방과 서방이 북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하려 드는 반달 집단에 대한 대규모 원정(429~439년)에 집중하는 사이 훈 제국은 다뉴브강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동방 군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0년 동안 훈 제국에 연전연패하여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한 동방 제국은 반달 집단의 북아프리카 지배를 용인해야만 했다. 블레다가 447년에 죽자 아틸라는 단독 군주가 되어 약탈 사업을 이어 나갔다.
테오도시우스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450년에 죽었다. 다시 한번 군대가, 정확하게 말하면 권신 아스파르가 군인 출신 노인 마르키아누스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처녀성의 맹세를 존중한다는 약속을 받은 풀케리아가 마르키아누스와의 결혼에 동의하여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이어지게 되었다. 451년 동방 제국은 협상을 통해아틸라와 화해했고 훈 제국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서방 제국은 훈 제국을 이용해 게르만계 침입자들을 통제하던 이전과 반대로 그들을 통해 훈 제국을 막는 정책을 채택했지만, 이 방법으로는 아틸라가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약탈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틸라가 453년에 죽은 일은 서방 제국에게 천운이었다. 이후10년이 안 되는 동안 계승 분쟁으로 훈 제국은 붕괴해 버렸고, 훈제국에 복종하던 종족들은 독립했다. 북유럽과 게르만의 공통적인 신화 <니벨룽겐 사가(Die Nibelungen-Saga)〉는 이로 인한 혼란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결과 서방 제국의 영역에서는 주로 게르만계 종족이세력을 굳힐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점차 게르만계 집단을 제거할수 없는 현실로 인식하게 되었다.
서방 제국의 자원은 점차 고갈되어 갔고, 서방 제국은 더 이상 보호할 가치가 없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서방 제국이 계속 존재한다면 단 하나의 집단이 남을 때까지 전쟁이 이어져야 했다. 게르만군 지휘관들은 차츰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군주로 행세하기 시작했으며, 각 지방의 대지주 입장에서도 게르만 통치자의 존재가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이후 20여 년 동안 서방 제국은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동방에서 마르키아누스와 풀케리아 재위 기간의 중요 사건으로는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가 있다. 이 공의회는 최초의 세계 공의회[칼케돈 공의회 이전에 개최된 제1차 니케아공의회(325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에페수스 공의회 (431년) 등도 세계 공의회라고 불리지만 '세계 공의회'라는 표현 자체는 공식적으로 칼케돈 공의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즉 보편 그리스도교 교회를 대표하도록 기획되었기 때문에 보편 교회의 신조를 표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리스도론 논쟁은 박해가 끝난 순간부터 그리스도교교회의 주된 문제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에도 아리우스파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발렌스의 지원 아래 복권되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 성직자가 니케아 정교를 따른다는 이유로 유배당했다. 이 사태의 또 다른 부작용은 아리우스파 주교 울필라스가 고트인에게 선교한 일이다. 울필라스가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한 일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데, 게르만계 종족 대부분이 울필라스를 따라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열정적인 그리스도교도이자 정통 교회를 지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 나지안조스(지금의 튀르키예 네니지)의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택하여 381 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이라고 다시 한번 선언했다.이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에서 누락되거나 부족한 사항을 상당히 채워 넣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정의였다. 또한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제국의 수도이자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편 교회 속 지위를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에 앞서게 규정했다. 다만 그리스도교 세계의 지도자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이 자리한 로마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 높은 영예를 누릴수 있었다. 이 조치는 이후 몇 세기 동안 끝없는 적대감의 근원이되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아리우스로 인한 분쟁을멈추기는커녕 문제를 키웠다.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을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절충안은 황제들의 바람과 달리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모든 종파가 성부와 성자가 동일 실체냐 하는 문제에 빠져들었다. 성자는 성부와 같은가, 같지 않은가? 동일한 본질인가, 유사한 본질인가? 주교이자 교회학자인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는 이 논쟁을 어두운 밤 폭풍우 속에서 해전을 치르는 일과 같다고 표현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위격[位格 Hypostasis(실질적으로 실체11體·Ousia, 즉 본질과 같은 말이다)]이라는 개념이 소개되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428 년 안티오키아 출신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 선출된 후 곧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어머니 Christotokos' 또는 '성자의 어머니 Anthropotokos'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학파인 알렉산드리아학파는 이 주장에 즉시 반박했다.
이 문제는 역사가 깊고 영향력 있는 동방(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학파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학파가 신참자여서 전통의 진지함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정치권력 분쟁으로 볼 수 있다. 431년 에페수스(지금의 튀르키에 에페스)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어 성모 마리아의 지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449년 에페수스에서 다시 한번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나, 이번에는 안티오키아학파의 세력이 압도적이었다. 제2차 에페수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독립적인 두 본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로마 교황 레오 1세는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내는 교의 서한 (Tomus ad Flavianum)〉을 통해 그리스도론 논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공의회에 제시했으나 무시당했다.
마르키아누스와 풀케리아는 이 상황이 폭발력을 지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칼케돈에서 세계 공의회를 소집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제2차 에페수스 공의회를 부정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했다. 또한 앞서 개최된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제1차 에페수스 공의회는 세계 공의회로 규정되었다. 레오 1세의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내는 교의서한〉은 낭독된 뒤 추인되었고, 네스토리우스는 다시 한번 이단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칼케돈 신경은 실질적으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단성론보다는 안티오키아학파의 양성론에 가까웠다. 그 결과 각 교회 사이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로 알려진 집단은 두 본성에 더 중점을 두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들은 페르시아로 건너간 뒤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방면으로 나아갔다. 지금의 아시리아 동방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에 속한다.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어 단일한 본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교파는 단성론파(Monophysites)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말은 ‘단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노스(Monos와) ‘본성'을 뜻하는 피시스(physis)의 합성어로,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최근에 학자들은 합성론파(Miaphysites)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이는 '단일'을 '하나'를 의미하는 미아(Mia)로 바꾼 것으로, '그리스도는 하나의 본성과 두 성격)을 지닌다’는 의미의 중립적인 표현이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 시리아 그리스도교 교파 대부분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이 해석을 지지한다. 오늘날까지 네스토리우스파와 합성론파는 그리스 정교회나 슬라브 정교회, 로마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달리 칼케돈 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된 모든 원칙을 결정하기 위해 기획되어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 이미 존재하는 로마·콘스탄티. 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 안티오키아의 4개 총대주교 관구에 예루살렘 추가)를 규정했지만, 결국 보편 교회가 영구히 분열하기 전의 마지막 공의회로 남은 것은 퍽 역설적인 이야기이다. 칼케돈 공의회는 제국의 종교계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큰 파장을 남겼다.
마르키아누스 정부는 아르다부르와 그 아들 아스파르에게 크게 의존했다. 두 군 지휘관은 아리우스파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 다수의 경멸을 받았지만, 다양한 자선 활동을 통해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아스파르는 459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독한 물 부족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수조를 건설했다. 알란 출신의 지배는 그다음 황제 레오 1세의 재위기 (457~474년)에도 이어졌다. 마르키아누스와 마찬가지로 발칸 출신의 원숙한 퇴직 군인인 레오는 또다시 아스파르와 아르다부르가 킹 메이커로 작용한 결과 즉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오는 곧 아스파르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로 했다. 아스파르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레오는 자신의 가족과 이사우리아[그리스어로는 이사브리아(Isauria)라고 하며 오늘날 튀르키예 남부 타우루스산맥 산악 지대를 가리킨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리들은 이 지역 부락들을 오랑캐로 여겼으나, 이들은 5세기경 동방제국 군대의 주력을 형성했다. 717년 즉위한 레온 3세부터 802년 폐위된 이리니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지배한 가문은 이사우리아 왕조라고 불리기도 한다.] 출신 코디사의 아들 타라시스를 중용했다. 소아시아 남부 산악 지대에 살던 이사우리아인은 강인한 비적으로 유명했다.
타라시스는 460년대 말에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페르시아와 공모했다는 혐의로 아르다부르를 몰락시킨 뒤 황제의 딸 아리아드나와 결혼하고 로마식 이름인 제노로 개명했고 군부의 여러 요직을 거쳤다. 468년 반달 왕국에 대한 원정이 값비싼 대가를치른 패배로 끝나자(1년 세입 전부를 소모했다), 아스파르에게 비난이 쏟아져 그를 제거할 기회가 무르익었다. 아스파르와 아르다부르는 471년 황궁에서 살해당했다. 레오는 474년에 죽었는데 그는그 전에 제노의 어린 아들 레오 2세를 후계자로, 제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레오 2세가 곧 죽었기 때문에 제노가 후계자가 되었다.
제노의 집권 시기 내내 이사우리아인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그의 권력은 오랫동안 굳건하게 이어졌다. 제노는 이사우리아인을 다수 중용하여 커다란 반감을 사서 마지막 10년에는 폭력 사태가 절정에 달했다. 동게르만 계통의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서방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476년에 폐위하고 동방 황제의 이름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게 해 달라고 청원한 것이바로 제노 재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오도아케르가 세력을 달마티아 방면으로 확장하기 시작하며 동방 제국을 위협하자, 제노는 테오도리크를 보내 견제했다.
오스트로고트의 왕 테오도리크는 어린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볼모로 지내다가 480년대 초반 오스트로고트 부락을 통합했다. 테오도리크는 489년 제노의 명령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오도아케르를 몰아냈다. 오스트로고트가 발칸반도를 떠난 덕분에 동방 제국 입장에서도 변경이 안전해졌다. 이후 동방 제국은 서쪽과 서남쪽에 대해서는 조약을 통해 현상 유지 정책을 추진했다. 서방에서 로마 제국의 패권은 실질적으로 붕괴했다. 스페인과 갈리아 대부분의 지역은 비시고트의 지배를 받았고, 북아프리카는 반달의 손아귀에 있었다.
신학 문제에 있어서 제노는 칼케돈 공의회로 인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482년 <통합령(Endiikon)>을 발행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여전히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다루지 않았다. 즉 교황 레오 1세의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내는 교의 서한〉은 다시 무시당했다. 하지만 동방의 교회들은 제노의 명령에 반감을 가졌고, 로마 교회는 5대 총대주교 관구의 수장으로서 지니는 수위권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도전받았다고 여기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교로 선언했다. 이 조치는 518년까지 지속되었다. 제노는 491년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