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조문기 선생님!
어이 가십니까?
정녕 이대로 눈 감으시고
저희들 곁을 영원히 떠나시는 겁니까?
선생님께서 그토록 기대하고 고대하시던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때에,
어이 채찍을 거두시는 겁니까?
이제 저희를 믿으시는 겁니까?
선생님께서 안 계셔도 저희가 이 겨레의 숙원 사업을 잘 성사시키리란
믿음이 드신 겁니까?
선생님께서는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한 지 35년 그리고 그것이 종식되기 20일 전에,
열아홉 살 어린 나이로,
한민족 독립운동의 마지막 거사를 빼앗긴 땅 서울 한복판에서 하셨습니다.
유만수, 강윤국 두 동지와 함께,
친일파 박춘금과 그 추종자들이 한민족 말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경성부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 건물) 집회장에 들어가서 폭탄 2개를 터뜨려
놈들의 책동을 무산시켰습니다.
선생님께선 이미 3년 전에도
일본에서 소년 노동자로 일하시던 중에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을 주도해 지명수배가 되셨었지요.
그러다가 좀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실 요량으로 귀국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 세운 목표가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서,
그 곳에 계신 지사님들을 모시고 말석에서나마 독립운동을 하시는 거였지요.
‘한국에서 그냥 임시정부를 찾아가 어린애들이 독립운동 하러 왔습니다 하면,
임시정부 어른들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겠나,
철없는 애들이 독립운동 하러 왔다고 하면 어떻게 대하시겠나.
그러니 이렇게 그냥 갈 게 아니라
국내에서 떠들썩하게 거사 하나라도 일으켜 가지고, 그 공을 등에 짊어지고 가면,
우리가 비록 나이가 어려도 임시정부는 우리를 믿고 중요한 일을 시킬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으로, 선생님께선 부민관 폭탄의거를 일으키셨습니다.
해방 뒤에는 단정 반대 투쟁으로 옥고를 치르셨고,
동족상잔이 일어난 뒤엔 제 정신으로 하늘을 볼 수가 없어서
얼굴에 분칠하고 극단의 배우 생활도 잠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정부는 선생님을 가만 놔두질 않았지요.
대통령 암살과 정부전복 음모 사건를 조작해서 투옥하고 고문을 했지요.
그때의 후유증은 평생을 통해 선생님의 건강을 해치더니
결국에는 선생님을 사랑하는 가족과 또한 저희와도 이렇게 작별토록 했습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시골에 묻혀 조용히 농사에만 전념하셨는데,
어느 날 엉뚱한 사람이 부민관 의거를 일으켰노라고, 한 일간신문이 대서특필하자,
어쩔 수 없이 선생님께선 다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부터는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시며
나라사랑과 독립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강연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999년, 선생님께선
역사정의 구현과 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업을 추진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2대 이사장,
그리고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 직에 취임하셔서 오늘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겨레의 숙원 사업이기도 한 친일인명사전을 올 여름이면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끔
필요할 때마다 따듯한 격려와 엄격한 채찍질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선 저희 연구소의 얼굴이시자 든든한 버팀목이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저희 연구소의 7천 회원은
선생님을 이사장이란 직함보다 사상의 스승이요, 삶의 아버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침내 친일인명사전이 마지막 고개를 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에,
그 몇 달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눈을 감으시다니요.
원통합니다.
정말 통곡이 나옵니다.
아니, 죄스럽기도 합니다.
저희가 좀더 분발했더라면, 선생님께서 사전이 나오는 것도 보시고
감격적인 축사 말씀도 해 주실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도 그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오죽하셨으면,
마지막 병상에서 의식을 놓으시는 순간까지도 “사전··· 사전을···” 하고
헛소리처럼 뇌이셨겠습니까.
참 독립운동가요, 마지막 독립운동가이신 선생님한테는
저희들이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운 버릇도 있으셨지요.
일제로부터 조국이 해방된 지 육십여 년이 되었건만,
이 땅은 여전히 남북으로 분단돼 있고,
친일 잔재 또한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조국의 현실 앞에
늘 가슴으로 앓으시며 사셨던 선생님께선,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집을 나와 어디론지 혼자 쓸쓸히 잠적하셨습니다.
그래서 남들 다 가는 광복절 경축 행사장과 청와대 만찬장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으셨던 선생님.
저흰 이제 선생님의 그 크고도 깊은 겨레사랑의 뜻을 가슴 깊이 헤아립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안타깝게도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민족의식을 버리고 황국신민이 되자고 외치는
신종 친일파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생님 영전 앞에서 다짐합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다음과 같은 유지를 잘 받들겠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 했던 것은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독립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가 나라도 분단되고···.
그러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서전 ‘슬픈 조국의 노래’에서>
선생님, 부디
분단과 미움이 없을 하늘나라에서 먼저 가신 독립선열님들과 함께 이제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이따금 저희가 졸거나 한눈을 팔거들랑 두 눈 부릅 뜨시고 일갈해 주십시오.
“친일파 청산이 끝났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혼란스런 시대에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을 한 분 모시고 있었던 저희는 참 행복했습니다.
2008년 2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이봉원, 울며 절합니다
[알림]
돌아가신 때 : 2008년 2월 5일 오후 5시
빈소 :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2호
발인 : 2월 11일 (월) 오전 7시
영결식 : 2월 11일 오전 10시 (장소 미정)
안장 : 2월 11일 오후 3시 대전국립현충원
[해적이]
1926 경기 화성 출생
1944 일본강관주식회사 파업 주도, 지명 수배
1945 대한애국청년당 결성
1945.7.24 부민관 폭파 의거
1948 단정반대 옥고
1951 <황금좌><고려> 등에서 극단 활동
1959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으로 투옥1982 건국포장
1983-1988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
1985-1996 광복회 경기도지부 지부장
1990 건국훈장 애국장
1997 한국독립유공자협의회 부회장
1999 (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2001 (현)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