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막재와 우실 그라고 군웅과 치우천황
메칠 전 고향 정자리 출신 김진일 선배님(진중 18회)얼 만나가꼬 야기럴 하다봉께 정자리에 '살막재', '살막치'로 불루넌 지멩(地名)이 있넌데
여가 이전에 개뿌닥 막기 전 월가리까장 바닷물이 둘오던 시절에 정자리서 갯뿌닥이로 가넌 오루막질인데 동리로 둘오넌 살(煞)을 막어주넌 고개란 지명에 관한 야기가 나왔어람짜.
내나 우리 선조덜께옵서넌 그란 지역에다가 도팍담도 쌓고 낭구(방풍림)도 싱개가꼬 액운(厄運)과 살기(煞氣, 殺氣)럴 막고 갯뿌닥에서 불어 넘어오넌 세찬 찬바람도 막넌 그란 용도로 씀시로 거그럴 신성시했었지람짜.
그케 생긴 데덜은 우리나라 서남해안과 섬 지역에 널리 퍼져 있어가꼬 지역에 따라 우실, 우술, 우슬, 머실담, 돌담장, 돌각담, 어유림(魚遊林), 어부림(漁付林)...
요케덜 여러 찔로 불루넌데라.
조도 관매도에서 꽁돌이 있넌 갯뿌닥이로 넘어가넌 고개턱에가 도팍담이로 갯바람맥이가 되아 있넌데 여그도 요즘은 '우실'이라고덜 불루고 고케 명패도 써붙에 논 데지라.
조도면 신륙리 육동마을 앞에 ‘우실’언 솔낭구 방풍림이로 이름얼 송총림(松叢林)이라 한답디다.
관매도에 그 우실도 이전에 노인덜께서 딿게 불루든 이름이 따로 있어가꼬 지가 옛날에 얻다 따로 적어 놨었는데(내나 액맥이, 살맥이... 그란 뜻에 이름이었는데) 통 못 찾겄어람짜.
관매도 출신 향우덜한테 물어봐도
아예 ‘우실’이란 이름도 잘 몰루넌 이도 있고
내나 거가 바람이 씬 데고 꽁돌해변 가넌데란 그 지형하고 형태만 기억하넌 이덜도 있고 이름얼 아넌 이덜도 다덜 ‘우실’이란 이름만 기억하고람짜... ㅠㅠ
관매도에도 해수욕장쪽에 있는 노송방풍림(老松風林), 모새미방풍림(茅沙里防風林), 죽림방풍림(竹林防風林) 등 해변갓에다가 방풍림을 맨든 것도 내나 폭풍이나 바다 물결, 모래바람에다 갯바람에 피해럴 막어주넌 자연 환경에 보호책이로 같은 뜻이기넌 하지라.
그라제만 고갯질 까우락진 데로
이런 지형에다 도팍담도 쌓고 낭구럴 싱기는 형태는 물론 재냉기(고개 너머에서 불어오는 찬바람)라넌 자연 현상인 바람에 피해럴 쭐일라고 하넌 점이 젤로 첫찌로 중한 점이 있제만, 여가 또 불가항력(不可抗力)인 신(神)에 영역하고 인간(人間)덜이 살아가는 영역에 구분지점이로 우리 민간 신앙에 옛 신화(神話)도 한 몫이럴 하지람짜.
예로부터 무당덜이 위하고 섬기넌 신(神)인 군웅[軍雄, 무당이 섬기는 신(神)의 하나로 무신(武神)이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아 주는 신(神)]에 관한 신화하고도 관련이 됩디다.
인간으로 태어난 왕장군(부: 천황제석 모: 지황제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하고 *용왕의 딸하고 새다구서 태어난 시 멩에 아들덜이 인간덜 삶에 영역이로 침투하넌 액(厄·모질고 사나운 운수)과 살(煞·흉악한 기운)을 물리쳐 주는 신(神), 즉 ‘군웅(軍雄)’으로 좌정(坐定)하게 되었다는 우리 민속 설화(說話)가 그 바탕이여람짜.
그래가꼬 그 군웅(軍雄)이 신(神)에 영역과 인간(人間)덜 영역에 구분지점인 그 경계처(境界處)에서 액(厄)과 살(煞)을 막어준다는 그란 믿음과 염원덜이 그케 담이로 쌓어 논 도팍덜이나 싱개 논 낭구들에가 다덜 담겼지람짜.
예전 우덜 에릴찍에 정초(正初)가 되므넌
당골래럴 불러다가 옴박지에다 물 담어가꼬 쪼빡 엎어 놓고 뚜둘개감시로 간단하게 액맥이굿하던 것얼
<도신>이라고 했었넌데 이런 이름덜얼 기억하고 아넌 이덜도 인자 벨로 없어져 가는 현실이 그 시대 문화하고넌 인자 이후 단절되는 현상덜로 어찌 짠하고 가심 아풉니다.
요새 젊운이덜은
서양에 구신(鬼神)덜인 그리스신화, 로마신화 얘기에다가 그 서양구신덜에 얽힌 족보덜언 꿰고 삶시로덜... ㅠㅠ
"우리 것은 존 것이여~!"가 아니고
인자 "놈우 것이 존 것이여~!"로 댜강께
한류 문화가 지구촌 세계럴 휩쓰넌 이때
새로 동학 혁명이 나와사라 씰랑가...??
그란데 민속신앙에 군웅(軍雄)을 야기해놓고 봉께 자칫 옛날 우리나라 군신(軍神)이 군웅(軍雄)인줄로 잘못 아께미 역다 야기 한 자루 더 붙일랍니다.
군웅(軍雄)은 무속계에서 모시넌 군사에 신이고 우리민족 고래에 군신(軍神)이로 나라에서 모시던 군신(軍神)은 치우천황(蚩尤天皇)입디다.
이분도 단군 한아부지의 뿌리로 우리 민족에 선조로 일컬어지시는 분임시로 증산도 등 민족 종교 안에서 배달국(倍達國. 고조선 의 중기) 제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B.C.2706)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분이 이 분인데 중국을 최초로 통일시켰다는 황제헌원(皇帝軒轅)과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탁록대전(琢鹿大戰)이라는 긴 전쟁에서 10년간 73번 전쟁을 했는데 치우천왕이 전승(全勝)을 했던 데에서 전쟁(戰爭)의 신(神)이고 군대(軍隊)의 신(神)이 되셨지람짜.
내나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에 문양이 그 치우천왕을 뜻하고 지끔 경복궁 수문장이 들고 있는 문양에도 뵈지라.
야튼 이런 치우천황(蚩尤天皇)에 사당(祠堂)이 조선시대엔 한양 뚝섬(纛島)에가 있었답니다.
1970년대까지 서울에서 물깟에 유원지로 젤 유멩한 데가 ‘뚝섬유원지’란 데였고 또 경마장이 과천이로 욍기기 전까장 있었든 ‘뚝섬 경마장’도 유멩했었지람짜.
그란 여가 조선시대 임금덜이 역서 군사럴 사열했넌데 그랄 때 임금의 깃발인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낸 곳이라 해가꼬 ‘둑섬’, ‘둑도(纛島)’라 불렸다가 이후 '뚝섬'으로 소리가 강한 음이로 바까졌다는데
여그가 내나 우리나라 군신(軍神)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이 모셔진 치우사당(蚩尤祠堂)이 있었고 그 사당은 1940년대까지만 해도 그 뚝섬에 존재했었다고 그래람짜.
기록덜얼 보자머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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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제(纛祭)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군신(軍神)인 치우천황(蚩尤天皇)께 꾸준하게 지냈던 제사를 말한다. 일 년에 봄 경칩과 가을 상강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냈는데 무장(武將)들이 부임지로 떠가기 전에는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둑(纛)은 어떤 모양인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군영(軍營)을 대표하는 대장기로서 전쟁신으로 불리웠던 배달국 14대 환웅천황인 치우(蚩尤)를 상징한다고 전해지는 [둑(纛)]이라는 깃발을 만들었다. 이 둑(纛)에 대해서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운회(韻會)》에 "모우(旄牛)355) 의 꼬리로 이를 만들고, 왼쪽 비마(騑馬)의 머리에 싣는다."고 한다. 《광운(廣韻)》에"크기가 말[斗]만 하다."고 한다. 《이의실록(貳儀實錄)》에 "검은 비단으로써 이를 만드는데, 치우(蚩尤)의 머리와 비슷하며, 군대가 출발할 적에 둑에 제사지낸다." 고 한다. - 세종실록 133권, 오례 군례 서례 병기 둑·기·휘 -
◎고려,조선 시대에 둑제를 지냈다.
고려시대에도 [둑제(纛祭)]를 지냈다는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
閱兵訖, 親祭纛于宮門 병사들의 사열을 마치고 친히 궁문에서 둑제(纛祭)를 지냈다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 13년(1287년)
왕이 일찍이 서경(西京)에 행차[巡御]하였을 때 커다란 둑기(纛旗)를 제작하여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인임에게 주어 출진(出鎭)하게 하였다. - 고려사 세가(世家) 권 41 공민왕 18年 (1369년)
◎조선시대에도 [둑제]를 지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안군(永安君)에게 명하여 둑신(纛神)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홍둑(紅纛)·흑둑(黑纛) 둘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므로 제사지내게 한 것이었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武服)의 차림이었다. -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1393년)-
정도전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둑(纛)에 제사지내게 하니, 도전(道傳)과 제사에 참여한 장사(將士)들이 모두 철갑(鐵甲) 차림으로 제사를 지냈다. -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1월 27일 (1394년) -
예조에서 계하기를, "봄·가을의 둑제(纛祭)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에 구분하여 정하지 않았으니, 적당하지 못하므로, 여러 제사 의식 중의 소사(小祀)의 예에 의하여 2일 동안 산재(散齋) 하고, 1일 동안 치재(致齋) 하고, 변두(籩豆)는 각각 여덟 그릇을 쓰며, 그 외의 드리는 제물(祭物)과 의주(儀注)는 그 전대로 할 것입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 7월 19일 (1421년) -
◎둑제(纛祭)를 지낸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이 3번 치우천황께 둑제(纛祭)를 올린 기록이 적혀있다.
① 癸巳(1593)年 2月 初4日 : 경칩날이라 둑제(纛祭)를 지냈다.
② 甲午(1594)年 9月 初8日 : 장흥부사로 헌관(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전사(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纛祭)를 지내기 위해 입재(入齋)시켰다.
③ 乙未(1595)年 9月 20日 : 새벽 2시에 둑제(纛祭)를 지냈다.
**********이상***
요케 기록덜이 전해지넌구만이람짜.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란 명언에 말짝시나
어쨌든 후대인덜언 선인덜에 기록을 믿어사라 항께람짜.
-진도사투리사전 저자. 송현인 조병현-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