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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동 굴씨묘를 다녀오며
2018년 그 초가을 산동성 조장시 권현비릉 앞에서 그녀의 고혼을 달래주던 의식..
2018년 그 늦가을 상해 동방명주 탑 레스토랑 선풍호골의 시정학 선생의 한마디..
내 나이 100에 이제 2년 남아..
今年歡笑復明年 올해도 즐겁게 웃고 이듬해도 그러하니
秋月春風等閒度 가을달 봄바람도 헛되이 보냈지요.
[시정학 98세] 진니옌 환샤오 푸밍(復明)..푸밍.. 어른 신 왜 푸밍에 목이 메십니까?
아 이 동방명주(東方明珠)는 중국굴기, 아니 명나라 선비족의 굴기요. 저 아래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화려한 도시는 발아래 있고 반대편 저 멀리 보이는 곳이 ‘숭명도(崇明島)’요. 뭐 明나라 이전의 명칭이고 한국 서울 두배 만하지만 1000년전 부터 조금씩 커진 것이니 .. 명나라 전에도 숭명이라 했으니.. 아 참 그 명태조가 '동해영주(東海瀛州)'라고 명명한 글씨가 있으니 주원장도 숭명이라는 이름에 느낌이 좋았을 거고.. 그러나 200년전까지는 해적 소굴에...어촌..
아 어르신 서울에도 이런 섬이 있지요 그 크기는 이백분지일 수준이지만..여의도 (汝矣島)라고 하는데 뭐 모래밭이었으니..너나 가져라! 이정도로..
아, 왕사여연(往事如煙)이라. 지난 일은 다 연기 같은 것이라오.
한국 권씨 여인이 영락제의 제1비로 그리고 몽골원정 따라 갔다가 산동성 조장시에서 사망 능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권아샤 선생이 12년전 최초로 가셨다고.. 아샤(阿夏).. 운남 모소족 언어로..칭런(情人) 이라..
난 방인야(方人也)라 하오. 정학(正學)은 바로 그 명나라 주체 놈에게 멸족당한 방효유 선생의 별칭이요. 그 주체가 영락제이고 그 1비가 조선의 권씨라. 영락제 어미 또한 조선인이요.
원래 내 이름은 시정명(施正明)이오. ‘정대광명(正大光明)’이니 그 글씨가 자금성 황제의 옥좌 뒤에 걸려있지요. 청나라 순치제가 쓴것이고 그 뒤 황후와 황제가 교합하는 '교태전'에는 무위(無爲)가 걸려 있으니 이는 강희제가 쓴건데, 거참 묘한 대조요. 무위라 남녀 관계란 천리에 따라서.. 본능이 시키는 대로 뭐 그런 건지..허..
절강시씨가 한국에도 있다지요. 그 당시 구족을 멸하지만 방효유선생의 조카가 겨우 광서(廣西장족자차구)의 하지(荷池)에 있어서 목숨을 부지 했소. 그 후손이 바로 나요. 그리고 시(施, 방+인+야, 방씨 사람이다.)씨로 변성을 했지요.
한국도 고려 왕씨가 차(車),전(全),옥(玉) 등으로 변성해서 목숨을 부지하고 그 이성계가 또 명에 복속되고 그 아들 이방원이 주원장 명태조와 만나고 아 당신 권씨들 권근 선생이 명태조와 나눈 단군시가 있지요.
그나 저나 시사명(施史明) 선생이 왜 이리 늦나..
녜 선생님! 아 그러고보니 제가 사는 고양시에 명나라 출신 궁녀 굴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절강 시씨 이야기는 민행구(한국인 거주 상해 중산층 아파트촌)에서 차가 고장이 나서..그렇다니 천천히..
「풀잎은 비단치마요, 꽃은 비녀같구나 이 언덕에 그대 묻은 지 그 몇 해던가해마다 한식 청명절엔 명나라 궁녀 위해 지전이나 보낼까 하네.似羅裙花似鈿 斷原埋玉幾經年 年年寒食淸明節 惟有宮娥送紙錢」
굴씨묘는 소헌세자 계열의 묘소에 있지요. 제 집에서 차로는 20분 정도, 가끔은 3시간 정도 천변을 따라 걷기도 하는 코스이지요. 한번 들어 보실래요. 슬픈 스토리.. 위 시도 숱한 묵객이 그녀의 묘를 지나면서 지은 시중의 하나이지요.
소주출신으로 미녀인데 일곱 살때 하도 명나라 말기 학정이 심하니 모친이 아이를 죽이려고 까지 하고 그러다가 선한 관헌이 이 아이를 궁에 넣게 되고 총명하니 숭정제 황후의 시종이 되지요. 그리고 이자성이 쳐들어와 숭정제가 자결하고 공주하나는 칼을 맞고 살지요. 숭정제 황후 주씨는 바로 아까 말씀 하신 교태전에서 자결하지요. 그 뒤 청나라는 옥쇄 보관소로 만 사용하지요. 광명정대의 청나라 4대 명군과 명나라 말기 4대 암군의 차이 일까요?
그때 굴씨(屈姐)도 황후와 같이 죽으려하나 민가로 피신 시키고 곧 구왕 돌콘의 군대에 잡히지요. 아 돌콘 이 부인이 의순공주라고 조선왕 효종의 양녀인데 그 무덤이 또 한국 의정부에 있어요. 그 사연 또한 대단히 비극적 이지요. 도르콘은 사실상 조선의 수양대군처럼 청나라 실권자이니 대단했겠지요. 그건 나중에 또.
구왕에 잡힌 명나라 환관등 100여명이 청황실의 요원이 되고, 이때 조선의 인조가 청태종, 즉 도르콘의 형이지요. 머리 아홉 번 박는 굴욕의 남한산성 스토리, 그리고 인조왕의 장남 소헌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잡혀가지요. 거기서 소헌세자에게 배당된 궁녀가 바로 굴씨와 오륙명이지요.
당시 굴씨가 봉림대군 나중에 효종 왕이 되지요. 이때 굴욕을 씻으려고 북벌을 생각할 때 굴씨가 측근으로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비파의 명수였다고 합니다.
[시정학 98세] 에.. 비파요? 이 둥팡밍쥬(동방명주)가 바로 백거이의 ‘비파행’시에서 착안하여 그 구절의 하나 ‘큰 구슬 작은 구슬 옥쟁반에 떨어지는 듯 하네(大珠小珠落玉盤)’를 따서 만든 것이니 구슬...
녜 조선의 비파는 다섯줄인데 후에 굴씨가 조선에 와서 무려 75살 까지 살았으니 숙종 년간에 사망하지요. 조선의 양반 여성 헤어스타일과 비파는 그녀가 보급한 것이지요.
조선에 와서 곧 소헌세자가 죽자 그 손자 임창군을 키우지요. 그 손자의 아들이 밀풍군 이탄인데 역적으로 몰려 죽으니 결국 굴씨의 묘도 파묘되다 싶이 되지요.
굴씨의 비파는 매우 좋은 자단향 나무로 고급진데 사후에 버려져 뒤웅박으로 쓰고 난리가 아닌데 조선의 석학 강세황의 손자가 구해서 수리해서 연주해 보니 그 음색이 기가 막혔다는 설이 있습니다. 비파 당기는 비 튕기는 파 그 반복이 만들어내는 유목민의 휴대용 악기 인데 아마 몽골의 마두금도 해금류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게 아닐까요.
굴씨는 청나라 궁궐에 있을 때 최고 권력자 도르콘의 모습을 보고 오랑캐라 욕하고도 살아남고 후일 자신을 조국 명나라 가는 가는 길목에 그 쪽 방향으로 묻어주고 조선의 북벌군이 지나는 걸 지켜 보겠다고 했지요.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라고 유언을 했다고요.
그녀가 죽을 때 키워준 임창군은 북경에 사신으로 가서 늦게 왔지요, 그가 애통해 하면서 그녀의 묘지석을 도자기 만들어서 간략한 이력을 적고 묻었는데 그게 프랑스 박물관이 있다니 기막힌 일이지요.
그 뒤 조선의 궁녀들이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네요, 지금은 소헌세자 계파의 전주 이씨들이 치제 하는 것 같고요,
그리고 당시 청나라의 선교사 아담샬이 천주교 신자인 명나라 환관 궁녀를 살려서 차기 왕권자인 소헌세자를 포섭하고 천주실의 책자를 주고 한 것은 그런 이유이지요. 그런데 이때 들어온 서적이 후일 이벽이라는 선비가 책장에서 발견하고 읽고 자생적 천주교도가 되지요. 역사는 아이러니 하다지만 다 인연의 끈에 의해 기승전결이 성립되는 것 같지요.
이 굴씨는 조선최초의 여성 그리스도 인이라 칭해도 되니 기독교사에 기록 되야 하겠지요.
[시정학 98세] 그렇소! 나라가 망하면 다 그런 것이지요. 절강 시씨 시문용의 후손이 이따 온다지만, 난 절강시씨가 아니오. 그러나 그의 선조라 생각하는 시전(施全)은 바로 송나라 충신 명장 악비(岳飛)를 죽인 간신 진회(秦檜)라는 놈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일족이 멸한 것인데 그 후손이나 방계가 시윤제 병부시랑 같으오. 시윤제는 국방차관으로 장관 석성의 처남이고 시문용의 아버지 이니 참 복잡한 인연이요. 아 그리고 여기 석성(石星)의 부인이 그 조선의 홍순언이 기방에서 구해준 그 여인이라지요. 허 참.. 그러면 그 굴씨가 1622년 생으로 75년을 살았으면 1699년인데 시문용이 1643년에 세상 버렸으니 그녀의 존재를 알았을까? 모를 일이나 좌우간 같은 공동 운명체로 명나라 부활과 귀향의 꿈을 버리진 않았을 것이요.
시선생님 그리고 굴씨는 자수궁이라는 것이 지금 옥인동 군인아파트 앞인데 이것이 바로 광해군이 호화궁궐로 시문용의 의견으로 지었다는 건데 여기에 효종의 배려로 사찰로 변한 자수원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자수궁 건도 인조반정 일파의 엉터리 모함이지요.
녜 당시 조선에 명과 관련된 후손이 많아요. 임진왜란 후 이런 저런 이유로 잔류한 사람이 있고 후에 청나라가 송환을 요구하자 산속으로 들어가니 그 대표적인게 바로 경북 성주 대명단, 대구의 대명동 이런 것이고 마귀(麻貴) 장군은 그 손자가 청나라 군사에 압박 받자 전라도로 배를 타고 와서 정착하니 거기도 사당이 있어요, 성주 이씨 이사룡 장군이 시문용의 병법 제자로 명군과의 전투에서 일부러 공포를 쏴서 사형당한 것, 또 효종을 따라온 아홉명의 명나라 인물들 이른바 구의사(九義士:王美承·馮三仕·黃功·鄭先甲·楊福吉·裵三生·王文祥·王以文·柳溪山)를 기리는 후손 풍영섭이 정리한 ‘구의사전’ 이란 책자도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찌 이리 정정하신지요.
[시정학 98세] 아까 광서 이야기 나와서 거기에 하지시에 나의 조상이 군관으로 가서 목숨을 부지 했다고 했지요. 그 하지시 파마현이 바로 세계 5대 장수촌이고 권선생도 근방에 공장이 있어 가보지 않았소!
그 인연인지는 모르나 난 아직 돋보기를 쓰지 않고 .. 그 장수촌 철학이요. 늙으면 철학.건강.노동.봉사.자연.후대.양보.종명 의 길을 가야지요. 강하면 죽고 부드러우면 산다. 는 것이지.. 결국 종신에서 피해 주지 않고 가는 것.. 좌탈입망이란.. 그 파마촌 노인들이 어떻게 갑디까? 오늘 저녁 까지 김을 매고 조용히 모든 기운을 다 빼고 다음날 잠자듯 일어나지 않는 것.. 아..
아 저기 시사명 선생이 권오명 군과 같이 오는 군요.. 권오명군은 한국인이 아니고 중국 권씨입니다. 그 권씨의 후손이 또 정승공파 권상좌의 후손으로.. 한국에 좀 있어요. 그 어머니 시정정(施晶政, 施明玉)은 북한의 금화군이 원적이요.
녜 그러면 굴씨에 대해서는 제가 정리한 글을 나중에 번역해서 드리지요. 우선 이것은 네이버에 나온 블로거의 것인데 참고로 보시지요.
[굴씨 이야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
원당역 012번 마을버스 타고 늦가을의 정취는 흐릿하다. 길이라 대자천(大慈川)을 끼고 걷는다. 약 10분 후 갈림길에 닿는다. 좌측은 최영 장군 묘,성녕대군 묘를 가리키는 길표지가 있고 우측은 고양동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다. 우측 길 고양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길은 한적한 2차선 포장도로다. 500여m 가벼운 비탈길을 걸으면 왼쪽으로 ‘정원가든’이라는 음식점이 보인다. 주변은 농막(農幕)과 밭이다. 음식점 뒤로는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보인다. 음식점 앞길로 들어가 이 산등성이 앞에 서면 등성이로 오르는 길은 없고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으로는 작은 묘가 두세 기(基) 보인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이름 없는 마애불보다 더 찾아가기 힘든 곳이 안내판 없는 이의 묘소다. 이곳을 찾기 위해 주변 산등성이를 헤매며 묘란 묘는 다 찾아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알면 금방이건만 모르면 참으로 아득한 것이 길이다. 아마 우리 사는 나날의 길도 다름 아닐 것이다. 과감히 산등성이를 오르면 우측으로 등성이 남쪽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묘(墓)가 보인다. 새로 세운 비(碑)도 보인다. 비문에 쓰여 있기를, ‘昭顯世子 淸國瀋館侍女 屈氏之墓(소현세자 청국심관시녀 굴씨지묘)’다. 2001년 4월 소현세자 종중에서 정비한 비석이다. 한편으로는 고양시에서 세운 예쁜 안내판도 있다. 조선이 멸망한 후 참으로 오랜 세월 버려졌던 묘소다. 似羅裙花似□鈿(사라군화사□전) 비단치마 꽃처럼, 비녀는 □처럼 斷原埋玉幾經年(단원매옥기경년) 이 언덕에 옥 같이 묻힌 지 몇 해가 지났던가 年年寒食淸明節(년년한식청명절) 해마다 한식 청명 그 날이 오면 惟有宮娥送紙錢(유유궁아송지전) 궁녀들이 오직 넋을 위로해 주었지 *紙錢(지전): 冥錢(명전)이라고도 하며 종이로 만든 모형 돈으로 저승에서 쓸 노자돈이다. 위는 조선말 선비 김구(金球)의 ‘굴씨 묘를 지나며(過屈氏墓詩)’라는 시(詩)다. 이 밖에도 선비 신진유는 ‘굴씨사(屈氏辭)를 남겼고, 자하 신위도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를 남겼다. 굴씨가 누구이길래 이랬던가?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온 명나라 궁녀 굴씨의 묘.
답은 정조의 명에 따라 간행된 존주휘편(尊周彙編)이라는 한정판 책에 들어 있다. 임란, 호란 후 흐트러진 정신과 기강을 바로잡고자 발간된 책인데 자연히 명(明)을 숭상하고 그 옛날 반듯한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니 청(淸)이 알까 극비에 붙였으며 명나라 멸망 뒤 조선으로 오게 된 궁녀들의 이야기도 기록에 남게 되었다. 1644년(인조 23년) 명(明)이 청(淸)에 멸망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의 포로가 되었는데 궁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굴씨는 명나라의 마지막 임금 의종(숭정제)의 부인 주황후(周皇后)의 궁녀였는데, 의종 내외가 자결한 뒤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청에 포로가 됐다. 그녀는 소현세자가 청(淸)의 인질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인 1645년(인조23년)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때 함께 온 명나라 궁녀들이 굴씨, 최회저, 유저, 진저 등이며 환관들도 함께 데리고 왔다. 아마도 소현세자가 아담 샬에게 요청했다는 천주교 신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저와 진저는 일찍 세상을 떠나 화장(火葬)한 후 이 땅의 산하에 뿌려졌고, 명나라 고관의 후처였던 최회저는 80세를 넘기고 1699년 숙종으로부터 상궁(尙宮)의 직을 받았음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 그녀는 1705년(숙종 31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아 양주군 화향촌에 묻혔다. 그 뒤 그녀의 묘소는 영영 잊혀졌다. ‘죽은 명나라를 섬기고 산 청나라를 배척’하다가병조호란이란 치욕을 당한 인조는, 자신을 대신해 청에 인질로 잡혀갔던 아들 소현세자가 돌아오자 그를 미워한 끝에 의문의 죽음을 보고, 이어 며느리 일가를 몰살시킨 뒤, 4-8-12살 손자를 귀양 보내니… 굴씨만은 예외였다. 글씨를 읽지 못했던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qu’라고 발음했는데 조선인들 귀에는 ‘규’로 들리니 규저(圭姐)로 불리다가 자신의 이름이 반름기(頒廩記: 녹봉표)에 尺자처럼 쓰여 있다 하기에 사신 길에 역관이 확인하니 굴(屈)씨였다. 우리나라 발음에 있는 ㄱ,ㄹ,ㅂ 받침이 중국에는 없는 언어 구조가 빚은 난센스였다. 이렇게 이름을 찾아 조선의 궁녀로 살아 간 그녀는 명나라 황실의 예법을 가르치고, 여인네의 머리 매는 법, 새와 짐승 길들이기, 비파의 명수로도 성가를 높였다.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바라건대 서쪽 근교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왕(효종)께서 청나라 정벌을 위해 출정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소원을 가슴에 안고…. 그러나 그 원(願)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하기에 그녀는 소현세자의 단 하나 남은 막내아들(TV사극 ‘추노’에서 오지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한 어린애)을 보살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소현세자 문중에서 그녀의 묘를 보살폈고, 김구의 시에서 보듯 궁녀들도 보살폈으며 그녀의 비파 연주는 장악원에 전수되었다 한다. 강세황의 손자 강이오(姜彛五)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된 그녀의 비파를 찾아내 손질했고 자하 신위는 그녀로부터 전수받은 장악원 악사로부터 비파 연주를 듣고 그 감흥을 떨칠 수 없었다. ‘미인은 흙으로 돌아갔어도 악기에 배인 향기는 남았구나.’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崇禎宮人屈氏 琵琶歌)는 절절히 애절하다. 나도 문득 부서지는 겨울 햇빛 속에서 그녀의 비파 소리가 듣고 싶다. 뻗어 나온 능선 길을 우측으로 오르면 묘한 기가 있고 그 뒤로 반듯한 비석과 문인석을 갖춘 묘가 보인다. 밀풍군(密豊君)의 묘소이다. 밀풍군은 누구일까?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비극은 잠시 후 경안군 묘소에서 돌아보자. 첫째, 둘째는 일찍 죽고 셋째 경안군(慶安君: 오지호가 지키려 한 어린애)만 살아남았다. 이 경안군은 다행히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가 임창군, 둘째가 임성군이다. 첫째 임창군의 맏아들이 밀풍군이니 소현세자의 증손으로 소현세자가(昭顯世子家)의 적장자(嫡長子)였다. 만일에 소현세자가 살아 임금이 되었더라면 밀풍군이 임금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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