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 작은 도시 삼천포, 농어촌을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일구고 그렇게도 힘든 보릿고개를 넘으며 모질게 목숨을 이어오면서도 소박한 미래를 꿈꾸며 살아온 학창 시절. 원래 작은 사천군 삼천포 읍이었던 고을을 당시 힘 꽤나 쓰는 국회의원 덕분에 1956년 근방의 시골과 섬까지 모아 인구 오십만을 겨우 채워 도시로 승격을 하였고 마침 일제시대에 놓였던 폐허가 된 철로를 복원하여 1965년 진삼선(진주-삼천포) 기차가 첫 운행을 하던 날은 온 시민의 축제로 모두가 한 잔의 술에 취하여 춤추며 노래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 마음으로 대 환영을 하며 박수치고 좋아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 도시에는 지역 국회의원이 이사장인 사립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1960년대 초반에 공립학교가 하나 생기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규모나 역사는 비교가 안 되지만 신설학교는 공립학교라는 긍지를 가지고 자랑하고 사립학교는 역사와 전통과 규모에서 순순히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였고 마침 두 학교가 배구나 농구 시합을 하는 날은 전교생이 하나가 되어 목청을 높여서 응원을 하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다니던 사립학교는 공립에 비하여 학생 수가 조금 많기는 하였지만 중학교는 네 반이고 고등학교는 두 반이 전부여서 3년간 다니다 보면 웬만하면 모두가 같은 반으로 동네 식구처럼 잘 알게 되고 거의 모두가 친구가 되었는데 혹간 시내에 사는 친구들이 시골 친구들에게 텃세를 하곤 하였던 가소로운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되어 부산이라는 대도시로 가게 되었고 대학 진학을 하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객지로 가게 되니 객지에서 만나면 모두가 반갑고 저절로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부산의 용두산 공원
해양대학을 다니던 친구와 나와 같은 대학의 초급대학을 다니던 친구와 만나서 저녁도 먹고 사진도 찍었던 기억이 나고 대학 2학년 쯤 징병검사를 하였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몇 년간 재검을 받는 동안 대학 졸업을 하게 되었고 고향을 멀리 떠나 천리 타향의 시골 중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어느 해 징집영장이 나와서 논산 훈련소에 입소를 하였는데 마침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반갑던지 전국에서 모인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아는 친구를 만나 서로 의지하며 한 내무반에서 약3주 정도 생활하면서 멀리 지나가는 호남고속도를 힘차게 달리는 차들을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과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정밀 신체검사를 하였고 마침 둘 다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나는 원래 폐가 좋지 않았고 친구는 시력이 나빠서 결국에는 귀향조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 친구와 서로 연락을 하며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시골의 고향집에도 같이 가고 고향에 사는 친구가 잘 아는 선박에서 갓 잡아온 큰 광어를 얻어 횟집에 부탁하여 회를 떠서 세 사람이 신선하고 푸짐한 광어회로 포식하였던 기억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경기도에서 교직생활을 하였고 친구는 부산의 어느 교회에서 목회자로 시무하면서 서로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다시 보니 기억도 새롭고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친구가 같은 교회 아가씨와 중매를 한다고 하여 어느 겨울방학 때 부산에 가서 어떤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을 하였는데 중매하려는 아가씨를 가리키면서 어떠냐고 하여 얼른 보니 나이도 들어 보이고 내 취향도 아니라서 나중에 이야기 하자며 나는 경기도 평택으로 올라오고 말았는데 훗날 알고 보니 친구가 중매하려던 아가씨는 졸업식장에서 본 그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사람을 잘 못 알고 엉뚱한 사람을 보고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친구가 보내온 편지에 보면 아가씨와 그 어머니가 나를 못 잊는다며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는 편지를 보고 혼자 웃으며 지난날을 추억하곤 하였지만 그러는 중에 나는 1977년 1월에 결혼을 하였고 신혼여행 차 부산에 갔다가 그 친구 부부를 만난 것이 마지막이 되었고 그 후에 친구는 목사가 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잠시 무심한 중에 저절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전에 광어회를 같이 먹었던 고향의 친구를 통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너무나 극적으로 서로의 소식을 알게 되었고 전화와 카톡으로 자주 소식을 주고받으며 내가 만든 자서전과 시집을 보내게 되어 훈훈한 옛 추억을 되새기며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친구는 로스엔젤레스에 사는데 평생 목회를 하고 이제는 은퇴를 하여 편안하게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손주는 학교에서 운동선수로 활동하고 있다며 사진과 함께 자세한 소식을 전하곤 하다가 2년 전 쯤에 엘에이에서 동부 버지니아로 이사를 간다며 새로 마련한 전원주택의 사진과 주변 풍경까지 사진으로 세세하게 소식을 전하며 아주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며 카톡을 보내오기도 하고 장인어른이 평생 장로로 교회를 섬기다가 이제는 은퇴를 하였는데 시인이라면서 신앙고백의 시를 보내는데 친구도 은퇴 후의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눈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나도 흐뭇한 마음으로 같이 격려하며 마음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옛날 대학 때도 그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하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화되는 것을 느끼곤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시골 움막 같은 고향집에도 같이 갔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즐겁게 소식을 주고받으며 코로나가 끝나면 고국에 한 번 다녀갈 예정이라고 하여 그럼 그 때 만나서 같이 남해안의 아름다운 통영과 부산 지역 여행도 하며 옛 추억도 되새겨 보자고 약속도 하고 안식구는 그 친구가 오면 거나하게 대접도 하고 용돈도 제대로 드리겠다고 나와 다짐을 하면서 언젠가는 한 번 만난 날을 기대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2023년 4월4일 이해인 수녀님의 4월의 시를 보낸 다음에는 소식이 없고 내가 보낸 글을 읽지도 않다가 한 참 후에 읽은 것을 보고 무슨 일일까? 하며 약간 염려가 되었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읽었다는 것을 확인 하고는 마음이 놓였는데 답장은 오지 않았고 다시 몇 번 카톡을 보냈지만 이제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보지를 않는 것이다. 너무나 궁금하며 걱정이 된다는 말로 소식을 꼭 좀 전해달라고 하였지만 역시 응답이 없어서 페이스톡을 하여도 받지를 않고 전화를 하여도 영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멘트만 나오니 사람이 답답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어느 날 생각 중에 편지를 보내서 소식을 알아봐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노트에 적어 놓은 주소를 보니 아차! 처음에 LA 주소를 적어놓은 것은 있는데 서부에서 동부 버지니아로 간 주소는 적어 놓지를 않아서 실망하면서 왜 미리 알아놓지 못했던가 하면서 후회를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벽마다 눈뜨면 기도를 하고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데 친구를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고 하였고 빨리 만나기를 기대하였는데 많이 그립고 꼭 한 번은 보고 싶은 친구요 평생 목회자로 살아온 그의 삶의 이야기도 듣고 나누며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 회포를 나누려고 하였지만 인생만사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던가? 생각하건데 갑자기 소식이 끊어진 것은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안 좋고 슬퍼지기도 하며 우리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하는 큰 아쉬움과 언짢은 마음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주변의 여러 사람이 같이 전국으로 여행을 다니고 수시로 만나서 식사를 하면서 정을 나누던 분들, 같은 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많은 추억을 쌓던 동료 교사들, 그리고 우산회라는 산행팀을 만들어 매주 월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산행을 하고 내려와서는 당구도 치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은퇴 후의 시간을 즐기던 15명 정도의 회원들 중에도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분들이 세 명이나 되고 무릎이 아파서, 이제는 다리에 힘이 떨어져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지금은 6명만 달랑 남게 되었다. 생각하면 너무 아쉽고 지나간 추억이 많이 그리워진다.
우리나라 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선정된 바 있는 삼천포대교를 보면서 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고 옛 동무들이 많이 그립고 보고 싶어지는 하루다.
이제는 지나온 날보다 앞날이 짧은 지금, 제각기 지울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고 그 추억을 곰씹으며 혼자 웃음짓다가 때로는 무릎을 치기도 하고 탄식도 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 중에도 남은 이모작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는 지난날의 추억은 보이지 않는 큰 자산이 되어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넉넉하고 부자 부럽지 않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오늘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던가? 오늘도 어떤 그리움을 안고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