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만수대예술극장 홍범도 나무
평양부 보통문(서문)에 들어서면 임란에 조선 파병을 ‘만력제’에게 주장한 명의 병부상서 ‘석성’을 기리는 ‘무열사’가 있다. 6·25 때 미군 대공습에 평양의 ‘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졌고, 1593년에 세운 이 무열사도 한 줌 재가 된 뒤 ‘평양만수대예술극장’이 들어섰다.
홍범도(1868~1943)가 이 무열사 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홍경래 혁명 때 증조부 홍이팔이 처형되고 조부 홍동철이 이곳에 숨었기 때문이다. 홍범도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일주일 만에, 젖동냥으로 아이를 키운 머슴살이 아버지 홍윤식은 아홉 살 때인 1877년 세상을 떴다.
머슴살이를 하며 열다섯 살이 되자, 홍범도는 나이를 열일곱이라 속여 평안감영 나팔수가 되었다. 하지만 감영 병사들의 상하 차별과 폭행에 시달리다, 군관을 죽이고 1887년 황해도 수안의 제지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7개월의 임금 체불, 동학을 믿으라는 강요 등 착취와 학대에 공장주를 죽이고 1889년 금강산으로 갔다.
1890년 홍범도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지담’의 상좌승이 되었다. 이때 문자를 배우고 서산, 사명대사를 알고 우국 역사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가까운 암자의 비구니 스무 살의 단양 이씨(이옥구, 이옥녀)와 혼례를 올리고 처가인 함북 북청으로 갔다. 가는 도중 건달패를 만나, 이때 만삭의 아내가 죽은 줄 알고 떠돌다 강원도 회양 먹패장골에서 사냥꾼이 되었다.
1895년 11월, 포수 김수협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철령에서 일군 12명을 사살하는 등 3차례의 전투에 의병들을 잃고 황해도 연풍으로 가 금광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감시가 이어지자, 다시 함북 북청으로 갔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아내와 다섯 살 아들 ‘양순’까지 만났고 둘째 ‘용환’이 태어났다, 홍범도는 이곳에서 화전농과 사냥꾼으로 포수 권익단체인 ‘포연대(捕捐隊)’ 대장이 되었다. 먼 거리에서 유리병 입구를 지나 병의 바닥을 맞히는 사격 솜씨는 사냥꾼들의 부러움이고 존경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는 조선군대를 없애고 9월 7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했다. 이해 11월 홍범도는 포수 70명의 ‘산포대(山砲隊)’를 조직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수비대를 격파하니 이때의 별명이 ‘날으는 홍범도’이다.
그렇게 신출귀몰의 홍범도 의병은 순종의 의병해산 칙령에도 5백여 명으로 늘었다. 이에 일제는 홍범도 아내를 인질 삼고 아들 양순을 내세워 회유했으나, 홍범도는 아들 머리에 총을 겨누며 항일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때 아내 단양 이씨는 혹독한 일제의 고문에 옥사하고, 양순은 ‘홍태준(洪泰俊)’ 이름으로 의병을 모집, 항일 무장투쟁 중 1908년 6월 16일 정평배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 둘째 아들 용환도 연해주에서 항일 무장투쟁 중 병사했다.
1910년 한일병탄에 홍범도는 만주로 망명했다. 백두산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영원불멸 전설이자,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직업 ‘의병’, 목적과 희망 ‘고려독립’의 홍범도 독립군의 전통을 잇는 대한민국이 육사 교정의 홍범도 흉상을 치워버렸다. 그것도 일제에 부역한 친일 후손, 토착왜구들의 소행이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
홍범도가 태어난 터, 평양만수대예술극장 가까이 능수버들이 있다. 거센 비바람을 이기고 푸른 잎을 피우는 능수버들처럼, 흉상은 치워도 홍범도의 정신과 기개는 치우지 못할 것이다. 홍범도 고향마을, 평양만수대예술극장 가까이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끼던, 한여름 햇볕에 유난히 푸르던, 그 능수버들을 떠올리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