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동안 비디오를 무려 3편이나 보았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제가 비디오를 잘 안보는 편이거든요.
그걸 감안하면 무척 많이 본 거죠.
한달가야 1-2편을 볼까말까 하는데, 1주일동안 3편을 보았으니
평생의 기록을 깬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쩝-
우리집 큰 조카가 집앞에 있는 선경비디오에서
만화인지 비디오인지를 자기 혼자 빌려 봤다가 분실을 했어요.
큰 조카는 아직 유치원생임돠.
참고로 이전에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어요.
휴직하고 집에서 훈련소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대우비디오에서
"아- 전진양씨, 거 '코난' 만화책 좀 갔다 주세요. 빌려간지 오래되었습니다."
"예? 제 나이가 몇살인데 그런 걸 봅니까. 저 그런 거 빌려 간 적 없어요"
"무슨 소리입니까. 여기 날짜가 정확히 있는데."
"언제입니까? 말해 보세요"
이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확인한 날짜는 제가 초계에서 근무하고 있던 5월 중순이었어요.
그럼 필경 그것은 제가 빌려 가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죠.
의심의 눈초리는 당연히 조카에게로 쏠렸습니다.
문제는 저놈의 자백을 어떻게 순순히 받아 내느냐 하는 거였죠.
방법은 간단해요.
당당하게 걸어가요. 그럼 조카가 겁을 먹고 뒤로 물러 납니다. 아님 일부러 딴짓을 하든가.
그때 바로 치명타를 날립니다.
"너 이노무 자슥, 누가 함부로 만화 빌려 보라구 그랬어"
이렇게 단정적인 어투로 다안다는 식의 결정적인 질문을 하면
꼬리를 내리고 순순히 자백하죠.
이런 경우는 질질 끌면 안됩니다.
고등학생이나 꼬맹이나 똑같아서 이런 심문에 바로 넘어가죠.
다 들켰으니 용서를 구하고 살길을 찾아 보자는 심리가 작용하죠.
저두 고등학교 때 많이 당했죠.
"종옥이 형이 그랬어요. 나는 몰라요. 앙-"
이렇게 자백을 받아 낸 후, 조카의 사촌 집에 있는 만화를 찾아서
가게에 갖다 주고, 연체료까지 다 물려 준 후에
차후로 애들에게 이런 거 절대 빌려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 가게에서 똑같은 일을 저질러서 그 가게는 다시 안가요.
암튼 이런 사건이 종종 있는지라,
형님형수의 많은 도움(학비 전액)을 받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제가
보답차원에서리 이런 일의 전문해결사로 나섰죠.
이번에는 얼마의 배상과 연체료를 지불해야할지를 가늠하며
가게에 갔는디,
아- 글쎄
가게 아줌마가 따뜻한 미소와 함께 배상을 안해도 된다는
사려깊은(꼬마에게 빌려준 자기 책임이라면서요) 친절을 베풀어 주시더군요.
부도덕한 상혼에 물들지 않은 아줌니의 선한 미소에 감동감동을 받아서리,
그럼 대신 제가 배상금액만큼 비디오를 자주 빌려 보겠다고 약속했죠.
(아줌니가 젊고 인물도 좋은디, 그거에 감동했나 모르겠슴돠. 하하하)
그래서 빌려 본 비디오가 늑대의 후예들과 엑시트 오운(이상 아줌마 추천), 에너미엣더게이트입니다.
친절한 아줌마의 추천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보지 않았을
왕 재미없는 '늑대의 후예들과 엑시트 오운(근데 제목이 맞나, 스티븐 시걸 나오는 건데)'을 본다고 얼마나 힘들었던지.
널찍한 거실에서 늑대의 후예들을 볼 때는 얼마나 곤혹스러웠던지요.
60이 넘으신 노모는 책상을 깔구 공부를 하시는데
(참고로 저희 엄니가 대단한 종교적 학구파입니다. 하하하!)
26살의 젊은 아들은 딩굴딩굴 누워서리
비디오나 보구 있으니 그 모양도 우습구,
주말의 명화에 뽀뽀하는 장면만 봐도
"그런 거 뭐하러 보노-."
하시며 빨리 자라고 종용하는 어머니의 성정을 잘 알기에
늘 비디오는 야한 장면이 안 나오는
'늑대개' 등과 같은 환경친화적(?)이면서 노누드적인 비디오만
볼 수밖에 없고,
'혹시라도'하는 엄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되도록 비디오는 어머니가 있을 때 보는 형편인지라
비디오 장면 하나하나에 엄청난 신경을 쓰죠.
(엄니가 있는데 돌발 상황이 나오면 안되거든요.)
요즘은 혹 밤늦게(여기서 밤늦게라는 말은 대강 11시정도임)
인터넷을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방문을 열어 놓고 하죠.
왜 그리 저녁식사 때마다 뉴스에서는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 기사가 많이 나오는지.
그럴 때마다
"세상 말세다 말세야. 너도 콤퓨타 좀 고만해라"
하는 엄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죠.
우리집에 그런 사정이 있는지라
'늑대의 후예들'들을 공개적으로 엄니 있는 데서 보았는데,
(참고로 가게 아줌니에게 절대 야한 장면이 나오는 비디오는 그렇게 안된다고 말을 했는디...)
우째 이런 일이.
당시의 상황은 이랬습니다.
엄니는 티브이 반대로 책상을 돌리고 앉아 공부를 하고 계셨고,
저는 그 뒤에서 배개를 베고 누워 비디오를 보고 있었죠.
무슨 말도 안되는 괴물이 나오고,
주인공들은 '메트릭스'에서나 나오는 화려한 스톱모션의 액션을
구사하며 이야기는 중세를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뭐- 이야기 초반만 보면 대강 어떤 놈이 어디서 죽고, 어떻게 결말이 나겠지 하는 추리가 가능한지라
(영화의 모티브는 대강 동일해서리 쉽게 추리가 가능하죠. 그래서 제가 비디오를 잘 안 봐요.),
그날도 그런 생각하며,
야하지 않다는 선한 아줌니의 말에 긴장을 풀고
별 생각없이 보고 있는데,
허걱-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