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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6년 9월23일(금)
장소 : 영덕군 창수면. 영해면 일원
반월당(08:00) - (145.8km. 2시간6분) - 신돌석장군유적지(10:06 도착. 관람 40분. 10:46 출발) - (1.6km. 4분) - 신돌석 생가(10:50 도착. 관람 20분. 11:10 출발) - (5.2km. 10분) - 괴시리 전통마을. 목은 이색 기념관(11:20 도착. 관람 1시간. 12:20 출발) - 영해면소재지에서 점심 1시간.1:20 출발 - (10.0km. 18분) - 창수면 신기리 나옹왕사 반송정(1:38 도착. 관람 20분. 1:58 출발) - (13.9km. 25분) - 장육사(2;23 도착. 관람 50분. 3:13 출발) - (14.0km. 26분) - 인량리 전통마을(3:39 도착. 관람 1시간. 4:39 출발) - (4.6km. 11분) - 송천예배당(4:50 도착. 관람 10분. 5:00 출발) - (3.8km. 7분) - 도해단(5:07 도착. 관람 10분. 5:17 출발) - (149.0km. 2시간 7분) - 반월당(7:24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신돌석장군유적지(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한말 유일한 평민장군인 신돌석장군의 본은 평산이고, 자는 순경이며, 호는 장산이고, 본명은 태호입니다. 이명으로는 돌석과 태홍, 태을, 대호이며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덕군에서는 신장군의 항일정신을 후대에 남기고 본받고자 축산면 도곡리에 생가를 복원시키고(1996년) 성역화공원(1999년)을 조성하였다. 생가는 장군의 부친 신석주가 1850년경에 지은 집이다. 그의 생가는 일본 관헌들이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꺽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1940년에 초가집 생가를 불태워 상량주 및 연목 일부가 전소되었으나 1942년 상량주 및 연목 일부를 새로이 세워 기와집으로 꾸몄다가 1995년 당초 건립시의 초가집으로 복원했다. 그리고 장군이 태어난 생가로부터 2.3km 떨어진 곳에 유적지를 조성하였으며, 유적지는 1995년도에 착공하여 1999년 11월 18일 준공되었고, 2005년 6월 22일 추가 조성되었다
신돌석장군생가지(申乭石將軍生家址.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신돌석(1878∼1908)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군사를 모아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하여 1896∼1908년 영덕, 영양, 울진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여 독립의병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래 있던 생가는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불에 태워 없앴고, 지금 있는 집은 1995년 복원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신돌석申乭石
순경(舜卿), 태호(泰浩), 돌석(乭錫),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 태백산 호랑이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건양 1) 3월 13일해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거사를 일으켰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재개되자 1906년 3월 13일 의병 100여 명을 모아 그가 사는 마을에서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재차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에 울진장흥관(長興館)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의 병정들을 습격해 항복을 받았다. 이어 삼척·강릉·양양·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또 그들의 전선 가설을 방해하였다.
1907년 울진매화당(梅花堂)에서 수동(壽洞)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모집,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원구(元邱)에 진을 쳤을 때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었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청부역(靑鳧驛)으로 진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민 3,000여 명이 가세하자, 영양의 주실〔注谷〕로 퇴각하는 주둔병을 추격해 격전 끝에 물리쳤다. 이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어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청하(淸河)로부터 영덕의 조현(鳥峴)에 이르러 적과 싸워 이기고 소항(所項)을 지나 대동(大洞)에 이르렀다.
10월에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수동으로 돌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12월에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해 서울을 공격하기로 해 전국의 의병부대가 양주로 모여 들었다.
이 때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실현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진호(鎭護)와 부서 개편에서 신돌석 부대는 제외되고 말았다.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대장은 양반·유생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만 편성되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을 비롯하여 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 등을 참여시키지 않아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부하 장병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로 되돌아와 1908년 1월에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2월에 영양읍에 진을 쳤다가, 3월에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쳐서 군세를 강화해 춘양(春陽)·황지(黃池)·소봉동(小鳳洞)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4월에는 울진도곡(道谷)에서 적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 7월에 평해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희암(喜巖)에서 싸웠다. 10월에 안동 재산(才山)으로부터 영양 검정여점(黔丁旅店)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져 이듬 해 봄을 기약하고 장병을 돌려보낸 후 눌곡(訥谷)의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했는데, 이들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였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그는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그의 의병부대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양반과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봉건적인 신분질서 관념은 평민출신인 그를 백안시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지도자 간의 이념적인 차이는 의병부대간의 통일전선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고, 평민 출신 의병장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잃고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 구나"
괴시리 전통마을(경북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괴시리 전통 마을 황토 빛 반사하는 흙길 따라 200년 종가 고택의 묵은 향연을 연주하다.
외갓집. 묵은 때. 연꽃향기 가득한 황토 뜰채에 잊혀져간 옛 문호의 사려 깊은 시구 떠돌다. 발걸음 따라 영해면 소재지에서 북쪽 해안방향으로 1km남짓, 괴시리에 이르면 마을 앞을 수놓은 연꽃의 향연과 풍채만으로도 묵은 세월을 말해주는 두 그루 고목이 따뜻하게 맞이한다. 황토 빛 반사하는 흙길 따라 이어지는 200여년 전통의 고가옥들이 머릴 맞댄 이곳이 바로 괴시리 전통마을이다! 마을의 분위기를 귀띔해 주듯 만개한 연꽃이 전답처럼 피어나 있어, 바쁜 일상에서 여유로운 과거 고택으로의 먼 시간여행을 나온 듯하다. 연(蓮)잎차의 참맛을 의미할 수 있는 고택체험도 기다린다 하니 발걸음을 재촉 해보자. 마을을 주름잡는 기인 기와 토담 길, 발길 더듬어 한 집 한 집 들여 다 보며 걷자니 어느덧 내 몸과 마음도 조선후기로 물들어 간다. 400여년 영양남씨 세거의 흔적이자 집성촌을 훔쳐보며 묵은 고택의 향취와 세월의 흔적을 마주한다.
이곳은 경상북도와 영덕군이 함께 전통마을로 지정하여, 복원도 하고 단장도 하여 잘 보존된 고유마을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었다. 지금 살고도 있는 가옥과 문화재로 지정받고 원형 그대로를 보존만 하고 있는 가옥들이 엇비슷하다.
이곳은 또한 고려 말을 대표하는 충신인 삼은(목은,야은,포은) 가운데 한분이신 목은 이색 선생과도 관련이 깊다. 고려 공민왕 8년 때 목은 이색 선생이 원나라 유학 후 고국 길에 잠시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의 괴시마을과 고향인 이곳(당시는 호지촌)이 유사하다고 여겨 이후 '괴시'라 칭하였고 전한다.
고려말 이색선생의 외가가 처음 입주한 이래 몇몇 종씨가 기거하다, 인조8년 1630년부터 영양남씨가 처음 정착하여 점차 집성촌을 이루었고, 이후 380여년이 흘렀다.
전통마을의 주택양식은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가의 원 형태 그대로 계승하며, 문화와 예절 또한 함께 전승되고 있다 한다. 마을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한 300년 된 영남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 대남댁, 영은고택, 물소와고택 및 서당 등 많은 종택과 서당, 정자 등 도합 14점의 국가 및 도 지정 문화재 자료가 있어 '문화재마을'이 아닐 수 없다.
이색 선생의 탄생지를 기념한 '목은 이색기념관'과 추모비, 그리고 일반 전통가옥들도 자연스레 합류돼 있어 일정한 시기의 옛 사대부가 마을의 형태를 원형 그대로 간직, 보존하고 있는 흔치않은 가치를 보이는 반촌이다. 남두원공에 의해 비롯된 영양남씨 괴시 문중은, 장남 붕익이 대과에 급제한 후 높은 벼슬을 지내고, 그 후 문한이 계속되어 영남유림에서도 뛰어난 선비들이 배출되었고, 문집, 저술, 서화 등으로 전해진다. 또한 후손 가운데는 신돌석의병을 적극 후원하고, 영해 3.18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계병 이하 남진두, 남효직, 남응하 등 항일 구국활동에 이바지한 독립투사들도 있다. 영해부 지역유림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괴시 문중이라 관혼상제의 예절과 학문건립, 문중의 제사와 전통 민속놀이, 세시풍속과 유가의 규범 등이 잘 전수되어져 내려와 지금도 학계에는 무수한 박사들이 포진해 있는 모범적인 전통의 집성촌 마을- 영덕의 괴시리 전통마을이다.
괴시리괴정(槐市里槐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97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29 (괴시리))
괴정은 영조 42년(1766)에 괴정 남준형이 지은 정자로, ‘경목재(景牧齋)’라 하며 지내던 곳이다.
남준형 선생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전과 역사 연구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키우는데 여생을 보냈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힘써 칭송을 받았다.
남준형의 『괴정유사(槐亭遺事)』와 남용만의 『괴정기(槐亭記)』, 남효채의 『괴정중건기실(槐亭重建記實)』에 기록이 남아 전하고 있다. 또한, 권병섭의 『괴정중건기(槐亭重建記)』에 따르면 순조 17년(1817)에 고쳐지었고, 남효채의 『괴정중건기실(槐亭重建記實)』에는 고종 13년(1876)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으며, 1936년에 보수공사가 있었다. 한국전쟁 뒤에는 야학 학당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괴정은 이곳 마을 주민들의 보호로 보존하고 있으며, 향토문화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큰 건물이다.
영덕괴시리영감댁(盈德槐市里令監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4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9 (괴시리))
영덕 괴시리 마을 내에 있는 영감댁은 호은 남흥수(1813∼1899)가 1847년경 건립하였으며, 1938년에 그의 증손 남대철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까지 대문채, 방앗간, 마굿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이 영감댁은 정면 4칸·측면 6칸의 ㅁ자형 건물로 자연석 기단위에 각주를 세웠다.
대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1칸의 방과 우측에 아랫방과 사랑대청이 있다. 우익사는 사랑대청과 연결하여 2칸의 사랑방과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1칸의 통래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 배면에 벽장과 내부와 통하는 문을 두고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사랑방 전면에는 3칸 모두에 반칸의 툇마루를 두고 소로수장하였다. 좌익사는 대문칸 좌측방과 연결된 고간, 부엌, 안방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좌측방은 원래 2칸 규모의 고간이었는데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한칸을 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을 좌측에 2칸 안방과 1칸 도장방을 두었는데 현재는 3칸 모두를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우측에는 2칸의 상방을 두고 외부에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상방의 내부 뒤편에 감실을 설치하였다.
또한 통래칸과 부엌 상부에 다락을 설치하여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청 중앙 전·후열 기둥에만 원주를 1본씩 사용하고 벽체는 판벽을 설치하였으며, 상부가구는 3량이다.
영감댁이 위치한 괴시리는 400여년 된 영양남씨 단일 집성촌으로, 이 영감댁은 창건 당시의 모습 일부가 변형되었고 건축연대 또한 오래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영덕괴시리사곡댁(盈德槐市里沙谷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5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16-3 (괴시리))
영덕 괴시리 마을 내에 있는 사곡댁은 남용(南鎔)이 조선 고종 37년(1900)에 건립한 것을 1942년에 남응호(현 소유자의 아버지)가 매입하였다고 한다. ‘사곡댁’이라는 이름은 현 소유자 남명순(현 소유자)의 할아버지인 남조영의 처가 동네 이름인 경주 사곡을 딴 것이라 한다.
이 사곡댁은 정면 4칸·측면 5칸의 ㅁ자형 건물로 자연석 기단과 자연석 주초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벽체·기단·굴뚝 등은 시멘트로 덧발라져 있다.
대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1칸 마굿간이 있고, 우측에 아랫방과 사랑대청이 있다. 우익사는 사랑대청과 연결하여 2칸의 사랑방, 반칸의 통래칸으로 되어 있으며, 통래칸과 연접된 사랑방 부분은 당초 고간인 것을 1980년대 경에 방으로 개조하였다. 사랑지붕은 맛배지붕이며 외부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좌익사는 마굿간과 연결하여 화장실, 부엌, 안방 등으로 되어 있으나 화장실과 부엌을 현대식으로 일부 변형된 상태이다. 안채는 2칸 대청 좌측에 안방과 도장을 설치하였으나 도장 또한 방으로 개조된 상태이며, 우측에는 상방과 상방 전면에 쪽마루를 설치하고 대청 배면은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상부가구는 3량이며, 사랑방 전면 지붕이 박공으로 되어 있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이 곳에 거주하는 사람이 없으나 관리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사곡댁이 위치한 괴시리는 400여년 된 영양남씨 단일 집성촌으로, 이 사곡댁은 창건 당시의 모습이 약간 변형되어 있고 건축연대 또한 오래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영덕괴시리영은고택(盈德槐市里瀛隱古宅.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9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호지마을1길 34(괴시리))
영은고택은 영양남시(英陽南氏) 집성촌 및 고가옥 밀집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괴시(槐市, 濠池)마을 내에 있으며 1871에 현 소유자의 5대조인 남공수(南公壽, 號.瀛隱, 1793~1875)가 건립하였다 한다. 건물은 정면4칸, 측면4칸반 규모의 口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대문칸을 중심으로 우측엔 사랑방, 좌측에는 광과 방이 연결되고, 사랑방과 연결된 우익사는 2칸의 방으로 되어 있는데 감실을 두었다. 좌익사는 부엌과 안방으로 이어져 있고, 내부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은 도장과 안방을, 우측에는 상방과 상방전면에 통마루를 두었다. 건물은 자연석기단과 자연석 주초위에 각주를 세웠으며, 상부가구는 전체적으로 3량가이다. 현재 기단, 벽체, 굴뚝등은 세멘트로 덧발라져 있고, 안방전면, 우익사 내외부 사랑전면등에 퇴마루를 두었으며 마을내 다른 가옥과 달리 전면 좌우측에 추녀를 달아 팔작지붕으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영덕괴시리스므나골재사(盈德槐市里스므나골齋舍.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0호.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사진길 121(괴시리))
스므나골 재사(齋舍)는 괴정 남준형의 묘소를 관리하고자 178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괴정공의 증손인 회수(華壽, 號 明厓,1781~1851) 대에 중수한 건물이다. 건물은 一자형으로 겹집형태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평면은 전렬은 좌측으로부터 방2칸.마루.부엌으로 되어 있고, 후렬은 방.방(도장).방.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석 주초위에 각주를 세웠으며, 상부가구는 납도리에 3평주 5량가로 맞보를 올렸다. 천정은 고미반자로 마감하고 그 위 상부는 노출시켰으나, 부엌과 전면 우측 마루부분의 천정은 앙벽을 치지 않고 산자를 노출시킨 상태로 있다.
목은이색기념관(경북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마을을 둘러 언덕 높은 곳에서 마침내 목은 이색선생의 기념관(2006년 6월)과 동상, 팔각정등과 함께 그의 생애와 사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말 충신이자 인문학의 원류대학자, 고려말 재상이자 대 사상가이며 不事二君의 충절 등 수많은 수식어의 주인공, 목은 이색선생! 그가 탄생한 외가이자 생가지에서 생애와 사상의 깊은 흔적들을 가슴깊이 새겨본다. 마을 앞으로 나와서 도로로 가면 유허비가정 이곡선생과 목은 이색의 유적을 추모하는 비가 나오고, 도로에서 마을을 살펴보면 전형적인 우리네가 사는 마을의 모습으로 눈에 삼삼히 들어온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아름다운 연을 만나고, 은은한 연꽃 향기 속에 괴시마을과 이색의 정신, 그리고 유년시절의 고향 낙원의 정취 속에 빠져볼 만할 것이다. 가치를 보이는 반촌이다.
이곡李穀(1298년 ~ 135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伯).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비서랑(秘書郞) 이효진(李孝進)이고,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창세(李昌世)이다.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이자성(李自成)이고, 어머니는 흥례이씨로 이춘년(李椿年)의 딸이다. 부인은 함창김씨로 향교대현(鄕校大賢) 김택(金澤)의 딸이다. 아들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중수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사로운 정리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 지방을 주유하였다. 1351년 향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창수면 신기리 나옹왕사 반송정(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나옹왕사출생과 동시에 어미를 잃은 핏덩이를 수백 마리의 까치들이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다.
하늘의 비호를 받고 살아난 이 아기는 훗날 우왕의 책사로 고려를 다스린 왕사인 것이다.
나옹이 태어난 이곳은 '까치소' 라는 이름을 얻었고, 까치소는 신기리에서 인량리 방향의 이름 없는 냇가다. 1320년 창수면 가신리 불미골에서 범상치 않은 태몽으로 잉태된 나옹(1320~1376), 아씨(속명)는 가난하게 살다 세금마저 내지 못해 끌려가는 어미 뱃속에서 가까스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장소는 불미골도 아니고 영해부 관가로 가는 길 가의 작은 시냇가였다.
끌려가던 어미가 힘겹게 아이를 출산하지만 관리들은 아이를 버려두고, 세금 못낸 어미만을 관아로 붙잡아 끌고 가버린다. 출생과 동시에 어미를 잃은 핏덩이를 수백 마리의 까치들이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다니, 하늘의 비호를 받고 살아난 이 아기가 바로 훗날 영해를 빛내고 고려 말 우왕의 책사로 나라를 다스린 나옹왕사인 것이다. 그는 20세 젊은 나이에 인생무상을 깨달아 출가의 길을 떠나는데, 반송 지팡이 하나를 거꾸로 꽂아두고 이르길 "이 나무가 살아 자라면 내가 살아있는 줄 알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 는 말을 남겼는데, 그때 반송을 꽂았던 그 자리가 바로 신기리의 반송유적지다. 신기하게도 그때 꽂아 둔 반송은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 낙락장송으로 자라났으며 그 후 무려 625년이나 살았고 1965년경에 고사되었다.
출가한 연후에 중국 원나라에서 지공화상을 만나 2년간 수도하고 공민왕 승하하고 우왕이 즉위한 후에 '왕사'로 봉해지고 32제자 중 최고였던 무학대사에까지 영향을 준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어진 지공-나옹-무학의 3대 고승은 나옹왕사가 창건한 장육사의 홍련암에 모셔져 있다.
물론 나옹왕사는 자기가 태어난 곳 가까이에 최초 터를 잡고 사찰을 마련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장육사였다.
새로 터를 잡았다고 해서 새술막 또는 신기라는 이름이 붙은 신기리 는 나옹의 자취 또한 만연한데 2008년에 그의 사적비를 세우고, 그 옛날 625년을 살았던 소나무가 고사된 자리에 다시 반송을 심어 '반송유적지'라 표방하니 그 역사적 의미도 새기고, 영덕이 낳은 한 시대의 고승, 나옹왕사의 큰 틀을 잊지 않고 다시 새겨본다
장육사(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구름이 머물다 간 운서산 기인 여운 아래, 숲 좋고 물 맑은 곳, 구름이 산다는 운서산 기슭에 자리한 장육사. 구조가 크지 않으나 평범함 가운데 짜임새 있는 현대식 인테리어를 앙증맞게 가미시켜 놓아 한 채의 고풍스런 박물관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장육사의 컬러이미지는 은은한 황토빛이다. 수행복도 수행자들이 머무르는 육화당과 자율차방, 참선하는 미류암 조차도 편안한 황토빛을 띄고 있다. 불당을 제외하면 차의 빛을 닮은 황토색이 주가 되는 장육사. 창건 시기는 오래됐으나 조선 세종 연간에 한번 전소되어 다시 지어진 사찰이다. 장육사는 영덕에 위치하지만, 영남의 동해안-포항, 청송, 영양, 울진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아우르는 경북 동해안 유일의 템플스테이 사찰이다.
영덕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盈德 莊陸寺 乾漆觀音菩薩坐像.보물 제993호. 경북 영덕군 창수면 장육사1길 172, 장육사 (갈천리))
경상북도 영덕군 장육사에 있는 높이 86㎝의 조선 초기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버린 것이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원문(願文)과 개금묵서명(改金墨書銘)을 통해 홍무 28년(태조 4년, 1395)에 영해부의 관리들과 마을 사람들의 시주로 만들었고, 영락 5년(태종 7년, 1407)에 다시 금칠하였음이 밝혀졌다.
얼굴은 사각형인데 눈이 치켜 올라갔고 코도 날카로우며 표정이 완고하다. 상체는 앞으로 깊게 숙였지만 비교적 건장한 편인데 사각형이면서도 어깨가 자연스럽고 가슴의 양감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편이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역시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14세기 초의 보살상에 비해 장식성이 더욱 강조되어 가슴의 목걸이 이외에 소매, 배, 다리에까지 구슬장식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번잡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가슴을 트이게 하고 가슴에는 속옷과 바지의 매듭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이후에 만들어진 대구 파계사 목조관음보살상(1447년), 영천 은해사 운부암청동보살좌상(1516년)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어서 고려말 조선초 보살상들의 연대 추정에 기준이 되는 작품이다.
장육사 대웅전(莊陸寺大雄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경북 영덕군 창수면 장육사1길 172 (갈천리))
장륙사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선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산불로 인해 불에 타고 그 후 다시 절을 세웠으나 임진왜란(1592) 때 훼손되어 다시 절을 세웠다. 광무 4년(1900)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장륙사 대웅전은 태조 4년(1395)에 태조와 그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기리기 위하여 지방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금을 입혔다. 또 숙종 3년(1677)에 수리하였다는 등 자세한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다.
특히 안에 모셔진 삼존불 중 오른쪽에 있는 관세음보살좌상은 종이로 만든 불상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불상 중에 종이로 만든 불상은 드문 예이며, 또한 불상을 만든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중요시되고 있다.
영덕 장육사 영산회상도(盈德 藏陸寺 靈山會上圖.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3호.경북 영덕군 창수면 장육사1길 172 (갈천리))
후불탱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본존 석가불이 중 상단에, 양옆으로 4천왕, 10보살과 10대 제자, 4분 신불 들이 사다리꼴로 배치되었으며, 하단에는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이 좌우에, 많은 범문들이 그 둘레를 장식하고 있다.
영덕 장육사 지장보살도(盈德 藏陸寺 地藏菩薩圖.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4호.경북 영덕군 창수면 장육사1길 172 (갈천리))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가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자비로운 보살님으로서, 중앙의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지옥의 십대왕과 판관들이 그려져 있다
영덕 화수루 일곽(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60호.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6-1)
조선 단종(재위 1452∼1455)의 외숙부인 권자신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화를 당하고 그 아들 권책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숙종(재위 1674∼1720) 때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이 지어졌는데,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화수루와 청간정만 남았다. 화수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의 중층 건물로서 순수한 살림집보다는 서원 또는 묘소를 지키는 재실기능으로서 이 지역 민가구조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또한 화수루의 부속건물인 초가까치구멍집도 비교적 구조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서민가옥의 발달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화수루와 더블어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
인량리 전통마을(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북쪽으로 멀리 태백산맥아래 가지를 친 칠보산(810m)과 등운산(786m)이 둘러섰고, 남쪽으로는 들판이 탁 트여서 마을이 자리 잡기에는 안성맞춤한 곳에, 안동 못지않게 예를 숭상하고 풍속이 엄격하다 하여 '작은 안동'이라고 불리던 영덕의 내재된 정신 기반 아래 차차 형성된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과거 창수면 제일의 규모로 명문지가의 위세를 떨쳐내던 인량1,2,3리 마을이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500여년 마을의 터주대감 당산목인 느티나무를 마주한다. 이 팔풍정 느티나무는 마을의 누군가가 불장난으로 원목에 불을 질러 아이들의 몇 아름을 넘나들었던 거대한 원목이 불타 소실되고, 지금은 다시 가지들이 자라 무성한 자태를 펼치고 있지만 이 조차 의미가 깊다하여 96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인량1리와 2리의 경계를 짓는 작은 냇개울을 지나.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 임진왜란 전인 중종 무렵에 차츰 들어서기 시작한 이 마을은 들판 가운데로 송천이 흐르는 가운데 마을은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형국으로 뛰어난 지세를 자랑할 만했다. 울령·등운산으로 부터 발원하여 동해안에서 제일 넓은 평야인 영해들(坪)을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송천이 만들어 주는 넓은 영해지역의 충적지는 과거 이 지역 문화발전을 지탱하여 온 경제력의 원천이기도 하여 실제로 인량리의 사람 대부분은 병곡(과거 영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다.
마을 뒤쪽은 인량대산 혹은 잉량대산이 에둘러져 있있데 등운산(786m)의 지맥이 내려와서 그 산줄기가 뻗어내려 이루진 산으로, 그 모습이 학이 양쪽 날개를 펼치는 듯한 형상이어서 산 아래의 마을인 인량리를 은 나래골 또는 익동(翼洞), 비개동(飛蓋洞)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명당의 조건들을 두루 갖추어선지 인량은 그 시절부터 5대성(大姓) 8종가(宗家)가 터를 잡고 세세토록 거주한 곳으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고 있다. '잉량'이 '인량'이 된 것(광해 2년에 인량리로 개칭)은 이렇듯 명현(名賢)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어진 분이 많이 난다는 것에서 붙여진 건 아닐까?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 구한말 독립운동사에 이르기까지 마을이 생긴 이래로 끊임없이 구국 의병 활동에 참여해온 의사들이 수두룩하다. 또한 지금까지도 마을 후손들은 학계와 정계 등 각 계를 주름잡는 인재로 활약하고 있다.
지금의 인량리 마을은 500년을 호가하는 수백 년 된 크고 작은 고 가옥들이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때론 보수되고 증축돼 오고 있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으며, 지정 보호를 받고 있다. 과거 이 마을은 지금의 전답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집들이 많았다. 영해부지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하였다. 광해7년(1615)에 군내에서 처음으로 향약을 제정, 숙종3년과 1927년에 규약을 시대에 맞게 중수하여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영해인량리주씨종택고문서(寧海仁良里朱氏宗宅古文書.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7호.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5길 45-4 (인량리))
신안주씨종택 소장 고문서 3종(種) 7점(點)이다. 지정목록은 가정(嘉靖) 18년(1539) 주소종자녀분재기(朱紹宗子女分財記), 만력(萬曆) 5年(1577) 주춘영자녀분재기(朱春齡子女分財記), 천계(天啓) 3年(1623) 주량자녀분재기(朱樑子女分財記), 무자(戊子) (1708) 주찬문자녀분재기(朱纘文子女分財記), 을미(乙未)(1715) 주중휘자녀분재기(朱重徽子女分財記), 만력(萬曆) 22年(1594) 주량무과급제교지(朱樑武科及第敎旨), 옹정(雍正) 9年(1731) 예조입안(禮曹立案) (朱氏宗孫 고주중휘(故朱重徽)의 양자건)(5件 연접(連接)) 등으로 분재 문서들은 1539~1731년에 걸쳐 영남지방 재지사족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갈암종택(葛菴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84호.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5길 45-4 (인량리))
조선 후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갈암 이현일(1627∼1704) 선생의 종가이다. 선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영남학파의 거두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아 ‘이기호발설’을 지지하였다. 서인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저서로 『갈암집』과 『홍범연의』가 있다.
가옥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적인 ㅁ자 형태이다. 선생은 원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나 선생이 40세 되던 해에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로 옮겼다. 선생의 10대손이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옮기면서 1910년 종가를 세웠으나 임하댐 건설로 지금 있는 자리인 창수면 인량리로 옮겼다.
또한 이곳은 영남 북부지역의 총의병 대장이었던 선생의 11대손인 이수악이 항일 구국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했던 곳이다. 많은 문집과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며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명성높은 가문 중 하나이다.
송천예배당(국가지정 등록문화재 제288호. 경북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405-1)
1953년 한국전쟁 직후 건축된 박공슬레이트 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해방이후, 건축된 교회건축물로는 드물게 남녀 신자를 구분한 교회형식이 건축계획에 반영되었다. 또한 건물입구의 포치 전면 상부에 목구조를 응용하여 십자가의 형태를 표현하여 교회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교회건축의 토착화 과정과 광복이후 목구조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천추에 길이 빛날 도해단蹈海壇(경북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426-3)
도해蹈海라는 말은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죽겠다'고 저항했던 중국 제나라 노중련의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 영해에 실제로 목숨을 던져 절의를 지킨 인물이 있었다.
현재 대진해수욕장 해안가에는 그의 자정순국을 기리는 ‘도해단蹈海壇’이 서 있고, 여기에는 순국 전날 대진 '산수암汕水巖'에서 지은 '절명시絶命詩'가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절명시絶命詩'
오백년 말에 태어나 붉은피 온 간장에 엉키었는데
중년의 19년 동안 머리카락만 늙어 가을서리 내린 듯 하네
나라가 망함에 눈물은 하염없으며 어버이 여의니 마음 또한 아파라
홀로 선 옛 산은 푸른데 온갖 계책 헤아려도 아무른 방책이 없네.
만리 길에 바다를 보고자 하니 이례가 마침 동짓날이라
희디힌 저 천리 길 물속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이碑(비)는 원래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필로 千秋大義(천추대의) 쓰신 것 이였으나 어느 무지몽매한 학도들이 바다에 빠뜨린 것을 후손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김도현金道鉉 명옥(鳴玉), 벽산(碧山) 의병장
1895년 8월 을미사변과 11월 단발령이 시행되는 등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드러나는 상황이 전개되자, 12월 1일부터 1896년 1월 15일까지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등지에서 뜻을 같이 하는 유지호(柳止鎬)·권한모(權翰模) 등과 논의한 결과 우선, 읍내에 통문을 띄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안동창의진을 이끄는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시국을 논하는 한편, 의진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96년 2월 13일유시연(柳時淵)과 청량산(淸凉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2월 25일 안동부로 진군하여 권세연의 안동의진과 합진하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3월 하순에는 의성 진영을 이끄는 중군장으로 함창·태봉 등 7읍의 의진과 합진,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5월 초순 평해의 이호성(李虎成)이 강릉의병장 민용호(閔龍鎬)의 소모사로서 방문, 청병하자 5월 10일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출진, 강릉 의병과 합진하여 5월 31일 삼척에서 관군과 접전하였으나 패하여 10여 명의 의병만을 거느리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그 병영을 재정비하여, 입암(立巖)·소청(小靑)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밀조를 접하고 10월 15일 영양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영남의 선비들과 더불어 상경, 을사조약반대 상소를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 순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지의 만류로 실패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에는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14년 11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영해의 관어대(觀魚臺)에 나아가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 참고 자료 ; 문화재청. 영덕군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