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강화지석묘가 있다.
강화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고인돌이 혼재하는 지역으로 130여기의 고인돌이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족산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전등사 /전등사대웅전(조선 중기), 보물 제178호, ...
전등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8호.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 樣間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0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린 뒤 1614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 사승(寺僧)이었던 지경이 이듬해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한편 1855년(철종 6) 화주(化主) 규형(奎瑩)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의 기록과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명문 중에 1876년(고종 13) 효월화주(孝月化主)가 대웅전과 약사전의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전등사 /전등사약사전(조선 중기), 보물 제179호, ...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9호. 이 건물의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지붕의 막새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전등사 /전등사동종(중국 북송), 보물 제393호, ...
전등사의 종각에 있는 중국 북송시대의 종. 보물 제393호. , 원래 중국 허난 성[河南省]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에 위치한 숭명사에 있던 것으로 1097년에 주조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중국 종이 어떤 경위로 전등사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말 군수물자 수집 때 강제로 빼앗겼다가 8·15해방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중국 원나라 장인이 만든 고려시대의 개성연복사종(1346)과 매우 유사하며, 11세기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중국 종의 시원적인 양식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몇 개의 중국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명문에 종이 주조된 지방이나 절·연대·시주인·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실록을 보관한 정족산사고
1605(선조 38), 1614년(광 해군이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한말 강제개국을 부른 운요호사건발발지
초지진과 광성보
신미양요(1871년) 당시 마지막까지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이고 조선의 강제 개국을
부른 강화도 조약은 운요호 사건(1875년)의 발발지인 초지진 전투에서 시작됐다.
광성보
소재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초지진 광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