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 아니네
신 보 성
산을 좋아하는 그 여인은 꽃 따라 잎 따라 옷을 바꿔 입는다
개나리 필 때는 노랑 점퍼 진달래 필 때는 연분홍 치마
박 선생, 저 여인 불러서 계룡산 도사에게 사주팔자나 한 번 보고 가라하소
책으로 배운 나의 주역 사주명리를 실험해 보소 싶소
생년월일시로 정해진 그 여인 사주팔자 그대로 말하긴 너무 나쁘다
남편이 죽었네요
맞습니다 선생님은 과연 도사이십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가슴이 두근두근
인간의 운명이 돌팔이 역술인 한 사람의 혀끝으로 정해지다니
입을 닫아라 양심의 소리가 죽비처럼 내 등을 후려친다
밤꽃이 피더라도 흰 상복은 입지 말고 역마살 살풀이에는 등산이 좋습니다
잘 하고 계시네요 머지않아 백마 탄 왕자 한 분 찾아 올 사주팔자입니다
복채는 공짜 사실 나도 나의 운명을 잘 몰라 이러고 있습니다
박 선생, 우리 치웁시다
오월이 되면 배낭에 주역 만세력 넣고 죽장에 삿갓 쓰고 금수강산 삼천리 명승지 곳곳 찾아다니며 돗자리 깔고 앉아 그대는 바람을 잡고 나는 돌팔이 사주로 막걸리 값이라도 벌어 무전여행 하기로 한 그 약속 원천무효입니다
그 짓, 막상 해보니 장난 아닙니다 사람이 할 짓 아닙니다
차라리 선거에 출마를 하겠어요 박 선생이 들러리가 되어주세요
당선이 되면 계룡산 도사 명함 찍어 나랏돈으로 남의 나라 들어가 그 나라 수도 한 복판에 돗자리를 깝시다
주역을 아십니까
그 속에 세계평화의 길이 있습니다. 비핵화의 처방이 들어있습니다.
주역의 가르침을 오바마와 푸틴이 들어야 합니다 왜놈들이 들어야 합니다
주역을 미신이라고 주장하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신자들이 들어야 합니다
그 속에 성경 못지않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월 어느 날
신 보 성
친구야, 오너라
사월 중순 보리밭 푸르러지고 찔레 순 올라와도
너와 나를 위하여 산벚은 아직 지지 않았다
바늘 없는 낚싯대는 그냥 두고
흑백 바둑돌이나 주머니 넣고 오라
세월은 낚지 않아도 제멋대로 흘러가고
물을 보지 못하는 잉어들도
바보 같은 늙은이는 귀신 같이 알아본다
송기떡을 아느냐
태평양 전쟁 육이오전쟁 남자들 전쟁 나가
싸우고 죽어갈 때 배고픈 아낙네들
소나무 가죽 벗겨 만든 구황음식을
이제는 별미라고 합천 처가에서 부쳐왔다
닭다리 두어 개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았으니
막걸리 한 병 흑백돌 보자기에 넣어서 오라
세상사 시끄럽고 걱정되는 일 많지만
참견하기엔 우리가 너무 늙었다
송기떡 씹어가며 흑백돌 희롱하다 심심해지면
닭다리 안주하여 막걸리나 마시다보면
산벚이 지고 사월의 밝은 해도 서산으로 기울리라
오너라 친구야, 우리들의 인생도 저물어간다
붓 페인트
신 보 성
승용차 두 문짝 박박 긁어놓았다
수리공장 갔더니 두 문짝 다 갈아야 한다며
수리비 금 사십만 원이란다
와, 사십만 원이면 자장면이 몇 그릇인가
안 되겠다
붓 페인트 한 통 오천 원에 사서 칠했다
이십여 분 작업에 흠 없이 재생된 자동차 모습
신기하다
나는 일류화가다
성형외과 의사다
내가 이 방면에 천재적 소질이 있나봐
진작 이 길로 나갔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자만심에
내 가슴이 봄날의 산불로 타 오른다
이 불을 어떻게 끌까
그렇다
상처 난 마음 곱게곱게 칠해주는
붓 페인트가 되자
불공평한 이 세상 어지러운 인간관계
마음의 문짝 긁힌 사람 얼마나 많은가
그 마음 붓 페인트로
고쳐주는 성형내과 의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