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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출생입적속명저작칭호배우자자녀부모친척웹사이트
일본 교토 고산사의 원효 진영 | |
617년 신라 금성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 |
686년 (70세) 혈사(穴寺) | |
설사(薛思) 아명(兒名) : 서당(誓幢) · 신당(新幢) · 모(毛) | |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해심밀경소》 《열반경종요》외 | |
소성거사(小性居士, 小姓居士) · 복성거사(卜性居士) · 서곡사미(西谷沙彌) · 백부논주(百部論主) · 해동법사(海東法師) · 해동종주(海東宗主) | |
요석공주 | |
설총(아들) | |
아버지: 설담날, 어머니 : 조씨 부인 | |
잉피공(친조부) 설을신(형) 태종무열왕(장인) 문무왕(처남) | |
경주 순창 설씨 대종회 |
한국의 불교
원효(元曉, 617년 ~ 686년)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이자 학자, 사상가, 작가, 시인, 정치가이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俗姓)은 설(薛), 본관은 경주(慶州), 속명은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별명은 모(毛), 호는 화정(和諍)이다.
그는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서당화상(誓幢和尙), 고선대사(高仙大師)라 불렸다.
원효는 고려시대에는 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라 존칭되었다.
고려 숙종에 의해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원효에게 내려졌다.
원효 스스로 지은 별명은 소성거사(小姓居士)이며, 한국에서는 보통 법명을 따라 원효대사(元曉大師)로 불린다.
출생[편집]
출생과 어린 시절[편집]
그의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으며 만삭(滿朔)이 된 몸으로 집근처인 상주(湘州)[1] 경산현 압량군(押梁郡)의
조씨는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원효를 낳았는데 이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불렀다. 그곳 밤나무의 밤은 크기도 크고[2] 굵으며 맛이 특이하여 사라율(裟羅栗)이라 불렀다.
원효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원효는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출가와 수행[편집]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설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하자 허락하였다.
영취산의 낭지(郎智), 흥륜사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당나라 유학 시도와 깨달음[편집]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원효는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받았다가 풀려났다.
그는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4] 근처의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다. 그는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한다.[5]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로 돌아온 뒤 원효는 분황사에 머무르며 저술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뒤 원효는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6]를 제창하며 민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하다가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서 절필(絶筆)했다.(삼국유사4)
하루는 마음이 들떠 거리에 나가 노래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고 하니 사람들이 듣고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 했다.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둘째 딸인 요석공주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금성시내에서 춤추며 노래부르는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관리를 만났는데, 그가 자발적으로 혹은 관리가 떠밀어서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이후 무열왕은 공주에게 옷을 말리고 쉬게 하도록 명을 내려 원효와 공주를 맺어주었다.
요석공주는 설총을 낳았는데, 고려의 승려 일연은 설총이 한국 유교의 시조라 하여 '지금(일연이 살던 당시)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입적(죽음)[편집]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혈사(穴寺/경주시 양북면 소재 골굴사)에서 입적에 들었다.
사상[편집]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대중 교화를 통한 실천[편집]
스스로 실계한 원효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를 따라가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 중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그렇게 컸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 그만두었다.
유교와 경학[편집]
원효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와 상앙의 법가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명상법[편집]
7세기 원효는 3세기 용수가 만든 대승불교의 승려였다. 그러나 12세기 중국 대혜종고가 간화선을 개발한 것이기에, 원효는 전통적인 불교 명상법인 수식관을 익혔을 것이다. 또한, 화랑이었기 때문에 도교의 조식법을 익혔을 것이다.
오늘날 간화선이 지배하는 한국 불교에서 원효가 별로 논의대상이 아닌 것은, 명상법이 달라서라고 할 수도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7세기 당나라 육조혜능을 헌법에 명시하여 중요시하는데, 7세기 신라의 원효는 오조 홍인대사 때의 승려이다.
삼국통일에 미친 영향[편집]
원효는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분열된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구려, 신라, 백제에서 당대 가장 고승이었던 원효대사가 신라에서 살았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했다. 삼국통일에는 당나라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원효는 당시 많이들 읽는 모든 불경에 대해 각각 해설서를 편찬할 정도로 불교에 자유자재했고 통달해 당시 당나라 고승들이 원효대사를 매우 존경하고 좋아했다. 당시 동북아 국가들의 왕은 최고의 고승을 국사, 왕사로 두어 각종 정책결정에 권고를 받았었다. 오늘날,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수입해 한국화 한 화엄사상과 더불어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평가 받는다.
저서[편집]
원효는 100여 종의 240여 권 (또는 85종의 170여 권)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심(一心)사상과 화쟁(和諍)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현존하는 것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가계[편집]
원효는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사로 6촌의 촌장 중의 한사람인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8] 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원효는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말(奈末, 육두품 출신이 맡는 제11등급 관직) 설담날(薛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이다.
원효의 조부인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원효를 금성 사람이라고도 한다.[9]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 중 1명인 설을신(薛乙臣)의 이름이 현재 전한다.
원효는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다.
원효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관계[편집]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을 사제(師弟)로 삼아 사형제지간(師兄弟之間)을 이루었다.
기타[편집]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처음으로 중창한 법당의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법명을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의 빛이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또한 불교사상을 통한 한국 사상사의 새벽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은 중국 한자를 한국식 발음에 맞춘 이두의 창시자이자 이두 문학의 창시자였다. 설총은 최치원·강수 등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힌다. 그는 9경(주역·시경·서경·예기·춘추·논어·맹자·주례 등)을 처음 우리말로 해석하여 유교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후일 고려시대에 인종때 원효대사의 18대손 설자승(薛子升)은 이자겸의 난 당시 화를 피해, 순창으로 옮겨가 순창 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른 후손인 설귀창의 후손들은 그대로 경주 설씨로 이어갔다.
각승 일화[편집]
바다 용(龍) 또는 임금의 부탁을 받은 원효는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삼매경소를 다 지은 뒤 원효는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이를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를 들은 대안법사(大安法師)가 구경온 사람들의 인파를 헤치고 와서, 소뿔위에 서 있는 붓과 벼루에 종이를 붙였는데 후일 일연은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원효를 한국 최초의 대처승[14]이라 보는 관점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과 사찰령을 통한 한국 전통 불교의 파괴 이후 한국에는 대처승이 유행하였다. 한국불교에서 일제를 찬양하는 왜색을 몰아내고 전통을 복원한 역할을 한 이승만의 불교정화운동 당시 대처승들의 승직이 박탈되었으나, 이후에도 대처승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일제의 영향이 빠져나간지 오래인 현대 한국에서 대처승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고려시대에 대처승이 고려에서 일본으로 전래되기도 하였다.
민간신앙[편집]
원효는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되는데, 그의 사상적 영향과 함께 서민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음을 생각하면 그러한 숭배가 이해된다 볼 수 있다. 숭배의 기제로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을 죽음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작동한다 추정할 수도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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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룡스님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