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마치 징검다리처럼 과정 과정의 연속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하나 실패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하나 성공했다고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신앙여정은 더 그래요. 어떻게 그 삶의 모습을 만들며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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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재승 교수의 강의와 이 정일 목사의 글을 읽었어요. 공감되는 바가
많아서 느린 독서법(옮겨적기)을 시도했어요. 두 글의 공통점은 '좌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것'인데 나만의 콘덴츠가 나를 발전시킨다고
이해했어요. 에예공이 언더 라인을 치면서 읽어주면 고마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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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는 답을 찾지 못해 고생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인터넷상엔 답이
넘쳐납니다. 문제는 그걸 정리해줄 사람입니다.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에
질서를 부여하고, 콘덴츠를 새롭게 읽어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메마른
삶을 적셔줄 새벽이슬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인생의 여정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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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여정에도 남들과 다르게 살 것입니다. 이걸 해내려면 킬러 콘덴츠가
필요하고 우리는 자신을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 고장 난 신호등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를 읽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돈키호테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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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빠져 모험을 떠나요. 한데 양떼를 적군으로 오해하고 공격을 해요.
그 행동이 바보 같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605년을 생각하면 다를 수
있어요. 당시 영국은 시민계급인 상인들에 힘입어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어요. 반면 에스파냐는 쇠락의 길을 가고 있었어요. 에스파냐는 신대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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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고 대항의 시대를 열었어요. 그런데 왜 후발주자인 영국에 밀리게
되었을까, 근대사회의 출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 큽니다. 유럽은 봉건 사회
에서 근대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에스파냐는 구시대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작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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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봉건귀족)을 질타한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견딜 수 있는 뭔가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질없는
것들로 마음을 채웁니다. 자기자리를 지키려는 어리석은 희망으로.‘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어리석은 희망으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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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는 부질없는 일들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나는 안 그럴 거라 장담하지만
서는 데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는 한국
교회의 콘덴츠가 부실하다는 걸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가슴 아프긴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왜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지를 깨달아야 해요. 무슨 일을 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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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아니라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가 중요해요. 우리는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문제는 그 방식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글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이는 기교적으로 뛰어난 글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솔직한 글을 좋아하지요. 그래서 속상하거나 창피한 순간을 담아낸 글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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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 무엇이 소유나
자산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에스파냐는
많은 걸 갖고 있었지만 그걸 활용하는 눈이 없었어요. 반면 영국은 상인들의
개인적인 역할을 인정해주었어요. 한 사람의 힘은 적었지만, 그것이 합쳐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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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힘을 바꾸는 힘이 되었어요. 그게 요즘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제 개인 유투버는 조직만큼 소리를 내고 있어요. 우리 역시 시대를 따라
가려면 ‘나’를 경쟁력 있는 콘덴츠로 만드는 걸 배워야 합니다. 나를 경쟁력
있는 컨덴츠로 바꾸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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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멀리서 보면 초록색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각기 다른 색과 형태의 나무
들이 있어요. 그 숲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적어도 몇 백 년의
세월이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콘데츠와 연결됩니다. 책을 읽으며 찾아낸
문장과 묵상들이 내 속에 쌓여간 시간이 필요해요. 때가 되면 떨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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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 순간을 문학에선 영감이
찾아온다고 불러요. 영감이 부러워서 조급한 마음에 인스텐트 독서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안 돼요. 영감이 주는 희열은 힘든 순간을 견딜 때 옵니다.
오래전에 8K를 뛴 적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는데 억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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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뛰었어요. 그런데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곤 그것이 온몸으로 퍼졌는데 그 힘들던 발걸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어요. 이런 희열이 콘덴츠를 만들 때 찾아와요. 독서를 하다보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해놓은 뜻한 문장을 만날 때가 있어요. 설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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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책에서
가장 많이 찾지만 우연히 보게 된 시나 소설에도 들어 있어요. 그것을 A4용지
에 적어 놓은 뒤 가까운 곳에 두고 읽어요. 그때 처음 느꼈던 기쁨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 느낌은 벽이 있던 곳에 생겨난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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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 같아요. 그 작은 문을 처음 열고 나갔을 때의 희열을 경험하면 치열
하게 공부하게 돼요. 설교는 하늘에서 맛본 말씀의 맛을 일상의 언어로 표현
해서 성도들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성도가 자극을 받으면 그 음식을
먹게 됩니다. 아무리 바빠도 짬을 낼 것입니다. 이게 목회자와 연결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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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이고, 학교와 연결 되면 공부이고, 회사와 연결 되면 새로운 기획안
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드물까. ‘돈키호테’가 여기에 대한 단서를
줍니다. 미국의 라이오넬 트릴링 교수가 오래전에 “모든 소설은 돈키호테의
변형일 뿐이다”라고 말했대요. 문학적 기교뿐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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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는 놀라워요. 신앙인인 우리가 배울 점이 제법 있어요. 앞에서
돈키호테가 바보스럽다고 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인생이 별거 있냐?
사느냐 죽느냐 지.” 그가 이런 말도 했어요. “불가능한 것을 손에 넣으려면
불가능한 것을 해야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야 하오. 꿈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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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 꿈꾸지 않는 자, 도대체 누가 미친 거요?” 400년 전 돈키호테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에게 이렇게 외쳤어요. 호기롭지 않은가요? 바보 같지만 돈키호테
는 도전했어요. 순응하기보다는 부닥쳐 보았고 애써 지키기 보다는 과감히
허물었어요. 돈키호테는 분명 바보 같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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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나 다니엘 같은 성경 속 인물들의 삶과도 겹칩니다. 현실적인 셈에 밝은
사람이 많다보니 이젠 꿈꾸는 자가 적어요. 누가 더 미친 것일까. 돈키호테의
말은 삶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고 재현 돼요. 직장생활에 지친 사람
들은 먹 방을 모면서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정답을 몰라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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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아닙니다. 정답대로 사는 게 힘들어서 그렇게 사는 겁니다. 우리에겐
이 먹 방을 대체할 콘덴츠가 필요합니다. 풍요롭게 살아본 경험이 부족하면
삶을 읽는 눈도 빈약하기 쉬워요. 하지만 이걸 뒤늦게 반전 시킨 사람도
얼마든지 있어요. 콘덴츠는 우연히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바라고 찾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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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얻을 수 있어요. 성경은 그것을 목마름이라고 해요. 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스티브 잡스도 집중과 단순함을 여러 번 강조 했어요. 뭔가 나만의
콘데츠를 갖고 싶지만 막막하게 느낀다면 작은 일에 집중해 보시라. 그러다
보면 잘할 수 있는 게 분명히 보일 것입니다. 그게 보이면 미친 듯 집중
하면 됩니다. 팔로 우 미!
2021.10.30.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