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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성경관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
서론 :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
2019년은 츠빙글리의 개혁사상이 선포 된지 오백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이미 1984년에 츠빙글리 탄생 오백주년에 즈음해서, 그동안 잊혀진 그의 사상과 남다른 기여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과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츠빙글리의 여러 저서들이 영어로 새롭게 번역되었다. 최근에 종교개혁 오백주년 대회가 활발하게 개최되었고, 역사적 교훈들과 신학적 추적들이 진행되고 있다. 2017년도에는 루터의 95개 조항 선포를 기념하면서, 종교개혁 오백주년 대회에서 거의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들이 재조명되었다. 2004년도에는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 (1504–1575)의 탄생 오백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 신학계에서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을 검토하는 학술대회를 전개하였다. 2009년에는 역시 칼빈 탄생 오백주년 (1509-1564) 기념대회가 열린 제네바에서도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 중요한 내용들을 다루었다.
오직 성경만을 최종 권위로 의존하겠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공통된 관점이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의 근거로 호소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개혁들 사이에는 성경에 대해서 다른 강조점들이 있고 차이점들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혁신적인 주장들을 제시할 때에 모두 다 성경에 근거하였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에 의존하기 보다는 교황제 직분자들의 권위와 결탁해 있었다. 거의 모든 성직자들은 성경을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비열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겸손하지 못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게 되어서도, 로마 고위 성직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죄와 부패함이 얼마나 큰 심판을 자초하고 있었던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순결하신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고 말았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성경을 연구한 자들만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로마 교회가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고, 닥쳐온 위기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처럼 말씀을 깨우친 종들이 증거하는 외침들은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타락과 악행들을 드러내는 것들이라서, 권세와 재물에 취해있던 자들에게는 방해물이라고 여겨질 뿐이었다. 중세말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시기는 천년동안 누적되어져 온 인간의 오만함과 실패, 인간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루터와 츠빙글리, 칼빈 그리고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의 선언이나 종교회의 결정에 많은 오류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이 인용하고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된 초대교부들이나 신조들마저도 무작정 따라가지 말아야 하고, 오직 성경의 최종권위와 그 절대 진리에만 의존할 것을 호소하였다. “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은 최고 권위에 대해서 호소할 때에 종교개혁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제기하는 공식이었다.
1. 츠빙글리의 성경관
인문주의 신학문과 전통적 로마 가톨릭 신학을 받은 후, 츠빙글리 (1484-1531)는 루터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스위스에서 자신의 개혁신학을 제시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과 스위스 지역사회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시도하면서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츠빙글리가 루터의 글을 읽고 참고했지만, 그는 루터를 자신의 동료개혁자로 생각하였다. 츠빙글리가 루터로부터 깊은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훗날 츠빙글리는 자신이 성경에 기초하여서, 전혀 루터와 관련성을 갖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개혁신학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루터 역시 츠빙글리에 대해서 “다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취급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개혁운동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서 결정적으로 두드러진 점은 성경의 절대 권위에 바탕을 두고 전개 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 그의 놀라운 종교개혁 사상들과 빛나는 기여들은 모두 다 그의 성경 해설과 설교 속에서 주어졌다. 그는 깊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압도되어지는 감화를 받았다. 성경의 독특한 특성과 기능에 대한 신념을 확실하게 터득한 츠빙글리는 전통이라는 허울로 혼란을 부채질 하던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다.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교회의 중요한 핵심적인 신학의 주제들로써, 말씀과 성령에 의한 예배, 그리스도와 구원사역으로서의 미사철폐, 성례와 상징적 인식, 용병제도의 철폐, 국가와 세속군주 등에 대해서 강조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전지역에서 가장 앞장서서 로마 교황청의 오류를 용감하게 지적했고, 미사의 철폐와 성상 제거를 위해서 투쟁하였다. 츠빙글리는 예배에서 말씀 강해를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개혁교회를 정착시켰고, 그러한 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병폐를 고치고 국가를 새롭게 정비하도록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황청을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제도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전통을 중시하고, 교황의 가르침에 의존해서 행동하던 로마 가톨릭파 캔톤들은 츠빙글리 진영을 무찌르고자 군대를 파견하였기에,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사회정치적으로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츠빙글리가 출생한 생가 빌트하우스 ⓒ김재성 교수 |
성경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와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어는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어거스틴, 비텐바흐, 에라스무스를 통해서 도전과 자극을 받았다. 비엔나와 바슬레에서 인문주의를 수학하는 동안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와 만났었고 큰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는 기독교철학을 발전시켰는데, 도덕적 윤리적 중생과 개혁에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사상적인 뿌리는 초대교부들 중에서 제롬과 오리겐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는 바, 어거스틴의 영향력은 다소 미약하다고 평가되어진다. 바젤 대학교에서 고전적인 스콜라주의 학자들과 일부 인문주의자들에게 수학한 츠빙글리는 철학적 체계로서 생활과 도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펼쳤던 “그리스도의 철학”에서 깊이 영향을 받았는데 본질적인 내용은 교회에서의 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츠빙글리의 초기 사상에서 강조하는 도덕적 갱신은 에라스무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516년부터 글라루스 근처 아인지델른 교구에서 성경을 강해하면서 유명한 강사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원어성경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신학과 철학을 새롭게 개발하였으며, 에라스무스와 같은 박식함과 성경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베르나르드 삼손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츠빙글리는 1518년 취리히 대성당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기에 이르렀다.
1519년 1월 1일 (토요일)에 츠빙글리는 취리해 대성당에서 취임식을 가졌고, 그 다음 날 주일부터는 로마 가톨릭의 절기에 따라서 전통적인 본문을 다루지 않고, 마태복음을 순서대로 강해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교회 개혁의 중심적인 본질이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에 있어서든지 생활의 모든 부분들이 성경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확고히 제시하였다. 성경적인 규범들을 생활에 적용하려는 츠빙글리의 설교는 로마 교회의 권위를 무작정 따라가던 흐름을 바꿔놓았다.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만 순종하여야 한다는 확신들을 갖게 되자 로마 교회와의 단절에 이르게 되었고, 복음적인 성찬예배가 미사를 대체하였다. 츠빙글리의 설교사역이 진행되면서,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는 훨씬 더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어졌다. 교황권으로 제정이 되었던 것들은 모두 다 제거되었다. 면죄부 비판, 성인들과 성상숭배의 제거, 스콜라주의 신학비판, 용병제도의 철폐 등이 모두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1522년 이후로, 츠빙글리는 교황의 권위나 교회의 상하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시의회가 승인하게될 교리의 유일한 원천은 성경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취리히 종교개혁은 1523년 1월 29일 공식적으로 시의회에서 결의되었으니, 성직자들에게 오직 성경만을 설교하라고 명령했다. 츠빙글리의 개혁사상은 “67개 조항”, 『신앙조항들의 해설』 (An Exposition of the Articles, 1523), 『간추린 기독교 입문』 (A Short Christian Introduction, 1523), 『참된 종교와 거짖 종교에 대한 해설』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1525), 『신앙의 고찰』 (An Account of Faith, 1530) 등의 저술로 확장되어나갔다. 이러한 저술들 가운데서 특히, 말씀과 성령에 대한 강조가 츠빙글리의 신학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강조되어져 있다.
츠빙글리의 성경해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서 루터는 성령과 말씀을 분리하는 듯한 해석들이 나타난다고 하면서 츠빙글리를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무시해버린 성령의 역할과 사역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온전하게 회복을 시도하려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루터가 츠빙글리를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어디로부터 불어오는지 알 수 없다”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는데 하나님의 영은 자유롭게 각 개인들에게 나눠주시고, 그분의 자유에 달려있다고 풀이했다. 또한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선포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하시며, 우리가 따르도록 우리를 가까이 이끄신다.”
2) 성경의 명료성과 확실성
1522년 9월 6일,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이라는 설교를 출판했다. 이 설교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성과 능력이 핵심 내용으로 강조되어있다. 츠빙글리는 서론에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는 명백한 선언을 하였다.
이 설교의 첫 부분에서 츠빙글리는 외형적으로 기록된 말씀(written)과 목회자의 선포를 통해서 참되게 듣는 (spoken)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 효력을 발휘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큰 효과를 발휘했던 사례들을 열거하였다.
츠빙글리는 단순하게 성경의 명료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풀이하였다. 루터는 성경의 두 가지 명료성을 언급했는데, 하나는 성경 본문 안에서 명료성이 있으며, 성경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내적인 명료성을 말하였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이해에 비춰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고백하도록 빛을 통과시켜주시어서, 그 말씀의 확실성을 알게 한다"고 강조했다. 명쾌하게 성도들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을 발휘하게 되며, 탁월한 적용에까지 효력을 끼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권적인 하나님께서는 시의 적절하게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끌어내어서 이해하도록 만들어주신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가르침" (theodidacti)을 받아야만 한다고 츠빙글리는 강조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를 갖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는데, 훗날 칼빈이 제시한 것과 거의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도 빛을 비춰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처럼 체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던 열두 가지의 사례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츠빙글리는 열거하였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츠빙글리가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특별히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2장 12-13절과 요한1서 2장 27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지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는 확신에 기초하여서 목회사역을 전개하였고, 강해 설교와 저술에 힘을 기울였다. 1519년부터 1531년까지 12년 동안에 연속적으로 거의 모든 성경에 대해서 독일어로 강해설교를 지속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모든 예배에서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읽도록 했고, 예배절차와 순서도 라틴어로 인도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독일어를 쓰는 시민들에게 모국어로 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였고, 가능한 한 모든 삶의 영역에 말씀을 따라 윤리적인 삶을 확산시키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목회자들을 양성하고자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 성경원어를 가르쳤다.
3)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근간으로 성취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츠빙글리가 선도하였고, 외콜람파디우스, 파렐, 불링거, 칼빈, 삐에르 비레, 테오도르 베자가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성경적인 제도와 윤리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스위스 동맹이 강화되면서,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선포한 복음이 주변에 확산되었다. 베른과 바젤을 거쳐서 마침내 제네바에서 칼빈이 혁신적으로 성취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시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교회제도와 예배를 크게 변화시켰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교황과 종교회의에 더 의존하였다. 인간의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기에, 루터와 칼빈은 교황이야말로 거짓 교사라고 정면에서 비판하였다. 인문주의에서 토대를 닦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 번역성경이 아니라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파고 들어가서 새로운 신학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배출한 대학교에서는 대부분 15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라는 토양이 구축되어 있었다. 성경에 대한 연구에서 획기적으로 중세와는 다른 흐름을 만들었지만, 이들 두 가지 흐름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를의 기념비 ⓒ김재성 박사 |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하던 신학적인 사상들은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반 시민들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려는 대안이자 위로였다. 성경의 내용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고민하던 문제들을 다룬 것이고, 일상생활의 고뇌와 아픔을 해결해 주는 해답들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 섭리와 예정, 예배와 설교를 중요시하는 것들은 모두 다 생활의 현장에서 일반 성도들이 해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을 겪던 것들이었다.
인문주의 언어학자들이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스콜라주의와 논쟁을 시작하였고, 이것을 계승한 종교개혁자들이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제시했다. 인문주의자들은 "근본으로 돌아가라" (ad fontes)라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헬라어 성경본문의 정확한 번역에 집중하였다가, 점차 그 의미와 해석으로 확산하였다. 고전 연구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자들로 확산되어지면서,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구호에 시인, 문필가, 화가, 건축가, 어학자, 고고학자, 철학자들이 공감했다. 지성적인 기독교 철학, 윤리와 도덕적 갱신운동에서 영향을 받아서 성장한 후에, 중세 로마 스콜라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기독교 신학사상을 정착시켰다. 15세기에 이탈리아로부터 확산되어나간 기독교 인문주의는 신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된 원서들을 읽고서 수사학을 발전시키는 탁월한 어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정신은 유럽인들에게 익숙했던 라틴어를 넘어서서, 거의 칠백 년 동안 잊혀져 있었던 고전 언어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 등 인문주의 학자들과 초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준 많은 신학자는 로마 가톨릭 신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였다. 루터가 최초로 독일어 성경번역을 시도한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가 신구약 완역본을 출간해냈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서서 살았던 로렌조 발라는 정확한 성경본문 이해를 촉구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여 (살후 2:8) 루터에게 확신을 주었으나, 그의 공헌은 충분하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츠빙글리가 선도적으로 앞서 전개한 성경중심의 교회 개혁은 그가 서거한 1531년 이후로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졌다. 우리는 츠빙글리와 그의 성경적 개혁사상의 확고한 정립이 이뤄지기까지, 엄청난 격동과 갈등의 시대를 통과했음에도 주목해야만 한다. 결코 쉽지 않았다. 츠빙글리를 비롯하여 외콜람파디우스, 불링거, 칼빈 등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격동기에 최전선에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는 영향을 남겼다.
인간 사회의 역사와 그 가운데 흐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유지되고 움직인다. 때로는 기독교 교회나 신학자들도 혼란에 빠져서 갈등과 대립에서 단 한 치의 개선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다 성취하거나 파악하지 못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셔서 오묘한 뜻을 간직하고 펼치도록 하셨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곁에 계시며 힘을 주셨고, 사자들의 입에서 구해 내셨다고 회고하였는데 (딤후 4:17), 츠빙글리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생애의 업적과 시련을 동시에 맛보았다.
2. 츠빙글리의 성경의 적용과 성취들
우리는 츠빙글리가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확고한 판단을 갖고서 철저하게 노력했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한다. 그가 성경적 확신을 가지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했다는 것은 단순히 참된 지식의 근거만을 발견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성경은 지혜의 보고라거나, 구원의 복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츠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사회의 건설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츠빙글리의 성경적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그 적용을 위해서 교회가 시정부당국과 일반 정치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간여했다는 점이다. 츠빙글리의 선도적인 역할로 인해서 스위스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진영에 가담한 목회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고, 시대적 변화를 깨닫게 되었다. 스위스 지방의 정치적인 문제는 곧바로 교회의 독립권과 자치권을 확립하는데 깊이 연계되어져 있었다. 세속 정부와 교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균형을 잃어버린 상태로 유지되어 왔었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위상에 따라서 세속 통치자들의 맞대응이 혼란을 가져왔었다.
성경의 권위를 가장 신뢰하였다 하더라도, 많은 구절들에 대한 정확한 의미파악과 해석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츠빙글리의 성경해석과 개혁적인 신학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무엇보다도 16세기 신학의 핵심쟁점이었던 성만찬 해석에서 츠빙글리의 상징설은 가장 두드러진 가르침으로 남았다. 1525년 이후로 츠빙글리는 루터에게 몇 차례 의견을 표시하였고, 여러 편의 글과 저술을 발표하였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이라는 것은 자신을 주님의 군사로 다짐하는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고린도전서 10장 3절에 대한 해석에서도 츠빙글리는 단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면서 상징하는 것들을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확신을 가졌는데, 말씀에 신실한 자들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창조하고 보전하기 때문이다. 츠빙글리는 교회의 기초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라고 확신했다. 각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하여 우주적인 교회가 형성된다. 1530년에 저술했으나, 츠빙글리가 서거한 후 1536년에 출판된 『믿음의 해설』에 보면, 프랑스 국왕 프랑소와 1세에게 보내는 헌정문이 담겨있는데, 여기에서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개신교회의 확립을 위해서 취리히 교회의 설교자로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지도력은 박해를 받았던 종교개혁자들의 상황타개를 위해서 여러 차례 모임에 나가서 중요한 발언과 저술을 발표하면서 발휘되었다. 1525년 이후로 루터의 성만찬 교리와 츠빙글리의 새로운 해석이 큰 차이를 보이면서, 신적인 임재에 관한 이해의 골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츠빙글리는 1529년에 마틴 부써의 주선으로 회집된 말부르크 개신교 지도자 모임에서 츠빙글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을 이끌고 나가서 독일에서 온 루터를 비롯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서로 중요한 교리적 기초를 확립했다. "말부르크 종교화의" (the Colloquy of Marburg)에서 츠빙글리는 루터파 지도자들과 함께 개신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세웠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논쟁으로 그치지 않고, 막강한 권세를 가진 황제와의 사이에 정치적 긴장관계를 유발하였다. 1530년에 합스부르크 황제 챨스 5세가 개최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 (the Diet of Augsburg)는 유럽의 정치와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던 독일지역 개신교의 문제를 주로 다뤘다. 황제는 독일 개신교회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도록 요청했다. 멜랑히톤은 6월 25일, 루터파의 입장을 요약해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츠빙글리는 7월 11일에 자신의 개신교 입장을 담아서 『믿음의 이해』 (Fidei Ratio)를 제출했다. 독일 남부 지방에서는 부써와 볼프강 카피토가 쓴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던 황제는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고 1531년 4월 15일까지 모두 다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 군주들은 스말칼트 동맹을 맺었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부써의 스트라스부르크도 이 동맹에 참여했으나, 츠빙글리와 스위스 개혁교회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부써가 너무나 루터파 신앙고백과 같은 입장이라고 불신하게 되었다.
스위스 지역 개혁자들은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31년 10월 11일, 스위스 가톨릭 진영에 속한 군대가 두 번째 카펠전투에서 개신교 진영의 군대를 제압하였고, 츠빙글리는 사망했다. 그리고 11월 24일 외콜람파디우스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츠빙글리의 핵심적인 교리들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입장을 계승한 "제1 헬베틱 고백서"가 불링거에 의해서 정리되어서 1536년에 나왔고,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1549년의 "제 2 헬베틱 신앙고백서"로 연속되어졌다.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냐의 츠빙글리와 "임재"하는 것이냐의 루터의해석 차이는 끝내 간격을 좁히지 못하였다. 스위스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츠빙글리의 신학은 그 성경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루터와도 다르고, 부써와도 차이가 있다. 취리히 교회가 처한 개혁과제가 달랐기 때문이고, 반대파들과의 쟁점이 달랐다.
츠빙글리도 처음에는 루터와 거의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1523년과 1524년에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는 다소 급진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아마도 그가 이러한 변화된 견해를 갖게 된 것은 네델란드 법학자이자 인문주의 해석자였던 코넬리우스 호엔(Cornelius Henrici Hoen)의 편지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되며, 같은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이면서도 루터와는 달리 칼 쉬타트가 성만찬에서는 아무런 실제적 임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츠빙글리는 1524년 11월에, "성만찬에 관하여 매튜 알베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했다.
▲츠빙글리가 출생한 생가 빌트하우스. ⓒ김재성 박사 |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언급한 것인데, 영적인 양식임을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츠빙글리는 지적했다. "이것은 내 몸이다"(마 26:26)는 구절에 대해서 츠빙글리는 사람이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님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다"고 해석하였다. 상징하는 것을 가지고 그것의 본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츠빙글리의 해석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신학자는 네델란드 법학자 호엔과 바젤의 개혁자 외콜람파디우스였는데, 물질적인 음식을 나누면서 동시에 영적인 식사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스부르그 개혁자 마틴 부써는 성만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며, 불신자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효력이 전혀 없다는 입장이었다.
츠빙글리와 루터의 성만찬에 관련된 주요 저작들과 그 안에 담긴 성경해석의 차이점들은 1527년 2월에 거의 동시적으로 출판되었다. 츠빙글리의 『친절한 주해, 즉 마틴 루터의 성만찬 해석에 대한 고찰』은 그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담겨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주장들을 요약해서 설명했고,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서 관련된 것들을 다시 제시하였다. 그는 요한복음 6장을 가장 중요한 해석적 기반으로 제시하면서, 그동안 설명해 온 입장을 요약하였다. 츠빙글리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몸을 실제로 가졌으며, 적나라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에, 유한한 신체로서 활동하다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 따라서 그의 몸과 피는 만물 가운데 편재할 수 없으며,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유아 세례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종교개혁자가 츠빙글리이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근거하여, 할례와 유아세례의 연관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는 이미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할례를 통해서 입증할 수 있었다 (롬 4:11-2). 그는 재세례파 후프마이어와 캬스파르 쉬벤크펠트의 저술을 비판하면서, 성도들이 구세주에 대하여 확고한 지식을 가진 후에 받는다는 믿음의 세례와 그 이전의 상태에서 받는 세례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가 어떤 연령에 속해 있다하더라도, 은혜의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다. 세례란 하나님께서 전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그의 자녀들과 언약을 맺는 "상징" (sign)이라고 츠빙글리는 확신했다.
3. 츠빙글리의 유산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
이제 마지막으로 츠빙글리의 독특성과 그가 남긴 성경적 개혁신학의 유산을 살펴보자. 츠빙글리는 신학적인 요소들과 도시의 정치적인 요인들을 결합시켜서 지역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취리히의 교구 목회자로서 교회당 안에서 성직자 제복을 입고서 활동하던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지역화 된 공동체의 최후 보루를 지키는데 까지 동참 하므로서 전혀 다른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남겼다. 성경의 교훈과 지역의 정치적 문제들을 포함하여 개선을 모색하는 식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성격을 결정짓는데 결정적으로 크게 이바지 하였다.
가장 탁월한 츠빙글리 해석자로 널리 알려진 로허 (Gottfried W. Locher) 교수는, "츠빙글리언주의"라고 부르는 특별한 도시중심 개혁운동의 전형이 취리히, 제네바 등 스위스 여러 지역에서만 성취되었다는 것에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그 전형은 먼저 세례와 성찬, 예배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성경해석이 확연히 드러났고, 츠빙글리가 취리히의 "예언자" 혹은 "선지자"로서 바른 정치를 하도록 세속정부를 이끌어 나갔다는 점이다. 츠빙글리가 1518년 취리히에 신부로 추천을 받아서 처음 부임했을 때에는 마리그나노 전투(1515)에서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스위스에서는 로마 교회가 더욱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을 시기였다. 츠빙글리는 1513년부터 계속된 전쟁에서 로마 교황권이 프랑스 군대에 패배하게 된 과정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1519년부터 1531년 사이에 유럽의 종교개혁이 치열하게 전개된 당시에 스위스는 열 여섯 개의 지역별 세속정부 즉 자치주, 자치도시, 봉건적 지방분권들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법적으로는 신성로마 제국의 일원이었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교황청의 감독 하에 있었다. 스위스 지역 칸톤들은 1499년 바젤평화조약을 맺고,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제국의 명령대로 따라가야만 한다는 의무적인 조항들로부터 자유를 얻어냈다. 결국에는 스위스 동맹에 속한 지역들은 상호연합을 통해서 영토와 사람들을 지켜내야만 하는 군사적인 보호조치를 강구해야만 되었다. 스위스 동맹체에서는 일관된 외교적 정책이 아직 마련되어있지 못했었다.
츠빙글리와 취리히 세속정부가 종교개혁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몇 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1520년 7월 15일부터 츠빙글리는 프란시스코파 설교자 프란츠 램버트와 성경해석과 설교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로 취리히 시의회는 오직 성경에 합당한 설교만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속한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1521년 여름에 취리히는 교황을 지키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파르마와 피아센자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전쟁은 취리히가 마지막으로 용병을 파송한 것이다. 그러나 1522년 1월 11일에 더 이상은 결코 용병을 파송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젊은이들을 고용해서 그들의 피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는 추기경들을 "늑대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성경적인 설교를 통해서 츠빙글리가 미사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면죄부를 공격하며, 성인들과 성상숭배를 철폐를 단행하고, 스콜라주의 신학을 비판하자 취리히 시민들은 찬반양론으로 나눠졌다. 제기된 교회 개혁의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 성경에 따라서만 판단해야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츠빙글리가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세속정부는 용병파송을 지속한다는 결정을 했었다.
츠빙글리의 성경적 설교사역이 진행되면서, 1522년 7월, 취리히 시의회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흑사병에 걸려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한 츠빙글리는 개인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한결 성숙해졌다. 여전히 교회와 성경 중에서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1523년 1월 29일, 취리히 시청에서는 양측의 공개토론이 개최되었다. 복잡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을 작성 제출했는데, 성경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황, 미사, 선행을 통한 구원, 성인들의 중보, 수도원제도, 성직자의 독신주의, 고해성사, 연옥을 모두 다 반대하였다. 1523년 10월에 츠빙글리의 신학과 설교가 성경적이라는 취리히 시의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삼는 교회의 개혁을 성취하지 않았더라면, 각 지역마다 나눠 갖고 있었던 법적인 결정사항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국가적 통합 원칙들을 제정할 수 없었다. 각각의 칸톤들은 독립적으로 결정하여 나가는 자치권을 행사하면서도, 주변의 도시들과 지역들에게 연대를 추구하고 있었다. 취리히의 결정은 콘스탄스, 울름, 프랑크푸르트, 아우구스부르그, 린다우, 멤잉겐, 스트라스부르그, 베른, 바젤, 제네바 등으로 전파되어나갔다. 츠빙글리의 영향은 제네바에까지 전달되어서 1535년에 개혁신앙을 받아들였고, 칼빈의 개혁신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터전을 제공하였다.
개혁교회 진영은 본질적으로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을 하는 네 개의 도시들을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중심으로 하는 칸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츠빙글리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껴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에 가담한 다섯 개의 도시들인 농촌지방들 (루체른,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우리, 프리부르크)은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와 1529년 동맹을 맺었다. 슈비츠에서 츠빙글리파 설교자가 이단으로 처형된 사건 때문에, 1531년에 두 번째 카펠 전투가 벌어졌고, 취리히의 개신교 진영이 패배하자, 츠빙글리의 꿈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취리히와 브렘가르텐이 포함된 아르가우 지방은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했다. 불링거와 다른 두 명의 목회자들도 역시 추방당했다. 다음 해가 되면서, 스위스는 츠빙글리를 지지하는 개혁주의 진영과 로마 가톨릭에 지속적으로 연대의식을 갖고 있는 칸톤들이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츠빙글리가 출생한 생가 빌트하우스 ⓒ김재성 박사 |
취리히를 포함하여, 종교개혁 진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한 도시들에서도, 교회의 주요 사항들은 모두 다 시정부, 귀족 정치가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제자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이던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제안한 바에 따라서, 교회의 출교권은 세속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고 받아들였다. 신앙고백서의 내용들, 목회자들의 활동사항, 교회의 권징, 교육, 교회재산의 관리 등 모든 결정들을 세속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지역 관내에 소관된 업무사항으로 다뤘다. 기독교 공동체와의 교류를 통해서 추진했지만, 깊은 충격을 받은 칸톤들에서는 목회자들이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회의 독립성을 구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세속 정부와 지방 시의회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목회자의 자문사항을 용인할 것인가를 놓고서 거듭된 토론을 하였다. 취리히에서는 거의 사십 여년을 목회했던 불링거가 개인적인 설득력을 발휘해서 시정부에 자문하였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이나 직분자들을 세우는 결정을 각 교회가 총회의 규정에 따라서 질서 있게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교회의 재량권에 속한 일이기에, 당연히 여기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취리히, 바젤, 샤프하우젠, 베른 등 개혁진영에 합류한 칸톤에서는 시정부와 교회 사이 심각한 대립과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칼빈은 베른 시당국의 결정에 대해서 번번이 반대하였다. 왜냐면 베른 시정부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권징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도록 전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든가, 예배의 예전적 구성에 대해서도 다툼이 발생했다. 제네바에서는 1540년부터 칼빈이 독립권을 쟁취하고자 노력하였기에, 그 주변에서 큰 도시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베른 시당국과의 사이에 민감한 대립을 지속하였다. 1558년에 이르게 되면서, 스위스 개혁진영 내에서는 취리히와 제네바가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츠빙글리의 서거 이후에, 취리히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들은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상호신뢰하면서 놀라운 협력을 이뤄냈다. 오늘날 세계 모든 개혁교회에 주는 교훈이 크다. 1549년에 불링거와 칼빈이 상호 존중의 정신에서 발표한 "협화신조" (Consensus Tigurinus)야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협력사역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독일 말부르크에서 모인 1529년의 회합 (Marburg Disputation)이 결렬된 이후에, 성만찬 신학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었다. 유럽 전 지역에서 츠빙글리와 스위스 개혁교회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군주들이 많지 않았고, 개신교 진영 사이에서도 신앙고백의 차이로 인해서 크게 흔들리게 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칼빈은 루터파 신앙고백서와 츠빙글리의 입장차이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상호 조율을 해서 조화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1544년에 이르게 되면서 성만찬 신학의 정립을 놓고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 새로운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해에 루터는 "성만찬에 대한 간단한 고백서"를 출간했는데, 취리히 교회의 신학을 거의 이단적이라고 거칠게 비판하였다. 루터의 글이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면, 취리히와 제네바로부터 나온 성만찬 해석은 크게 위축되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위축되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되어져 있었다. 독일어 사용권 지역에서 루터파의 신앙고백을 따르지 않는 개혁교회들은, 예를 들면 하이델베르크 지방과 같이, 합법적인 교회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루터의 권위와 영향력으로 인해서, 적어도 독일 지방이나 그 주변의 지역에서는 루터파 교회들과 개혁교회 진영사이에 내적인 교류가 단절될 형편이었다.
불링거는 1545년에 주변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루터가 이단적이라고 비난하였으나, 자신들의 신학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적극 옹호하고 홍보하였다. 칼빈도 역시 양 진영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불링거와 칼빈은 개혁교회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것을 거듭 인식하면서, 취리히와 칼빈의 제네바가 공동체로 단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불링거와 제네바의 칼빈은 수십 년간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불링거와 칼빈은 1536년 2월 처음으로 바젤에서 만났다. 1537년부터 1564년 칼빈이 사망할 때까지 불링거에게 직접 친필로 작성해서 보낸 편지가 무려 168통에 이른다. 그 내용들에는 개인적인 것들도 있고, 신학적인 것들, 정치적인 것들, 교회에 관련된 주제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두 사람은 스위스 내부적인 것들만 상의한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움직임과 사건들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불링거는 목회경험과 현실문제에 대응하는 전략이 탁월했고, 칼빈은 영특하고 예리한 신학지식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1540년대 후반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개혁교회 진영이 전체적으로 존립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1549년 5월 칼빈과 파렐은 취리히를 직접 방문하였다. 불링거와 직접 대면하여 신학적 합의를 도출하려고 노력했는데, 두 사람은 만난 지 불과 두 시간 이내에 서로 합의를 이뤘다. 칼빈의 제안은 취리히 시의회에서 논의된 후에 공식적인 지지를 얻었고, 정치적인 동지애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곧바로 "협화신조" 20개 항목이 발표되었는데, 칼빈은 불링거의 용어들과 교육방식을 받아들였기에 손쉽게 합의에 도달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성령을 통해서 실현되어지는데, 믿음을 통해서 받은 것이라는 점이 핵심내용이다. 스위스 개혁진영은 견고한 통일성의 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취리히와 제네바에서는 점차 교회의 독립권이 허용되어졌으나, 베른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모든 교회업무가 사실상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좌우되었으며 특히 교회가 독자적으로 시행하는 권징을 허용하지 않았다. 베른에서는 츠빙글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요한네스 할러가 루터파에게 가까웠던 스트라스부르 교회 쪽으로 기울었다.
1558년 12월, 로잔의 목회자들은 더 큰 도시인 베른 시당국의 결정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베른 시당국의 반응은 즉각적인 보복이었다. 복종하겠다는 목회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1559년 2월, 로잔의 모든 개혁교회 목회자들을 직위 해제시켰다. 아카데미에서 원장을 맡아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산시키던 삐에르 비레 역시 물러났다. 제네바와 베른은 똑같이 종교개혁의 사상을 받아들였으면서도, 내적으로는 교회의 지위가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다.
취리히와 제네바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성만찬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 루터파에 대응방안을 모색했지만, 그 외에 각론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개혁신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제네바에서는 교회 권징과 예정론이 지속적으로 논의가 되었고, 취리히에서는 불링거가 앞장 서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들과 동유럽에 관련된 사항들을 많이 다뤘고, 칼빈은 프랑스어 사용지역의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를의 기념비 ⓒ김재성 박사 |
맺는 말
로마 가톨릭 신부였던 츠빙글리가 모든 오류들을 간파하고 결정적으로 낡은 전통에서 돌아서서 종교개혁자가 된 계기는 성경을 통해서였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츠빙글리는 사탄을 정복한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능을 확신했다.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능력은 때로는 역사 현장 속에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구원의 은총이 담겨져 있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으킨 츠빙글리의 성경적 확신에 감동을 받는다.
성경을 통해서 믿을만한 합당한 근거를 찾은 후에, 그는 지속적으로 생활의 개혁과 윤리적인 갱신으로 구체화 되어야만 할 것을 역설하였다. 츠빙글리의 복음적인 발견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특징 지워졌다. 부당함과 불공정에 맞서서 역사 속에서 참된 의로움을 시행해 나가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순종하라는 것이 츠빙글리의 메시지에 담긴 특징이다. 이점에 있어서 그의 개혁은 전 세계적으로 각성과 연계되어져 있었다.
츠빙글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였고, 그의 스위스 시민을 향한 애국심은 사회정의와 인권을 존중하는 감각을 새롭게 하였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스위스 지역 종교개혁자들의 연대를 묶어내는 요소가 되었고, 후대 종교개혁자들, 특히 제네바의 칼빈과 그를 따르는 주변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취리히 지역의 종교개혁이 모든 기독교 세계의 개혁운동으로 확산되어지도록 하는 강력한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군대에 의해서 비참하게 츠빙글리가 처형당한 곳에는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끝)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첫댓글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지난달 공과금 통신료를 못내고..카페운영이 어렵습니다
카페를 잘 운영하도록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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