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서로 다른 번역을 보고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요즘은 교회뿐만 아니라 성당에서도 전도활동을 하고 있다. 늘 지나다니는 생태하천 길에서 어깨띠를 두른 성당사람들이 휴지를 줍고 있다. 일부는 길목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길을 막고 커피나 과자, 사탕, 과일을 제공하며 권유하는 장면을 많이 목격한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교회임을 알리는 전단지를 나누어 준다. 그런 사람들을 목격하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지나치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전단지를 나누어 주려 제스처를 취하면 퉁명스럽게 “지나가는 사람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 있으나 거의 대부분 고개만 까닥이며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 없이 지나친다.
왜 부처님은 피곤하다고 하였을까?
통행로를 막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을 대하면 피곤하다. 특히 자신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불쾌하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종교를 믿기 위해서는 내 종교를 내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전도사를 만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청원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Brahm?y?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Brahma Sahampati Mengunjungi Buddha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힘들게 성취한 진리에 대하여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사함빠띠 브라흐마(하느님)의 거듭된 간청에 따라 마침내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S6:1)”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나 사상을 먼저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진리를 설해 보았자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피곤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S6:1)”라 하였다.
정반대의 번역이 있는데
위 게송과 관련하여 현재 두 가지 정반대의 번역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성스런 구함의 경(M26)’에 똑 같은 게송이 있는데 초불연과 성전협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Ap?rut? tesa? amatassa dv?r?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았다.
(성스런 구함 경, M26, 초불연 대림스님역)
[세존]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성스런 구함의 경(M26), 성전협 전재성님역)
‘Open for them are the doors to the Deathless, Let those with ears now show their faith. Thinking it would be troublesome, O Brahma, I did not speak the Dhamma subtle and sublime.’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역)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문구가 ‘pamu?cantu saddha?’ 이다. 이 문구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 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정반대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하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각주를 보면
이 문구에 대한 각주를 참고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주석서(MA.ii.181)를 인용하여 “자기 자신의 믿음을 보내라, 펴 보여라”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주석서 인용없이 “예전에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뜻이라 하였다.
그런데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가 공동으로 번역한 MDB 에 따르면 문제의 문구에 대하여 “show their faith(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초불연의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와 일치 한다.
그렇다면 ‘pamu?cantu saddha?’의 뜻은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초불연)”일까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성전협)”일까? 대체 어느 번역이 맞는 것일까?
마성스님의 글에서
‘pamu?cantu saddha?’문구에 대한 마성스님의 글이 있다. ‘범천의 권청(勸請)’ 이라는 글이다.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4년 4월호), pp.13-20에 게재된 것’이라 하였다. 스님의 글은 블로그를 처음 만들었을 때 마성스님의 홈페이지에서 글을 열심히 퍼 나른 것이다. 그 홈페이지는 폐쇄 되었지만 그 때 퍼나른 글은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범천의 권청에 대한 게송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귀 있는 자들에게
(범천의 권청(勸請), 마성스님)
마성스님 글에 따르면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고 하였다. 이는 스님의 글에 따르면 “팔리어 <율장>의 [대품]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율장 대품에도 똑 같은 게송이 있음을 말한다.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마성스님의 글에서는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 당시 시대적 상황이 잘 반영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의 타락이 극에 달해 대규모 동물희생제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 사실은 숫따니빠따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바라문들] ‘물과 토지와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있는 자들의 필수품인 것과 같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습니다.
두 발이나 양 뿔, 어떤 것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들은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는데, 왕은 뿔을 잡고 소를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은 ‘불법적인 일이다’고 소리쳤습니다.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 없었소.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살해한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의의 폭력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죽인다는 것은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지내는 자들은 정의를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어느 바라문이 예전의 바라문은 어떠 하였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자 부처님이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바라문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낸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살생으로 이루어진 제사에 대하여 천상의 존재들은 “불법적인 일이다”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바라문들은 대규모 동물희생제 만 지낸 것은 아니다. 경에서 “그래서 수레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핀을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Sn2.7)”라는 문구로 보아 ‘인간 희생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동물희생제나 인간희생제 모두 살생하는 것이다. 후손들이 죽은 자가 하늘에 태어나도록 동물희생제나 인간희생제를 지내는 것은 정의를 파괴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은 청원경에서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라 하였을 것이다.
후박나무님의 글에서
이처럼 ‘pamu?cantu saddha?’의 뜻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전재성님역)”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님역)”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후박나무님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만약 [믿음을 내어라]라고 해석한다면 붓다는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믿어라 라는 말이 되어서 “와서 보라”는 붓다의 설법자세와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고 따르지 말라는 깔라마경과도 위배되는 가르침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라고 번역한 것은 그 믿음이란 것이 그 당시 제사 지내는 브라흐만사상이라고 이해 해서 그렇게 의역한 것 같습니다.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후박나무님에 따르면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믿음을 내어라”라고 번역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라는 것인데 “먼저 믿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가르침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번역에 오류가
“먼저 믿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전도사들이 “예천불지”를 부르짓는 것과 같다. 그런 전도사를 대하는 것은 피곤할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법을 청하지 않으면 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도 세 번 청해야 법을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법을 설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일부로 다가가서 말해 주는 것은 길거리 전도사들 수법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부처님이 ‘pamu?cantu saddha?’라고 말한 것은 “먼저 믿어라”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자신의 잘못된 믿음, 즉 근거없는 제사에 대한 믿음,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 더 넓게 말하면 부처님 당시 브라만으로 대표 되는 영원주의와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허무주의나 숙명론 등 삿된 견해, 즉 62가지 사견을 먼저 내려 놓으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삿된 견해를 가진자에게 무조건 “먼저 믿음을 내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삿된 견해를 가진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불연의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초불연)”이라고 번역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라 본다. 또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의 “show their faith(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영역한 것도 역시 오역이라 본다.
게송인가 산문인가?
후박나무님의 글은 2008년에 올려진 글이다. 인용한 글은 각묵스님이 번역한 디가니까야 마하빠다나경(대전기경, D14)이다. 초불연에서 상윳따니까와 맛지마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오지 이전의 번역된 것이다. 참고로 상윳따니까야 청원경의 게송은 모두 세 군데서 보여진다. 상윳따니까야 권청경(S6.1), 디가니까야 마하빠다나경(대전기경, D14),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 이렇게 세 군데 똑 같은 게송이 실려 있다.
각묵스님이 최초로 번역한 디가니까야 대전기경(D14)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믿음을 내어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각묵스님역, 디가니까야 대전기경, D14)
디가 니까야에서 각묵스님이 번역한 것을 보면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믿음을 내어라”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앞서 지적한대로 ‘오역’이다. 더구나 ‘Vihi?sasa??i pagu?a? nabh?si?, Dhamma? pa??ta? manujesu brahme ti.’라는 문구에 대하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라고 하여 길게 번역하였다. 번역이 너무 길고 산문형식이라서 게송이 맛이 아지 않는다. 주석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올라 온 듯 하다. 그런데 이 번역도 오역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문제의 문구를 원문과 함께 전재성님역과 최봉수님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Vihi?sasa??i pagu?a? nabh?si?, Dhamma? pa??ta? manujesu brahme ti.
1)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전재성님역)
2)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최봉수님역)
3)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각묵스님역)
4) Thinking it would be troublesome, O Brahma, I did not speak the Dhamma subtle and sublime.(빅쿠 보디와 냐나몰리 역)
문제의 번역문구는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각묵스님)”라는 구절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라고 하였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누가 상처 받았나?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
[의견] 이 번역은 크게 상처받는 것이 붓다인가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vihimsasa???는 vihims?(해로움)+sa??in(산냐를 가진자)인데 sa??in의 주격 단수가 sa???입니다. 그래서 “해롭다는 생각을 가진 자인 (나는) ” 의 뜻입니다.
여기서 망설여지는 부분은 붓다가 어떻게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는 이미 앞에서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말을 완전하게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상처받는 다는 산냐란 앞에서 붓다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 라고 3번 생각한 적이 있는 “붓다의 산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서도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a)는 성가심(v?hes?)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번역에서 곤란, 피로, 상처, troublesome 등이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곤란하고, 누가 피로하고, 누가상처 받고, 누구 귀찮은(troublesome)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라고 함으로서 인간들이 상처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상처받은 자가 부처님인 이유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왜 오역인가? 상처받는 자는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맥으로 파악하면 알 수 있다. 게송 바로 전에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세존]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한다.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하면,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
(Brahm?y?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인용된 문구에 따르면 마지막에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연기법을 모르는 자들에게 법을 설해 보았자 부처님만 피곤할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문맥으로 파악하면 게송에서 왜 부처님이 “곤란을 예견하고(전재성님역)”이라든가,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최봉수님역)”이라고 번역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각묵스님은 과도하게 긴 문장으로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라 하여 마치 피곤한 대상이 ‘인간들’인처럼 오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짤막한 게송에서 두 번 오역하였다. 디가니까야 대전기경(D14)에서 “믿음을 내어라”라 하여 한 번 오역을 하였고, 이어서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라고 함으로서 두 번째 오역을 하였다. 이렇게 하나의 게송에서 연달아 두 번 오류역을 하였다.
놀라운 입장변화
디가니까야 대전기경에서 무려 두 군데나 오역이 발견되었다. 그런 디가니까야는 각묵스님의 최초의 번역으로서 2006년에 출간 되었다. 그러나 오역된 부분이 바로 잡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번역비교를 하기 위하여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1권을 구입하였는데, 청원경(S6.1)에는 디가니까(D14)와 맛지마니까야(M26)에서 보던 것과 정반대의 번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 불사의 문들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았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S6.1, 각묵스님역)
게송을 보면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되어 있다. 이는 디가니까야에서 “믿음을 내어라(각묵스님)”과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대림스님)”역과 정반대이다. 왜 이렇게 입장이 변했을까? 아쉽게도 설명이 없다. 오역이 되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재성님과 매우 대조적이다. 전재성님은 자신의 오역에 대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재성님이 밝힌 오역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초역 전집에는 <<쌍윳따니까야>> 전 5편을 초판본 한글판 11권 전집으로 엮어내어 순차적으로 낼 때만 하더라도 번역조건이 너무나 열악한 나머지 교정진 조차 없이 발간하는 바람에 많은 오타, 착간뿐만 아니라 간혹 오역이 발견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고귀한 부처님 말씀을 잘못 훼손하지나 않았나 하는 송구스러움이 있는데, 이 책을 사랑하여주신 많은 독자의 성원에 힘입어 초판본 완간 4년 만에 2년간의 교정과정을 거쳐 꼼꼼히 교정하고 편집을 새로 하고 주석을 증보한 개정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전재성님,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머리말)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개정판을 발간하면서 오타, 오역 등에 대하여 사과 하였다. 그리고 오역이 있었던 경의 각주에서 오역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바로 잡은 것에 대한 설명을 허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오역에 대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독자를 햇갈리게 하는 각주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2013년 판을 보면 놀랍게도 맛지마니까야(M26)에서 보던 각주 내용과 정반대이다. 게송의 내용이 180도 바뀌었기 때문에 각주의 내용 또한 180도로 바뀐 것이라 본다. 이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불연에서 출간된 맛지마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똑 같은 게송에 대하여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다. 대림스님이 번역하고 각묵스님이 감수한 맛지마니까야에서는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 라 할였는데, 똑 같은 문구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이전의 디가니까야에서와 180도 다르게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하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각주를 보면 각각 주석서를 인용하였는데 각주 또한 180도 다르다. 그래서 주석서 맛지마니까야 주석서(MA.ii.181)를 인용한 것을 보면 “자신의 믿음을 보내라, 펴 보여라는 말씀이다.”라 되어 있고, 상윳따니까야 주석서(SA.i.203)를 인용한 설명을 보면 “자신의 믿음을 내버러야 한다”라고 되어 있어서 정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대체 어떤 것이 맞는 번역이고, 어떤 주석이 맞는 것일까? 이를 읽는 독자는 햇갈리기만 한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갈팡질팡 하는 것 같다. 니까야마다 용어가 다르고 번역이 다르고 각주 또한 다르다. 이에 비하여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은 초지일관 같은 패턴을 유지한다. 이는 한 번역자가 4부 니까야를 번역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두 번역승이 번역한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번역승 마다 다르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 번역승이 서로 감수를 했음에도 같은 내용을 두고 정반대의 번역이 일어 났다는 것이다.
번역 모음을 보면
이처럼 갈팡질팡하는 번역과 달리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은 초지일관 같은 패턴을 보여준다. 이런 번역 모음을 표로 정리허였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번역비교하는 것에 대하여 못 마땅해 하는 것 같다. 일개 블로거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번역승들이 목숨걸고 번역한 성과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지적을 해 주어 더 잘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하여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Dhp 76)”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의 영역
게송에 대한 초불연 번역을 보면 문제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잘못 사용된 단어가 있는 가 하면 오역이 많다. 그것도 디가니까야에서는 두 개나 보인다. 더구나 상윳따니까야와 비교하면 180도 다른 내용이어서 어느 것이 맞는지 혼란스럽다. 이렇게 오역과 갈팡질팡 번역이 되어 중구난방으로 보이고 죽도 밥도 아니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역(英譯)’을 답습하였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는 빅쿠 보디의 영역 CDB를 참고 하였다고 써 놓았다. 또 초불연의 맛지마니까 약어편을 보면 ‘냐마몰리스님/보디스님’이라는 이름과 함께 맛지마니까야 영역본과 상윳따니까야 영역본이 초불연에서 간행된 청정도론, 아비담마길라잡이와 함께 소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불연에서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의 영역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영향에서인지 이들 영역승들의 번역을 그대로 답습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빅쿠 보디의 “Let those who have ears release faith.(S6.1)”와 빅쿠 냐마몰리의 “Let those with ears now show their faith.(M26)”가 있는데, 기초적인 영어실력을 가진 자라면 아마도 누구나 “귀를 가진자 믿음을 내어라”라고 누구나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에서도 역시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D14, M26)”라고 번역하여 초불연 번역이 영역을 답습하였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영역승들은 공통적으로 “믿음을 내어라(release faith)”라거나 “show their faith(믿음을 보여라)”라는 식으로 믿음을 강조하였을까?
왜 영역승들은 믿음을 강조하였을까?
영역승 빅쿠 보디와 빅쿠 냐나몰리는 서양인들이다. 서양에서 태어나 교육받았기 때문에 서구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빠알리니까야 영역에서 종종 ‘존재론’적 번역이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일신교에서는 ‘절대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에 바탕을 둔 유일신교는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 믿음은 거의 맹목적 맹신에 가깝다. 이치를 따져 믿거나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믿음으로는 유일신교 교리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기지 않아도 우선 믿고 보아야 되는 것이 유일신교의 믿음관이다. 이는 길거리에서 전도사들이 “예천불지”를 외치며 믿음을 먼저 강요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철학의 특징은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있고, 서양의 유일신교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역승들은 빠알리어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 release faith.(믿음을 내어라, S6.1)” 와 “show their faith.( 믿음을 보여라, M26)”로 번역하였다. 이를 답습한 한국의 번역승들 역시 “믿음을 보여라.(M26)” 또는 “믿음을 내어라.(D14)”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문제의 빠알리어 ‘pamu?cantu saddha?’에서 ‘빠문짠뚜(pamu?cantu)’ 의 뜻은 무엇일까? 빠문짠뚜(pamu?cantu)의 뜻은?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Pamu?cantu의 원어는 Pamu?ca이다. 그래서 Pamu?cantu는 Pamu?ca에 대한 삼인칭 명령어 복수로 쓰인다. 그렇다면 Pamu?ca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 사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mu?ca Loosening, setting free or loose,
Pamu?cati To emit, utter; to loose, release; to cast off 脱す, 解脫す, 出す, 放つ; 捨つ, 自由にす
Pamu?ca는 형용사로서 ‘느슨한(loosening), 풀어진’의 뜻이다. Pamu?cati는 동사형이다. 그래서 ‘방출하다(emit), 양도하다(release), 벗어나다(脱す)’의 뜻이 있다.
pamu?cantu saddha?에 대하여 단순하게 빠알리사전의 뜻대로 번역하면 영역승의 번역대로 ‘release faith’ ‘show their faith’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막 깨달은 부처님이 ‘믿음을 내어라’ 또는 ‘믿음을 보여라’라는 식의 번역이 되고 만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번역
하지만 이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번역이다. 문맥으로 파악하였을 때 부처님이 처음부터 믿음을 내라고 말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와서 보라’고 초대할 만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대뜸 ‘믿음부터 내어라’식의 가르침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설령 백번 양보하여 ‘믿음을 내어라’라고 하였다고 치자. 그럴 경우 심각한 모순이 된다. 왜 그런가? 이제 금방 깨달은 부처님이 한 번도 설법을 한적이 없음에도 ‘믿음을 내어라’ 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황으로 보았을 때나 이치적으로 보았을 때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믿음을 보여라’라고 말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pamu?cantu 가 들어 간 두 개의 경을 보면
그렇다면 pamu?cantu 가 들어 가는 경은 어떤 것이 있을까? 후박나무님의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두 경우를 들고 있다.
1)수따니빠따 5장
1067. Ta? ta? namass?mi samantacakkhu Pamu?ca(미래수동분사) ma? sakka katha?kath?hi
널리보는 눈을 가지신 샤끼야여!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저를 온갖 의혹에서 풀려나게 해주십시오.
1151. Evameva tvampi pamu?casasu(수동명령형 2인칭 단수) saddha? Gamissasi tva? pi?giya maccudheyyassa p?ra?.
그대도 믿음을 버리시오. 삥기야여 그대는 죽음의 영역의 저쪽으로 갈 것입니다.
2)상윳따니까야 (SN.1.51.Candimasutta)
R?hu canda? pamu?cassu buddh? lok?nukampak?ti. "
그때 세존께서는 하늘아들 짠디마에 관해서 아쑤라의 왕 라후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 하늘아들 짠디마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짠디마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Tath?gata? arahanta? suriyo sara?a? gato, R?hu suriya? pamu?cassu buddh? lok?nukampak?ti.
[세존] "하늘아들 쑤리야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쑤리야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후박나무님)
숫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에서 pamu?cantu가 실린 글을 보면 모두 ‘버리라, 놓아라’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전과 주석서, 그리고 숫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 등에서 pamu?cantu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아서 ‘pamu?cantu saddham’는 ‘(삿된) 믿음을 버려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믿음을 내어라’ 이든 ‘믿음을 버려라 ‘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마치 고양이의 경(S20.10에서 ‘쥐가 고양이를 먹었다’ 또는 ‘고양이가 쥐를 먹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띠’이기 때문에 누가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든가 ‘그게 그거 아니냐’식으로 하야 결과만 중요시 한다면 가르침이 크게 왜곡 되고 변질 될 가능성 매우 크다. 그래서 결국 가르침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정확하게 번역하여야 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도 보듯이 전체적인 문맥을 파악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역이 된다.
오역이 되었을 때 독자들에게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고귀한 부처님 말씀을 잘못 전달하고 진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잘못된 번역, 오역, 갈팡질팡 번역, 영역을 답습한 듯한 번역,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듯한 번역, 주석에나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있는 주석적 번역 등을 지적한다.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진리에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라는 대명제에 기인한다.
2013-10-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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