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리더십
정도전(1342~1398)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혁명가라 불릴만한 인물이다. 그는 이상을 꿈꾸었고, 그 이상을 실천할 나라를 만들었으며, 그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의 문집인 『삼봉집』의 키워드는 “경국(經國)”이었다. 그의 사상이 녹아있는 대표작인 『조선경국전』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책”이기도 한다. 조선을 만든 그는 위대한 사상가, 탁월한 실천가였으며, 신념을 가진 리더였다.
정도전은 누구인가?
정도전은 봉화지역 향리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워낙 총명했던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 신진사대부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익혔다. 1362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370년 성균관박사가 되면서, 정몽주 등과 당시 신학문이었던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면서 고려를 개혁할 의지를 다졌다. 그는 1375년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들과 대립했다. 권신들은 반원정책을 주장하는 신진개혁파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대표격인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접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정도전은 권신인 경복흥을 찾아가 “제가 영접사로 가면 원 사신의 목을 베어버리든지, 그들을 명나라로 묶어서 보내겠습니다.”라며 말했다. 당연히 그는 명령 불복종으로 파직되고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파직될 것을 알고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은 원칙주의자였다. 1377년 유배에서 풀려난 후, 그는 고향에서 머물며 직접 밭농사를 배우고 약초를 가꾸며 소나무를 심는 등 농민들과 똑같이 생활했다. 30대의 9년간을 야인으로 지내면서 그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고려를 보았다. 그는 고려 말의 부조리한 시대상황을 바꾸기 위해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는 야인생활을 통해 온건개혁파에서 적극적인 혁명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고,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1383년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의 함주 막사로 찾아갔다. 당시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던 이성계의 가능성을 알아본 정도전은 그와 더불어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1384년 명나라로 가는 사신단의 정사 정몽주의 추천으로 서장관이 된 그는 명나라를 방문하게 된다.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고려로 돌아온 정도전은 성균관좨주, 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여 학문을 더욱 다듬으며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운명의 시간을 다가왔다. 1388년 6월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정3품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등과 함께 토지제도 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 제거에 앞장섰다.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잠시 위기가 있었다.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정도전은 향리의 서자라는 신분적 약점 때문에 많이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도전은 다시 일어섰다. 1392년 이방원 일파가 정몽주를 격살하자 유배에서 풀려나왔고, 그해 7월 조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해 조선개국의 1등 공신이 되었다.
이성계의 신뢰를 받은 정도전의 능력
조선은 이성계가 창업했지만, 조선의 조선답게 만든 사람은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자신이 설계하고자 하는 정치이념과 제도에 관해 명확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군부의 실력자인 이성계와 협력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성계를 자신보다 7살이 어린 정도전에 대해 무한신뢰를 보냈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없었다면, 그가 조선을 건국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정도전에게 이성계가 없었다면 그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는 그를 문하시랑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판호자사겸 판상서서사, 보문각대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 의흥친군위절세사 등 요직을 겸임하게 해 정권과 병권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정도전은 1인 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권력을 갖고, 그가 꿈꾼 새로운 나라 조선을 만들어갔다.
왕조의 설계자로서 그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도 그를 믿고 따랐던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문신이었지만 『팔진36변도보』, 『오행진출기도』, 『강무도』, 『진법』 등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병법서를 지었고, 군사 훈련과 군대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문무를 겸비한 그는 『심기리』 3편과 『심문천답』, 『불씨잡변』 등 철학서를 저술하는 등 유학자의 깊이 또한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학, 산학, 음악, 시문 등 다방면에 걸쳐 넓고 깊은 지식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강력한 실천력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먼저 사람들과 소통하고, 기본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설득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신뢰, 능력,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보 317호인 이성계 어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그를 도운 정도전의 관계는 수어지교(水魚之交)라 칭할 정도로 굳은 신뢰로 이어진 관계였다.
다수의 힘을 믿은 정도전의 재상론
정도전은 국가경영의 구체적인 지향점은 민본사상에서 있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민생을 보호하는 일을 가장 시급한 직무로 생각해야 한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란 말은 유교 경전인 『서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대다수의 유학자들은 민본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유교적 지식을 앞세워 백성을 가르치고 군림하려고 할 뿐,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고 실천한 유학자는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정도전은 분명하게 달랐다. 그는 백성의 나은 점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민본의 자세를 잊지 않았다. 정도전은 농민들의 삶을 살아보았고, 목민관이 되어 백성들과 부딪혀 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토지제도 개혁을 강행했고, 농민들을 위한 농본정책을 시행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선정이 농민들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법치주의에 기반을 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선 법전의 기본이 된 『조선경국전』에서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한 것이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고 썼다. 왕은 하늘이 선택한 자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이룩된 왕조국가에서 백성들에 의해 왕이 바뀔 수도 있다는 그의 생각은 맹자의 역성혁명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면 언제든지 쫓아내도 된다는 역성혁명론을 나라의 기본 법전 서두에 적은 그의 생각은 곧,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정치는 진정 백성을 위한 정치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정도전은 바른 정치를 위해서 왕을 보좌하는 재상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조선경국전』에서 권력의 중심이 재상에게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재상의 역할과 자질에 대해 서술했다. 위로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 백관을 통솔하며 만민을 다스리는 재상은 인사, 군사, 재정, 포상, 형벌 등 막강한 권한을 갖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과 자질이 매우 중요하다. 정도전은 재상의 자질로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함, 임금을 바르게 함, 사람을 가려서 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함 등을 꼽았다.
1395년 정도전이 지은 조선왕조의 정치조직에 대한 초안이라고 할 『경제문감』에서는 “군주의 권한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 임명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재상과 정사를 논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정도전은 “군주는 현명할 때도 있지만 어리석을 때도 있다. 재상은 군주의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조시대 임금은 세습되는 존재다. 왕들이 모두 현명한 자로 세습이 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게 현명한 왕들로 계보가 이어진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상은 천하 선비들 가운데 선택된 인재 중의 인재이기 때문에, 현명한 재상이 나올 수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다수의 힘을 믿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 국가통치 구상은 3정승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의정부서사제로 조선시대 통치제도의 기본구조가 된다. 각 분야별 임무를 맡은 육조의 직무를 의정부에서 논의하고, 꼭 필요한 것만 왕에게 보고하고 나머지는 재상들이 처리하는 시스템이다. 의정부서사제는 태조는 물론, 세종도 이를 받아들여 현명한 정치를 했었다.
백성의 안위가 우선이다.
조선은 건국되었을 때부터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명나라에게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제후국임을 자처한 나라였다. 조선이 명에게 사대를 한 것은 전쟁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은 조선을 언제든지 침략할 것처럼 위협했고, 명나라에 간 조선사신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기도 하는 국제외교상 있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명나라는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이 요동 땅을 되찾으려 할 것을 우려했고, 심지어 조선이 20만 대군으로 명을 침범할 수 있다고 의심했다. 명나라를 교묘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조선을 괴롭히며 조선을 위협했다. 국력의 차이가 현격한 상태에서 조선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외교적인 노력과 함께 스스로 국력을 키우는 길 뿐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의 외교정책을 주관했다. 그는 한편으로는 명에게 지극정성을 다해 사대의 예를 취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방력 강화를 시도했다. 정도전은 1393년부터 5년간 직접 군사들에게 진법 훈련을 시키며, 전쟁에 대비했다. 이성계의 절대적 지원을 받으며, 정도전은 전쟁에 대비했다. 그는 전쟁에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사졸을 직접 어루만지며,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라고 장수들을 가르쳤다. 정도전은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과 달리 맹목적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평안하기 위해 전쟁을 피하려고 명에게 사대 외교를 한 것일 뿐, 나라의 안녕까지 위협하는 적에게는 단연코 맞서 싸워야 하며 이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직한 정도전을 명나라는 크게 두려워했고, 그래서 주원장은 조선에 트집을 잡아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끝까지 정도전을 보호했고, 정도전은 명나라에 당당히 맞설 준비를 했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1397년 6월 공식적으로 요동정벌론을 내세웠다. 명나라의 압박에 더는 굴복해서는 안된다는 의지였다. 정도전은 조선이 중국에 꿀릴 것이 무엇이며, 조선이라고 중원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있느냐는 담대한 주장을 펼쳤다. 명나라의 횡포가 극심해지는 시점에서 조선은 저항할 것인가, 굴복할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런데 1398년 5월 조선을 위협하던 주원장이 죽었다. 정도전이 주원장의 죽음을 요동정벌의 호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진법훈련을 강화하고 조선을 당당한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평택 삼봉기념관과 정도전사당인 문헌사 - 사당 현판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하사한 “유학의 으뜸이요, 조선 개국에 공 또한 으뜸이다.” 라는 유종공종(儒宗功宗) 이라 글이 적혀 있다. 그는 조선 제일의 개국 공신이었다
미완의 혁명가 정도전.
정도전은 그가 꿈꾸던 새나라 조선을 만들었다. 궁궐의 이름과 궁문 이름, 도성 구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나라 조선에는 그의 손길이 곳곳에 닿았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세계를 만든 토대를 마련하고, 자신이 직접 그 세계를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정도전은 행복한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꾸던 민본국가 조선, 주변 강대국에게 당당한 국가 조선의 꿈은 완성되지 못했다.
정도전의 재상론을 왕권을 억압하는 것으로 이해한 태종의 5남 이방원이 그를 역적으로 몰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군주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을 재상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본 정도전의 재상론은 군주권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현명한 정치를 위해 재상의 역할을 강화했던 것뿐이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잘못된 결정을 할 때마다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했고, 한번 결정된 임금의 뜻을 철저하게 받들어 실행했다. 하지만 명나라 관계를 보는 관점, 다음 왕위의 문제 등에 있어서 이방원과 관계가 어그러지면서, 정도전은 1398년 음력 8월 26일 살해되고 만다.
정도전은 그가 만들어간 조선에서 오랜 세월 잊어진 인물이었다. 조선에서 그는 반역자로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미완의 혁명가, 조선을 바꾼 리더로 기억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