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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 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곰나루 : 충남 공주에 있던 나루. 동학 농민군이 최초로 봉기한 곳
* 초례청 : 전통 혼례인 초례를 치르던 장소
<해설> 1967년 [52인 시집]에 수록된 시이다.
신동엽 시인은 4·19 혁명에 대하여 남다른 집념을 보인 시인이다. 그를 흔히 60년대의 대표 시인으로 꼽고 있는 이면에는 4·19 정신의 문학적 성과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4·19 정신의 정수로부터 획득한 이념적 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1960년대 불의와 부정 부패, 그리고 독재 체제라는 시대적 상황 앞에서 순수의 열정으로 이런 현실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참여시이다. 현재 있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는 미래에 있어야 할 것, 즉 정의, 자유, 민주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표출된다. 그래서 4.19 혁명과 동학 혁명을 통해 시인은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과 민주에의 열망을 확인하고 이것을 억압하는 모든 비본질적 요소들이 사라지기를 희망한다.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든가, '중립의 초례청' 같은 구절을 보면 외세의 간섭이 없는 통일의 그 날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이 시가 반제국주의와 분단 극복의 단호한 의지가 응집되어 있는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서,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나 이육사의 "절정"에 닿아 있는 기념비적인 저항시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는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는데, 김수영은 이 작품에서 ‘참여시에 있어서 사상이 죽음을 통해 생명을 획득하는 기술이 여기 있다’고 하며 김소월의 민요조와 이육사의 절규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고 하였다. 현실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예술성과 상상력을 추방하는 이 작품은 단순한 원칙을 고수하는 소박한 모사론(模寫論)의 한계에 빠질 위험성이 언제나 잠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립의 초례청에서 아사달과 아사녀가 혼례식을 치르는 것은 분단 극복, 곧 통일이라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동학 농민운동과 4·19혁명이 지닌 반봉건 내지 반제국주의를 분단 극복의 역사적 과제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1960년대 참여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시는, 동학혁명과 4월혁명의 정신인,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외세의 부당한 침입에 맞서는 자주독립의 정신을 계승해야 함을 모든 불의와 거짓은 사라지라는 외침으로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순수한 정신의 회복을 통해 조국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 신동엽의 시 세계
신동엽은 시를 통해 전통적인 서정성과 역사 의식의 결합을 시도하였으며,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기보다는 민족의 현실에 관심을 두고 시를 발표했다. 동학 혁명과 그 이후의 민족의 수난사를 내용으로 삼고 있는 장시 '금강' 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서 신동엽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동학 혁명의 방대한 내용을 시적 형식으로 포괄하고 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면서 시적인 긴장과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시의 영역을 확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금강' 외에도 그는 4월 혁명 등 역사의 흐름을 추동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의 역할을 보여준 사건들을 시적 제재로 끌어들이면서 민족의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의식을 담은 작품을 주로 썼다. (현대시 작품. 인터넷)
* 신동엽이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과 "아사달"과 "아사녀", 그리고 "한라에서 백두까지"의 "향기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로 대변되는 "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고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즉 그는 특별히 4·19혁명의 성공과 좌절을 지켜보면서 역사적 '알맹이'와 '껍데기'에 대한 각성과 경계를 분명히 한다. 그러면서 "빠다와 째즈", "딸라"와 "원조물자"로 표상되는 "양키이즘"(「금강」6장)과 같은 '껍데기는 가라'고 단호하게 외친다. 또한 "대포"를 "끌고 와" "강산의 이마"에 "금그어 놓았"던 "이방인"이나 "그 벽을 핑계삼아 딴 나라 차"린 것은 진정한 "우리"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와 더불어 "서붓사람들의 은행소리에 홀려 /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를 "얻으려" 다니는 행위 역시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에 "흐르고 있는 / 맑은 강물"의 "조국"이 아니다. 그야말로 그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껍질"일 뿐으로서 "저희끼리" 경쟁하고 "싸우다"가 "흘러"(「조국」)가 버릴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그가 볼 때 제국주의와 사대주의, 서구적 기계 문명과 그에 대한 부화뇌동 행위는 한낱 "역사의 껍데기"(「금강」6장)로 "역사의 하수구"로 "흘러가버"(「아사녀」)릴 대상일 뿐이다.
반면에 그는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평화의 마음"과 "아사달"과 "아사녀"의 아름다운 "몸부림", "3·1의 하늘"로 대변되는 "찬란한 저항"과 4·19혁명이 보여 준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아사녀」)를 높이 평가한다. 특히 그는 장편 서사시 「금강」을 통해 "각자 스스로"가 "한울님"이라는, "모든 중생"과 "이웃사람"을 "한울님 섬기듯" "섬길"(「금강」4장) 것을 강조하면서 "한 생명을 독점하려는 소유욕" 대신 "내것/네것" 구분하지 않는 "세상"(「금강」9장)이야말로 참된 '알맹이'의 역사가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야말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지주"와 "관리", "은행주"와 "특권층"이 없는 "평화"와 "평등"의 "두레" 또는 "무정부 마을"(「금강」6장)이 그가 꿈꾸는 진정한 이상사회의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동확/한신대 교수,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신동엽(申東曄): 1930 - 1969 >
* 1930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 필명 석림(石林).
* 1948년 전주사범학교, 1953년 단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4년 건국대학교대학원 국문과를 수료하였다.
* 1958년 충청남도 주산농업고등학교(珠山農業高等學校)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 1959년 장시(長詩)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진달래 산천(山川)>, 세계일보에 〈새로 열리는 땅〉을 발표하였다.
* 1960년 [현대문학]에 〈풍경 風景〉, 조선일보에 〈그 가을〉 등을 발표하였으며,
* 1960년 월간 교육평론사(敎育評論社)에 근무하였다.
* 1961년 명성여자고등학교(明星女子高等學校)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뒤 1969년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 1963년 첫 시집 [아사녀(阿斯女)]를 내었다.
* 1967년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52인 시집]에 〈껍데기는 가라>, 〈3월〉, 〈원추리〉를 비롯, 7편의 시를 실었고, 장편 서사시 〈금강(錦江)〉을 발표하였다.
* 시작 외에 그는 시극(詩劇) 〈그 입술에 파인 그늘〉(1966), 평론 〈시인정신론〉(1961) 등을 발표하였다. 편저로 [학생혁명시집(學生革命詩集)](1960)이 있고, 유저로 [신동엽전집(申東曄全集)](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79)가 있다.
<서울 단국대학교 상경관 신동엽 시비, 시제는 '껍데기는 가라'>
<충남 홍성군 성곡리 만해민족시비공원 신동엽 시비,시제는 '껍데기는 가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문학관>
<설치미술가 임옥상의 작품으로 신동엽 시인의 대표시 구절을 깃발처럼 형상화하였다>
* '껍데기는 가라' (이규식/논설위원. 충청투데이 '이규식의 문화카페')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어떤 분석과 해설로 이 작품의 진정성과 시적 성취를 부연할 것인가. 1967년 발표한 '껍데기는 가라'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산에 언덕에' 등과 함께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신동엽 시인(1930~1969)의 대표작이다. 시어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되고 읽어가는 동안 생겨나는 절묘한 리듬은 그리 큰 흥분상태 없이 자연스럽게 시인의 감성과 의지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시 발표이후 거의 반세기. 이즈음 '껍데기'는 사라졌을까.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향기로운 흙냄새만 남아있고 껍데기와 쇠붙이는 가버렸을까. 5월 초 충남 부여읍 시인의 생가 바로 옆에 문을 연 신동엽 문학관에 들어서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오히려 창궐하고 있는 껍데기, 쇠붙이, 불의와 협잡, 부정과 사술을 준열하게 꾸짖는 듯한 강렬한 눈매의 시인 흉상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아사달과 아사녀로 상징되는 순수한 우리 민족이 중립의 초례청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화합을 이루는 장소에서 맞절하는 정경을 노래한 시인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외세와 술수, 간계와 비리, 전횡 독선이 만드는 불협화음의 거대한 소음이 일상을 압박하는 가운데 '껍데기'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득의만만하다. 이런 가운데 청소년들은 이렇게 얘기할지도 모른다. "개그맨 신동엽씨가 시도 썼나요? 그런데 왜 껍데기를 싫어하지요? 돼지껍데기 구운 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 '껍데기는 가라' (발췌) (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써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다. 이 작품이 입선되어 문단에 나온 신동엽은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 <세계일보>에 「시로 열리는 땅」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는다.
1967년 <신구문화사>가 간행한 “현대문학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을 실음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시인은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그 ‘알맹이’란 무엇일까. 백낙청은 이 알맹이에 대해 “4·19에서 진짜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들이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심지어 무기까지 들고 일어섰던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 이것이 4·19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려야 할 알맹이”라고 말한다. 1968년 신동엽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의 집필을 계획하고 자료 준비를 위해 임진강변의 문산 등을 답사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전5집으로 구성된 오페레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다.
1969년 간암 선고를 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서울 성북구 집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미처 활자화되지 못한 유작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조국」, 「영(影)」, 「서울」 등이 《고대문학》, 《월간문학》, 《현대문학》, 《상황》 등에 발표된다.
1970년에는 <사상계>와 <창작과비평>에 「좋은 언어」, 「봄의 소식」, 「강」, 「살덩이」, 「만지(蠻地)의 음악」 등이 실리고, 부여읍 군수리 나성터 금강 기슭에 그의 시업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진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신동엽 전집』이 나온 이래 1979년 선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3년 『신동엽 - 그의 삶과 문학』 1984년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평전 시선집』, 1989년 시집 『금강』이 잇달아 간행된다.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알기 쉬운 언어로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그가 숨진 뒤 오히려 높아진다.
* 신동엽 대표시 '껍데기는 가라' 최초발표작 공개
껍데기는 가라’ 최초 발표 연도를 1964년으로 앞당겨야 한다는 주장은 재야 문학자인 홍윤표 씨가 2011년 12월 반연간지인 <근대서지> 4호에 “시 ‘껍데기는 가라’ 의 첫 발표연대가 당초 알려진 1967년 1월이 아니라 1964년 12월 시 동인지 <시단> 6집에 처음 발표됐다”는 글을 실으면서 학계에 처음 알려졌다.
이어 2012년 4월,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한 김성숙 씨가 국어국문학회지 160호에 ‘신동엽 서정시의 원본 변이 과정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신동엽은 등단 이후 <시단>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제 6집에 ‘껍데기는 가라’를 실었다. 이 시는 이후 <52인>에 재수록됐다”며 홍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학계에 공론화됐다.
뒤이어 신동엽 연구자이자 신동엽문학관 사무국장인 김윤태 씨가 2013년 12월 발간된 시잡지 <시인> 제17권에서 “시 ‘껍데기는 가라’의 발표연대 정정과 관련한 정본 논의”라는 글을 통해 <시단> 6집에 수록된 ‘껍데기는 가라’의 첫 발표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 고서 수집가 최씨에 의해 최초 발표본을 작가가 직접 수정한 작가 소장본이 발견됨에 따라 ‘껍데기는 가라’ 첫 발표 시기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를 종합해보면, ‘껍데기는 가라’는 모두 4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①1964년 <시단> 6집 첫 발표본 ②최현호 씨가 찾아낸 <시단> 6집의 작가 육필 수정본 ③신동엽시인의 유족이 문학관에 기증한 신동엽 육필 초고본 ④1967년 <52인 시집> 재수록본이 그것이다. 시간적으로는 ①→②→③→④의 과정을 거치며 시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①④는 잡지에 공식 발표됐다. ②와 ③은 작가가 수정하고 있던 것들이다.
‘껍데기는 가라’는 이처럼 첫 발표 뒤 3년간의 숙성과정을 거치면서 시어가 정교해졌고, 특히 3연과 4연이 재배치되면서 신동엽의 대표작으로서 손색이 없는 예술성과 사상성을 성취하게 됐다. 1964년 판본은 마지막 4연을 “이곳에선 두가슴과 그곳까지 내놓은 /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을 빛내며/ 맞절을 할 것이다.”로 마무리해 이상 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원을 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1967년 판본에서는 연을 바꾸어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로 마무리했다.
시어의 변환과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구조를 통해 4·19에서 동학혁명과 분단의 기억을 일깨우고 그 원인이 ‘쇠붙이’임을 일깨우는 주제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신동엽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 외에도 동인지 <시단>에 발표한 9편의 서정시 중 ‘살덩이’와 ‘蠻地의 音樂’, ‘마려운 사람들’, ‘노래하고 있었다’ 등의 시도 나중에 개작해 <52인 시집>과 <신동엽전집> <사상계> <현대문학> 등에 발표했다.
신동엽 시인은 왜 이렇게 자신의 시를 여러 번 고쳤을까? 이에 대해 신동엽 시를 연구한 김성숙 씨는 “신동엽 시인은 일단 시가 발표가 되었을지라도 시의 불완성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자세를 보였다”며 “대체로 발표 시기가 늦은 시편에서 일관된 예술적 성취가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신동엽 시인은 운율이나 미의식을 고려해 끊임없이 퇴고를 거듭한 전경인(全耕人:세계에 대한 철인적·시인적·종합적 인식을 가진 온전한 사람)적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에 따라 “신동엽 서정시의 원본을 확정할 때에는 시인의 의도를 존중하여 가장 뒤늦게 발표한 <52인 시집> 판본을 정본(定本)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했다. 신동엽문학관의 김윤태 사무국장도 “<시단> 6집에 수록된 시가 최초 발표본이 맞다. 하지만 시적 완성도 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기존 <52인 시집>의 원고를 정본으로 삼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원일/기자, 월간중앙)
♣ The Tango/'여인의 향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