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유적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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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아트뉴스=어랑] 산들투어 5대양 6대륙 투어단이 고구려 기상 되새기는 일정은 집안시에 있는 국내성, 광개토대왕비와 능,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장수왕릉(장군총), 고구려 귀족의 무덤인 5호묘 탐방을 한다.
고구려 도읍지 국내성
중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集安市)
서기 37년 고구려 제2대 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으로부터 이곳 국내성으로 천도하면서 한민족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도시이다.
천도 이후부터 평양성으로 옮기기전까지 400년이나 고구려의 수도로서 가장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고구려 1대왕 고주몽
주몽(朱蒙 동명성왕東明聖王)
고구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인 주몽(朱蒙)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성왕이라 기록되어 있고, 중국 측 사서에서는 해모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몽 뒤를 이어 고구려 2대왕이 된 유리는 주몽과 예씨부인사이에 낳은 아들이다. 주몽의 부인 고구려 국부인 서소노는 전 남편인 우태와의 사이에 비류 온조 두아들과 재혼하게 된다.
이후 소서노는 아들 2명과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 · 온조는 위례성쌓고 백제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고구려의 성장, 백제의 탄생 이야기이다.
압록강 상류에 위치한 고구려 국내성
국내성은 오녀산(五女山 -오뉴산)에 세워진 고구려의 졸본성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한 곳으로 현재 집안 시내에 위치해있다.
지금처럼 강변에 축대를 만들지 않았다면 강물이 성벽의 지척에 이를 만큼 압록강 가까이에 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단했던 국내성 터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남쪽 성곽의 일부만 잡초 속에 남아 있었다. 없어진 석성의 돌들은 인근 주민들이 가져가 집에 사용되었다고 하니 한심하고 참으로 허탈한 이야기다.
한때는 남문이 복원 되었으나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담덕)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재위 391∼412)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정복군주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존경받는 위인인 광개토대왕이다.
거대한 비석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릉 관리 사무소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니 거대한 광개토대왕비가 전각 안에 커다란 위용을 드러냈다.
역사 교과서에서만 만났던 아주 오랜 옛일이 눈앞에 펼쳐지니 가슴 떨리는 감동이 물결쳐 온다.
비문 앞의 안내문에는 한자와 한글 그리고 영문 순으로 3개국 언어로 설명을 표기하였다.
다행히 이곳은 개방이 되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보존을 위하여 높은 전각을 지어 실내에 보존하는 형태를 갖췄다.
중국 당국이 집안 일대의 고분과 고성 등 고구려 역사 관련 유적들을 유네스코에 고구려 유물로 등록을 하였다.
높이 6.39 미터 넓이 2미터 폭 1.35 미터의 직 4면에 1,775 글자를 손바닥 크기의 한자로 빼곡히 전각이 되어 있으며 일부 몇 자를 빼고는 모두 글씨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는 서기 391년에 고구려 19대 왕으로 영토를 광활히 넓히고 국가를 튼실하게 다진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고 한다.
기념품점에서 광개토대왕비 모형을 보았는데 글을 해석한 내용을 보면 당시 신라와 백제 관계, 그리고 신라를 침범하는 왜를 몰아낸 내용과 주변의 성들을 고구려의 영토로 넓혀 나간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광개토대왕릉 외부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높게 쌓아졌던 석축 돌들이 상당 부분 없어지고 속살인 자갈은 흘러내려 있었다.
위대한 광개토대왕릉이라고 알려지면서 현지인들이 왕의 기운을 받는다고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진 돌들을 빼 가져갔다고 한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다행히 남쪽인 뒷면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복원의 토대를 유지는 하고 있었다. 조속히 복원이 이루어져 대왕릉의 위엄과 역사적 가치를 되찾기를 바란다. 능의 내실은 정상 부위에 있는데 내부는 텅 빈 채로 공개되어 있으며 관리인이 상주하고 있다. 한편 능의 정상에서는 압록강이 동송읍에서 한탄강을 바라보듯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여기도 또한 압록강 건너 북녘의 우리 산하가 한눈에 펼쳐진다.
장수왕(長壽王 거련)
장수왕은 고구려 제20대 왕 (413년~491년) 왕위에 오른 후 98세 사망하기까지 무려 79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중국 북조 왕조와의 외교관계를 안정화시키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광개토대왕릉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장수왕릉을 찾아보았다.
광개토대왕릉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복원 작업을 통행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옆에는 관련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옛 무덤의 형태로 규모도 작고 석실은 석기시대 고인돌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곳 집안에는 고구려 고분이 무수히 많아 10,000기가 있다고 하는데 집안에도 있고 하여 집집마다 옛 무덤이 있다고도 할 정도로 많다고 한다.
고구려의 영화와 위용이 뚜렷이 남아 있으나 제대로 관리 되지 않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말로만 듣던 우리의 옛 역사의 현장을 찾아드니 감동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한반도에만 국한된 우리의 역사 인식을 넓히고 선조들의 기개를 이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생각을 가져봐야겠다.
압록강
압록강(鴨綠江)은 백두산 남파에서 발원하여 북한과 중국을 가로질러 서한만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총 길이가 790㎞로, 남한에서 제일 긴 낙동강의 525㎞, 한강의 514㎞보다도 길다.
유역 면적은 64,740㎢이며, 북한 쪽 유역 면적이 약 31,226㎢이고 나머지는 중국에 속한다.
한국사에서 몹시 중요한 강인데, 기원전 1세기 고구려가 압록강 상류에서 건국되어 5세기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500년 가까이 압록강 유역에 머물렀다.
고구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려와 조선이 이 강을 국경선으로 삼으면서 1천 년 넘게 한민족과 이민족을 가르는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국경은 강 가운데다 국경을 긋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은 강을 공유한 관계로 압록강의 중국 쪽까지 북한의 영토이고, 중국에서 북한 쪽까지 중국의 영토이다. 그 때문에 배만 타면 양국의 땅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태운 보트나 여객선은 최대한 북한 쪽으로 다가가 준다.
집안의 압록강에서 배를 타면 북한에서 제일 크다는 만포에 있는 구리 제련소도 가까이 가서 볼 수도 있고 강가의 북한 주민도 육안으로 목격할 수도 있다.
첫댓글 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유적지(국내성 광개토대왕 장수왕 압록강) 탐방
https://cafe.daum.net/9595kimmini0A0/OF3z/224
고구려 역사
공부를 새롭게 배우고 갑니다
알찬수업~~^^
보람과 자부심 가득합니다
새롭게
주몽
광개토대왕
드라마 찾아보게 됩니다,
역사공부 다시. 하면 잘 할것 같아요
네
문학산에 오르다보면 자료가 길거리를 메우고 있어요 ㅎㅎ
@어랑 ㅎ네
회장님
문학산도. 예전엔 매일 갔었는데
쉬는 날 한번 둘러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