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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에 대비한 방송언어의 과제
연사: 김상준 아나운서실장
1. 머리에
현재 이 지구상에서는 약 3천 개의 언어가 존재하는데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서 남북분단의 이질적 상황에서도 동질성 회복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어떤 나라의 경우는 한 나라에 많은 언어가 있어서 방송언어만 하더라도 중국은 11개 언어로 방송하고 있으며, 옛 소련은 84개 언어로 프로그램을 제공했으며, 인도의 경우는 16개의 주요언어에 51개의 방언, 87개의 부족어가 있어서 18개 언어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 남북한간의 언어의 차이는 발음, 어휘, 의미, 어법, 맞춤법, 문체 등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발음은 생동하는 음성언어의 현상이므로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며, 결과적으로 그만큼 남북한의 언어차이를 직감적으로 뚜렷하게 노출하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00년 6월 13일 남북 정상회담과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서로간에 비방을 중지하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있어 언어에 관한 부분도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남북한 방송언어의 차이점에 관한 단순한 비교보다는 북한의 방송언어에 나타난 대표적인 특징을 살펴보고, 통일에 대비하여 한국어의 나아갈 방향을 몇가지 분야에 걸쳐 제시하고자 한다.
2. 남북한 방송언어의 이질화와 동질성 회복을 위한 제언
새 천년과 21세기, 우리 한민족의 공통적인 화두는 남북통일일 것이다.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날로 심각해져 가는 언어의 이질화를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여 궁극적으로는 남북한 언어의 통일을 이룩하는 일일 것이다.
2000년 8월 12일 평양 목란관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을 방문한 한국 언론사 사장단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올해에는 9월과 10월 매달 한 번씩 이산가족을 만날 수 있게 하고 내년에는 이산가족들이 집까지 갈 수 있게 해보겠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우리를 놀라게 할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와 앞으로의 남북관계 진전을 예측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지리라고 믿어진다.
김정일 위원장의 어록을 몇 개만 간추려 본다.
"판문점은 50년대 열강 각축전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곳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길을 열자.
남측이 경의선 철도를 먼저 착공하면 우리도 38선 분계선(휴전선)에 배치된 2개 사단 3만 5천명을 빼내 착공하겠다.
금강산과 설악산 관광을 연결하는 것은 2005년에 할 일이다.
남북 모두 휘발유를 사서 무엇 때문에 멀리 돌아다니느냐? 큰 대표단은 직항로로 오라. 군부가 비행기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반대하지만 내가 말하면 된다.
45년도에 만든 노동당 강령은 과격적, 전투적 표현이 많지만, 고치려면 여러 가지 난관이 있다. 그러나 남한의 보안법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로켓 한 발을 쏘는데 2억 내지 3억 달라가 드는데 미국이 우리 위성을 대신 쏴주면 우리가 개발 안하겠다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얘기했다.
시드니 올림픽에 초대받았으나 시드니보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서울을 먼저 가야 한다.
미국이 테러국가 모자를 덮어씌우고 있는데 이것만 벗겨주면 즉각 수교한다. 일본은 일제 36년을 우리에게 보상해야 한다. 나는 자존심 꺾으면서 일본과 수교는 절대로 안한다.
판문점 연락 사무소로 매일 신문을 넣어 주시오. 우리가 신문을 일본을 통해서 돌아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산가족들이 고향방문까지 하고 가족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쌀이 모자란다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는 주제에 그대로 보여줘야지 숨길 것 없어요. 숨기면 오히려 의심을 받습니다."(중앙일보, 2000. 8. 14)
이러한 표현대로라면 남북교류와 협력은 잘 이뤄지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2000년 6월 남북정상 회담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남북한 방송언어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길목에 캄캄한 밤의 어둠밖에 볼 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정중히 인용하자면 교시원문을 다른 문장단위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발음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를 인용하여 전달할 때 사상감정을 생동하게 반영하는 것은 교시를 정중히 인용하는 형상수법의 하나이다."
이 글은 북한의 아나운서들을 위한 교재인 방송원화술(평양: 예술교육출판사, 1988, pp. 139∼143)에 나오는 말이다.
이렇게 김일성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이외에, 방송자체를 북한에서는 '김일성주의방송'으로 규정하여, 방송 전체를 "방송원이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는 입장과 자세를 바로 가지고 옳은 화술수법을 적용하여 생동하게 형상하여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남한의 방송이 시청자 중심의 경어를 사용하여 정중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대원칙에 입각한 데 비해 현격한 차이가 난다.
'출판보도물'이라는 용어로 통용되고 있는 북한의 언론은 자유주의적인 언론과는 달리 주체(주체하는 말도 김일성주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의 언론이며 김일성주의 혁명의 언론이다.
여기에 맞춰 북한의 방송은 김일성주석 유일체제를 위한 강력한 선전도구로 철저한 통제를 받으며, '남조선혁명'을 위한 선전선동의 기능을 수행했었다.
또한 언어란 노동과 함께 노동을 통해서 성립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그 맥을 같이 하면서, 노동 생산성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의 방송언어를 분석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으나, 이 글에서는 한국방송에서 소개하고 있는 북한 방송에 따라 형태적 특징, 어휘적 특징, 발음상 특징, 화법적 특징으로 나눠 살펴 본다.(김상준, 남북한 방송언어에 대한 비교 연구, 1990)
(1) 경어법에 나타난 이질감
형태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경어법이다. 또한 경어법의 차이야말로 남북한 방송언어에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남한의 방송언어가 시청자 중심의 경어를 사용하면서 국가원수일지라도 지나친 경칭과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 비해 북한의 방송에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만 최상의 경칭과 경어를 사용하고 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자욱
아버지 원수님
어버이 수령님
친애하는 김정일동지
아버지 원수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께
이렇게 김일성부자에게는 최상의 경칭과 요란한 수식어로 높임말을 사용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우리의 방송보다 격이 낮은 표현을 하고 있다.
연합기업소 당위원회 홍인범의 보고
서호 수산사업소 선장 로력영웅 김용익이 토론했습니다.
이런 형태로 이름 뒤에 호칭이 없는 언어표현을 하고 있다.
우리가 ' 할머니, 씨, 어린이' 등으로 반드시 이름 뒤에 호칭을 붙여서 인격을 높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그 틀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있다.
(2) 특이 형태의 접미사
접미사에서 '-적(的), -들'과 같은 말이 많이 사용된다.
'-적'의 사용에는 다음과 같다.
따뜻한 형제적 인사
책임적이며 튼튼한 방어
빛나는 로력적 성과
이러한 말들은 우리 나라 방송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또한 남북한 모두 셀 수 있는 명사나 대명사에 쓴다고 규정하고 있는 '∼들' 접미사가 북한방송에 특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린이들이 누구들인지 아세요.
토론들이 있었습니다.
전체 인민의 뜨거운 마음들이
외신보도들에 의하면
적지 않은 성과들이
이렇게 '누구들, 토론들, 마음들, 보도들, 성과들'과 같은 말은 남한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북한방송에서 많이 나타난다.
(3) 어휘적 이질감
분단 이후 변화한 남북한 언어가 상당한 거리로 벌어지기는 했으나, 북한의 방송을 듣고 이해하지 못할 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들은 미루어 짐작하거나 사전을 찾아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뜻풀이는 북한의 '현대조선말사전'을 참조했다.
일떠서다 → 힘차게 일어서다
예문) 건축면적을 가지고 일떠선
테제 → 어떤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입장과 태도. 그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원칙과 방도, 방침 등을 함축하여 명제적으로 서술한 강령
예문) 테제 발표
앙양 → 기세나 열의 같은 것이 드높아 지는 것
예문) 끊임없는 앙양을 일으킴으로써
건발기 → 이발한 뒤에 머리칼을 말리는 기구. 다듬은 말로 머리말리개
만풍년 → 모든 곡식과 열매가 다 잘되고 잘 여물어서 크게 풍년이 든 것
예문) 올해를 만풍년으로 빛내인 기쁨을 안고
담화 →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
예문) 텔레비죤 방송기자와 담화했습니다.
풀김치 → 집짐승에게 더 많이 먹이고 소화도 잘 되게 하기 위하여 김치
담그는 것처럼 가공처리한 풀먹이
예문) 영양가 높은 풀김치
두리 → 하나로 뭉치게 되는 중심의 둘레
예문) 당과 수령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로작 → (로동계급의 혁명리론 발전에서 커다란 리론실천적 의의를
가지는 고전적 저서)를 이르는 말.
예문) 위대한 수령님의 불후의 고전적 로작
이밖에 남북한이 같은 어휘이지만 의미를 달리하는 말이 많다. 이 경우는 외교문서나 양측의 협상이나 회의 때 의미의 혼란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북측 관계자를 만나는 사람들은 북한의 문화어에 대한 조예가 깊어야 한다.
또한 어휘 부문에서는 수의 표현의 특징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방송에서는 '키로, 그람, 톤, 메터, 센찌멘터'와 같은 외래어 앞에 '일, 이, 삼, 사'와 같은 한자어가 아니라 '한, 두, 세, 네'와 같은 고유어 계열의 수관형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열 키로그람의 먹이를 얻어낼 수 있고
한 톤 열한 키로그람을 증수했으며
백 네 그람
정보당 스무 톤 이상의 거름을 내기 위해
열 톤이 넘은 알곡
이밖에 한자어와 외래어의 경우는 북한의 말다듬기 사업에 의해 많은 변형과 왜곡 현상이 나타나 의미변별에 혼란을 줄 우려가 많다.
(4) 발음의 차이
우리말은 글자는 같으면서 발음이 다른 말이 많으며, 장단음의 차이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 장단음의 구분은 남한의 방송보다 북한에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도 '조선문화어문법'이나 '조선말화술' 등의 저술에서 그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나, 실제의 언어생활에서는 잘 지키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북한의 '조선말사전'에도 장단음 표시가 돼 있지 않은 것을 봐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북한은 장단음을 잘 지키지 않으면서도 김일성이나 김정일 관계 기사에서 그들을 수식하는 말은 짧은 말을 길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짧은 음을 길게 발음하는 수의적인 발음의 대표적인 예이다.
위 대한 수령님의 불후의 고전적 로 작
당 과 수령
김정일 동지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와 존 경
김정일 동지의 초 청으로
자 신들이 먼저 로 작의 사상을 깊이 연구할 데 기초해서
고 상한 도덕적 품성을 가지고
천구백구 십년
고향마을 새 세대
남북한 방송언어의 발음에서 가장 심한 차이는 두음법칙의 적용 여부이다. 북한에서는 '량심, 려관, 녀자, 년세, 락관, 로동'과 같이 두음법칙을 무시한 표기도 하고 발음도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역서, 역량, 낙천, 노동'과 같이 두음법칙을 적용한 발음도 허용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규률, 대렬, 배렬, 사렬(沙列)' 등의 말음 표기를 '률, 렬'로 하지만 발음은 '율, 열'로 하고 있다.
북한말에는 경음화 현상이 많다.
'혁명적, 핵심적, 헌신적, 락관적'의 경우 '적'을 '쩍'으로 발음하고 있다.
평양이라는 말은 '평양'으로 하는 발음도 가끔 나타나지만 거의 대부분 '평냥'으로 발음하고 있으며, '펴양'이라는 발음도 나온다.
(5) 북한의 화법
화법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지식이나 의견, 감정, 소원 등을 올바르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갖추어야 할 능력의 하나이다.
북한에서는 화술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화법을 순수하게 보지 않고,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이 철저히 구현되고, 김일성의 주체적인 언어사상의 구현인 평양말에 의하여 창조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의 방송언어는 선전선동이 그 주된 목표이며, 심지어 사실보도가 생명인 뉴스까지도 선전선동을 위해 '보도'가 아닌 의도적인 '제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전투적인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저질스러운 욕설까지 사용되고 있다.
정일봉상 쟁취를 위한 축구경기대회
투쟁을 적극 벌려 먹이기지를 조성했습니다.
생산과 건설을 대담하게 작전하고 능숙하게 지휘해서
겨울철 물고기잡이 전투
논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전투
탄부들은 당의 충직한 혁명전사
교원은 직업이 아니라 혁명가
이렇게 전투적인 용어의 사용이 많음에 비해 언어의 전달속도는 남한의 방송보다 느리게 나타난다.
이것은 내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강세를 많이 두고, 속도를 의도적으로 느리게 하기 때문이다.
(6) 남북언어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제언
우리는 북한의 아나운서들이 하는 뉴스를 보고 이질감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북한 아나운서들의 뉴스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발성과 억양, 인토네이션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 그들의 방송은 자기들의 기준으로는 최상의 방송을 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한국의 아나운서들보다 훨씬 수준 높은 방송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북한은 남한에 비해 방송출연자의 범위가 다양하지 않아 언어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방송원들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에도 기인한다.
이질감을 주는 다른 요인은 문법규범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에 따른 경어법(언어예절) 등의 요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러한 요인이 제거되면 동질성 회복은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이념과 체제, 주체사상 등의 근본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거나 제거하기 어려운 문제들일 것이다.
필자는 남북언어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남북한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언어현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언어정책 수립기관과 언론사 등 관계자들의 만남이 계속되어야 한다.
둘째, 언어의 통일이 필요할 때는 분단 이전인 1933년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셋째, 남북한 양측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신조어의 생산을 중단해 야 한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문규범으로 우리말의 맞춤법을 비롯한 문법체계를 통일하여 작성한 안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나라 한반도 전역에서 모인 학자들이 만든 안이지만, 이 안에 대해서 혹시 북측에서 반대론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남북한과 해외동포까지 포함하여 7500만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 한국어의 세계화를 이룩한다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말을 다듬어 나아가야 한다.
3. 정보화 시대의 국어발음관리와 언론의 역할
사람의 말은 말소리, 즉 음성에 의한 음성언어와, 문자에 의한 문자언어가 중심이 된다. 그러나 앞으로는 고도의 전자과학의 발달로 컴퓨터가 만들어 낸 합성언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컴퓨터에 의해서 만들어진 전자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합성언어는 지금도 도처에서 들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116 전화 시보안내를 비롯해서 114 번호 안내, 말하는 시계라디오 등 각종 가전제품에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합성언어의 기술이 날로 발전하면서 사람의 말을 원고화할 수 있는 음성인식 컴퓨터는 물론이고, 문자를 음성으로 전환시켜 시각장애자들에게 들려 줄 음성전달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발전할 것이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외국어 사용자와의 대화를 통역해주는 통역기의 등장으로 외국인과의 대화를 자국어로 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다다를 것이다.
전자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음성 합성기기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그 기계가 언어학이나 국어학 등 인문과학과 협조가 부족해서 첨단기기에서 나오는 전자언어는 유아적인 언어표현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즉 언어학적인 면에서 보면 발음이나 인토네이션 등이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글에서는 전자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합성언어의 개화기를 앞두고 국어발음의 현황을 고찰하고 발음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1) 국어발음 사용의 현황과 문제점
우리나라의 국어정책은 광복이후 5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최근까지 국어문자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수립하느냐를 결정하는 초보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한글전용과 국한문 혼용의 양극에서, 심지어 전용론자와 혼용론자의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 그런 정책이었다.
문자는 언어의 보조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음성언어적 측면에서 국어의 발전을 논의하는 건설적인 정책결정 과정은 없이 어떤 문자를 사용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됐다. 이러한 국어정책의 영향은 국어교육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쳐 최근에도 국민학교에서 한자교육을 하느냐 마느냐를 교육계와 어문학계, 그리고 어학과는 관계가 없는 단체들까지 우후죽순처럼 나서서 논의가 분분한 실정이다.
더구나 이렇게 국어정책 결정 과정의 의견이 엇갈려 국어학계가 양분돼 학계의 에너지, 나아가 국가적인 에너지의 낭비 현상까지 초래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1988년 1월에는 새로운 한글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이 국가기관에 의해 고시돼 국어발전에 한 단계 높은 성과를 올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적인 국어규범을 고시해서 시행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계는 규범의 준수에 소홀하다.
특히 표준어규정 중에 '표준발음법'이 들어 있으나 국어의 발음규범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지 초·중·고등학교 문법에서는 표준발음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으나, 소위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의 어문계열 학과에서조차 국어 표준발음법을 강의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2) 국어 합성언어의 사용현황과 문제점
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대표적인 합성언어는 전화시보 안내와 전화번호 안내를 비롯한 가전제품 등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전화시보 안내는 한국표준연구소가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의 전신)의 협조로 서울지역을 필두로 하여 1980년부터 약 2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 1982년 10월 3일 서울지역에서 개통된 후 1983년 8월 15일에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개통했고, 이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시계는 한국표준연구소에서 1978년 시간표준의 원기인 세슘 원자시계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과 많은 예산을 들여 추진한 전화시보 제도이지만 안내하는 합성언어는 국어발음의 원칙에 많이 벗어나 있다.
전화시보를 위한 음성안내의 구성은 음절 단위의 합성이 아니라, 단어와 어절 단위의 합성으로 모두 39개의 단어나 어절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자음동화나 음운첨가 원칙 등 국어 발음에 있어서 각종 변이음들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 다음 시각 → '다'의 'ㄷ'음이 무성음이라야 하는데 유성음임
이십육 분 → '이·십·육'이 개별적인 음절의 결합이어서 '이심뉵'으로
소리나지 않음.
삼십초입니다 → 현실발음은 '삼십촙니다'라야 하는데 생략과정이 없이
문자전달식 발음임.
위와 같은 발음의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제작과정에서 수많은 수정을 거친 역작일 뿐만 아니라 수의 장단음 구분은 비교적 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합성언어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어서 발음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방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시급히 수정작업을 해야 한다.
음성을 대상으로 하는 음성학의 연구분야는 음성분석, 합성, 인식의 세 분야로 나누어 활용할 수 있다. 즉, 음성의 분석으로 뽑아낸 음성의 특징을 활용하여 통신의 효율화를 기하고, 기계를 이용한 인공음성의 합성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음성인식의 영역에까지 그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합성한 언어의 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발음이나 억양 등에 아직도 문제가 많아 전자공학과 언어학, 국어학 등 관계 전문가들이 함께 작업을 하여 개선해 나가지않으면 안된다.
(3) 국어발음의 국가관리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생활은 문자의 규범은 비교적 잘 지키고 있으나 발음의 규범은 잘 지키지 않고 있다. 특히 외국어의 발음은 열심히 배우면서도 국어의 발음은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 대충 배운 방법으로 언어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보화 사회라고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문자언어로 소통되는 커뮤니케이션 보다 음성언어로 소통되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특히 뉴미디어 시대에는 기계와 대화를 하거나, 기계를 사이에 두고 외국어 사용자끼리의 대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국어발음의 국가관리가 필요해지고 있다.
현실의 언어 생활과 뉴미디어 시대에 대비한 국어발음의 국가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한국어 음성학 분야의 연구 및 교육 확대가 필요하다.
우리 나라 대학의 국어학이나 국어교육학 등 국어계열 학과에서는 국어나 국어학의 사적인 연구, 그 문헌의 연구, 문법론의 연구 등 문헌위주의 연구나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래서 생활국어나 규범문법에 대한 연구나 훈련이 부족해서 국어계열 학과를 마치고 교단에 설 경우 국어 낭독법이나 화법의 실제를 터득하지 못해 사투리 발음으로 강의하거나 발음규범에 어긋난 지도로 생활국어의 전파와 국어문화의 확산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교과과정의 재편성이 있어야하고, 상아탑에서도 그러한 이론의 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생활국어의 규범문법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어문화의 확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둘째, 합성언어용 국어발음의 KS(한국공업규격)화가 필요하다.
각종 전자제품이나 통신기관 등에서 사용하는 합성언어용 국어발음은 공업규격처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규격화된 발음원본은 국가가 관리하는 도량형처럼 권위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규범에 맞는 발음을 조음 음성학이나 음향 음성학 등 관련 학문의 도움을 받아 음절단위, 단어단위, 어절단위로 구분하여 발음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이때 필수적인 것은 발음훈련이 잘 된 사람을 가려 뽑는 일인데, 교수나 교사, 아나운서나 성우 중에서 선발하여 엄격한 재교육 후에 녹음이나 녹화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발음목록은 남녀별로 구분하여 일종의 전자발음사전으로 테이프나 컴퓨터에 수록한 뒤 필요한 곳에 공급해야한다.
셋째, 발음관리를 위한 언론의 역할 강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언론은 전통적으로 표준어의 보급과 국어순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 특수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일종의 센세이셔널리즘에 의해 왜곡된 국어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평범한 한자어를 오히려 난삽한 고유어로 바꾸는 운동이나 한글이름 운동이라 해서 지나치게 작위적인 작명 등으로 국어문화의 방향을 왜곡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많다.
문제는 그런 운동이 거의 모두 비전문가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한자어 몇 개를 사전을 찾아가며 고유어로 옮기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데도 그것이 바로 국어사랑이고 애국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는 일에 박수를 보내는 일은 이제 삼가야 한다.
이제부터 한국의 언론이 국어에 이바지해야 할 일은 올바른 국어발음의 확대 보급으로 국어가 음성언어적으로 세계적인 말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또한 표준어의 보급을 더욱 확대해서 북한의 문화어에 대응할 만한 모국어를 확립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남북교류와 통일에 대비하는 국어정책의 방향을 올바로 이끌게 될 것이며, 다가오는 뉴미디어 시대의 국어문화확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4. 왜곡된 한글문화에 대한 반성
일본 NHK방송이 한국어강좌를 방송하기 시작하면서 그 강좌 이름을 한글강좌로 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안녕하십니까. 한글강좌'이다.
이 강좌 명칭도 우여곡절을 겪은 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의 시각에서 짓는다면 '한국어강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 살고 있는 북한에 호의적인 동포들은 조선말강좌를 희망할 것이기 때문에 중간을 잡느라고 한글강좌로 지었다는 것이다.
55년간 분단의 벽이 두꺼워지면서 해외의 방송에서까지 분단의 비극이 점철된 경우이다. 그러나 정작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이나 분단의 비극이라고 하면서 아쉬워하겠지만, 의식있는 일본사람들은 재미있는 코미디쯤으로 생각할까 봐 걱정이다.
그것은 마치 일본어강좌를 가나강좌라 하고, 영어강좌를 알파벳강좌라 하는 억지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웃지 못할 비극은 국내에서도 가끔 발견되기도 한다. 특히 한글날을 전후해서 거의 모든 국민이 한글 애호가가 될 무렵이면 한글이 한국어 그 자체로 둔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공사를 불문하고 오가기도 하며 심지어는 방송의 전파를 타고 나오기도 한다.
"왜 요즘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한글을 두고 외래어를 즐겨 쓰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 말에 들어 있는 함정을 쉽게 발견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이 말이 방송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작가의 작문을 거쳐 제작자의 검토, 제작 책임자의 사전 심의, 성우의 녹음을 거치는 최소한 네 사람의 동의나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버젓이 방송을 통해 나온 것을 확실히 들은 적이 있고, 비슷한 유형의 말은 부지기수로 들을 수 있다.
한글이 곧 우리말, 국어, 한국어 그 자체라는 생각, 이렇게 오해하도록 하기까지는 한글을 지나치게 아낀(?) 분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 분들이 볼 때는 한글 전용론자가 아니면 모조리 비애국자이다.
중립적인 처지에서 살펴보면 한자교육 필요론자들이나, 국한문자 혼용론자들에게 모욕적일 정도로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문자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문자는 곧 언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한글은 곧 우리말이라는 착각에서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훌륭한 우리말을 두고 왜 외래어를 쓰는지 몰라'라는 말까지 나온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지만 애국심도 지나치면 국수주의라고 해서 경계해야 한다. 한글에 대한 애정이 국어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필자는 우리말 규정의 체계도 한글 때문에 균형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말 규정의 체계는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으로 돼 있다. 이 규정은 1988년에 고시된 것이다.
한글 맞춤법은 문교부 고시 제88-1호이고, 표준어규정은 문교부 고시 제88-2호로 분류해서 고시된 것이다
한 나라의 언어규범이 하나의 규범으로 묶여서 고시되지 않고, 분리해서 고시됐는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분리해서 고시할 성질의 것이라면 표준어 규정이 앞서고 한글 맞춤법이 뒤서야 하는데 반대로 됐다.
우리나라의 현행 언어규범은 1993년 조선어학회가 만든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근거하고 있어서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으로 분리돼 있는 것을 통합해야 한다. 통합한 우리말 규범의 명칭은 「한국어 규정」이나 「한국어 규범」이면 좋겠다.
그 순서는 '1. 표준어 사정원칙, 2. 표준어 정서법, 혹은 맞춤법, 3. 표준어 발음법, 4. 외래어 규정'으로 체계화하여 지금의 한글 맞춤법,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으로 분산된 국어규범을 통합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 표준어 정서법이나 표준어 맞춤법 속에는 한글로만 표기가 가능한 고유어뿐만 아니라 한자어나 아라비아 숫자와 관계있는 어휘들이 많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한글 맞춤법이라는 말이 맞지 않다.
우리의 국어정책은 그동안 지나치게 신격화·성역화한 한글 주변의 제현상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한글학'이 한글 본연의 가치나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어, 국어의 순화나 우리말의 고유어화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왜곡된 한글학이 되지 않도록 관계 단체나 학자들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국어사전을 뒤적이면서 이미 무리없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 몇 개를 골라 우리말 고유어로 바꾸는 작업에 희열을 느끼고, 그것이 대단한 학문적 업적이거나 애국적인 일이라고 기고만장해 하는 한글학자연 하는 분들에게 이제는 경종을 울려주어야 한다.
그런 유형의 작업이 개인적인 일로 그친다면 별문제가 없겠으나, 국가기관이나 사회단체, 연구단체 등에 진정서나 호소문을 남발하여 업무에 지장을 초래할 만큼 반복하여 국가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문제가 많다.
최근에 대법원에서 호적에 실릴 이름을 여섯자 이내로 제한하면서 공개한 '朴 차고 나온 노미새미나, '趙 물주가 낳은 최대걸작품'과 같은 이름들의 연원도 결국은 '한글이름' 운동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실은 한글이름이라는 말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말이다. 홍길동이를 한글로 쓰면 한글이름이고, 한자로 쓰면 한자이름, 영문자로 쓰면 영문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글이름을 논리에 맞게 표현하려면 '우리말 고유어 이름'이라야 한다.
한글이나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가 아닌, 사전을 뒤적여 우리말 고유어의 조어나 만들어내는 한글학자 내지는 한글 애호가들은 북한 김일성주석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김일성주석은 1996년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데 대하여'라는 담화에서 '지하와 땅속, 심장과 염통은 뜻이 같지만 그 폭이 다르므로 한자말과 고유어를 다 그대로 두는 수밖에 없다. 만일 지하투쟁이란 말을 땅속투쟁이라고 고치거나, 평양은 나의 심장이란 말을 평양은 나의 염통이라고 고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물론 북한은 그 이후 수많은 한자어를 없애고 고유어를 대량생산하여 우리말의 이질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모든 국어관련 사업이 정부주도로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서 우리처럼 개인이나 사설단체들에서 생산해 낸 신조어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는 사태는 없다.
1966년 이후 북한은 한자 추방에 박차를 가해 사전의 표제어조차 한자병기를 하지 않다가 뒤늦게 최근에는 한자어사전을 따로 만들고 학교교육에서 한자교육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한자교육을 다시 시작한 이유 중의 하나가 남조선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한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남조선을 해방했을 때 그들을 알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것이라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한글 전용론자들은 우리나라의 신문잡지 등에서 한자를 없애면 저들도 한자를 다시 없애서 한반도 전체에 한자가 없어지고 한글문화가 꽃필 것이라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조금 크게 뜰 필요가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3국인 우리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한자문화권 내지 한자이해문화권 인구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깝다. 여기에 대만이나 싱가포르 등을 합하면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우리가 학교교육을 통해 한자 1천여자를 배워 놓으면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도 중국에가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필담으로 할 수 있고, 일본이나 대만도 마찬가지로 한자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외국 여행에서 도로안내나 관공서나 상점 등의 간판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유용한지 겪어본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 NHK가 한글강좌를 시작한 이래 일본에서는 우리말을 '한글말(ハンソグル語)'이라는 이상한 언어명으로 부르는 일도 있다고 한다.
현 한글학회도 1949년에 명칭을 바꿀 때 국어연구학회에서 조선어학회로 변한 전례를 살려서 한국어학회나 국어학회로 했으면 좀더 폭 넓은 연구분야를 개척할 명분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한글에 대한 지나친 신성시나 한글 주변의 성역화로 인한 배타적이며 독선적 권위주의, 한글을 볼모로 한 국어정책 결정의 후퇴와 같은 일들은 훈민정음이나 한글에 담긴 홍익인간의 정신을 발양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한민족 모두가 공유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5. 한국어의 음악성을 살리는 낭독교육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예부터 책의 낭독교육이 철저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전환하면서 낭독교육은 말뿐이고 문자에서 문자로 옮겨 다니는 문자풀이 위주의 교육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과거의 낭독교육은 서당에서 입을 모아 「하늘 天, 따 地」하면서 낭독하던 천자문에서부터 각종 교재를 곡을 붙여 함께 낭독하는 제독으로 언어교육의 효과를 높였었다.
그래서 필자가 어려서만 해도 할아버지들이 한문서적이나 유충렬전과 같은 소설류를 낭랑하게 소리내어 읽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또 필자도 어린 시절 학교에서 읽기시험을 치르기도 했으며 읽기시험이 아니라도 국어나 영어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많이 한 기억이 있다.
언어생활을 그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등 넷으로 나눌 수 있다. 미국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사람의 언어생활은 쓰기가 9%, 읽기가 16%, 말하기가 35%, 듣기가 40%로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듣는 경우가 읽고 쓰는 경우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말하고 듣는 언어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에서도 낭독법에 대한 지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학교에서 터득한 좋은 낭독법은 음성언어를 통한 언어생활을 풍부하게 해준다.
이러한 언어생활을 세분하면 대화, 연설, 토의, 토론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외에도 조직사회에서의 보고 방송보도 해설 사회 등의 응용분야가 많다.
좋은 낭독은 발성법을 잘 터득해야 하고 한국어의 발음법 악센트와 억양, 표현속도를 적절하게 익힌 뒤에 효과적인 음성관리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발성연습을 할 때는 진성대(眞聲帶)를 활용하는 지성(地聲 natural voice)을 사용해야 하며, 쥐어짜거나 지나치게 꾸미는 가성(假聲 feigned voice)을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좋은 음질은 호흡기관, 후두, 공명기관, 성대 등 네 개의 조직으로 구성된 발성기관과 신경 및 근육의 활동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
발성연습에서 조심할 일은 가성을 사용하여 지나치게 높은 소리를 내거나 했을 때 성대에 작은 혹이 생겨 악성종양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낭독할 때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
목과 어깨 등 온몸의 힘을 빼고, 정확한 발음을 위해 입을 가능하면 크게 벌리며, 혀를 빨리 움직이면서 입술은 부드러워야 한다. 그리고 호흡은 편안하게 유지하고 적당한 크기의 소리, 가성이 아닌 지성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낭독하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요즘에는 웅변학원이나 화술학원 등이 있어 자칫하면 기본을 무시하고 기교만 가르쳐서 단기적으로 웅변대회의 우승이나 노리는 곳이 많다.
그러나 요즘은 웅변이나 연설도 많이 변모되었다. 과거의 웅변처럼 전쟁터에서나 어울리는 이른바 사자후를 토해내면서 탁자를 내리치며 핏발을 세우던 형태에서 탈피해가고 있다.
또 과거의 연설은 문학적이거나 화려한 수사법을 동원했으나, 현대의 연설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대화적인 어조를 취하며, 자연스럽게 말하는 토론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안방에서 조용하게 볼 수 있는 텔레비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연설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보는 사람은 냉정한데 말하는 사람이 흥분하는 것은 우스갯거리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낭독이나 방송낭독은 정확한 발음과 알맞은 성량, 정감있는 억양에 적절한 호흡과 속도, 듣는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과, 낭독자의 겸양하는 정신을 담아 차분하면서도 낭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
훌륭한 낭독을 위해서는 평소에 좋은 낭독과 많이 접해야 하는데, 방송낭독 중에는 이러한 원칙에 맞는 낭독을 가끔 접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시조와 같이 우리말의 전통적인 리듬이 녹아있는 문학작품을 낭송하거나 낭독하는 습관은 낭독뿐만 아니라 언어생활에서도 큰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6. 한국어 교육의 과제
우리나라의 국어정책은 광복 이후 55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최근까지 국어 문자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수립하는가를 결정하는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즉 한글전용이냐 국한문자 혼용이냐 하는 양극단의 주장과 논리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 그런 국어정책이었다.
그러나 문자는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만 언어행위라는 측면에서 보면 음성언어인 말의 보조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음성언어학적인 측면에서 국어의 발전을 논의하는 건설적인 정책결정 과정이 없이, 어떤 문자를 사용하느냐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국어정책 결정에 악영향을 끼쳐왔다.
신문과 방송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1년에 딱 한번 한글날 정도에만 국어문자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왔을 뿐, 언어 전반의 순화와 미화를 위한 교육과 계도는 미흡한 채로 흘러오고 있다.
컴퓨터와 뉴미디어가 선도하고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는 문자언어보다 음성언어가 대단히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컴퓨터가 말을 알아듣고 말을 만들어 내는 시대, 전자기기와 인간이 대화를 나누는 시대, 외국인과의 대화를 자동으로 즉시 통역해 주는 통역기 시대는 표준화된 음성언어의 필요성이 절실해질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국어정책과 국어교육은 곧 닥쳐올 전자기기와의 대화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국어교육의 일대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나라 국어교육은 대학입시에 맞춰 문헌위주의 교육으로, 정보의 이해에 초점을 맞춰 이뤄져 왔다. 그나마 1990년대에 들어서서 초등학교에서 말하기 듣기 교육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국어는 아직도 구태의연하게 생활국어나 현실의 언어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과목이 설정되지 않고 있다. 대학에서의 국어도 우리말의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 등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어문규정이나 화법, 언어예절 등의 살아있는 국어 교육으로 우리말 지도자의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SAT)에 한국어가 선택과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한국어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제는 우리 한국어도 영어 토익이나 토플 형태의 시험처럼 발음이나 악센트, 억양, 화법 등이 중시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식의 국어교육은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한국어도 정확한 발음, 알맞은 크기, 적절한 속도 등의 조건을 갖춘다면 세계화에 걸맞는 아름다운 말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7. 결론 - 남북언어의 통일을 위한 제언
우리는 북한의 아나운서들이 하는 뉴스를 보고 이질감을 많이 느낀다. 그러나 북한 아나운서들의 뉴스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발성과 억양, 인토네이션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 그들의 방송은 자기들의 기준으로는 최상의 방송을 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한국의 아나운서들보다 훨씬 수준 높은 방송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북한은 남한에 비해 방송출연자의 범위가 다양하지 않아 언어훈련을 철저하게 받은 방송원들의 활용도가 높다는 것에도 기인한다.
이질감을 주는 다른 요인은 문법규범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에 따른 경어법(언어예절) 등의 요인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러한 요인이 제거되면 동질성 회복은 빨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이념과 체제, 주체사상 등의 근본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거나 제거하기 어려운 문제들일 것이다.
필자는 남북언어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남북한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언어현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언어정책 수립기관과 언론사 등 관계자들의 만남이 계속되어야 한다.
둘째, 언어의 통일이 필요할 때는 분단 이전인 1933년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셋째, 남북한 양측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부터라도 신조어의 생산을 중단해 야 한다.
첫째 항에서 상대방의 언어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역지사지의 정신은 언어의 통일과정에서도 필요하다.
2000년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중국 북경에서 열린 한국어(조선어) 국제 학술토론회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언어학 연구소 문영호 소장은 '조선어 서사규범의 확립과 그의 통일적 발전을 위한 몇 가지 문제'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언어분야의 민족성을 구현하는 데 기본은 민족 고유어에 기초하여 언어체계를 발전시키고, 인민대중의 뜻에 맞게 말과 글을 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조선일보, 2000. 8. 15)
이 말만 가지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기본적인 생각은 우리와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문규범으로 우리말의 맞춤법을 비롯한 문법체계를 통일하여 작성한 안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나라 한반도 전역에서 모인 학자들이 만든 안이지만, 이 안에 대해서 혹시 북측에서 반대론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남북한과 해외동포까지 포함하여 7500만이 사용하고 있는 우리 한국어의 세계화를 이룩한다는 생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말을 다듬어 나아가야 한다.
우리말을 다듬어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신문과 방송,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한 아름다운 한국어 가꾸기 운동의 활성화와, 국어정책 당국의 생활국어 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또한 국어교육 당국은 국어의 최고목표를 대학입시에 모아지도록 할 것이 아니라, 민족어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향해 교육의 목표를 세우고 2세 국민들을 지도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온 민족의 지혜를 모으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