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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98 14.04.27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傳]

 

중국 안휘성의 구화산. 99개 사찰을 품고 있다는 불교 성지다. 한 신도의 기도가 간절하다. 대상은 커다란 항아리, 항아리 아래 부분에는 한 장의 사진이 놓여 있다. 항아리와 사진은 이 특별한 불상과 관련이 있다. 23년 전 입적한 대흥화상의 등신불이다. 입적할 때 모습 그대로 등신불이 된 것이다.

 

셰수톈 교수(안경사범대학 중문과)

“등신불이 있기 때문에 구화산이 중국 불교사에서 가장 추앙받고 있다.”

 

 

구화산이 성지가 된 것은 서기 794년 한 스님이 열반하면서 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김교각. 신라 왕자라고 중국의 역사서는 적고 있다.1) 김교각 그는 열반 후 등신불이 돼서 자신의 서원을 이루고 구화산을 지장보살에 성지로 일군 신라왕자였다.

 

<등신불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중국 구화산을 불교 성지로 일군 김교각 스님. 그가 신라의 왕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라 왕자의 신분으로 승려가 된 그는 왜 신라가 아닌 중국 당나라에서 구도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일까요. 더욱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소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등신불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전 모습 그대로 열반에 들 수 있었는지 등신불의 비밀을 찾아 구화산으로 가보겠습니다.

 

 

중국 안휘성 구화산. 해발 1352미터로 아흔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가 아름답고 명승고적들이 많아 동남 제일 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아흔 아홉 개의 사찰과 일만 여기의 부처를 모신 곳이다. 중국 불교의 사대 성지 중 하나로 지장 신앙의 본산이다. 수도하는 승려만 천오백여명에 이른다.

 

 

구화산의 사찰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장하는 기원선사. 지장보살을 섬기는 이곳에선 매일 오후 1시에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하는 법회가 열린다. 불교 성지답게 구화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 들어선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동남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삼보일배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띤다. 이들이 끊임없이 구화산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씨 관광객

“삼양에서 왔습니다.”

“여기 오신 이유는?”

“노동절 연휴이고 해서 관광왔어요.”

 

판카이 얀 관광객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기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구화산이 여느 불교 성지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등신불의 존재다.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육신보전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편액엔 고기육자 대신 달월로 표기됐다. 스님에 대한 존엄에 대한 표현이다. 김교각 스님을 모신 곳이기에 구화산을 찾은 신도들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은 어떻게 보존되어 있을까? 육신보전은 독특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층 건물 내부엔 7층 석탑이 지붕과 맞닿아 있다. 탑 하단부에 지장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 탑 안에 등신불이 모셔진 것이다.

 

스성푸 스님(육신보전 주지)

“김교각 스님이 99세에 열반하고 3년이 지나자 스님을 모시기 위해 이 보탑을 지었다. 탑 주위에는 전당을 지었다. 탑 안에는 3층 목탑이 있고 그 안에 김교각 스님의 육신이 모셔져 있다.”

 

 

건물 내에 7층탑을 세운 것은 그만큼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건물 내에 7층 석탑. 7층 석탑 안에 3층 목탑. 그 탑 안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것이다. 등신불이란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육신에 금칠을 한 것이다. 구화산 제 2봉에 자리 잡은 백세궁. 원래 이름은 적성암이었다. 이곳 역시 등신불이 모셔진 곳이다. 명나라 때 입적한 무하스님의 등신불. 백 살이 넘어 입적한 당시 제자들은 풍습대로 무하스님을 항아리에 넣어 모셨는데 삼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 무하스님은 김동리에 소설 등신불에 소재가 되기도 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생시 모습 그대로다. 백세궁에는 무하스님의 유물이 남아 있다. 구화산에서 수행하던 28년 간 혀와 손가락에 피를 내어 금가루를 섞어 필사한 여든 한권의 화엄경이다.

 

 

한자도 소홀함 없이 명료한 글자체엔 아직도 주홍빛이 선명하다. 혹독한 수행과 정진에 증거물이다. 무하선사가 등신불이 되자 명나라 숭정황제는 옥인을 하사했다. 등신불이 나타난 이곳에 백세궁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김교각의 응신보살로 대우했다. 김교각 스님의 화신이 무하스님의 등신불로 나타났다고 보고 응신보살이라 정한 것이다.

 

훼이칭 스님(백세궁 주지)

“구화산에 등신불이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 김교각 스님이 지장보살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화산 통혜암. 자명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진 곳이다. 지난 1991년 자명스님 역시 가부좌한 모습 그대로 열반에 들어 등신불이 됐다. 등신불이란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스님의 육신을 말한다. 열반에 든 모습 그대로 항아리에 넣었다가 삼년이 지나도 썩지 않으면 그 위에 금칠을 해 보존한 것이다. 자명스님은 최초로 등신불이 된 비구니 스님이기도 하다.

 

“(돌아가신 후 3년이 지나)자명스님의 육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직접 피부를 만져보니 육신 자체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탄력이 있었다. 피부색이 검어서 돌아가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 실제로 멀리서 보면 어떤 노스님이 살아서 참선하시는 모습 같았다.”

 

 

열반 후 자명 스님을 모셨던 항아리는 소중히 보존되어 있다. 김교각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구화산에 등신불이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페이예차오 교수(구화산 불화원)

“당나라 때에는 지장보살이 신라의 김교각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국으로 건너온 것이라 여겼다. 김교각 스님이 불도를 배우고 고행을 하다 등신불이 되자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이라고 인정했다.”

 

김교각 그는 누구일까?

그는 과연 신라 왕자였을까?

 

 

김교각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 최고의 김교각 전문가로 알려진 셰슈텐 교수. 당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인 전당문. 이 책에 구화산 화성사기가 있다. 김교각 스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책이다. 구화산 화성사기는 813년 비관경에 의해 쓰여졌다. 이 책에는 화성사기를 쓴 비관경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구화산이 위치한 청양현 출신으로 시문에 뛰어난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셰수톈 교수(안경사범대학 중문과)

“비관경이 구화산 화성사기를 쓴 시기는 김교각 스님께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비관경은 김교각 스님과 동시대를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화성사기는 김교각을 김씨 성을 가진 신라왕자라 적고 있다. 화성사기보다 후대에 쓰여진 송고승전2) 역시 김교각을 신라 국왕의 친족으로 그가 왕족 출신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3) 구화산의 역사를 기록한 구화산지에서는 최초로 김교각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그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지장이라 불리는 김교각은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온 신라왕자라는 것이다.

 

 

구화산 아래 위치한 노전오촌. 오씨 일가가 긴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다. 구화산 입산 전 김교각 스님이 다녀간 곳으로도 유명하다. 오씨들의 선조를 기리는 사당에 김교각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비석에는 오씨 일가와 김교각의 인연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도 김교각이 신라인이라고 밝히고 있다.4) 김교각이 직접 쓴 시도 전해진다. 수행하는 그에게 오씨 가문에서 쌀을 보내주자, 보답하는 의미로 썼다는 수혜미.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신라의 왕자임을 밝히고 있다.

 

“본디 나는 신라의 왕자 수행길에 오용지를 만났으며......” 傳 : 수혜미

 

구화산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등신불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해발 1352m로 고지인데다 유난히 비가 많고 습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등신불이 생긴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풀 수 없는 신비인데요, 바로 그 구화산을 등신불의 본고장으로 일군 이가 신라왕자 김교각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왕자라는 김교각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외롭고 어려운 구도자의 삶을 선택한 것일까요. 당시 왕자의 신분으로 그렇게 먼 곳 까지 가서 승려가 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섬서성의 성도 서안. 이곳은 한때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었다. 당나라 역사문물이 보존되어 있는 장안박물관. 박물관 앞들을 가득채운 석각들 중에 당시 신라인의 흔적도 남아 있다. 당나라의 유학과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대유학자가 된 김가기의 마애석각이 그것이다. 김가기는 당나라가 뽑은 당인 7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가기가 중국에서 대 유학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당나라의 유학 장려책이 있었다.

 

여성구 교수(국민대 한국학 연구소)

“중국에서는 이제 그것을 국자감, 국자학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곳에서 유교뿐만 아니라 일곱 개의 전공분야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나눠서 교육하는 당나라에서도 최고의 교육기관이 국자감인 것이죠. 그래서 신라 유학생들이 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국자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쓰는 비용은 다 중국에서 일체 제공을 하는 것입니다.”

 

 

당나라 유학생들 중에 유학자뿐 아니라 불교 승려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 신라 승려 혜초였다. 일찍이 인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 스님. 그는 인도를 다녀온 뒤, 당나라에 머무르며 불경 번역 등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당나라 때 사찰들이 많이 남아 있는 종남산. 그곳엔 신라 승려들의 흔적도 많다. 흥교사는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스님을 모신 곳이다.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와 쉽게 번역하고 법상종5)을 창시했던 곳이다. 현장 스님은 중국 불교 신도들에게 가장 인기 많고 영향력 있는 고승 중 한명이다.

 

 

현장 스님을 기리는 오층 석탑 옆엔 또 하나의 작은 탑이 있다. 당나라에 유학 가 평생을 그곳에서 수도한 신라 승려, 원측 스님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리리안 불교연구 소장(서안시 서북대학)

“한국에서 온 스님들은 불법을 연구하고 불경을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일을 했는데 원측스님이나 의상대사는 중국에 머물면서 많은 책을 썼다. 당시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책을 열심히 읽었고 좋아했다.”

 

 

혜초, 원측 스님처럼 당나라에서 활동한 스님들도 있었지만 유학 후 신라도 돌아간 고승들도 많았다. 지상사에 머물렀던 의상대사도 그 중 한명이다. 중국 화엄종에 본산인 지상사. 원효대사와 함께 유학길에 올랐던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화엄종6)의 대가인 지엄화상으로부터 수년간 수학했다. 서기 670년 신라로 돌아간 의상대사 그는 신라에 화엄 신앙을 널리 알렸으며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상대사처럼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유학 간 승려는 이백 여명이 넘었다.

 

리리안 교수

“한국에서 온 승려들은 장안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유학을 통해 중국의 언어, 문화, 문학, 관습 등 여러 분야를 배웠고 한국과 중국의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의 신분으로 유학길에 올라 보살에 지위에 오른 김교각 스님 그는 누구일까?

구화산 최초의 사찰인 화성사. 8C초 김교각 스님이 세웠다는 이곳은 역사문물관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곳에는 명나라 황제가 구화산 스님들에게 하사한 교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올 때 데리고 왔다는 삽살개의 형상도 남아 있다.

 

스성푸 스님(육신보전 주지)

“김교각 스님은 중국에 올 때 한국에서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볍씨와 차씨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의 유품으로는 유일하게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도 엄청 커 보이는 짚신 한 켤레. 길이만도 40cm에 이르러 그가 기골이 장대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화산 정상의 고배경대. 김교각 스님이 수도 기간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곳에 사찰을 세워 그이 뜻을 기리고 있다. 이곳엔 김교각 스님이 수도할 당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있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 신장이 150cm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크기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김교각 스님은 7척의 키에 장정 열 명을 상대할 만큼 장사였다고 한다.7)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다는 김교각. 그가 신라왕자였다면 그는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그는 어느 왕의 아들이었을까?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김교각에 출생연대를 추정해 보자. 김교각에 출생과 사망에 대한 기록은 사서마다 엇갈리고 있다. 화성사기와 송고승전에서도 김교각의 입적시기8)를 달리 기록하고 있다.

 

뤄위위리에 교수(북경대 종교 철학과)

“비관경이 쓴 <화성사기>가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비관경은 김교각과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성사기>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화성사기의 기록을 따른다면 김교각은 696년생. 그러나 우리나라에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출생시기로 유추해보면 그가 성덕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중국학자들은 추정한다. 성덕왕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삼국사기는 성덕왕의 아들 중 장자 김수충이 중국의 유학을 다녀왔다고 기록한다. 그가 최초로 중국에 유학을 갔을 때가 성덕왕 13년인 서기 715년.9) 그러나 김수충이 당나라로 유학한 이듬해 신라에서는 태자 책봉이 있었다. 김수충의 동생인 중경이 책봉 된 것이다.10) 김수충이 태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어머니마저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의미했다.

 

셰수톈 교수(안휘성 안경사범대학)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수충의 어머니가 왕으로부터 폐출 당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 김수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더 이상 김수충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추측컨대 만약 김교각이 신라왕자라면 김수충일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와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에서 고민했던 김수충. 그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나라 유학길에 접한 불교경전들과 사상들이 마음깊이 와 닿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정치적인 암투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수행의 길이었다.

 

 

중국엔 4대 성지 불교가 있습니다. 모두 한명씩의 보살들이 모셔져 있는 곳인데요. 산서성 오대산엔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성 아미산엔 시천에 상징인 보현보살이 받들어지고 있고요. 절강성 보타산엔 자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이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김교각 스님이 머물렀던 아미산엔 구원의 상징인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당시 승려 김교각은 신라 왕자 신분이긴 했지만 유학생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언어와 낯선 문화의 벽을 뛰어 넘긴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응 자체도 쉽지 않은데 김교각은 어떻게 이런 한계를 딛고 지장보살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신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뱃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신라를 떠난 김교각은 양자강 하구를 통해 구화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양자강 하구에 위치한 안휘성 무호시. 이곳에도 김교각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제사가 그 중 한곳이다.

 

페이예차오 교수(구화산 불학원)

“김교각 스님이 중국에 도착하여 구화산으로 오시기 전에 절강성과 안휘성에 머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경에도 여러 곳 있고 절강성을 비롯 안휘성의 무호시 남령현에도 그 흔적이 많다.”

 

 

이상적인 수행지를 찾아 떠돈 지 10년 만에 그는 신비에 쌓인 구화산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구화산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이었다. 그가 구화산 최초의 정착민이 된 것이다. 김교각 스님이 터를 잡고 수행 처로 삼은 곳은 구화산 정상에 한 동굴. 지장스님이 수도한 옛 동굴이라고 해서 지장고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의 험난한 수행이 시작됐다.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작은 동굴. 이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행이 이어졌다.

 

 

그는 동굴 주변에 경전을 갖다 놓고 하루 종일 향을 피우며 선정에 빠져 들었다. 남루한 배장삼 차림, 추위를 달랠 그 무언가도 없이 세 발 달린 솥 하나가 전부였다. 끼니는 이 지역에서 나는 흰 흙에 약간에 쌀을 섞어 해결했다. 스님의 고행이 알려지면서 스님에 가르침을 받으러 구화산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백토로 끼니를 때우며 수행 정진하는 스님을 보며 감동하여 직접 나서서 절을 지었다.

 

셰수톈 교수(안휘성 안경사범대학)

“구화산 산기슭에 살던 제갈절이라는 사람이 스님이 수도하는 모습을 보고 ‘스님이 이토록 힘든 고행을 하는 건 모두 저희의 업보입니다’라고 말하며 김교각 스님을 위해 구화산에 절을 지었다. 이 사찰이 바로 화성사다.”

 

 

당시 당나라의 정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서기 755년 귀족들의 권력 쟁탈전은 안녹산의 난(서기 755년)으로 표면화 되었다. 전쟁은 나라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약탈과 방화, 살인 등 만행이 저질러졌다. 당나라의 호구수가 9년 새 1/3이 줄어들 정도였다. 마음 둘 때 없는 백성들의 현실과 어려움은 수도승에게도 큰 숙제였다. 특히 중생 구제에 대한 염원이 컸던 김교각 스님에겐 더욱 그랬다.

 

 

그는 피폐한 백성들의 삶을 구제할 방도를 찾고자 했다. 그는 농경지가 부족한 구화산을 개간하고 직접 농사도 지었다. 민생고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백성을 구제한다는 수도승마저 기생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여성구 교수(국민대 한국학연구소)

“기록을 보게 되면 거기 그 화성사라는 사찰을 창건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농지를 개간했다라는 거죠. 그리고 벼를 심기도 했다라는 거, 차나무를 심어다라는 거, 그것은 당시 당나라 라는 사회 다시 말해 안녹산의 난으로 전국적으로 황폐화 되고 어려운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 백성들의 어떤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러한 행위를 몸소 실천하셨다라는 거죠.”

 

철저한 자급자족의 실천과 함께 수행의 강도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의 수행과 깨달음엔 늘 백성들이 있었다. 자신의 성불보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셰수톈 교수(안휘성 안경사범대학)

“김교각 스님이 출가를 하고 중국에 온 것은 단순한 불교 신자여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교각 스님은 참된 진리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김교각의 사상은 지장보살의 정신과 흡사했다. 지옥의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한다는 지장보살. 사람들은 김교각에서 지장보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영담스님(불교방송 이사장)

“어떤 사람이 옷이 없었는데 자기가 옷을 다 벗어 줘야 하는데 자기 몸을 의지할 때가 없어서 땅을 파고 자기 몸을 의지하고 자기 옷까지 다 줬다. 이런 데서 땅지자, 감출 장자, 땅에다 몸을 감췄다해서 지장보살이라고 부르는데 그 지장보살의 원력이 모든 중생들이 성불하지 않는 한 당연히 성불하지 않겠다,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하고 난 다음에 맨 마지막에 내가 성불을 하겠다해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데서부터 지장 신앙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야겠죠.”

 

 

그의 고행과 덕행은 당나라 황실에까지 알려졌다. 사찰 명을 지어 달라는 지주 태수 장암의 부탁에 당황제는 직접 화성사라는 편액을 내렸다. 당황제의 편액. 그것은 김교각에 대한 당황실의 공식적인 인정을 의미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광제사의 분수엔 용모양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당황제의 금인을 본 뜬 것이다. 757년 당황제 숙종이 김교각 스님에게 내린 금인. 그것은 광제사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가로 세로 각 12cm 정방형으로 무게 4.5kg에 달하는 금인. 바닥에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지장 즉 김교각 스님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황제의 금인은 그 자체로 황제의 권위를 상징했다. 당치덕 2년이던 757년 김교각은 중국 최고의 수도승이 된 것이다.

 

페이예차오 교수

“황제가 금인을 내린다는 것은 김교각 스님에게 황족 대우를 해준 것이다. 황제와 왕만이 옥새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인을 받음으로써 김교각 스님은 지장왕보살이 될 수 있었다.”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수도하던 시절 당대에 시인이었던 이태백이 구화진에서 서당을 열며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이태백은 김교각을 만났고 그의 수행에 감탄하여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보살의 자비로운 힘

끝없는 고통에서 구하나니

하해와 같은 그 공덕

世世孫孫 빛나리로다

 

- 이태백

 

地獄未空 誓不成佛(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 성불하지 않으리라)

 

김교각 스님이 수행의 화두로 삼았던 서원입니다. 이처럼 모든 중생들이 구제되기 전엔 성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서원은 수많은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런 서원은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됐습니다. 척박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옷을 직접 지어 입으며 검소한 삶을 살았던 김교각. 과연 그가 이룬 것과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1200여 년 전인 서기 794년 음력 7월 마지막 날이었다. 김교각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고별인사를 건넸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었다가 3년이 지나거든 꺼내 보거라. 그때까지 썩지 않았거든 내 몸에 금칠을 하여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99의 일기로 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당시 구화산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산이 울리고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종을 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11) 스님의 유언대로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그의 육신을 항아리에 모신지 3년이 지났다. 제자들은 시신을 수습해 탑에 안치하기 위해 스님을 모신 항아리 앞으로 모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님의 육신이 썩지 않고 열반에 들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마주 들자 뼈마디에서 금쇠소리가 났다. 불경에 따르면 뼈마디 속에서 쇳소리가 난다는 것은 보살의 현신을 의미했다.12) 제자들은 스님의 육신에 금칠을 해 석함에 모시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 등신불이 되므로 김교각은 지옥의 비기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그의 서원을 이루었다. 그의 중생구제에 대한 염원은 지장보살을 방불케 했고 등신불로 남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했다. 이후 구화산은 여러 스님들의 등신불이 이어져 등신불의 성지이자 지장신앙의 본산이 됐다.

 

영담스님

“지장보살. 그러니까 김교각 스님으로부터 시작이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가 굉장히 습한 지대입니다. 그렇다면 육신불이라고 한다면 미라가 되어야만 육신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습한 지역에서 과연 육신불이 미라가 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그러한 특이한 상황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김교각 지장보살께서 말씀을 하셨죠. ‘내가 삼년 후에 다시 이제 육신불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장보살의 월력이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러한 서원하고도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구화산에는 아홉 전의 등신불이 보전되어 있다. 김교각 이래에 구화산의 등신불에 성지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원을 빌기 위해 구화산을 찾고 있다. 중국의 4대 불교 성지에서 모시는 보살들은 대개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지만 구화산의 김교각 지장왕보살은 유일한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청완샤 상하이 시민

“저도 김교각 지장왕보살님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큰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어요.”

 

 

지난 1999년 9월 9일 구화산 불교협회는 김지장보살 대동상 건립 기공식을 거행했다. 99m에 이르는 세계 최대 높이의 불상을 세우는 대 역사다. 김교각을 기리는 이 동상은 2009년 9월 9일에 완공될 예정이다.

 

뤄위위리에 교수(북경대 종교 철학과)

“중국인들은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를 아주 중시한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충과 고통을 해결해 준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에 민중들이 김교각 지장왕보살을 따르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김교각 스님을 높이 추앙하는 이유는 또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효를 강조해왔는데 김교각이 추구하는 지장신앙이 효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지옥에 빠진 마지막 중생도 구제하겠다는 그의 서원이 중국 민중들의 소망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페이예차오 교수 구화산 불학원

“불교에선 출가를 하면 속세와 모든 인연을 끊는다. 효자가 출가를 하더라도 부모와 연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와 연을 끊는다는 것은 중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김교각 지장보살이 나타나셨고 그 이후로 불교에서도 효도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장보살이 중국 불교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예비 승려들을 위한 승가대학인 구화산 불학원. 매년 60여명의 승려가 배출되는 곳이다. 지장보살의 도량에서 김교각을 배우고 따르려는 사람들이 고행의 길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영담스님

“중국의 달마대사나 육조혜능대사 이런 분들은 전부 다 조사에 불과합니다. 조사면 한참 아래 단계인데 신라에 그것도 당나라 하면 그 당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런 국가였었는데 조그마한 신라의 스님이 와서 수행해 가지고 고승이고 보살이라 호칭을 부친다는 것은 이것은 엄청난 것이죠.”

 

신라 왕자 출신으로 낯선 땅 중국에서 평생 구도자의 길을 간 김교각. 그는 지장왕보살이 됨으로서 신라인의 자존심을 세웠을 뿐 아니라 마지막 중생까지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실천한 민중의 등불이었다.

 

각고의 노력과 오랜 수도 끝에 자신의 서원을 이룬 신라왕자 김교각. 그는 신라인으로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김교각 스님에 대한 존경이 오늘날 까지 이어지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옥이 비기까지 성불하지 않겠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개인의 영달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김교각 스님이 몸소 실천한 서원은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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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김지장, 본명은 교각이고 신라왕자 출신이다.

 

2) 중국 당(唐)·오대(五代) 시대 고승의 전기를 집대성한 책. 30권. 송대 찬녕(贊寧)이 편찬했다. 옹희(雍熙) 4년(987)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혜교(慧皎)의 〈고승전〉, 도선(道宣)의 〈속고승전〉에 이어 찬집된 것으로, 〈삼속고승전 三續高僧傳〉이라고도 불린다. 내용은 역경(譯經)·의해(義解)·습선(習禪)·명률(明律)·호법(護法)·감통(感通)·유신(遺身)·독송(讀誦)·흥복(興福)·잡과(雜科)의 10과로 분류되며, 각 과의 말미에 사론(史論)을 실었다. 정전(正傳) 533인과 부록 130인이 실려 있다. 〈대정신수대장경 大正新修大藏經〉 50권에 수록되어 있다.

 

3) “‘新羅國王之支屬也’ 김교각은 신라 국왕의 친족이다.” 傳 : 송고승전

4) “김지장은 신라 사람이다.”

 

5) 유식종(唯識宗)·자은종(慈恩宗)·유가종(瑜伽宗)·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보위승교종(普爲乘敎宗)·유식중도종(唯識中道宗)·유상종(有相宗)·상종(相宗) 등으로 불린다. 〈해심밀경 解深密經〉과 미륵(彌勒 Maitreya)의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 호법(護法 Dharmapala)의 〈성유식론 成唯識論〉 등을 소의경론(所依經論)으로 한다. 당(唐)나라의 현장(玄?)이 중인도 날란다(Nalanda) 사원에서 계현(戒賢 Silabhadra)으로부터 호법 계열의 유식학을 배워와서 규기(窺基)에게 전함으로써 중국에서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었다. 법상(法相)이란 오위백법(五位百法) 등으로 존재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일체법(一切法:모든 존재)은 허상에 불과하며 오직 마음의 작용인 식(識 vijnana)이 연기(緣起)해 현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유식론을 바탕으로 존재의 공성(空性)보다도 현상을 세밀히 분석해 설명하기 때문에 법상종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하나의 종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상판석(敎相判釋)이 행해졌는데 교상판석이란 어떤 한 종파가 입교개종(立敎開宗)하기 위한 근거로서 불교의 교리를 형식과 내용에 따라 체계화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말한다. 법상종의 교상판석은 호법의 학설에 따라 부처의 가르침을 3시기로 나누어 초시교(初時敎)·제2시교·제3시교의 '삼시교'(三時敎)를 세웠다. 초시교는 자아의 실재에 대한 집착, 즉 아집(我執)을 여의게 하는 가르침으로 〈아함경〉이 여기에 속하며, 제2시교는 존재의 실재에 대한 집착, 즉 법집(法執)을 여의게 하는 가르침으로 반야경계통의 경전들이며, 제3시교 또는 요의교(了義敎)는 비공비유(非空非有)의 중도(中道)를 밝히는 가르침으로 〈화엄경〉과 〈해심밀경〉 등이다. 인도에서의 유식사상은 미륵을 개조로 하여 무착(無着)·세친(世親) 형제로 이어지는 유가행파(瑜伽行派)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세친은 〈유식삼십송 唯識三十頌〉이라는 간결하며 함축적인 게송(偈頌)을 남겼는데 후대의 안혜(安慧)·호법 등의 '유식십대논사'(唯識十大論師)라고 하는 유식학자들이 이에 대한 여러 주석을 가함으로써 유식학은 더욱 흥기하게 되었다. 이들은 안혜의 학설을 위주로 한 무상유식설(無相唯識說)과 호법의 유상유식설(有相唯識說)로 크게 양분되었는데, 전자는 진제(眞諦)에 의해 섭론종으로, 후자는 현장에 의해 법상종으로 되었다가 법상종이 크게 일어나자 섭론종은 법상종에 병합되었다. 처음에 현장은 신방(神昉)·가상(嘉尙)·보광(普光)·규기 등 4명의 제자와 함께 십대논사들의 주석서를 모두 번역하고자 했으나, 규기가 호법의 학설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 9명의 해석을 위사선택할 것을 건의하므로 이를 받아들여 〈성유식론〉을 완성했다고 한다. 규기는 이 〈성유식론〉을 바탕으로 하여 〈성유식론술기 成唯識論述記〉·〈성유식론추요 成唯識論樞要〉 등을 지어 법상종의 교리를 정리했다. 당시 중국에는 많은 신라승이 활약했는데, 그중 현장 문하의 신방과 원측(圓測)은 신라인으로서 유식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신방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으나 현장의 역경사업에 참여해 활약했고,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 등의 저술이 있었다고 한다. 원측은 여러 역경사업에 수석으로 참여했으며,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 般若心經〉의 오역을 지적할 정도로 산스크리트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는 신라불교 특유의 회통적(會通的) 관점에서 〈성유식론소 成唯識論疏〉·〈해심밀경소 解深密經疏〉 등을 저술해 호법의 학설에만 기울어진 현장과 규기를 비판하고 진제가 전한 안혜의 유식설과 나아가 중관학파의 학설까지도 포섭하는 유식사상을 제창했다. 이러한 원측의 독특한 유식사상은 서명파(西明派)를 형성해 규기의 자은파와 함께 법상종의 양대조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유식

출처 : 브리태니커

 

6)〈화엄경 華嚴經〉을 주요경전으로 삼아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당초 인도에서는 화엄종의 시조는 용수(龍樹)·세친(世親)이었다. 중국에서는 창시자 법장(法藏)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서 '현수'(賢首 : 보살의 이름)라는 법호를 하사받았으므로 현수종이라고도 하고,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을 주장했으므로 법계종이라고도 불린다. 화엄종의 특색은 법계연기론에서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理:본체)와 사(事:현상)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사와 사 또한 서로 원융하다고 본다.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융통하고 화해하며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 이 종파의 시조는 두순(杜順:法順이라고도 함)이며 2조는 지엄(智儼), 3조는 법장인데 법장의 저작이 매우 많다. 〈오교장 五敎章〉·〈금사자장 金師子章〉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현장(玄?)의 교리를 받아들여 교판(敎判)을 완성했으며, 아울러 5대 화엄사찰을 건립하는 등 화엄종의 창립에 큰 역할을 했다. 4대 징관(澄觀)은 '청량국사'(淸凉國師)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 문인인 종밀(宗密)은 선교(禪敎)의 융합을 꾀했으며, 유가 및 여러 사상을 조화시켜 이후의 화엄종풍의 기조를 이루었다. 당 무종(武宗)의 멸불(滅佛) 사건 이후 이 종파는 큰 타격을 입어 쇠퇴했다. 우리나라의 승려 의상(義湘)은 지엄에게 화엄을 배운 후, 신라에서 화엄종을 열어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시조가 되었다. 8세기 신라의 승려 심상(審詳)은 일본에 건너가 화엄교리를 강의하고 일본 승려 양변(良辯)에게 법을 전하여 일본의 화엄종을 성립시켰다. 그후 우리나라의 화엄종은 고려초에 교종(敎宗)이 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

 

7) “김교각의 키는 칠 척(長七尺)이었다.” 傳 : 화성사기

8) 승고승전은 정원 19년으로 기록하고 화성사기는 정원 1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9) “왕자 김수충을 당나라에 유학 보냈다.” 傳 : <삼국사기> 성덕왕 13년

 

10) “왕자 중경을 태자로 삼았다.” 傳 : <삼국사기> 성덕왕 14년.

11) 화성사기

 

12) 마주 들어서 움직이니 뼈마디에서 금쇄소리(쇠울림)가 났다(骨節若?金鎖). 傳 : 화성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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