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순위
눅 14:25-35
본문 말씀의 배경은 누가복음9:51부터 19:27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주간 이전의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반기 사역 중 한 부분입니다.
(눅14:1)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바리새인 집에서 안식일에 수종병 걸린 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과 초대 받았을 때에 먼저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본 집 주인이 친구여 상석에 올라앉으라고 하면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있으리라고 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바리새인 집에서 큰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들어서 잔치에 청함을 거절한 자들은 “내 잔치에 맛을 보지 못하리라.”(눅14:24c)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바리새인 집에서 식사를 다 하셨는지, 그 집을 나와 길을 가실 때에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 무리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무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6,27절)
예수님을 따르는 자 곧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자 됨과 연관하여서 두 가지의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
본문 25절을 보면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셔서 길을 가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돌이키시고’ 그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 말인 즉,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제자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음을 보셨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는다고 함께 길을 걷는데, 그 무리들의 심중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이키시고’ 그 무리들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 미워하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26절)
이 말씀을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다른 성경 말씀과 모순이 되고 적절하지 않다.
우선 순위의 문제이지, 문자 그대로 엄격하게 해석해서는 안되는 말씀이다.
성경은 분명히 “부모를 공경하라” 말씀하고 있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양육하여 보호한다”고 하였다.(엡5:29)
주님은 마가복음 7장에서 유대인들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잘못을 심하게 꾸짖으셨다.
창29;31에서 레아가 ‘미움 받는 것’을 보셨다고 했다.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여’(29:30). 레아가 ‘덜 사랑을 받았다’는 의미다.
‘미워하지 않으면’은, 주님보다 ‘덜 사랑하지 않으면’으로 봐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사람이나 물건이나 일을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하고 우선시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가족들일지라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이 주님보다 우선이고 중심인 사람은 형식적으로, 겉으로, 입술만으로는 몰라도, 행함과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고 뻔함, 같을 약)하다.
주님을, 마음 중심에, 영혼 중심에, 모시지 않는 사람은 그분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은 이웃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다.
그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보면 다 자기 중심적 사랑이요 자기식의 사랑이요 감정적이요 파도처럼 흔들리고 소유와 환경에 지극히 민감하고 이기적이다.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종종 이러한 구절 때문에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것들은 자기 부모도 모르고, 자기 형제도 모른다.’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실 때,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계명에서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는 계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자기 부모, 처자, 형제, 자매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습니까?
여기서 “미워하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섬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야 합니다. 자기 처자나 형제, 자매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둘째 : 십자가를 지라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또 다른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십자가는 고난과 고통을 넘어 죽음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처형 방법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당하면서 죽는 처형 방법입니다. 그 십자가 처형 방법은 십자가 처형을 판결 받은 죄인이 심판의 장소에서 처형의 장소까지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 처형이 결정되자 채찍을 맞으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그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미워서 예수님에게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십자가 처형이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처형 장소까지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십자가 처형 방법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게는 자기가 져야 하는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당하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렵고 때론 수치스럽고 고달픈 일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표현되는 것이고, 십자가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 십자가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하는 아픔과 고통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은 그럴 마음들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셋째 : 소유를 버려라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망대를 짓기 전에 준공하기까지 비용이 얼마나 들지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비웃지 않겠느냐?
또 임금이 전쟁을 하기 전에 능히 대적할 수 있을 것인지 비용과 전력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도 망대 짓는 것, 전쟁을 준비하는 것 못지 않게 계산을 해야 한다.
혈과 육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것이 제자의 길이다. 제자로서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데 어떤 대가와 준비가 필요한지 계산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작만 하고 이루지 못하였다 하고 비웃음을 당하고 말 것이다.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능히 제자가 될 수 없는 길이다.
계산을 해보고 나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싸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 건축과 싸움은 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
단호하고 확고한 결심으로 이 건축과 싸움에 임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힘과 도우심을 바라보며 이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하셨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4-46)
제자가 되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다.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감추인 보화요, 극히 값진 진주인 것이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지 않고 대충대충 흉내만 내는 자들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자기 육체만을 위해 심고 땅에 보물 쌓은 자들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였을 때,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시 주님을 따랐다.
세베대의 아들들도, 세리 마태도,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즉시 주님을 따랐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주님의 제자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한 각오와 준비가 없다면 그것은 맛을 잃은 소금이요 유사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그의 신앙 고백은 말뿐인 것이고, 그의 삶은 이방인과 다름없는 삶일 뿐이다.
누가복음 14장은 다음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소금은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14:34-35)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앙 고백과 그의 삶으로 고귀한 ‘소금’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