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을 읽고
역사학과 20122221 남예진
1. 『징비록(懲毖錄)』이란?
책의 자서(自序)에 따르면 『징비록』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징비록』이라는 제목은 『시경(詩經)』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懲] 뒤에 환난(患難)이 없도록 조심한다[毖]”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는 서애 유성룡(柳成龍)으로,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을 예전의 진관제도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 목사로,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고 임명하여 왜란에 대비하도록 했다. 1598년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전란 중에 겪은 성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고찰하여 뒷날의 일을 대비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저술했으며 국보 132호로 지정되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난중일기(亂中日記)』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난중일기』가 이순신이 기록한 전선일기라면 『징비록』은 유성룡이 기록한 전란 극복기로 그 성격이 다르며, 임진왜란의 정보가 생생히 담겨 있어 1695년에 일본에서 이를 몰래 입수하여 교토에 간행되었다고 하고, 이 사실이 통신사들에게 의해 알려지면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징비록』의 구성은 상, 하권과 녹후잡기(錄後雜記), 근포록(芹曝錄) 2권, 진사록(辰巳錄) 9권, 군문등록(軍門謄錄)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번에 읽은 『국역정본 징비록』(2007, 역사의 아침)에서는 상, 하권과 녹후잡기만 수록되어 있었다.
2. 감상문
전란의 기록이라 하지만 그 이전의 이야기들도 기록해 둔 것을 보아 유성룡이라는 위인의 치밀함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전란 속에서의 내용들이 상당히 자세하여 전쟁 안에 있던 여러 사람들을 알 수 있었다. 임진왜란 하면 원균과 이순신으로만 압축되었던 과거의 지식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란의 진행 과정이 상당히 자세하게 적혀 있어서 마치 선조와 함께 피난을 가는 도중에도 미리 이 책을 위하여 기록해두었다가 다시 쓴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업적들도 객관적으로 보면 정치적 입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서술의 중심으로 내세운 부분에서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은 임란기 자신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으로 자신과 남인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3. 맺음말
『징비록』은 조선시대의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양난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그 역사적 가치와 당시의 시대상황, 인물들의 활약을 알 수 있다. 이는 유성룡이 훗날 이러한 일이 번복되지 않기 위하여 해둔 장치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정치 활약상을 비춘, 즉 남인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들어가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을 보는 시야를 갖추면서 동시에 이를 훗날 조선 후기의 변화에 연관짓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문수, 『징비록:대한민국 국보 132호, 반성을 위한 전쟁의 기록』, 돋을새김, 1999
석민영, 「『징비록』과 역사·문화 기록의 중요성」,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6
장준호, 「『징비록』의 저술배경과 李舜臣·元均에 대한 서술」,『이순신연구논총』통권 제 16호 pp,77~121,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11
첫댓글 대단히 부실해 뭐라 평을 할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