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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베드로와 가룟 유다
(마태복음 26장 69절 ~ 27장 10절)
26:69 베드로가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한 하녀가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네요."
70.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71. 그리고서 베드로가 대문 있는 데로 나갔을 때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72.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73. 조금 뒤에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당신이 누군지 분명히 드러나오."
74. 그 때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말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
75.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다.
27:1 새벽이 되어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두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2.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3. 그 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4. 말하였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5.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6. 대제사장들은 그 은돈을 거두고 말하였다.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으면 안 되오."
7. 그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8.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한다.
9.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은돈 서른 닢, 곧 이스라엘 자손이 값을 매긴 사람의 몸값을 받아서
10. 그것을 주고 토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주님께서 내게 지시하신 그대로다."
사람의 한계가 드러나다
가시나무라는 노래에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은 적이 있다. 내게는 그런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떤 상황이 되니까 내 안에도 사람 속에 있을 것이 다 있고 나올 것이 다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 속에 수많은 가능성들이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한 누구라도 예외 없이 생로병사의 길을 가고 희로애락을 느낀다. 뉴스를 보면 ‘저 천벌 받을 인간…….’ 이렇게 생각이 드는 사건들이 매일 터지지만 남 욕할 것이 없다. 그것은 그냥 인간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길을 가는 인간을 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이 있고, 우리에게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올 것이 다 나와야 자신을 조금 보게 되고 알게 된다. 사람은 스스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문제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이 거기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도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이렇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천 년 전에 있었던 특별한 일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다 알 수 없다. 어떤 사람, 어떤 문제를 만나면 그 사람의 내면이 드러나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대표적 인물이고 가룟 유다는 배반자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에서 보면 이들이 드러남으로써 예수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드러났다. 사람의 어떠함이 폭로된 것이다. 이들은 우리를 대표하고 있다. 한계가 드러나야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했다. 그는 유대교의 한계를 안 사람이다. 씻는 의식인 결례로는 안 되고 침례를 받아야 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옛 사람 아담의 한계를 드러내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가 보면 우리로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산상 수훈에서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 하셨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자라는 말씀에서 한계에 부딪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시고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자 “너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하셨다. 이에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갔다. 예수님은 그를 한계에 부딪치게 하신 것이다. 과연 영생을 얻자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아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을 줄로 생각한 사람에게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니고데모는 호의를 가지고 예수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며 “다시 나야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모태로 돌아가서 다시 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모태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유대교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는 사람의 한계를 아는 분이었다. 그는 베드로의 열정과 충성도, 유다의 계획도 그 한계가 어디인지 아셨다.
베드로의 부인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 사람이다.(마19:27) 제자들 중에 가장 충성스럽고 계시가 밝은 제자였다. 서열을 매기자면 언제나 1위였다. 모든 사람이 주를 버려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며 곤경이 다가왔을 때 주와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다.(26:33,35) 예수를 잡으려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 사람들 앞에서는 칼을 빼들고 예수를 지키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하녀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맹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것이다.
그 직전까지 죽을지라도, 다 부인할지라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사람이 그날 밤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베드로라는 사람이 두려워서 그렇게 했을까? 두려워서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까지 한 행동으로 보아 꼭 두려워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없다.
목사님 중에 유불선을 통달하고 목사가 되신 분이 있다. 한국 영성에 거대한 봉우리 같은 분인데 그분은 독특한 시각과 독특한 표현으로 요한복음을 해설해 놓았는데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대목에서 베드로를 질타하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를 부인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단호하게 써 놓은 것을 보았다. 영성이 깊은 분이고 내가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만 그 대목을 보면서 ‘아, 이분은 그럴 수 있구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분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데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부하면 되는데 왜 공부를 못하는가? 일하면 되는데 왜 돈이 없다며 빌빌대는가?’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탁월한 사람의 눈에는 베드로가 목에 칼이 들어와서 비굴해진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의 의지 부족도 아니고 비겁해서도 아니다. 베드로는 정말 예수를 몰랐던 것이다. 용기나 의지로 보면 베드로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면 우리도 다 결격이다. 베드로가 맹세하면서까지 말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정말 예수를 몰라서 모른다고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들의 희망인 예수께서 잡히어 처형되고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그렇게 믿었는데 그분이 이렇게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손에 잡혀 처형되는 길로 가는 것을 수긍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하나님이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계신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모른다고 한 것이다.
확실한 것은 붙들 수 있지만 모르는 것은 붙들고 있기 힘들다. 자기 자식이라도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붙들기는 어렵다. 의지로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생명이 되면 죽여도 어쩔 수 없고 거꾸로 매달아도 어쩔 수 없다. 내 생명대로 하는 길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반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알고 계셨다. 요한복음에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 하셨다.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렇지만 아는 날, 밝히 보는 날이 오게 되는데 그때는 베드로가 따를 것이라고 아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한계도 아셨고 나중에 따라올 것도 아셨다. 내 생명이라야 끝까지 버릴 수 없다. 끝까지 갈 수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도 내 몸이라야 사랑할 수 있다. 내 몸이면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일이다.
‘내 몸, 내 생명인 그 길’,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오셨다. 우리 생명으로 사는 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으로 사는 길을 보여 주러 오신 것이다.
어쩔 수 없어서 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 헌신, 충성, 열심, 결심. 다 소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한계와 그의 때가 나중에 올 것도 아셨다.
부활 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세 번 물으실 때 베드로는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되풀이해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근심하면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했지 더 이상 자기를 규정할 수 없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당신이 나를 아십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충성도 결단도 다 끝나고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끌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후일 베드로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왜 십자가로 가셔야 했는가. 왜 그렇게밖에는 안 되었던가. 그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다 버렸던 그것을 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버린 그 길로 가셨다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의 배반
가룟 유다는 가장 똑똑한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돈 계산을 잘하는 세리 출신 마태가 있었음에도 그가 제자단의 재정을 맡았고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이었지만 그는 유대 출신으로 다른 제자들과 결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복음서에는 모두 유다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되었고 실제적으로 제자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았다고 한다.
가룟 유다는 기독교 문화에서 비호감 1위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독일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짓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저주받은 이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장성한 다음에는 자기 스스로 유다라는 이름을 쓸 수 있어도 부모가 그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금지해 놓았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 제일 밑바닥에 있는 마귀 루시퍼가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이 가룟 유다로 묘사될 정도다.
가롯 유다는 과연 돈을 탐하여 예수를 팔았을까? 이에 대해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최근에는 바티칸 신학자들까지도 이에 동조한다. 동방 정교나 성공회 신부들은 가룟 유다가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것은 아닐 것이라고 평가하고 어쨌든 그로 인해서 온 인류에 대한 메시아 사역이 완성되지 않았느나며 그를 다시 열두 제자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대도 만만찮다.
뉴욕 교회 어느 자매의 남편이 러시아계 유대인인데 그분은 성경 외에도 주변의 것에 대해서 해박하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분은 “가룟 유다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수준이 높았다. 다른 제자들이 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이해했던 유일한 제자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가룟 유다 둘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른 제자들은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했다. 다른 제자들이 ‘네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는데 혹시 음식을 사오라는 말인가.’ 하는 수준인데 그분은 “네 할 일을 속히 하라.” 하신 것은 가룟 유다가 메시아 사역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해석했다. 중앙 아시아나 영지주의가 번성했던 곳에는 그런 이해가 많이 있고 뒤늦게 발견된 유다 복음서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만약 어떤 시나리오처럼 하나님이 계획해서 진행된 것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그 계획에 가룟 유다가 메시아 사역을 이해하고 동참했다는 가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알고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그 길을 가셨는데 그런 일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한 일이 우리에게 구원의 사건으로 계시되었고 해석이 된 것이다.
이런 저런 것들을 다 제쳐놓고 사실만 본다면 가룟 유다가 돈을 탐해서 예수를 팔았다는 것은 제자들의 해석이다. 그러면 가룟 유다에 관해서 확실한 사실은 무엇인가?
그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목표로 하는 열심당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가룟(이스카리옷)은 열심당과 관계된 말이다. 이스카리옷의 어원인 ‘시카리(단검)’라는 말은 열심당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극단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극단주의자들은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한다. 목적만 분명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이다.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가 되었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에서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것과 같이 시카리(단검)를 차고 다니던 열심 당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예수를 팔아서라도, 어떤 일이라도 벌이고 싶었을 것이다. 예수를 그들 가운데 던지면, 로마 왕 앞에 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가룟 유다 앞에서 예수는 힘으로 싸우는 자의 노력이 자기 파멸로 끝날 것을 아셨다. 그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고 결국 그 말씀대로 유대의 독립을 원하는 무장 공비들을 진압하느라고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를 보면 세상은 힘으로 힘을 이길 수 없는 곳이다. 힘으로 힘을 이기는 그 길은 예수께서 가신 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애굽기 말씀에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종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다. 무엇이 바로의 종된 상태에서 해방을 가져올 것인가? 그 대답이 유월절이다. 넘어가게 하는 것, 지나가게 하는 것은 어린양이다. 힘 있는 것은 다 꺾이고, 초태생은 다 죽고 어린양 고기를 먹은 사람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가장 약해서 죽은 어린양 고기는 집 안에 들어가서 먹고 그 피를 집밖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은 죽음을 표방한다. 죽음을 표방했는데 죽음이 지나갔다. 힘이 지나간 것이다. 죽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조사를 하다가도 피의자가 죽고나면 사건이 종료된다.
유월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의 힘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힘을 표방했으면 다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양을 표방하고 어린양 고기를 먹고 어린양 고기 속에서 살아났다. 이것은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을 이길 것인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으로 이기는 길밖에 없다. 어떤 방법이나 충성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사람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예수의 길
유대인들에게는 두 길이 있었다. 사두개파 사람들처럼 로마와 타협하고 성전을 지키며 사는 길과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서 열심당처럼 파멸할지라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는 길이다. 성전을 지키며 사는 길인가, 열심당처럼 파멸할지라도 투쟁하는 길인가?
예수의 길은 그런 길과 다른 제3의 길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6)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생의 위치를 회복하셨다. 인생을 하나님 앞으로 회복하셨다.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되돌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되찾는 일이다.
인생의 위치를 회복하는 길, 사람이 드러나는 길,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사람, 하나님이 목적과 계획을 두신 그 사람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의 사역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셨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일하셨고 아버지 나라가 임하는 일을 위해서 사셨는데 반대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드러났다.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는 길, 하나님이 표현되고 나타나는 사람이 드러났다. 우리는 이 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되는 것이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생명이라고 고백하게 되고 우리의 원형이고 잃었던 내 생명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남을 죽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이기셨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을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셨다. 죽음으로써 힘을 지나가게 하고 죽음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것, 이것이 세상에 감추어진 비밀이다.
그것이 싫어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던 죽음이 싫어서 베드로는 부인했고 가룟 유다는 그 운명을 팔아서 길을 바꿔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드로가 부인했고 가룟 유다가 팔았던 그 운명을 모퉁이 돌로 삼아 영광스러운 당신의 집이 되게 하셨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신 삶, 그가 가신 길이 우리에게 생명이 된 것이다.
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계시다. 우리에게 빛이 비치는 것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저런 사람이다.” 했던 것이 제자들 안에서 다 가짜로 드러나고, 예수 그분 자신이 보여주신 전혀 다른 길 안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그 집 안에 있음으로 유월절이 지나갔듯이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참으로 사는 길이다.
우리가 다시 평가를 한다면 베드로는 비겁해서 예수를 부인했던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모른다고 했던 것이고, 가룟 유다는 은 삼십냥 때문에 예수를 판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자기들의 목표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를 던져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제자들이 알았던 그것이 아니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 사람이 보기에 아니라고 했던 그것을 들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람의 위치로 회복하는 데 쓰셨다.
우리에게 그 사람이 보이면 우리 인생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고 거기서 모든 것이 발생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가치들이 하나님이 일할 수 있는 그 사람 안에서 나타나고 발견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자신을 제자들을 통해서 폭로되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제 3의 길을 보게 하심을 감사한다. 예수가 가신 그 길 안에 우리도 있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이 보여지기를 원한다. 어머니 가신 길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룻의 고백처럼 예수를 통해서 열려진 이 세계가 우리에게서 누려지기를 원한다.
[ 기 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알고 있었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을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제자들의 길에서 폭로되고 우리 자신도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안에서 인생의 진실을 보게 되고 하나님이 버리실지라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에게 정하신 그 운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취해서 모퉁이 머릿돌로 삼아 하나님의 집을 건축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다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힘을 빼시고 오직 유월절 어린양 안에서 발견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운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고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