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13일 수 흐림 (7번
방의 기적)
어제 방을 바꾸었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교도소 측에서 원해서. 나는 2상2방에서 2상7방으로 이사를 했다. 방은
좁은 복도 같았다. 전에 있던 방보다 한 1m 정도가 더
긴 복도 같다. 천장은 썩어서 곰팡이가 피었고 여름 장마에 썩고 낡은 베니다 천정이 푸석푸석해서 마루바닥으로
떨어졌다. 곰팡이 때문인지 기침이 났지만 며칠 지나면 적응될 수 있지 않을까 지켜보려고 한다. 그래도 안되면 용각산을 주문해서 먹을 요량이다. 방은 더 어둡고
방문 앞에는 온수를 가열하는 통이 있어서 하루 종일 이상한 소리가 난다. 그래도 잠은 잘 수 있었다. 화장실은 더 깨끗하고 바닥에 타일까지 깔려 있었다. 물도 더 잘
나온다. 그러나 이전 방보다 더 소란스럽고 산만해서 독방 수용자들은 꺼리는 방이라고 한다. 교도관은 새로운 수용자가 소지들하고 불편한 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내게 방을 바꾸어 달라고 청탁했다. 7번 방 바로 옆이 소지들의 방이기 때문이다. 나도 감옥에서 내
편한 것을 고집할 처지가 아니라 생각되어 교도관의 청을 따랐다. 그래서인지 소지들이 방을 옮기는 것을
열심히 도와 주었다.
방을 옮기고 첫날은 너무 마음이 어수선했지만 하루가 지나니 좀 안정이 되는 것 같다. 그 1m 정도의 차이인데도 몸이 느끼는 자유로움이 매우 커진 것
같아서 놀랍다. 그러고 보니 내 방이 바로 7번 방이다. 언젠가 아내와 “7번 방의 기적”
(사실은 7번 방의 선물인데 많은 사람이 기적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고 송박사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7번 방의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이후의 글을
썼기 때문에 그대로 옮긴다.)이라는 영화를 같이 본 적이 있다. 감옥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휴먼드라마였다. “7번 방의 기적”은
아름답고 훈훈한 부녀지간의 사랑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불의한 사법 판결이 빚은 비극적인 희생을 그려주고 있다. 무성의한 기소, 맹목적인 권위주의,
무책임한 판결들이 합작하여 한 소녀가 생애의 태양과 같은 아빠를 잃어버린다. 이 드라마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법정은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다. 검사들은
정권의 시녀가 되어 있고 판사들도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시국 사안이나 공안사범일 경우 법정은
단지 권력을 정당화하는 공중사무소에 불과하다. 강자는 옳고 약자는 틀리다. 힘이 없다는 것 자체가 죄다. 법이 약자를 보호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법은 항상 이 상식에 이르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면 아빠는 무죄판결이 나 사랑하는 딸과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아빠는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는커녕 두려움 속에서 없는 죄를 스스로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나에게도 7번 방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의 행위가 업무방해가 아니라 해양오염을 감시한 정당한 시민고발행위요 무죄라는 판결이 날까? 난 7번 방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개들이 하루 아침에 인간으로 진화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망한 기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