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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승 이공승의 자는 달부(達夫)이며 청주(淸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六代祖) 이희능(李希能)과 5대조 이겸의(李謙宜)가 모두 태조를 따라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데 협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 이공승은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하여 글을 잘 하였으며 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直翰林)으로 되었고 후에 우정언(右正言)으로 되었다. 의종 초년에 전중 시어사(殿中侍御史)로 임명되어 사신으로 금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 금나라로 가는 사람은 관하 군인으로부터 은(銀)으로 일인당 한 근씩 받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는데 이공승은 한 푼도 받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에 감복하였다. 왕이 일찍이 달밤에 청녕재(淸寧齋)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공승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가을 달이 밝고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없는 것이 바로 이공승의 가슴속과도 같다”라고 하였다.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우승선 좌간의대부(右承宣左諫議大夫)로 있을 때에 왕이 환자 정함에게 줄 고신(告身)에 서명할 것을 독촉하니 이공승이 부득이 서명하였다. 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되었을 때 왕이 또 이공승과 중승 송청윤(中丞宋淸允), 시어사 오충정(吳忠正) 등을 불러 말하기를 “정함은 내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부터 근고하면서 나를 보육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권지 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로 임명하여 그의 공로에 보답하려는 것인데 벌써 3년이 지났어도 그대들이 그의 사령서에 서명하지 않으니 실로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다. 만일 끝내 서명을 거부한다면 너희들을 모두 육장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니 송청윤과 오충정은 모두 엎드려 진땀을 흘렸으나 이공승만은 왕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으니 왕이 노하여 책망하면서 그 자리에서 쫓아 냈다. 후에 왕이 또다시 대간(臺諫)들을 불러 정함의 사령서에 서명할 것을 독촉하니 모두 예, 예! 하며 순종하였으나 이공승만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이 이공승을 꾸짖기를 “네가 전번 간관으로 있을 때에는 서명하고 이번에는 거부하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니 이공승이 대답하기를 “제가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은 까닭에 명령을 복종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노하여 이공승을 집으로 돌아가라(就舍)고 명령하였다. 간의대부 김양 등이 왕에게 또 상소하여 간(諫)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구에 왕이 이공승에게 나와서 일을 보라고 명령하고 지주사(知奏事)로 벼슬을 올렸다.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 양(羊)을 선사하였는데 그 중에 뿔이 네 개 있는 양 한 마리가 있었다. 이공승이 이것을 상서로운 짐승이라 하여 글을 올려 축하하니 당시 사람들이 사각 승선(四角丞宣)이라고 조소하였다. 왕이 태묘(太廟)에 친히 제사를 지낼 때 이공승이 제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보고를 하였으므로 왕이 태묘 뜰에 들어가 본즉 제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왕이 대단히 노하여 엄중한 책벌을 주려 하였으나 우승선(右承宣) 이담(李聃)이 극력 구원한 덕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좌천되었다. 전자에 왕이 관북궁(館北宮)에 굴실(窟室)과 대(臺)를 축조하고 금과 옥으로 극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리고 환관 백선연(白善淵), 옥광취(玉光就) 등과 더불어 주연을 차려 놓고 이공승과 김양과 이담 등을 그곳으로 불러 술을 실컷 마시었다. 왕이 취하여 장막(幕)으로 들어가면서 좌우의 시종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읊고 놀라 하였는데 이공승은 “공명과 부귀의 극치는 다 이 꽃 아래서 마시는 석 잔 술자리에 모였다”라는 구절을 노래 부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왕의 배척을 받은 데 대하여 말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일의 시가 오늘의 배척을 받을 조짐이라고 말하였다. 후에 동지추밀원사 이부 상서(同知樞密院事吏部尙書)로 재직하다가 22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연로 퇴직을 청원하였더니 참지정사 판 공부사(參知政事 判工部事)로 승진시키고 치사하게 하였다. 그는 정원에다 모정을 짓고 연못도 파며 화원을 싸고 화초를 심어 놓은 후 두건을 쓰고 여장을 짚고 그 사이에 거니는 것으로 낙을 삼았으며 손님이나 자제들이 찾아올 때면 문득 시와 술로써 서로 즐겼는데 안주로는 고기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소채와 과실만 먹었다. 명종 3년에 이의방(李義方) 등이 문사(文士)들을 잡아 죽일 무렵에 이공승이 불일사(佛日寺)에 숨어 있었는데 사환욕에 날뛰는 자가 그를 이의방에게로 붙잡아 갔다. 이공승은 전일에 연복정(延福亭) 터를 잡았으며 큰 공사가 벌어지게 한 장본인이어서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에 이의방이 죽이려 하였다. 그런데 그의 제자 문극겸(文克謙)의 주선으로 화를 면하였다.
5년에 왕이 그의 전날의 덕(德)을 존중히 여기고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명하였다. 13년(1159년)에 그가 죽으니 나이 85세였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그의 장삿날에 하관도 하기 전에 아들 이춘로(椿老)와 이계장(桂長)이 음양설을 믿고 꺼리는 바 있다 하여 그만 집으로 돌아갔으므로 결국은 문극겸이 마지막까지 장사를 치르었다. 이공승은 수염이 아름답고 화색 있는 얼굴로써 젊어 보였으며 조행이 깨끗하였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성질이 경망스러워 남의 잘못을 보면 참지 못하고 그 즉시 욕설로 대하였다. 전일에 내시 조강실(趙剛實)의 집이 이공승의 집과 서로 마주 대하여 있었는데 조강실은 좌창(左倉)을 관리하면서 매일같이 사람들에게서 쌀을 뇌물로 받았다. 이공승이 이것을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 하루는 조강실이 이공승을 추밀원으로 찾아왔었는데 이공승이 여러 사람이 있는 좌중에서 그 일을 가지고 수죄하고 목소리를 높여서 욕설을 하니 조강실이 대단히 부끄러워하였다. 또 한번은 승려 관원(觀遠)이란 자가 대신들 집에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였는데 문극겸이 어느 날 그를 데리고 이공승의 집으로 방문하니 이공승이 자세히 보다가 하는 말이 “이 중은 아무런 취할 데가 없는 자인데 그대가 이런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은 뜻밖에 일이다”라고 욕질하고 쫓아 보낸 후에 술을 마시면서 유쾌히 놀았다. 이공승의 아들 이춘로(李椿老)의 자는 고존(固存)이니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희종 5년(1209년)에 나이 77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라 하였다. 이춘로가 일찍이 서해 지방을 안찰하였는데 그곳 아전과 백성들이 존경 복종하였다. 그는 재상의 요직에서 오랜 기간 지내면서 청렴하고 성근하기로 칭찬을 받았다. 이계장(桂長)은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수 태부 문하시랑 동 중서 문하시랑평장사 동 수국사(守太傅門下侍郞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同修國史)까지 올라 갔으며 네 번이나 공거(과거의 시험 일체를 맡은 벼슬)에 임명되었는바 그가 선발한 선비 중에는 후일의 명사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