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함마드 보수기 교수가 최초로 공개한 2천년전 고대 페르시아의 고지도에 나타난 경주. 사진=경북신문 이은희기자 © 편집부 | |
▲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 사진=영남일보 © 편집부 | |
[민족/역사/통일=플러스코리아타임즈-리복재 기자]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신라의 수도 경주가 지구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2월 24일 경북 경주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2회 화백포럼에서 해양실크로드의 세계적 역사권위자인 이란 테헤란대학교 역사학과 모함마드 보수기 교수(사진)는 "2천여 년 전 제작된 고대 페르시아의 지도에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명시하고 있다"며 "이 문서는 신라가 이미 국제적인 왕국이었으며 세상과 폭넓게 교류했다는 점을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고 주장했다고 경북신문 이은희 기자가 25일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보수기 교수는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 본초자오선 이전에는 신라의 왕경이었던 경주가 동서를 가르는 중심축이었고, 경주를 자오선의 시작으로 정하고 경주를 기점으로 지구상의 동서가 나눠졌다는 것.
보수기 교수는 이날 '실크로드를 통한 신라와 페르시아의 역사적 교류'라는 주제의 강의에서 한 장의 고지도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당초 지리학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의 지도에는 칼레닷 섬(현재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을 자오선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이후 페르시아의 자오선은 당시의 신라, 즉 현재의 경주를 자오선의 0도 지점으로 설명하고 있다"며 "이후 이슬람의 지리학 문서에는 이에 따라 신라의 강데즈(경주=금성. 현 중국대륙의 낙양=동경)를 자오선의 기준점을 설정했다"고 덧붙였다.
보수기 교수는 그동안 '강데즈'라는 지명에 대해 의문을 가졌지만 신라의 왕경인 경주가 과거 '금성'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강데즈'가 경주임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어로 '강'은 '금'을 뜻하고 '데즈'는 '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수시로 강데즈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이 지명을 신라와 연결 짓지 못해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며 "그러나 지금은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를 완성함으로써 실크로드상의 동쪽 시작점이 신라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이날 보수기 교수는 신라의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가 결혼해 페르시아를 재건한 영웅을 낳은 사실을 묘사한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를 설명하면서 이 서사시는 신라와 페르시아의 다양한 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또 '도로와 왕국 총람' 등 많은 페르시아 문헌에 신라를 "금이 많은 도시, 물이 맑고 젊은이가 많은 도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하고 살기 좋은 도시여서 한 번 방문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도시로 묘사돼 있다"며 "신라는 페르시아에서 유토피아로 여겨진 최고의 왕국이었다"고 밝혔다.
▲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공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 필사본인 이 사서에 ‘신라’가 여러번 언급돼 있다. 사진는 영남일보 © 편집부 | |
한편,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는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논문 이전엔 지금까지 아랍과 페르시아인 학자들이 편찬한 총 23권의 각종 역사서, 지리서, 백과사전, 풍물지 등에 ‘신라’가 부분적으로 언급됐다. 이 내용은 1970년대 이후 재미학자 정기원을 비롯해 김정위·정수일 교수를 중심으로 상당 부분 논의돼왔다. 특히 김정위 전 한국외대 이란어과 명예교수는 2005년 ‘중동사’를 증보편찬하면서 중세 중동인 18명이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대해 썼다. 이후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한·이슬람 교류사’등에서 중동인의 신라 묘사에 대해 언급했다. 보수기 교수는 이번에 처음으로 페르시아의 고대 문헌을 인용해 이 사실들을 뒷받침했다”고 전제한 뒤,
보수기 교수는 학술대회에서 “9~16세기 많은 페르시아와 아랍 문헌들에는 신라에 대한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가 많은데 마티니 교수가 발간한 ‘쿠쉬나메’를 제외하곤 알려진 게 별로 없다. 이란인은 이란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수세기 동안 신라와 교류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정치와 역사에 대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산조페르시아의 멸망(AD 632)으로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슬람세계로 전해졌다. ‘신라(Sila)’라는 명사는 이란의 상인에 의해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를 거쳐 이슬람 문화와 문학 속에 녹아들어오게 된다”는 보수기 교수의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지구조선사 지명선 대표는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이란 테헤란대 보수기교수는 경주(금성)가 원래 지구 자오선의 기준점(0도)이 되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밝혔다" 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신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세계를 석권한 지배국이었다는 큰 사건인데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보수기 교수에 대해서도 "보수기 교수는 대륙신라를 이해못하고 신라가 한반도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하여 한반도 경주(금성)를 지목했으나, 신라는 대륙에 있었고 경주가 바로 하남성 낙양이었는데 페르시아지도의 강데즈는 곧 낙양(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한반도 경주가 아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역사의 진실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보수기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다른 재야사학자도 “경주(慶州)는 대륙의 동경(東京)이며, 동경이 곧 낙양(洛陽)이라는 지명으로 시대에 따라 다르게 쓰인 것뿐이지, 결국은 같은 지명”이라며 “이 글을 쓴 기자도 경주(慶州)가 낙양(洛陽)인 줄 모르고 쓴 것 같지만, 아마 기자가 경주를 대륙지명인 낙양이라고 썼으면 아마 학계가 난리 났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천자문(千字文)에선 동서이경(東西二京)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대륙에서의 동경(東京)이요 다른 하나는 서경(西京)이며, 서경은 곧 장안(長安), 동경은 현 경북 경주시가 아니라 대륙 낙양이 경주(慶州)다”고 지명까지 설명했다.
▲ 모함마드 보수기 테헤란대학 역사학과 교수가 발견한 ‘신라’. 고대 페르시아 글자로 쓰여 있다. 사진=영남일보 © 편집부 | |
다음은 역사의 중요성을 감안해 영남일보 박진관 기자의 기사를 여과 없이 인용 보도한다.
보수기 교수에 따르면 최초로 신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9세기 중엽 ‘술레이만 시라피(Sulayman Sirafi)’라는 이란의 항해사다. 그는 극동지역을 여행한 이란 상인이기도 했다. 시라피는 그의 책에서 “중국의 바다 한쪽에 ‘알 신라(Al Sila, al은 관사)’라는 섬이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흰색 피부를 가졌고, 그 나라에 도착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나라에 대한 기록을 갖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흰색 매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보수기 교수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처음으로 극동아시아에 건너간 무슬림은 시라피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븐 코르다드베(Ibn Kordadbeh)’라는 페르시아의 지리학자가 AD 846년에 쓴 지리서에는 “중국의 가장 끝 지점인 광쑤 근처에 많은 산과 많은 왕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금이 많다. 이슬람인 중에 그곳에 정착한 이도 있는데 살기가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븐 코르다드베의 정보는 페르시아와 극동아시아 간 문화적 관계에 기초했다. 11세기에 쓴 쿠쉬나메는 페르시아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텍스트다. 쿠쉬나메의 중요한 텍스트는 이슬람 이전에 속하는데 동양과 서양의 두 길에 바탕을 두고 있다.
페르시아인은 신라에 대해 ‘신라(Silla)’ 또는 ‘바실라(Basilla)’라고 했다. 바실라 혹은 신라 역시 한국에 대해 비슷하게 언급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다 역사적 동질성을 갖고 있다. 보수기 교수가 발표한 ‘고대 페르시아 문헌에 기록된 신라의 묘사와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논문에 나타난 신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마수디(Masudi·출생미상~957년)가 쓴 ‘황금초원과 보석광산 총람’과 지리서인 ‘학습과 개관’ 속 신라
<중국 해안 건너 신라와 그에 예속한 섬을 제외하곤 이 나라에 대해 많이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이라크인과 일부 외국인이 신라와 그 섬에 정착했으며 그곳을 고향으로 선택했다.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깨끗했으며 농토가 비옥했다. 또한 보석과 광석물이 많은 데다 획득하기도 쉬웠다. 그래서 신라에 정착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떠나는 이도 극히 적었다. ‘왕국과 도로총람’에 따르면 중국의 동쪽에 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행한 사람 역시 맑은 공기와 비옥한 토지, 깨끗한 물에 반하고 풍요한 생활과 주민들의 친절한 행동으로 인해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일곱째 종족은 신라를 비롯한 중국과 그 주변지역이다. 그곳에는 노아의 아들 야벳과, 야벳의 후손 아무르족의 거주지다. 한 명의 왕이 그들을 통치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김정위 교수는 ‘중동사’에서 아무르를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야벳의 장자 ‘고메르(Gomer)’로 봤다. 김 교수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아무르의 이름이 빠질 때도 있었는데, 이때 아무르 대신 ‘주마르(Jumar)’를 사용했으며 주마르는 ‘고메르’의 아랍어 철자라고 추정했다)
◆이븐 나딤(Ibn Nadim·출생미상~995년)이 쓴 ‘세계 각 나라의 목록(Al Fehrest)’에 나타난 신라
<중국에 ‘신라’라고 부르는 땅이 있다. 신라는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다. 그곳에는 금이 아주 많다>
한편 9~11세기의 지리학자 알 비루니와, 알 마수디, 알 이드리시는 각각 지도에 신라(Silla)라는 지명을 표시했다. 특별히 ‘알 비루니(Al Biruni)’는 그의 지도 ‘알 카눈(Al Qanun)’에 신라의 위도와 경도를 표시했다. 그는 신라에 대해 “중국의 동쪽 끝에 위치하며 몇 명의 사람만이 바다를 통해 그곳으로 여행한다"고 썼다.
◆1092년 타바리(Mohammad Bin Ayub Tabari)가 쓴 ‘갈렙’이란 책에서의 신라
<중국과 가까운 또 하나의 도시는 신라다. 그곳은 강하고 견고하다. 신라의 왕은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 만약 조공을 보내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아 폐허가 될 것이다. 만약 조공을 보내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변한다>
◆마르위지(S.Z.T. Marwzi)가 쓴 ‘동물의 자연적 번성’에 나타난 신라
<중국 영토의 가장 끝에 신라라는 땅이 있다. 무슬림이나 어느 이방인이든 그곳에 가면 정착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다. 유쾌하고 살기에 좋기 때문이다. 많은 금이 거기에서 발견된다>
◆에드리시(Edrisi·1099~1167)가 쓴 ‘먼 지역을 가로지르는 트레킹 모험’ 속 신라
<신라는 중국의 북동부에 위치한다. 당시 몇 명의 사람이 신라를 여행했다>
◆투시(M.bin.A. Tusi·1161~1178)가 쓴 ‘창조의 경외감’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중국에 있는 한 도시다.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결코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바크란(M.N.Bakran·1208)의 저서 ‘세계 이야기’에 나타난 신라
<마친(Machin) 혹은 중국 내지를 보실라(Bosila)라고 하는데 중국의 맨 끝부분에 있다. 이 지역은 산악지대이며, 때론 보신라로 불린다. 일부는 물속에 있다. 이 도시같이 예쁘고 풍요로운 도시는 발견할 수 없다. 소수의 사람이 이 도시에 도착하지만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라서 이 도시에 한번 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는다>
◆자카리야 카즈위니(Qazwini·1203~1282)가 쓴 ‘창조의 경이로움과 존재의 희귀성’과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에 나타난 신라
<신라는 너무나 완벽하고 좋은데, 중국의 한 지방이다. 물이 달고 땅이 비옥하며 맑은 공기가 있어 가난하고 비루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아름답다. 질병도 적다. 사람들이 만약 물을 땅에 뿌리면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유해동물과 해충, 파리와 전염병도 이 땅에선 거의 없다. 다른 지역에서 병이든 사람을 누구나 신라에 데려오면 병이 완쾌된다. 자카리야에 라지는 “누구든지 신라에 오는 사람은 이곳에 정착하는데 풍부한 금과 과일, 맑은 공기와 물 등 살기 좋은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향유고래의 배설물에서 나는 향기)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진실을 안다>
◆세드 빈 알리 조자니(Jojani)가 쓴 ‘도로와 왕국 총람’에 등장한 신라
<신라는 중국의 맨 끝부분에 위치한다. 어떤 사람은 신라를 바신라라고 부르는데 바신라 역시 해변을 갖고 있다. 바신라는 부유하고 아름답다.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개 젊은이다. 그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매우 적은데 한번 그곳에 가면 살기가 좋아 떠나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페르시아인의 눈에 비친 신라는 무릉도원이자 이상향이다. 하기야 사막과 황무지로 된 그곳에서 바라본 동방의 신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일 수도 있다. 그들의 문헌에서 보듯 한번 신라를 찾은 사람은 그곳에 정착해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관한 이 기록들은 한자문화권 밖에서 나온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기 교수의 논문에 대한 반론도 있다.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는 ‘Silla’ ‘Sila’ ‘Shila’가 ‘섬’ 혹은 ‘군도’라고 언급된 것을 볼 때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대양의 극동에 신라라는 섬이 있다’ ‘중국의 해안 쪽으로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중국 저편 동해에 여섯 개의 섬으로 형성된 신라라는 나라가 있다’는 설명을 예로 들었다. (글·사진=영남일보 박진관기자)